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0화. 뱀과 야생 고양이 (6)
대학 생활 1년의 클라이막스는?
<축제>다.
연국대 의대의 축제는 일주일간 진행된다.
신입생들은 첫날 장기자랑을 준비해야 했으며…….
―예과 1학년들, 축제를 장례식 분위기로 만들고 싶지 않으면 준비 잘해라. 고학번 선배님들 다 보러 오시니까.
동기들 고생하는데, 은근슬쩍 빠지지 말고!
선배들은 으름장을 놓았다.
매주 시험에 치여 사는 본과생들은 축제를 준비할 여력이 없기에, 대부분의 준비는 예과생들에게 맡겨지게 된다.
그리고 대망의 첫날.
신입생들은 청팀과 홍팀으로 나뉘어 장기자랑 경연을 펼쳤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띄워야 하는 상황.
그리고 각 팀의 에이스는…….
“자, 청팀의 에이스를 소개합니다! 여! 봉! 철!”
매혹적인 검은색 드레스 치마를 입은 여봉철이 리듬을 타면서 무대 위로 걸어 나왔다.
파격적인 의상에 모두가 기겁했다.
“아악!”
“내 눈!”
“오, 마이 아이!”
여봉철은 어울리지 않는 여장을 한 채, <성인식>의 무대를 연출했다.
반응은 엄청났다.
시냇물처럼 흘러가던 축제에, 엄청난 바위가 첨벙 떨어진 느낌.
관중들은 뜨겁게 환호했다!
이대로라면 청팀의 압도적인 승리가 예상되었다.
그런데―
홍팀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자, 다음으로 홍팀의 에이스를 소개합니다! 마 동 섭!”
“뭐야? 의자를 왜 끌고 나와?”
“설마……?”
드르륵―
핫팬츠를 입은 마동섭이 의자를 끌고 무대로 나온다.
분위기만 보면 덩치 큰 형사가 취조실에 의자를 끌고 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처억!
비트가 흘러나오자, 마동섭은 지하철 쩍벌남처럼 의자에 앉아 춤을 췄다.
“으아아악! 내 눈!”
“푸하하!”
“잘한다!”
여봉철의 <성인식> vs 마동섭의 <미쳤어>.
희대의 대결이었다.
가요계의 대표적인 ‘섹시 댄스’ 배틀!
선배들은 포복절도하며 1학년 후배들의 장기자랑을 즐겼고, 동기들도 박수와 환호로 무대를 채웠지만-
항상 그렇듯, 몇몇은 즐거웠고 몇몇은 불편했다.
특히 여봉철과 마동섭 본인들에게는 흑역사가 생성되는 순간이었다.
“자퇴할까?”
“그럴까?”
“학교 때려치우자. 아니, 같이 죽자!”
무대가 끝나고 난 뒤―
울며 겨자 먹기로 분위기를 띄웠던 덩치 브라더스는 뒤풀이 호프에서 500cc 맥주잔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여장이라니! 내가 여장이라니!
이러려고 의대에 온 게 아닌데!
죽자, 죽어!
마시고 죽자!
* * *
축제는 계속되었다.
늘 똑같던 캠퍼스의 풍경도, 이때만큼은 조금 달라진다.
“김치전 하나에 오천 원이에요, 드시고 가세요! 주문할 땐 큰 소리로 주모를 불러 주세요!”
“주모!”
“예, 가유~!”
의대 앞 천막에서는 콘셉트 주막을 열어 안주를 만들고 있었고.
“다트 게임 한 판에 천 원! 형님들, 다트 한 번 쏘고 가세요. 300점 이상이면 인형도 드려요!”
“자기야, 이거 하고 가자!”
“그럴까?”
다른 한쪽에서는 다트 게임을 설치하여 운영 중이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각종 학술 동아리들이 준비해 놓은 전시관이 열렸다.
[연국의대 해부제]
해부학이 궁금하신가요?
인체의 신비 속으로 여러분을 안내합니다.
우리 몸속 구석구석을 탐험해 볼까요?
내용: 인체 해부 실습 및 인체표본 소개
장소: 연국대학교 의대 해부학 실습실 (농구장 옆)
주최: 연국대학교 해부학 교실
김뱀은 해부학 전시관 안내를 맡았다.
장기자랑을 준비하거나 천막을 운영하는 것에 비해 훨씬 간단한 임무다.
이 또한 전략이었다.
꿀 같은 역할!
시간을 아끼면서 축제에 참여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이고 스마트한 선택이었고…….
“너는 왜 여기 있냐?”
“난 연국대 의대생 아니야?”
“네 얼굴을 축제 기간에 계속 봐야 할 줄은 몰랐는데.”
“누가 할 소릴.”
김뱀은 찌릿 하고 옆을 쳐다보았다.
송유주가 뒷짐을 지고 전시관 복도에 함께 서 있다.
하얀 블라우스에 [안내]라고 적힌 목걸이 명찰을 달고 있다.
“평소에는 학교 행사에 코빼기도 안 비추더니…….”
“그건 선배들이 쓸데없이 불러내는 거고, 이건 공식 행사니까.”
“잘났다.”
