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236화 (236/241)

#외전 18화. 뱀과 야생 고양이 (4)

입학식 당일.

3월의 하늘은 화창했다.

그리스 시대의 야외극장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공간에, 자연과학 캠퍼스의 신입생들이 빼곡하게 서 있다.

“다음은 신입생 대표의 선서 낭독이 있겠습니다. 의예과 1학년 송유주 학생, 앞으로!”

또각, 또각―

구두 소리가 울려 퍼진다.

곧 신입생들 사이에 나지막한 탄성이 감돌았다.

핑크다.

그것도 아주 선명한.

복사꽃을 닮은 분홍색 머리카락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보기 좋게 찰랑였다.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의대의 신입생들은 전부 검은 머리를 하고 있었기에, 그 사이에서 더욱 돋보였다.

마치 흑백 영화 속에서 혼자 툭 튀어나온 컬러 영화 인물 같달까?

의대생들은 술렁이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진짜냐?’

‘입학식 때 저러고 왔다고?’

‘미친.’

‘저래도 되나?’

‘선배들한테 대놓고 반항하는 거네. OT 때부터 심상치 않더니만…….’

소리 없는 경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송유주는 무표정으로 단상 위에 올라간 뒤 손을 올렸다.

“선서.”

낭랑한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야외무대에 울려 퍼졌다.

“연국대학교의 신입생들은 재학 중 학칙 및 제 규정을 준수하고, 학생으로서의 본분을 지켜 성실히 면학에 정진할 것을……”

당당하다.

시선에 조금의 흔들림도 없다.

헤어스타일이 파격적인 데 비해, 행동이나 말투는 한치의 빈틈도 없는 모범생 스타일이다.

단상 옆에 줄지어 앉아 있던 교수들은 허허 웃음 지으며 속삭였다.

“요새 학생들은 자유분방한 게 매력이에요. 허허허.”

“신선하고 좋네요.”

“의대에서는 저런 스타일 흔치 않은 것 같던데…….”

“저 젊을 때 생각나네요. 호호.”

교수들은 대부분 흐뭇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야 당연했다.

대학은 본디 자유의 공간.

선배들이 아무리 온갖 불합리한 규율을 강조한다 한들, 그것이 대학 자체의 규율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송유주의 외모는, 머리카락 색을 제외하고는 칼같이 정돈되어 있기에 교수들의 호감을 샀다.

한편, 의대 신입생들 사이에서 마동섭과 여봉철은 감탄하며 속삭였다.

“이야, 점마…… 진짜 핑크색 머리 하고 왔네?”

“그날 우리가 미용실에서 말렸는데 귓등으로도 안 들었잖아? 아무래도 성깔이 보통이 아닌 듯해.”

“믓찌네.”

“상여자다, 상여자.”

“인정.”

처억―

엄지를 치켜드는 둘.

두 사람은 성별과 상관없이, 깡다구가 있는 사람을 좋아했다.

송유주의 팬 1호, 2호가 동시에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김뱀은 그 사이에서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마음에 안 들어……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그리고, 한편.

입학식에 참석한 의대 학생회의 표정은 썩어 있었다.

특히 나동탁은 열이 잔뜩 올랐는데, 안 그래도 구황작물 같은 그의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다.

그 옆에서, 단발머리에 안경을 쓰고 있는 학생회장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신입생 머리 예쁘다?”

“죄송합니다.”

“이러면 우리 과 규율이 어떻게 돼? OT 때 제대로 안 가르쳤어? 나동탁 이것밖에 안 되니?”

<학생회장 주봉선>.

그녀는 나긋나긋한 말투로 후배인 동탁을 질책했다.

“면목 없습니다, 선배님…… 제가 반드시 잘 교육시키겠습니다.”

빠득, 하고.

나동탁은 이를 갈았다.

그날, 신입생 송유주는 연국대학교 의과대학에 잔잔하지만 확실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 * *

대학에 가게 된 뒤,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신문물은 무엇일까?

