#외전 21화. 뱀과 야생 고양이 (7)
선선한 밤.
송유주는 비틀거리며 걸었다.
김뱀은 몇 걸음 뒤에서, 기숙사로 가는 길을 함께 걸었다.
앞에서 걷는 마르고 작은 몸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불안했다.
“……많이 취했냐?”
“아니이이.”
“……어쩌자고 술을 그렇게 주는 대로 다 받아마셨냐?”
“남이사아아.”
송유주가 취한 목소리로 대답하다가, 고양이 같은 눈매로 뒤를 홱 돌아보며 묻는다.
“근데, 넌 왜 따라오냐아아?”
“내가 너랑 걷고 싶어서 이러겠냐? 네 팬클럽 선배들이 너 기숙사 잘 들어가는지 확인하고 보고하란다.”
“후우우…….”
“힘드냐?”
“먼저 가라. 난 잠깐 앉았다 술 깨고 갈란다아아…….”
“…….”
만취한 송유주.
그녀는 길가의 화단에 걸터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저걸 혼자 두고 갈 수도 없고.’
에라, 모르겠다.
김뱀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자신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넓직한 도로에는 사람이 적었고, 가로등 빛 아래 몇몇 커플이 부둥켜안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 멀리, 아직도 축제를 즐기는 대학생들의 고함이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
김뱀은 마음이 심란했다.
아까부터 그렇다.
뜨뜻미지근한 무언가가, 가슴속에서 간질간질하게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취해서일까?
모르겠다.
조금 전, 선배들끼리 농담처럼 쑥덕거렸던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진짜 유주가 범수 좋아하는 거 아냐?
―범수야, 이따 기숙사 데려다주면서 물어봐 봐!
―안 돼! 우리 유주 지켜!
―유주는 우리 모두의 것인데!
―그래도 유주 본인이 좋아한다고 하면 어쩔 수 없잖아?
―야야, 다들 호들갑 떨지 마! 범수 얼굴 빨개진다. 크크크!
김뱀은 안경을 치켜올렸다.
‘곤란한데.’
연애…….
그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개념.
김뱀은 여자 친구를 사귀어 본 경험이 없었다. 공부만 하다 스무 살이 되었고, 올해는 대학 생활에 적응하느라 바빴으니까.
‘뭐, 내가 송유주를 연애 대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고, 앞으로도 없을 테지만…… 아니, 꼭 그렇지도 않나?’
선배들이 술자리에서 바람을 넣은 바람에, 김뱀의 사고는 신나게 급발진을 하고 있었다.
‘연애는 대체 어떻게 시작하는 거지?’
항상 궁금했다.
사람의 마음을 어떻게 확신하고 덤빈단 말인가? 너무 리스크가 큰 행위 아닌가?
어릴 때 컴퓨터로 플레이해 봤던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처럼…….
[호감도가 10 올랐습니다.]
……라고 누군가가 말해 줄 것도 아닌데.
다들 잘만 하는 걸 보니, 뭔가 방법이 있긴 한가?
김뱀이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을 때, 고개를 숙인 송유주의 입술이 열렸다.
“고맙다아.”
“뭐?”
“뒤풀이 가라고 등 떠밀어 줘서어.”
김뱀은 놀라서 송유주의 조막만 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고맙다>라고?
맨날 꺼지라는 말만 하더니?
요 며칠, 그녀의 새로운 얼굴을 많이 발견한다.
송유주의 말이 이어졌다.
“뒤풀이, 가기 싫었는데, 막상 가니까…… 잘 갔다는 생각이 드네에에.”
“그래?”
“솔직히 왜들 그렇게 미친놈들처럼 술을 마셔 대나, 했는데에에……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것도, 뭐, 나르으음…… 괜찮네에.”
김뱀은 목이 탔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단둘이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건 MT 이후로 처음인가?
오늘은 그날과 느낌이 달랐다.
체온과 숨결―
달짝지근한 술 냄새―
송유주의 입술 근처를 맴도는 그런 것들이, 가을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듯하다.
‘미치겠네. 내가 무슨 생각 하는 거지?’
