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237화 (237/241)

#외전 19화. 뱀과 야생 고양이 (5)

MT 이후.

김뱀은 선배들의 눈에 띄었다.

말 잘 듣고, 분위기 잘 맞추고, 선배들에 대한 예의범절도 깍듯해서 마음에 쏙 들었던 모양이다.

그 말은 즉…….

대학가에서 술을 퍼마시는 나날들이 이어졌다는 뜻이다.

“으, 머리야…….”

“괜찮냐?”

“어제는 형이 세 명으로 보였는데, 이제 한 명으로 보이긴 해.”

“……술 좀 적당히 마시지.”

“누가 머리에 띠를 묶어 놓고 엄청 세게 조이고 있는 기분이야.”

김뱀은 새햐얘진 얼굴로 사촌 형이 차려 준 북어국을 떠먹었다.

국에서도 술맛이 나네?

심각하다, 심각해.

대학 생활이 이렇게 빡센 거였나?

그래도 서울살이하는 사촌 형이 매번 해장을 챙겨 줘서 다행이다.

맞은편에 걸터앉은 형이 픽 웃으며 물었다.

“대학교는 다닐 만해? 재밌어?”

“재미는 무슨.”

“왜?”

“별로야, 때려치우고 싶다…….”

“크크, 기껏 연국대 합격해 놓고? 삼촌이랑 숙모가 들으면 난리 나겠다, 인마.”

“말이 그렇단 거지.”

범수의 부모님은 교수였다.

그들은 한국 사회에서 대학 타이틀이 주는 무게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좋은 연구 결과를 내놓아도, 출신 학교의 한계 때문에 상위권 대학교수로 임용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범수야, 대학 간판 평생 간다. 반드시 명문대 졸업장 타이틀을 쥐어야 해!

명문대, 명문대.

그 이야기를 몇 번이나 들으며 자라 왔는지…….

부모님은 언제나 ‘최적의 성공 코스’를 강조해 왔고, 그걸 중요하게 여기는 건 김뱀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사촌 형은 동생의 시시콜콜한 이야기에 더 관심이 많은 듯하다.

“친구는 좀 생겼어?”

“그건 왜 자꾸 물어?”

“얌마, 형이 평소에도 직업정신이 투철하잖냐. 궁금한 건 못 참지. 우리 동생이 친구는 좀 사귀었는지, 연애는 좀 할지…….”

“이상한 애들밖에 없어.”

“이상한 애들?”

“그중에서 제일 이상한 애가 있는데…… 정말 희한해. 이해가 안 되는 인간이야.”

잠시 후, 김뱀의 말을 듣고 사촌 형은 껄껄 웃었다.

“뭐? 그런 애가 있어?”

“미친 애라니까.”

“와, 그 친구 매력 있네. 완전 내 스타일인데?”

“그래, 형이랑 얘기하면 잘 통하겠네.”

“친하게 지내봐. 어쩌면 너랑 친구가 될 수도 있잖아? 가끔은 반대끼리 손뼉이 맞을 때도 있는 법이라고.”

“절대 그럴 일 없을 거야.”

김뱀은 불쾌한 생각을 잘라 내듯 말했다. 사촌 형은 그런 동생을 보며 귀엽다는 듯 말없이 웃기만 했다.

* * *

예과 1학년.

이들의 시간표는 자유로운 편이다.

금요일 하루 빼고는 원하는 교양 과목들을 선택해서 들을 수 있으니까.

물론 본과보다는 훨씬 여유가 있었지만…….

‘방심할 수 없지.’

김뱀은 평소에 자신 있는 역사 과목들 위주로 선택했다.

이것 또한 전략.

가장 효율적인 선택으로 최고의 학점을 노린다.

자신이 잘 알고 있는 분야라, 강의를 듣는 것도 수월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르네상스의 인본주의는 화풍에 영향을―”

<전쟁사>와 <서양미술사>를 연달아 듣고 나면 오후 1시.

학생 식당은 여러 개가 있었는데, 그중 김뱀이 있는 건물은 언제나 붐볐다.

식판을 들고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다, 혼자 밥을 먹는 송유주와 눈이 마주쳤다.

“…….”

“…….”

[야생의 송유주가 나타났다. 어떻게 할까?]

―1. 밥을 함께 먹자고 제안한다

―2. 도망친다

망설이던 중.

송유주가 자기 식판을 슬쩍 몸쪽으로 끌어당겼다.

가까이 오지 말라는 뜻인가 보다.

김뱀은 울컥해서 말했다.

“야, 씨. 내가 무슨 바이러스냐?”

“꺼져.”

“하…….”

김뱀은 툴툴대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은 뒤 말했다.

“누군 너랑 같이 먹고 싶어서 앉는 줄 아냐? 자리가 없어서 그런다.”

“그럼 빨리 먹고 꺼져.”

“그럴 거다.”

우걱, 우걱.

마주 앉아 밥을 먹는다.

어색한 시간이 흐른다.

