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7화. 뱀과 야생 고양이 (3)
“반갑습니다. 학생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나동탁이라고 합니다.”
씨익.
갑자기 웃으며 존댓말을 쓰는 나동탁.
그의 얼굴에는 심술이 가득했고, 눈빛에는 비호감의 기운이 팍팍 풍겼다.
“여러 교수님이 웃으면서 대해 주니까 좋았죠? 이제부터는 실제 대학 생활을 직접적으로 알려 줄 겁니다. 초면에 막말한 건, 정신 차리라고 한 거니까 오해 말고.”
신입생들은 어리둥절했다.
아무리 정신 차리라는 의도였더라도, 초면에 쌍욕을 박는다?
이상하긴 했지만, 일단 조용히 그의 말을 경청했다.
“다들, 의사 사회에 대해서는 여러 루트를 통해서 들어 봤을 거로 생각합니다.”
단상에서 나동탁이 무게를 잡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러자 학생회 소속으로 보이는 선배 몇몇이 신입생들 주위를 서성거렸다.
저벅, 저벅―
신입생들을 쳐다보는 눈빛이 마냥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갑자기 180도 달라진 분위기에, 신입생들은 침을 꼴깍 삼켰다.
“본과 3, 4학년 선배님도 실습 중에 레지던트 선배님들께 말 걸기 어려워합니다. 그만큼 위계질서가 중요하단 소리죠. 근데 하늘 같은 교수님이 말씀하시는데 학생 따위가 꾸벅꾸벅 존다? 감히!”
타앙!
나동탁이 단상을 내리쳤다.
몇몇 신입생이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릴 정도로, 그의 무대 장악력은 엄청났다.
“지금부터 제 얘기 잘 귀담아들으십쇼. 연국대 병원은 한 번씩 가 보셨겠죠, 다들?”
“…….”
“대답 안 합니까?! 앞에서 세 번째 줄 카키색 잠바 입은 신입생! 조는 거 아니죠? 모두 고개는 상방 15도 향합니다.”
신입생들이 다 같이 고개를 들고 앞을 바라본다.
“다시 한번 묻습니다. 연국대 병원은 한 번씩 가 보셨겠죠, 다들?”
“예!”
긴장한 목소리의 신입생들이 크게 대답했다.
“아무나 연국대병원 의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병원 사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씩 단계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그 첫 번째 단계인 의대생으로서 여기 모이게 된 것이며…….”
곧 기나긴 훈계가 이어졌다.
‘의사 사회를 알려 주겠다’며 연설을 하는 부학생회장.
물론 그도 아직 학생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 막 입학한 신입생들에게, 본과 선배들은 거대한 피라미드의 높은 곳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즉 여러분들은 이제 한배를 탄 것입니다. 의대에서 무서운 것 중의 하나가 ‘유급’인 것 아시죠?”
“네!”
“낙오자 없이 여러분들 전원이 무사히 졸업해서 의사가 되는 것이 우리 학생회의 목표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지켜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나동탁은 강당 안이 울릴 만큼 큰 소리로 신입생들에게 쩌렁쩌렁 외쳤다.
“첫째, 인사!”
“!”
“앞으로 의대 건물에서 모르는 사람을 만났다? 바로 고개 숙여 인사하십시오.”
“…….”
“그중에는 교수님도 계시고, 선배님도 계십니다. 여러분들이 앞으로 적어도 10년은 모시고 배워야 할 분들이라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의대 선배들과 인사를 하고 가깝게 지내서 나쁠 게 없으니까.
교수님, 선배님들에게 인사하는 건 예절의 범주에 속하니, 예절을 유난히 강조하는가 싶었다.
그런데 이야기가 점점 이상해졌다.
“기숙사에서 의대 건물로 가는 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선배님들은 신입생들을 한눈에 알아봅니다. 이번 신입생들 인사 잘 안 하더라는 이야기가 들리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바로 1학년 전체 집합할 겁니다!”
집합?
집합이라고……?
고등학교 수련회도 아닌데?
신입생들이 불안한 눈빛을 나누었다.
‘뭐야, 그럼 의대 건물 주변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한테 인사하라는 거야?’
‘거기 지나다니는 사람이 한두 명도 아닐 것 같은데…….’
‘나는 그냥 고개 처박고 다녀야겠다.’
그들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나동탁이 말한다.
“그냥 고개 처박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하는 신입생들 있죠? 고개 처박는다고 안 보이는 거 아닙니다.”
뜨끔한 몇몇 신입생이 숨을 죽이고 다음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둘째, 용모.”
“?”
“1학년들은 염색, 파마 금지입니다. 특히 여학우들은 반드시 이마와 귀가 보이게 머리를 묶어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신입생들이 술렁거렸다.
뭐…… 뭔 소리야, 이게?
대학교에서 이건 좀 아니지 않나?