김뱀은 혼란에 빠졌다.
여전히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기도 싫은 상대인 건 분명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솔직히, 여자로 보이려 한다.
“아, 근데 너무 많이 마셨다. 씨이이…….”
김뱀은 초조히 안경테를 매만졌다.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여자가 남자 쪽으로 몸을 기울이는 것은 무의식적인 호감의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후우우, 술 마시고 걸었더니 덥네. 많이 마시면 원래 이런가아아?”
김뱀은 계속 초조히 안경을 치켜올렸다.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는 동작은 남성에게 호감이 있음을 표현하는 여자들의 본능적인 행동이라고…….
“뭘 그렇게 보냐, 으으응?”
“아니.”
“휴, 다 쉬었다. 가자아.”
송유주는 비틀대며 일어났다.
그때 김뱀이 손을 뻗어, 그녀의 팔소매를 잡았다.
“야, 송유주.”
“?”
“너 혹시…….”
평소라면 그런 말을 하지 않았겠으나…… 술기운 때문인지, 김뱀은 평생 후회할 말을 해 버렸다.
“나 좋아하냐?”
말해 버렸다.
그리고, 동시에―
김뱀은 흠칫 놀랐다.
태어나서 그런 표정은 처음 봤다.
술이 확 깬 송유주가,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미생물을 보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
얼탱이가 없다는 듯.
“내가?”
천천히 손가락을 들며.
“널?”
김뱀은 식은땀을 흘렸다.
망했다.
어떡하지?
내가 어쩌자고 이런 말을?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분 전으로만…….
[세이브 파일을 불러올까요? YES / NO]
예, 시간을 되돌려 주세요. 제발 부탁합니다, 신이시여……!
[그런 기능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시뮬레이션 게임이 아니라 실전이었다.
김뱀의 말이 빨라졌다.
“그, 내, 말은. 그러니까. 만에 하나라도.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싶었던 거야. 야, 어디 가냐, 송유주? 내 말 좀 듣고……!”
송유주는 듣지 않고 뒷걸음질 쳤다.
사사삭!
순식간에 스무 걸음 정도 떨어진 송유주는, 언제 술에 취했냐는 듯 기숙사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아 씨X, 빨리 가서 귀 씻어야지.”
귀를 박박 문지르며―
마치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송유주는 성큼성큼 멀어졌다.
홀로 남겨진 김뱀은 부들부들 떨었다. 스무 살을 살면서 이런 굴욕감은 처음이었다.
“……자퇴할까?”
* * *
축제가 끝났다.
새벽 3시.
덩치브라더스는 캠퍼스에서 늦은 시각까지 맥주를 깠다.
첫날 파격적인 공연을 한 덕분에 슈퍼스타가 된 두 사람이었지만, 영광은 커녕 부끄러움만 남았다.
“축제가 이리 잔혹한 것일 줄이야…….”
“…….”
“우리 흑역사 어떡하냐? 영상으로도 남았는데.”
“내는 그거 고향에 있는 가족들도 다 봤다 아이가.”
“뭐? 어쩌다가?”
“우리 누나 친구가 연국대에 있다 카대. 동영상 찍어 가꼬 보내 뿟다 카대. 엄마 아빠 누나 사촌들 다 봐 뿟다 카대.”
“…….”
“꼬추 떼 뿌라 카대.”
“힘내라, 인마. 그래도 고추는 떼지 말자고. 우리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니까.”
슬픈 여봉철과 마동섭.
두 사람은 목장갑을 낀 손으로 맥주캔을 부딪쳤다.
평소라면 선배들 눈치 때문에 의대 건물 앞에서 이렇게 과감하게 맥주를 마시지 못했겠으나, 오늘은 축제 마지막 날.
야외 주점 천막을 철거한 뒤, 아이스박스에 남은 술을 처리한다는 명목으로 술을 까는 중이었다.
얼음이 녹아 물이 되었지만, 아직 그 안에 있는 캔맥주들은 시원했다.
“에효, 그래도 축제라꼬…… 의대 건물 앞에서 이래 술 마시니까 기분은 색다르고 좋네!”