물과 기름이 만나도 이렇게 섞이기 힘들지는 않을 것이다.

두부조림을 입에 욱여넣던 김뱀이 툭 던지듯 물었다.

“언제까지 겉돌 거냐?”

“남이사.”

“의대 생활 6년이야. 계속 아웃사이더로 지내려고? 시비 거는 게 아니라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다.”

“너처럼 가면 쓰고 인사이더인 척하는 것보단 낫지.”

“하…….”

김뱀은 기가 막혔다.

사회 부적응자 주제에!

이때는 아직 <인싸>라는 단어가 생기기 전이었지만, 김뱀은 누구보다 열심히 학교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야, 내가 너보다는 학교생활 백 배로 잘하고 있……!”

위이잉―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김뱀은 문자 메시지를 확인한 뒤 인상을 썼다.

“아 씨, 오늘 저녁에 또 집합이네. 누가 또 선배들한테 인사 안 했나.”

“와. 부. 럽. 다.”

“…….”

“학교생활 잘해서 좋겠네? 나는 사회 부적응자라 그런지 선배들한테 혼나는 게 너무 부. 럽. 다.”

송유주는 식판을 들고 사라졌다.

김뱀은 부들거리며 그녀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왜 이렇게 열받지?

쟤만 보면 초조해진다.

서로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달까…….

평행선을 달리며, <넌 왜 그렇게 사냐>고 손가락질하는 기분이다.

‘반대끼리 손뼉이 맞긴, 개뿔! 쟤랑은 평생 맞을 일 없을 거다.’

완전히 의대 생활에 녹아들기 시작한 김뱀.

그리고 마이웨이로 살아가는 송유주.

두 사람은 그렇게 반대 방향으로 멀어지며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 * *

금요일.

예과 1학년들이 전공 수업을 듣는 날이다.

과목은 총 2개.

[환자와 의사] 그리고 [사회와 의사].

아직 고등학생의 티를 벗지 못한 신입생들에게, 이 사회에서 의사로서 살아가기 위해 가져야 할 교양과 마음가짐을 가르쳐 주기 위한 과목이었다.

“어, 범수야! 이리 온나!”

“김뱀, 오랜만!”

“…….”

덩치 브라더스가 손짓한다.

그리고 그들의 옆에는 언제나처럼 송유주가 앉아 있다.

비공식 송유주 팬클럽 1호, 2호.

그들은 아웃사이더인 송유주를 만나기만 하면 일부러 그녀를 챙겼다.

그래서 전공 수업을 들을 때는, 늘 저렇게 3인조 구성이 만들어졌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늘 4번째 자리를 김뱀을 위해 비워 놓곤 했다.

“야, 느그 둘은 아즉 화해 안 했나? 엠티 갔다온 지가 언젠데?”

“…….”

“…….”

“하여간 둘은 만나기만 하면 냉기가 쌩쌩 흐르는구먼. 어우 추워.”

덩치 브라더스는 물과 기름을 섞이게 하려 했지만 매번 실패하는 중이다.

마동섭은 쩝 하고 입맛을 다신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늘따라 강의실이 미어터질 정도로 와글와글했는데, 심지어 도강을 하러 왔는지 통로에 앉아 있는 사람도 있었다.

“오늘 사람이 많네?”

“당연하지 인마. 오늘 교수님이 레전드다 아이가.”

“하긴.”

전공 강의는 매주마다 교수님이 달랐다.

연구실에서 기초 연구를 하시는 교수님들도 있었고, 병원에서 임상을 하는 교수님들도 있었다.

때로는 의사가 아닌, 약학대학, 간호대학, 법의학과 교수님들이 와서 수업을 하기도 했으며…….

어떤 날은, 아예 의료와 관련 없는 외부 강사가 오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SBC 8시 뉴스 앵커 이도완입니다―”

“안녕하세요, 헬스티어 제약회사 대표 유지원입니다-”

매번, 강사가 누구냐에 따라 수업의 인기가 달라졌다.

그리고 오늘.

9월, 2학기 첫 번째 강사는 연국대 의대에서 가장 유명한 의사인 흉부외과 의사 백의신이었다.

―덜컥!

오후 1시.

칼같이 정각에 문이 열린다.

베이지 정장에 흰색 셔츠를 입은 백의신이 강의실로 들어왔다.

‘백의신이다!’

‘우와, 진짜 백의신이야!’

‘대박!’

척, 척, 척―

특유의 빠른 걸음걸이.

약간 희끗희끗한 머리에, 고집 센 얼굴.

120여 명의 계단식 강의실에 있는 연국대 예과 1학년 학생들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TV에서만 보던, 유명 인사가 내 눈앞에 있었으니까!

그렇게 바람을 가르며 나타난 백의신이 단상에 놓인 물을 들이켠 뒤 학생들에게 건넨 첫 마디는―

다소 파격적이었다.

“너희 인생은 망했다.”

……갑자기요?

……왜요?

