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6화. 뱀과 야생 고양이 (2)
김뱀은 흠칫 놀랐다.
남자의 인상이 너무 강렬했다.
덥수룩한 수염 자국. 산만 한 덩치. 부리부리한 눈매-
산도적 같달까?
조선 시대에 과거 시험을 보러 야산을 오르다가 도적 떼의 우두머리를 만난다면 이런 기분일까 싶다.
“무슨 일입니꺼?”
진한 경상도 사투리.
알고 보면 친근한 말투였지만, 김뱀의 귀에는 마치 싸우자는 것처럼 공격적으로 들렸다.
본토 경상도 사투리 특유의 뉘앙스가 귀에 익숙지 않은 탓이다.
‘괜히 말 걸었나?’
좀 무섭다.
혼자 길 찾아볼걸.
그렇게 생각하며 김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의대 건물이 어느 쪽이죠? 제가 신입생이라 캠퍼스가 익숙지 않아서 길을 잃어버렸는…….”
“아, 그쪽도?”
남자는 돌연 반가운 얼굴을 하며 손을 불쑥 내밀었다.
“반갑다! 내도 의대 신입생이다.”
“…….”
정말인가?
어딜 봐서?
김뱀은 미심쩍은 눈길로 여봉철을 쳐다보았다.
신입생처럼 안 보인다. 최소 복학생, 조교, 거짓말 좀 보태면 강사라고 해도 믿을 외모였다.
김뱀이 어색하게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뒷모습만 보고 재학생이신가 해서…….”
“착각할 수도 있지! 내는 여봉철이라고 한다.”
“김범수입니다.”
“말 놓자.”
“……그럴까?”
“그래!”
부웅, 부웅.
여봉철은 김뱀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우악스러운 힘에서 화끈한 성격이 느껴졌다.
<산도적> 여봉철.
대학교에서 통성명을 하게 된 첫 번째 동기였다.
“근데 니 얼굴은 와 그라는데?”
“아, 이거?”
여봉철이 김뱀의 얼굴에 붙어 있는 반창고를 가리켰다.
“쌈이라도 했나?”
“……뭐, 그럴 일이 있었어.”
김뱀은 대답을 얼버무렸다.
싸움이라는 말이 틀린 표현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일방적으로 맞기만 했지만.
“이야, 믓찌네! 의대는 범생들만 모일 줄 알았는데 싸움꾼도 있고…… 상남자네, 상남자!”
뭐가 멋지다는 걸까?
큰 오해가 생기는 듯했지만 김뱀은 그러려니 했다. 왠지 모든 걸 설명하려 들면 피곤해질 것 같다.
“아무튼 만나서 반갑네. 같이 길 찾아보자!”
“그래.”
“이쪽 맞제?”
“붉은색 건물 왼쪽에 의대로 가는 통로가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정문 바라보고 왼쪽이가, 본관 바라보고 왼쪽이가?”
“…….”
안타깝게도, 둘 다 길치였다.
10분 후.
계단을 오르고 비탈길을 내려가서 원래 자리로 돌아온 여봉철이 참을성이 다한 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뭔 놈의 길이 이래 헷갈리노?!”
“…….”
김뱀은 관자놀이를 짚었다.
괜히 같이 다니니까 더 헷갈린다.
연국대가 길이 아무리 복잡하다고는 해도, 혼자였다면 벌써 도착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봉철이 목소리가 크고 행동이 화끈해서, 자꾸만 상대의 페이스에 휘말리게 된다.
“하 씨, 첫날부터 OT 늦으면 안 되는데…… 아, 저분한테 물어보면 되겠네! 딱 봐도 고학번이다 아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여봉철이 누군가를 발견했다.
그는 성큼성큼 달려가 앞서 걸어가던 남자를 불러세웠다.
“저기요. 의대 갈라카모 어데로 가믄 됩니까? 저희가 신입생이라 길을 몬 찾아가! 좀 도와주이소!”
스윽-
덩치 큰 남자가 돌아보며 대답했다.
“어? 나도 의대 신입생인데.”
김뱀은 충격을 받았다.
의대에 노안만 모였나?
둘 다 서른 살이래도 믿겠네!
새로 등장한 남자는 동물로 치면 야생곰, 사람으로 치면 조폭처럼 생겼다.
대충 ‘마장동 쌍도끼’나 ‘연희동 피바다’ 같은 별명이 붙어 있다 해도 믿을 것 같은 험악한 외모다.
김뱀과 같은 생각을 했는지, 여봉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입생? 에이, 구라치지 마이소. 그래 안 보이는데?”
옆에서 듣던 김뱀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기도 노안이면서! 게다가 초면인데 못 하는 말이 없네!’
다행히 남자는 성격이 쿨한 듯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쪽도 액면가로 치면 만만찮은 것 같은데, 노안들끼리 인사나 하죠. 마동섭입니다.”
“여봉철이고, 말 편하게 하입시다.”
“그럴까?”
“그래!”
터억―
서로 두꺼운 손을 마주 잡는다.
만난 지 1분도 안 되었으면서 금세 말을 놓아 버리는 두 사람.
훗날 <덩치 브라더스>라고 불리는 콤비답게, 첫 만남부터 죽이 척척 맞는다.
그사이에 끼인 채, 김뱀은 떨떠름한 표정이다.