“그러게.”
“근데 저거 김뱀 아이가?”
“어, 그러네?”
“범수야~ 이리 온나!”
여봉철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기숙사 쪽 방향.
저 멀리서부터 김뱀이 터덜터덜 걸어와 합류했다.
“어데 갔다 오노?”
“범수 표정이 왜 그렇게 넋이 나갔냐? 무슨 일 있어?”
“자퇴…….”
“응?”
“머라꼬? 자퇴?”
멍하게 <자퇴>라는 단어를 중얼거리던 김뱀은, 별안간 아이스박스에 달려들어 얼굴을 처박았다.
“아니다. 자퇴는 무슨, 그냥 접싯물에 코 박고 죽자! 그르르르르릃!”
“얌마, 김뱀!”
“엄마야, 와 이라노!”
첫 대학 축제.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을…… 거대한 흑역사로 마무리하게 된 3인조.
어쩌면 스무 살의 추억이란,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기억들이 있기에 각별한지도 모른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예과 2학년―
김뱀은 과 대표, 일명 <과대>가 되었다.
소위 ‘라인’을 타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의대 생활에 완벽하게 적응했고, 어느새 조직 생활의 달인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그 조직 생활의 정점은 바로 <동아리> 활동이다.
“패스!”
“여기! 여기로!”
“리바운드! 그렇지!”
연국대 의대 농구부 <크레이지4U>는 가장 규모가 큰 곳이었다.
남자들은 선수, 여자들은 매니저―
동아리 내에서 성별에 따른 역할은 고정되어 있었고 여자 회원들의 수도 상당했다.
농구를 좋아하는 선배들은, 어릴 적 만화책을 보면서 키웠던 로망을 채우고 있었으나…….
울며 겨자 먹기처럼 동아리 활동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김뱀 또한 그중 하나였다.
오늘 그의 포지션은 센터.
팔다리가 길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상대 센터가 나동탁>이라는 이유가 가장 컸다.
―야! 나동탁 그 인간 씻지도 않고 경기 뛰러 오는 거 알지? 진짜 그 인간이랑 몸을 부대낄 때마다 죽고 싶다…… 범수야, 네가 희생해 줘라! 과 대표잖아!
키 큰 동기가 울면서 사정하는 바람에, 김뱀이 총대를 멜 수밖에 없었다.
나동탁이 현란한 피벗 플레이를 펼치자, 그 뒤에서 수비하던 김뱀의 표정이 썩었다.
‘아오 씨…… 암내!’
김뱀은 울고 싶었다.
사람의 겨드랑이에서 어떻게 이런 냄새가 나지?
이 사람은 내분비계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나동탁이 180도 몸을 돌리며 공을 날렸고, 축축하게 젖은 겨드랑이가 김뱀의 얼굴을 덮쳤다.
―철푸덕!
“악!”
“……!”
대참사가 일어났다.
훗날 동기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될, <김범수―나동탁 겨드랑이 키스 사건>이었다.
김뱀은 코트 위에 주저앉은 채 헐떡이며 생각했다.
개같다.
진짜 개같다.
확 엎어 버릴까?
썩은 계란과 상한 우유에 코를 박아도 이렇게 괴롭진 않을 거다, 좀 씻고 다녀라…… 하는 독설이 혀끝까지 올라왔다.
“아, 쏘리 쏘리!”
“…….”
“뭐냐, 김뱀, 표정이 왜 그러냐? 미안하다니까?”
“아니, 그게, 오펜스가 아니라 디펜스 파울인 것 같아서요. 쿨럭, 제가 먼저 손으로 밀었습니다.”
“아, 그런가?”
“예, 쿨럭.”
김뱀은 그 와중에도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며 나동탁을 추켜세웠다.
“역시 형의 센터 플레이는 막기 힘드네요, 쿨럭.”
그 모습을 보며 동기들은 잠시 등을 돌리고 눈물을 삼켰다.
기억할게!
너의 숭고한 희생……!
기억할게!
* * *
뒤풀이 술자리.
나동탁은 제왕처럼 한가운데 앉았다.