“대학병원 의사 중에 염색하고 파마한 거 본 사람 있습니까? 머리 귀신처럼 풀고 다니는 사람 본 적 있습니까? 교수님들 보시기에 불편한 외모로 돌아다니지 마십시오.”
대학생한테 이런 규율이 있다니?
듣도 보도 못했다.
게다가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셋째, 복장.”
“?!”
“의대 건물에 무릎 위로 오는 치마 입고 오면 안 됩니다.”
의대 건물과 병원 건물이 바로 옆에 붙어 있다는 이유를 대며, 나동탁은 구체적인 복장 규정을 덧붙였다.
“나시, 반바지 당연히 안 됩니다! 신발은 슬리퍼, 하이힐…… 이딴 거 신고 의대 건물에 들어올 생각 마십쇼. 알겠습니까?”
어어?
모두가 직감했다.
자신의 대학 생활이 뭔가 잘못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대학 생활 중 대부분의 시간을 저 답답한 규율을 지키며 지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1학년들은 선배들 앞에서 이어폰 꽂고 다니는 거 아닙니다. 한 명이라도 걸리면 바로 집합입니다. 또한…….”
온갖 규율이 줄줄 이어진다.
신입생들의 머릿속은 복잡해져 갔다.
……이게 대체 뭐지?
대학생에게 강요할 수 있는 수준인가?
의사가 되려면 꼭 이렇게 해야만 하는 것인가?
상황을 관찰하고 있던 여봉철과 마동섭도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수군거렸다.
“야, 뭐고?”
“군기 잡나 본데.”
“미친 거 아이가?”
“명문이라는 연국대학교에서 이럴 줄은 몰랐는데…….”
대학가에 아직 ‘똥군기’가 만연하던 시절.
대한민국 최고 엘리트들이 모여 있다는 연국대 의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웬만한 대학들보다 심각했다.
권위적이고 폐쇄적인 환경에서 만들어진 악습들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건 예상 밖인데…….’
김뱀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상식에도 이상해 보이는 부분들이 많았다.
물론 규율이 있을 거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숨 막힐 줄이야!
강당에 모인 대다수의 신입생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풉.”
……오직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
“방금 웃은 거 누구야?”
“다 들었어!”
“누가 감히 선배들 말씀하시는데 건방지게 목소리를 내!”
“거기 갈색 머리 여자 신입생, 너 일어나 봐! 너 말이야!”
학생들 옆을 돌아다니던 학생회들의 눈썹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그들은 목소리를 낸 학생을 지목했다.
스윽―
앞자리에 앉아 있던 여학생이 일어났다.
작고 마른 체형.
고양이처럼 솟은 눈매.
마치 얼음을 깎아 만든 것 같은 냉랭한 무표정.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모인다.
나동탁이 험악한 표정으로 단상 위에서 내려다보며 물었다.
“너냐?”
“네.”
“왜 웃었지?”
살벌하다.
본과 2, 3학년들이 무서운 눈빛으로 쏘아본다.
신입생들은 손에 땀을 쥐었다.
강당이 고요해졌을 때―
그녀는 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웃겨서 웃었는데요.”
김뱀의 눈이 커졌다.
마동섭이 무릎을 꽉 쥐었다.
여봉철이 입을 틀어막았다.
모두 뜨악한 표정으로 입을 쩍 벌리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나동탁이 시뻘게진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1학년 송유주.
연국대학교 의과대학의 모든 학생이 그녀의 존재를 머릿속에 깊게 각인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 * *
OT가 끝났다.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송유주가 던진 돌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고, 그 탓에 학생회 선배들은 남은 시간 동안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다.
―오늘은 첫날이라 의대 생활을 잘 모르고 그랬다고 이해하겠습니다! 이번 학번 개념 없다고 의대랑 병원 전체에 소문나길 바라는 거 아니죠?
그렇게 협박했고.
―방금 개념 없는 갈색 머리 포함해서, 두발 불량하신 분들!
동기들 전체에 피해 주는 사람 되기 싫으면, 다음에 볼 때까지 단정하게 머리하고 오십시오. 안 그랬다간 6년 동안 의대 생활 쉽지 않을 줄 아십쇼!
그렇게 경고했다.
영혼이 탈탈 털린 신입생들은 OT가 끝난 후 의대 건물을 힘없이 걸어 나왔다.
“하아.”
“어떡하죠?”
“머리 풀어야죠, 뭐.”
“저는 원래부터 곱슬머리였어요, 진짜 파마한 거 아닌데…… 억울해요.”
새내기가 된 김에 머리에 멋을 부렸던 학우들은 한숨을 푹푹 쉬면서 미용실을 찾아 떠났고.
“연국대 의대가 원래 이래요? 명문이라고 해서 다를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심한 것 같네?”