김뱀은 코웃음을 쳤다.
물론 송유주는 학교에서 여전히 아웃사이더였다.
하지만 최근 그녀에 대한 여론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쟤는 단체 생활에 어울리지 않아. 우리 의대에 없는 셈 쳐야 돼! 열외시켜!
……아직도 많은 선배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왜? 난 유주 좋아! 똑똑하고 공부 잘하면 됐지. 이제 우리 학교도 꼰대 문화에서 벗어날 때 되지 않았어?
……라고 말하는 선배들도 있었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을 ‘송유주 팬클럽’이라고 부르며 알음알음 그녀를 챙기기도 했다.
김뱀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따위로 사회생활을 해도 옹호해 주는 사람이 있다니,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누군 열심히 선배들 비위 맞추고 있는데, 새삼 열받는다.
“맘에 안 들어…….”
“또 시비냐?”
“사회 부적응자랑 같이 있으니까 나도 아싸 되는 것 같다고.”
“너야말로 열 걸음 이상 떨어져. 재수 없게 같은 공기 마시고 싶지 않으니까.”
“네가 가라.”
“네가 가.”
“나는 이미 복도 끝이다.”
“꺼져, 좀. 초딩도 아니고.”
“아니, 복도 끝이라 못 간다고!”
두 사람이 뒷짐을 진 채 말싸움으로 투덕대고 있을 때.
“왜 두리 싸워요……?”
앳된 목소리에,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아이다.
아주 어린 아이.
말랑 콩떡 같은 여자아이가 눈을 땡그랗게 뜨고 두 사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축제는 외부인들에게도 오픈되지만, 이렇게 어린 방문객은 처음이다.
“혼자 왔니?”
“엄마 저기서 딴 사람들이랑 이야기하느라 바빠요.”
“아, 그랬구나…….”
“여기는 모 하는 대애요?”
“……!”
김뱀의 심쿵.
그는 보기와 달리 작고 귀여운 생명체에 약했다.
양 갈래로 땋아 올린 머리를 하고, 아장아장 걸음으로 다가온 여자아이가 혀 짧은 말투로 물어보자…….
김뱀은 목소리는 저도 모르게 흔들리고 있었다.
“여, 여기가 뭐 하는 덴지 궁금하니? 설명해 줄까?”
“옵빠 무섭게 생겼오. 이쁜 언니한테 갈래요.”
“……!”
아장아장―
그렇게 마음의 상처를 받은 김뱀을 뒤로하고.
아이는 송유주에게 다가가 그녀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언니 여기 모하는 대애요?”
“음…… 우리 몸에 대해서 설명해 주는 곳이에요.”
“이게 우리 몸이에요?”
“맞아요.”
“우아, 신기해요!”
곧 송유주는 허리를 숙여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고, 벽면에 걸린 인체 모형들을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의외네.’
김뱀은 송유주를 힐긋 바라보았다.
송유주가 저런 부드러운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본다.
물론 그래 봤자 입꼬리가 1mm정도 올라가고 눈꼬리가 미세하게 내려간 정도였으나…….
항상 얼음장 같던 표정만 보다 보니, 지금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아이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이건 모에요?”
“피예요.”
“피?”
“그래요.”
“피 시러요…… 무서어요…….”
“피는 무서운 게 아니에요. 우리 몸속에서 항상 흐르는 거예요. 지금 여기에도 흐르고 있어요.”
송유주는 그렇게 말하며 아이의 몸을 가리켰다.
제 딴에는 친절한 설명이었으나, 아이는 살짝 겁먹은 듯했다.
벽면에서는 심장과 폐 모형에서 빨간색과 파란색 액체가 왔다 갔다 하면서, 혈액의 흐름을 보여 주고 있었다.
“저 물이 몸속에 있다고요?”
“맞아요.”
“물은 잘못하면 쏟아지는데…… 저 물이 다 쏟아지며는…… 그럼 어케 대는 거예요?”
“그럼 죽어요.”
“!”
아이의 얼굴이 굳는다.
김뱀은 침을 꼴깍 삼켰다.
불안했다.
송유주의 저 <진실의 주둥이>를 지금이라도 틀어막아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주거요?”
“네.”
“죽는 거 시러요…… 무서어요…….”
“죽음은 자연스러운 거예요. 나이가 들면서, 여기 보이는 심장이 안 뛰면, 언젠가는 다 죽어요.”
“……우리 엄마랑 아빠도……?”
송유주는 아이와 눈을 맞추고 따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죽어요.”
“야, 인마!!”
“으아아아아아아앙!”
아이가 빽 울음을 터트렸다.
김뱀은 얼른 우는 아이를 달래느라 쩔쩔매야 했다. 하지만 워낙 눈초리가 사납게 생겨서, 아이를 달래는 데는 전혀 재능이 없었고…….
송유주는 뒤늦게 사탕으로 아이의 환심을 사려 했지만 역부족이었으며…….
“왜 애를 울리고 그래욧?!”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서로 다른 이유로 아이에게 버림받은 두 사람은, 아이 엄마에게 고개를 꾸벅꾸벅 숙여야 했다.