캠퍼스?

자율적인 시간표?

방패처럼 두꺼운 전공 서적?

모두 맞는 말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술.

그렇다. 술이다.

전국 모든 대학생이 한이 맺힌 것처럼 술을 마셔 댄다. 전 세계 모든 대학생이 예외는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한국은 유별난 축에 속한다.

“마셔라 마셔라!”

“아,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 거야!”

인천 오이도의 한 펜션.

초록색 소주병이 방 한구석에 산처럼 쌓여 있다.

만취한 대학생들이 원을 그리고 앉은 채 술 게임을 하는 중이고, 김뱀은 질린 표정으로 그 속에 섞여 있었다.

‘뭐, 뭐야…… 의대생이라는 작자들이 이렇게 무식하다고? 이렇게 술 퍼먹다가 간 아작나는 꼴 보고 싶어?!’

……라는 말이 김뱀의 턱 밑까지 올라왔지만, 간신히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분위기를 깼다간 그 길로 선배들의 눈 밖에 날 테니까.

“잘한다! 잘한다!”

“원샷!”

김뱀은 억지로 술을 마셨다.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특히 맞은편에 앉은 부학생회장 나동탁은 미친 듯이 술을 강요했다.

게다가, 옆자리에 학생회장 주봉선…….

그녀 또한 술자리의 주당으로,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선배들로부터 ‘동탁과 봉선이 껴 있는 술자리를 조심하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를 실감하고 있는 중이었다.

“얘, 눈 째진 귀여운 신입생. 너 술 잘 마셔서 마음에 든다. 이름이 뭐랬지? FM 한번 해 볼래?”

FM.

80년대 대학가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자기소개’를 뜻한다.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오랜 역사를 가진 학교들은 으레 이런 ‘구호’들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다.

역사가 오래된 연국대학교에도 당연히 이런 풍습이 있었다.

봉선의 말에, 김뱀은 벌떡 일어나 목소리를 쨌다.

“안녕하십니까!”

“어이!”

“자유~ 연국!”

“어이!”

“선봉~ 의대! 김! 범! 수!”

마지막 구호는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 만약 마무리가 선배들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벌칙 술을 마셔야 하니까.

“오늘 밤! 끝까지 달려 보겠다는 마음으로! 화끈하고 쌔끈하게 인사드립니다!”

눈을 딱 감고 섹시 포즈를 취했다.

죽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웠지만, 동기들은 환호로 답했다. 이쯤 되면 한 번에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나동탁과 주봉선은 짓궂은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뭐지, 이 느낌은?

중학교 시절, 괜한 트집으로 시비를 걸던 일진을 보는 느낌이다. 불쾌한 기억이 김뱀의 머릿속에 스멀스멀 떠올랐다.

“틀렸어.”

“?”

“학번을 얘기 안 했잖니.”

“…….”

봉선의 핀잔에, 동탁이 얼른 끼어든다.

“야! 그리고 너의 엉덩이 놀림이 전혀 화끈하고 쌔끈하지 않았어! 옆에 계신 선배님을 확 꼬셔 버리겠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흔들었어야지!”

“꺄하하!”

나동탁은 후배들에게 성희롱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는데, 대상의 성별을 가리지 않았다.

깔깔 웃는 주봉선 또한 이러한 분위기에 열을 지폈다.

몇몇은 즐거웠고, 몇몇은 불편했다.

“마셔야겠지?”

콸콸콸―

그릇에 온갖 것들이 다 들어간다.

소주, 맥주, 막걸리.

새우칩. 땅콩.

커피믹스. 라면수프.

손에 잡히는 걸 전부 때려 넣은 뒤 마지막에 김치까지 첨가하려는 것을, 보다 못한 동기들이 그만하라고 만류한다.

결국 나동탁은 김칫국물만 적당히 첨가한 뒤, 외친다.