“저 동탁이라는 선배가 진짜 군기 반장이래요. 다른 학교에서 2년 다니다가 날라왔다는데…….”
뭘 좀 아는 친구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들을 공유했으며.
“엄마, 나 학교 잘못 들어온 것 같아…… 선배들 겁나 무서워…… 훌쩍.”
휴대폰을 붙잡고 구석에서 중얼거리는 신입생도 보인다.
몸은 성인이지만, 이제 막 부모의 울타리에서 벗어난 그들.
아직 주체적으로 판단을 하는 능력이 부족했고, 학생회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한편.
마동섭과 여봉철은 착잡한 표정으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놓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짜꼬?”
“뭘 우째.”
“선배들 말 들을 끼가?”
“들어야지.”
“고마 확 엎어 뿌면 안 되나? 기분 더러븐데.”
여봉철이 으르렁거렸다.
그는 경상도 마초 집안 출신으로, 성격이 고분고분하지 못했다.
평생 험한 일이라고는 해 보지도 않은 것 같은 범생들이 몇 년 선배랍시고 ‘가오’를 잡고 있는 걸 보면 꼴같잖았다.
마동섭은 그 옆에서 신중한 표정이었지만, 그 역시 이 상황에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매한가지다.
그런데 김뱀의 생각은 달랐다.
“엎긴 뭘 엎어. 제정신이야? 저기 있는 선배들은 1~2년 볼 사람들이 아니야. 지금 당장이 아니라 앞으로의 의사 생활을 생각해야지.”
“그건 범수 말이 맞다.”
“하긴…….”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의대 특유의 <폐쇄적인 환경>을 설명하려면, 일단 이들의 인생 코스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의대는 6년.
평범한 대학 과정보다 길다.
그런데 예과, 본과뿐만이 아니다.
만약 인턴, 레지던트까지 연국대병원에서 밟게 된다면……?
30살이 넘을 때까지 똑같은 얼굴들을 보고 살아야 할 수도 있다.
무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집단 안에서 사회생활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연국대에 온 신입생들은, 당연히 연국대병원의 의사가 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에…….
‘탈출로’가 없다!
그렇기에 위계질서가 강할 수밖에.
게다가 끈끈한 선후배 간 커넥션으로 인해, ‘평판’도 쉽게 공유된다.
이것이 의대 특유의 폐쇄적인 환경의 실체였다.
“어떤 선배가 그러더라. 군 생활은 망쳐도 2년이면 지워지는데, 의대 생활은 망치면 인생이 꼬인다고.”
“……맞나?”
“그래. 그러니까 성질 죽이고 참아라.”
마동섭은 화를 삭이는 여봉철의 등을 툭 치더니 우스갯소리로 그를 달랬다.
“솔직히 네 머리 별로긴 했어. 언제적 샤기컷이야? 소몰이 창법으로 노래 한 곡 뽑아 볼래?”
“야, 니나 빠마 풀어라 쉐키야! 꽃뽀다 남자 구준표도 아이고.”
여봉철과 마동섭은 사이좋게 서로를 헐뜯으며 낄낄댔다.
그들은 ‘두발 불량자’로 낙인찍혀 헤어스타일을 고쳐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첫날부터 절친이 된 그들은 김뱀을 질질 끌고 갔다.
“나는 왜?!”
“야, 니도 딱 보이까 자를 때 됐구먼!”
“그래, 범수야. 같이 놀자. 머리 자르고 PC방이라도 가자고.”
그렇게 세 명의 남자는 사이좋게(?) 미용실로 향했다.
한 줄로 앉아서 헤어컷을 받는 남자들.
그런데 잠시 후.
옆자리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일제히 고개를 돌려 보니, 작고 마른 고양이상의 여자가 자리에 앉고 있었다.
문제의 신입생.
송유주였다.
“어떻게 오셨어요?”
“머리색을 바꾸려고 하는데요.”
“어머, 갈색으로 염색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아깝다…… 근데 학교에서 선배들이 뭐라고 막 하죠?”
김뱀은 그런 그녀를 옆 눈길로 보며 피식 실소를 머금었다.
‘그래. 아무리 고집이 세도 대학 생활 하려면 쟤도 어쩔 수 없겠지.’
단체 생활이란 게 그렇다.
어디에나 <룰>은 있다.
불합리하게 느껴진다 할지라도, 결국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도 끝까지 고집 피우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아서 다행이군…….’
그런데, 이어지는 송유주의 말은 모두를 뜨악하게 만들었다.
“탈색해 주세요.”
“……?!”
“핑크색으로.”
“야야야야! 스톱!!”
기겁한 3인조가 벌떡 일어나 달려들어 그녀를 뜯어말리기 시작했다.
송유주.
역대급이라 불리는 신입생의 탄생이었으며…….
훗날, 연국대 의대의 전설로 남는 일화의 시작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