* * *
축제의 마지막은 언제나 술이다.
연국대학교 앞의 작은 술집 <해바라기>.
지금 이곳에는…….
김뱀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기현상이 펼쳐지고 있다.
“유주를 이렇게 술자리에서 보다니!”
“너무 좋다!”
“유주야, 언니가 아낀다! 손 한 번 잡아 봐도 되겠니?”
거의 송유주 팬클럽 선배들의 정모 현장이었다.
학술 동아리에는 비교적 온건한 성향의 선배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중간에 기강을 잡아 보려는 선배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야, 송유주! 너 염색 아직도 안 풀었냐? 마이웨이도 적당히 해야지, 그렇게 하고 의대 건물 들어오면 안 돼, 너는! 진짜 1학년이 눈치가 없……!”
“야 김송탁! 우리 유주 혼내지 마! 네가 뭔데!”
“맞아!”
“유주 지켜!”
“아,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알았다, 알았어! 안 할게…….”
기강은커녕, 본전도 못 찾고 깨갱하고 돌아가야 했다.
송유주는 약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술을 홀짝였고, 그 옆자리에서 김뱀은 심란한 표정으로 술을 홀짝였다.
이게 대체…… 대체 뭐지?
송유주를 실드 쳐 주는 선배들이 이렇게나 있었다고?
존재를 알고 있긴 했지만 실제로 보니 당황스럽다.
“그동안 다른 선배들이 괴롭혔지?”
“기죽지 마! 연국대에 꼰대 선배들만 있는 거 아니야!”
“유주야, 우리가 있다!”
“비록 우리가 쪽수는 딸리고, 아싸라서 힘은 없지만, 그래도 힘내!”
“……고맙습니다.”
송유주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녀 또한 이런 상황이 익숙지 않았다.
1년 동안 아웃사이더로 지내는 게 당연한 삶을 살아왔기에.
자기를 옹호해 주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니 기분이 이상한 듯했다.
“그…… 선배님들, 학술제 준비하시느라 수고 많으셨…… 습니다.”
송유주가 어색하고 무뚝뚝하게 인사를 하자, 선배들이 꺅 하고 박수로 화답했다.
‘……너 그런 말도 할 줄 아냐?’
김뱀은 소리 없이 경악했다.
선배들에게 나름 예의를 차리려고 노력하는 송유주의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왜 저래?
평소랑 다르게.
무슨 바람이 불어서?
물론 ‘네가 사람이면 뒤풀이 정도는 참석해라’라고 등을 떠민 것은 김뱀 본인이었으나…….
막상 송유주가 사람들 사이에 조금씩 섞이는 걸 보니, 기분이 묘했다.
‘마음에 안 들어.’
저런 식으로 살아도, 세상 어딘가에 아귀가 들어맞는 톱니바퀴가 있다는 게…… 인정할 수도 없고, 인정하기도 싫었다.
“저 담배 좀 사 올게요.”
송유주가 어색하게 자리를 뜨자 팬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시크해.”
“엣지 있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지.”
“담장 위 고양이 같지 않아?”
“근데 유주가 뒤풀이 온 것도 의외네. 안 올 줄 알았는데.”
“그러게, 신기하네.”
곧 그들은 시선을 김뱀에게 돌렸다.
“범수가 있어서 그런가?”
“그런가 봐.”
“하긴 범수가 유주와 단짝이긴 한 것 같더라. 데리고 와 줘서 고마워, 범수야!”
쿨럭.
김뱀은 맥주를 뿜을 뻔했다.
뭔가 단단히 착각들을 하는 모양이다.
그는 입을 닦으며 말했다.
“……선배님들, 죄송한데 저 쟤랑 안 친합니다. 쟤도 저 싫어하고.”
“에이, 아닌 것 같은데?”
“친한 거 아니었어? 전시관 안내할 때도 둘이 사이좋아 보이던데?”
그게 사이좋은 걸로 보였다니…… 축제를 준비하는 동안 엄청난 오해가 쌓인 것이 분명했다.
선배들의 말이 이어졌다.
“송유주가 다른 사람들한테는 늘 똑같은 표정만 짓던데, 유일하게 표정 변화 있을 때가 범수랑 얘기할 때잖아?”
그건 맞다.
주로 혐오하는 표정이었지만.
“유주가 원래 말을 길게 하는 편이 아닌 것 같던데…… 유독 범수랑 얘기할 때는 항상 길게 대화하는 것 같고.”
그것도 맞고.
주로 꺼지라는 말을 길게 풀어서 하는 편이었지만.
“학교 행사에 코빼기도 안 비치던 애가, 수많은 행사 중에서도 굳이 해부제 부스에 참여했다? 게다가 뒤풀이까지 왔어?”
그것도 맞긴 한데.
어째 점점 이야기의 흐름이 이상해진다.
선배들은 심상치 않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혹시…… 유주가 범수 좋아하나?”
훗날, 김뱀은 회상한다.
그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말았어야 했다고.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술기운의 마력 때문에, 김뱀의 한쪽 뇌에서 작은 속삭임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런 거였나? 평소랑 다른 이유가?’
아니야, 미친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