“야, 이거 내일 컵라면이랑 먹어야 하는 건데 특별히 넣어 준다!”

미친놈아, 네가 마셔 봐라, 고구마처럼 생긴 자식이…….

라고 말할 뻔했다.

김뱀이 역하다는 표정으로 머뭇거리자 동탁의 표정이 사나워진다.

“왜? 못 마시겠어? 전통주로 말아 줄까?”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전통주란, 결코 평범한 뜻이 아니었다.

“침 뱉어 줘? 양말 담가 줘? 담뱃재 토핑은 어때? 옛날에 선배들은 다 그렇게 마셨는데…… 어디 한번 구시대 스타일로 찐하게 말아 줘?”

“……!”

“마셔.”

나동탁이 히죽 웃으면서 그릇을 김뱀의 코앞으로 들이밀었다.

* * *

“웨애액.”

펜션 앞.

김뱀은 속을 게워 냈다.

엘리트 집단?

개뿔.

지긋지긋했던 일진 소굴에서 드디어 탈출했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어린 꼰대들이 군기를 잡는 곳으로 오고 말았다.

‘사람 사는 곳…… 다 똑같다, 이건가. 멀쩡한 놈들이 없어.’

후우우우.

김뱀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중학교 시절.

집단 안에서 적응하지 못해서 고생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일진들 사이에 융화되면서 상황을 타개했던 것처럼―

이제 그는 대학교라는 새로운 관문에 서게 되었다.

‘이 문화에 섞여 들어가야 해.’

어떻게 들어온 의대인데, 이곳에서의 생활을 망칠 수는 없다.

적응해야 했다.

시대에 너무 뒤떨어진 집단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학생회장 주봉선은 그럴싸한 설명을 덧붙이며 술을 강요했다.

―우리가 너희에게 술을 먹이는 건, 다 깊은 뜻이 있어. 그동안 너희가 배웠던 해묵은 지식들을 게워 내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할 준비를 하라는 뜻이지! 고등학교 때 너희 몸에 쌓여 있던 독을 오늘 다 쏟아 내야 해! 이게 선배들로부터 내려온 연국대 의대의 전통이니까.

개소리.

하지만 어쩌겠는가?

선배들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

‘어쩔 수 없이 장단을 맞춰야겠지…… 로마에 왔으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하는 법이니까.’

김뱀은 터덜터덜 걸었다.

일단 바람을 쐬고 정신을 차리고 싶었다. 10분만 걸어가도 바닷가니까.

그리고, 잠시 후.

그녀를 만났다.

한밤중이라 잘 보이지 않았지만, 수평선 위로 삐죽 돋아난 핑크색 머리카락은 달빛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었다.

‘……송유주.’

어둠이 가라앉은 바닷가.

까만색 후드티를 입고,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바다를 보며 앉아 있는 실루엣.

술판이 벌어지는 내내 어디로 피해 있었나 했더니, 저기에 있었던 모양이다.

몇 시간째 혼자 앉아 있는 걸까?

무리에서 고독하게 떨어져 있는 것이 조금 신비로워 보이기도 했고, 안쓰러워 보이기도 했다.

평소라면 모른 척 지나갔겠지만…….

술기운 때문인지.

어느새 김뱀은 휘청대는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야.”

“…….”

“뭐 듣냐?”

“알아서 뭐 하게?”

“그냥 궁금하잖아.”

송유주는 경계심 가득한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김뱀을 빤히 올려다본다.

그리고, 잠시 후.

말없이, 이어폰 줄 한쪽을 김뱀에게 내어주었다.

김뱀은 그 옆에 주저앉아,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잠시 그녀와 함께 음악을 들었다.

드럼, 기타, 베이스…….

요즘도 철 지난 락 음악을 듣는 사람이 있군, 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무슨 밴드냐?”

“스트록스를 몰라?”

“뭔데 그게?”

“라디오헤드는 알겠지.”