이제 <학생회장>이 된 그는 자신의 지위를 즐겼다.
그의 옆자리에는 늘 여자 후배가 배치되었고, 일정 시간마다 다른 여자 후배들로 교체되었다.
왜냐고?
‘우리 고학번 선배님은 신나셔야 하니까!’ 라며 선배들이 눈치를 주었으니까.
“학교 공부만 정직하게 한다고 원하는 과를 갈 수 있을 줄 알아? 천만에. 동아리가 핵심이다, 이거야!”
타악!
동탁은 기분 좋게 술잔을 내려놓았다.
맞은편에 있던 김뱀은 그의 술잔을 금방 채워 주었다.
“너희들…… 저번에 친선 경기 할 때 오셨던 OS(정형외과) 진철이 형이랑 상섭이 형 알지?”
“아, 예. 그때 인사시켜 주셨던 것 기억납니다.”
“그 형들이 어떻게 정형외과 갔을 거 같아?”
“네?”
“이런 말 하면 안 되지만, 그 형들 공부는 진짜 못 했거든. 그런데도 인기과인 OS(정형외과)에 딱 합격했잖아. 그만큼 우리 농구부 선배님들이 정형외과는 꽉 잡고 있다는 거지.”
“아…… 네.”
“정형외과뿐만이 아니야, 재활의학과도 꼭 한 명은 우리 동아리에서 뽑는다! 물론 거긴 농구를 잘해서 눈에 뜨일 정도가 돼야 해.”
이상한 말이었다.
농구부 활동을 잘하면 원하는 과를 간다니?
하지만 지금 이 공간에서는 전혀 이상한 말이 아니었다.
“시험공부는 적당히만 유지해도 돼! 동아리 활동만 잘해도 웬만큼 원하는 과는 갈 수 있다, 이 말이야!”
<동아리>.
……동아리는 그냥 취미 아닌가요?
맞다.
하지만 아니기도 하다.
연국대의 <의대 동아리>는 달랐다.
동아리 안에서 선후배 간의 끈이 이어지고, 의대 생활의 필수 정보들이 전해진다.
그렇기에, 동아리 없는 의대 생활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인턴, 레지던트가 되어 원하는 과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선후배 관계가 무척 중요하며…….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같이 일하기 싫은 사람을 같은 과 사람으로 뽑기 싫어하는 것은 모두 눈치로 알고 있었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모든 인원은 반드시 1개 이상의 동아리에 들어가야 했다.
그나마 관심 있는 동아리가 있다면 다행이었지만…….
없다면?
그래도 들어가야 한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를, 연국대에서의 의사 생활을 위해서.
“송유주처럼 대학 생활 하면 안 된다고. 걔는 진짜 개념이 없어. 무개념이라니까?”
난데없이 송유주의 이름이 나오자, 김뱀은 움찔하고 반응했다.
동탁은 틈만 나면 그녀의 욕을 했는데, 그럴 때마다 김뱀은 불편했다.
이유는 몰랐다.
단순히 작년의 흑역사가 떠올라서 그런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
“우리 동아리 여자애들을 좀 본받아야 돼! 효선이를 봐! 얼마나 개념 차냐고!”
동탁이 옆자리의 신입생을 가리키자, 효선은 불편하게 ‘ㅎ’ 하는 소리로 답했다.
1학년 최효선.
그녀는 동아리 모임에 빠지지 않는 성실한 신입생이었다.
매니저 활동이 재미있냐고?
전혀.
공 튕기는 사람들이나 재밌겠지 뭘…….
하지만 매주 있는 모임에 안 나가면, 선배들이 지나가면서 한마디씩 눈치를 줬다.
―효선아, 요새 동아리 안 나오더라?
이렇다 보니, 동아리 모임은 빠질 수 없는 곳이었고, 한 번 가입된 동아리는 졸업할 때까지 탈퇴란 불가능했다.
“송유주처럼 살면 멋있어 보이냐? 천만에! 의대 생활 망하는 지름길이다. 그렇게 아싸로 지내면, 나중에…….”
나동탁이 자신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히죽 웃었다.
“이런 것도 못 얻는단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