파릇파릇한 새내기들한테 축복을 내려 주기는커녕 뜬금없이 저주라니……?

백의신은 검은색 마카를 들고, 화이트보드를 향해 손을 뻗었다.

“대충 너희의 인생을 점, 선, 면으로 표현해 볼까?”

타악―

백의신은 점을 찍었다.

그리고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게 스무 살까지, 너희가 거쳤던 입시 관문이다. 바늘구멍이지.”

순간 의대생들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뿌듯함이 스쳤다.

그들은 입시 전쟁의 승리자니까.

그런데 다음으로, 백의신은 긴 가로줄을 쫙 긋더니 말했다.

“이게 대충 서른 살까지, 앞으로 너희의 인생이다.”

“……?”

“공부. 시험. 공부. 시험. 공부, 시험, 공부, 시험.”

탁, 탁, 탁.

<공부>와 <시험>을 반복해서 리드미컬하게 체크한다.

사람의 인생을 거칠게 요약한 타임라인이 만들어졌다.

“공부하고 시험만 치다가 서른 살이 넘지.”

“…….”

“그리고 이건 그 이후로 펼쳐질 너희의 삶의 반경이다.”

주르륵―

이번엔 원이었다.

백의신은 보드 위에 작은 동그라미를 하나 그린 뒤 말했다.

“거의 정해진 풀 안에서 끼리끼리 어울리며 살게 되겠지. 같은 과 의사, 의사, 의사…… 다른 과 의사, 의사, 의사…….”

탁, 탁, 탁.

이번에는 <의사>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원 안에 체크 표시를 채워 넣는다.

드넓은 화이트보드에 비해, 원 안의 세계는 무척 좁아 보였다.

백의신은 손을 턴 뒤 말했다.

“대충 이렇게 살아갈 너희가, 정신이 똑바로 박혀 있는 어른이 될 확률은 몇 퍼센트나 될 것 같냐?”

다들 당혹스러운 표정이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백의신이 하는 말인 만큼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그 후, 그가 풀어낸 이야기들은 다소 충격적인 것들이었다.

그야말로 <의사: 절망 편>.

10분 정도 이야기를 했는데, 의사라는 직업을 선택한 뒤 최악의 인간이 된 사례들만 쏙쏙 골라서 나열했다.

대체 꿈나무 신입생들을 상대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뭘까?

“오늘 과목 이름이 뭐였지? 그래, <사회와 의사>…… 내가 너희에게 말해 주고 싶은 건 이거다.”

백의신은 한 줄의 문장을 거침없는 필치로 적었다.

<물고기는 물을 모른다>

……?

학생들은 전부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선문답 같은 문장이었다.

“이 말인즉.”

삐리리!

별안간 경보음 같은 전화벨이 울렸다.

백의신은 망설임 없이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전화를 받더니 버럭 소리친다.

"뭐야? 다이섹션(dissection, 대동맥 박리) 또 왔다고? 아까랑 다른 환자야? 페인(pain, 통증)은 언제부터 있었는데?"

상대 쪽에서 급하고 큰 목소리로 뭐라 뭐라고 하는 소리가 핸드폰 너머까지 들려왔다.

“에코(echo, 심초음파)는 봤어? 애올틱 밸브(aortic valve, 대동맥 판막)는 어떤데? 이 씨…… 똑바로 얘기해!”

타악―

백의신은 들고 왔던 가방을 다시 쥐어 든다.

그리고 불과 15분 전에 들어왔던 강의실 출입문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다시 단상으로 돌아와 마이크를 잡고 말한다.

“아,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다.”

“……?!”

“질문 있나?”

처억―

십수 명의 학생이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일제히 손을 높이 든다.

백의신은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그래, 좋은 자세다. 항상 질문하는 태도로 인생을 살도록.”

“??”

그리고 강의실을 나가 버린다.

휘잉―

그가 사라진 뒤, 남은 자리에는 적막만이 가득했다.

저럴 거면 질문이 있는지는 왜 물어봤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뭐야…… 진짜 간 거야?”

“강의 끝이야?”

“성격 진짜 이상한 분이라더니 사실이었나 보네…….”

다들 황당한 표정으로 수군댄다.

그럴 수밖에.

강의를 하다 말았으니까.

화이트보드에는 백의신이 적어 놓은 문장 한 줄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물고기는 물을 모른다>

여봉철과 마동섭은 턱을 긁적거렸다.

“저게 뭔 뜻이고?”

“예전에는 무슨 매의 눈, 사자의 심장, 그런 소리 하지 않으셨나…… 동물을 좋아하시는 건가?”

“그런가?”

“대충은 알겠는데, 맥락은 모르겠네.”

한편.

송유주는 미동도 없이 빤히 화이트보드를 쳐다보았다.

김뱀 또한 마찬가지.

모처럼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과연 백의신 교수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알듯 말듯, 간질간질한 기분이 두 사람을 괴롭혔고―

머지않은 미래에, 두 사람은 이 문장을 곱씹을 날이 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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