“아, 그…… 나는 록 음악을 많이 듣지는 않우웁.”

김뱀이 헛구역질을 하자, 송유주는 흠칫 놀라 어깨를 피했다. 행여라도 김뱀이 볼케이노를 뿜을까 봐 긴장하는 태세였다.

“내 옷에 토하면 죽여 버린다.”

“걱정 마라. 아까 다 토해서…… 더 토할 것도 없으니까, 딸꾹.”

“뭔 술을 그렇게 마셨냐?”

“FM 할 때…… 실수 좀 했다고 냅다 먹이더라.”

“FM? 그딴 유치한 걸 왜 하고 앉아 있냐?”

“시키니까.”

“시키면 해야 되냐? 우리가 등신도 아니고.”

울컥.

김뱀은 날카로운 눈으로 송유주를 노려보았다.

작은 손으로 턱을 괸 채 한심하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는 송유주를 보자, 참을 수 없는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조막만 한 얼굴에, 어쩜 저렇게 냉랭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김뱀의 입이 열렸다.

“넌…… 딸꾹. 사람들이랑 어울리지도 않을 거면…… MT는 왜 왔냐? 선배님들이 너 따돌리려고 모임 공지도 안 줬다는데, 꼽 주는 분위기인 거 뻔히 알면서…….”

“궁금해서.”

“뭐?”

“대학 왔으니까 MT는 한 번쯤 와 봐야지. 근데 와 봤자 역시 별거 없네. 그래서 다음부터는 안 오려고.”

“하…….”

김뱀은 배알이 뒤틀렸다.

누군 좋아서 룰을 따르나?

열받네.

한동안 봉인해 두었던, 독설을 품은 악마의 주둥이가 근질근질했다. 그는 원래 말을 곱게 하지 못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래, 고등학교 다닐 때 꼭 너 같은 애들 있었지…… 공부 잘하면서 하루종일 록 음악에 심취해 있는,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애.”

“갑자기 웬 시비야.”

“너 그렇게 특별한 존재 아니라고. 너도 그냥 흔하게 널린 타입이니까 혼자만 잘난 척하지 말라고.”

“뭐?”

“그냥 머리 물 빼고, 지금이라도 의대 문화에 맞게 살아, 사회부적응자처럼 굴지 말고.”

“하.”

송유주가 짜증스레 코웃음을 쳤다.

줄곧 무표정이었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거칠게 이어폰 줄을 당겨 회수한 뒤 말했다.

“내가 사회 부적응자라도 너처럼 재수 없진 않아.”

“뭐?”

“애초에 라디오헤드도 안 들어 본 놈이랑 상종하는 게 아니었는데.”

“……락 오타쿠.”

“꺼져.”

송유주는 가운뎃손가락을 올리고 자리를 떴다.

김뱀은 마치 소금을 뿌리듯, 그녀가 사라진 바닥에 손에 집히는 모래를 팍 던졌다.

취기가 가시기는커녕, 점점 더 심해지는 느낌이었다.

마침 해변을 향해 걸어오던 마동섭과 여봉철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야 김뱀, 여기 있었냐?”

“방금 송유주 아이가? 둘이 무슨 얘기 중이었어?”

“쟤 얼굴에 감정 드러난 거 처음 본다.”

“대체 무슨 말을 했길래 저래 뿔이 났노? 싸웠나?”

“싸우기는 무슨…… 내가 저딴 사회 부적응자랑 왜 싸웨에에에엑.”

“야야야, 김뱀!”

“어이쿠!”

두 덩치가 얼른 달려와 김뱀의 등을 토닥인다.

말이 토닥이는 거지, 두 사람이 때리기 시작하니 구타당하는 기분이었다.

김뱀은 정신을 잃어 가는 와중에 생각했다.

‘납득 못 해.’

내 방식이 맞다.

송유주의 방식은 틀렸다.

두고 봐라.

의대라는 사회 안에서, 앞으로 저절로 증명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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