‘대학 생활은 첫 친구가 중요하다던데…….’
이 두 사람이랑 같이 다녀도 괜찮을까?
자신도 비슷한 이미지로 각인될까 걱정된다.
그때 마동섭이 김뱀의 그늘진 얼굴을 슬쩍 들여다보며 물었다.
“이쪽 친구는 이름이 뭐야?”
“김범수.”
“얼굴은 왜 그래?”
“아, 그…….”
“싸웠어?”
여봉철이 불쑥 끼어들며 대신 대답했다.
“고등학생 때 쌈 좀 하고 다녔다 카대. 상남자다 아이가.”
“오, 멋있네?”
“믓지쟤!”
처억.
두 사람은 동시에 엄지손가락을 올렸다.
김뱀은 한숨을 쉬었다.
뭔가 오해가 점점 커지는 것 같지만, 굳이 정정하기는 귀찮았다.
* * *
의대에 합격하면 처음부터 흰 가운을 입을 수 있게 될까?
아니다.
의사의 상징인 가운을 입을 수 있는 것은 최소한의 교육을 받은 이후부터.
그렇기에 의대생들도 처음에는 다른 과의 대학생들과 같은 모습들을 하고 있다.
적당히 어설프고, 적당히 풋풋하고, 적당히 설레는 모습들…….
지금 의과대학 지하 강당에 모인 사람들이 전부 그렇다.
총 인원 120명 남짓.
올해 연국대 의대에 합격한 신입생들이었다.
“휴, 겨우 찾았네.”
“첫날부터 지각할 뻔했다 아이가!”
성큼, 성큼.
커다란 덩치 두 명이 강당으로 들어서자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뭐지?
저 아저씨들은?
몸집을 보고 한 번, 얼굴을 보고 두 번 놀라게 된다.
덩치 브라더스는 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다, 혼자 동떨어져 앉아있던 체구가 작은 여자 신입생에게 다가갔다.
“저기요, 옆에 앉을 사람 있습니꺼?”
그녀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앉아도 됩니꺼?”
이번엔 끄덕인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별다른 대답 없이 외투를 무릎 위로 치웠다.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
새침하게 곤두선 눈썹.
작고 마른 체형의, 동물로 치면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이미지였다.
자리에 앉은 여봉철은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야~ 범수야! 여 자리 있다! 이리 온나!”
‘조용히 좀 하라고…….’
멀찍이서 강당에 들어서던 김뱀은 얼굴을 찌푸렸다.
일부러 떨어져 앉으려고 화장실에 들르는 척하고 왔더니, 굳이 이름까지 부르며 시선을 끈다.
하는 수 없이 앞자리를 향해 걸어가는데, 어디선가 소곤대는 소리가 들렸다.
“쟤가 수석 입학이지?”
“누구?”
“저기 제일 앞자리 앉은 여자애.”
“어, 쟤 맞아. 내 친구랑 같은 고등학교 출신인데…… 수능 한 문제 틀렸대.”
“와, 이번 수능 진짜 어려웠는데?”
김뱀의 귀가 솔깃해졌다.
작년에 ‘물수능’이었던 만큼, 올해는 지나치게 어려운 난이도로 ‘역대급 불수능’이라고 불렸다.
특히 수리 영역 가형의 난이도가 악명이 높아 전국에서 곡소리가 터져 나오던 해였고, 당연히 전 과목 만점자는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수석 입학자라.’
김뱀은 자리에 앉으며 힐긋 옆을 바라보았다.
“…….”
딱 봐도 공부 잘해 보인다.
언뜻 귀엽게 생기긴 했는데, 뭐랄까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도 꽤 매력 있게 생긴 얼굴이라는 생각을 잠깐 하고 있을 때, 어느새 OT가 시작되었다.
“먼저 학장님의 축사가 있을 예정입니다. 연국대학교 의과대학장 장호인 교수님을 박수로 맞이해 주시길 바랍니다.”
짝짝짝!
박수가 울려 퍼졌다.
안경을 쓰고 머리가 군데군데 하얗게 샌 의과대학장 장호인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강단에 올라섰다.
“신입생 여러분, 환영합니다.”
학장의 목소리가 강당에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지금까지 여러분의 세상은 작은 책상 안에만 갇혀 있었을 겁니다. 이제 대학생이 되니까 다들 좋으시죠?”
뻔한 멘트.
이어지는 말도 뻔할 것 같았다.
그런데 학장의 말은 모두의 예상과 약간 다르게 흘러갔다.
“거두절미하고 솔직히 말씀드릴까요? 여러분들의 삶은 고등학생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학장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환상이 아닌 현실을.
“왜냐하면, 여러분은 고등학교 시절 이상으로 공부해야 할 테니까요.”
“…….”
“수천수만 페이지의 공부 자료들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암기하고, 암기하고, 또 암기하고…… 수많은 시험의 관문 또한 기다리고 있지요.”
“…….”
학생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안 그래도 수험 생활에 몇 년 동안 시달려 온 그들이다.
<공부>와 <시험>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기만 해도 트라우마가 떠오른다.
그런데 진짜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니!
첫날부터 김이 팍 샌다.
“하지만 말입니다.”
학장이 웃으며 목소리를 밝게 전환했다.
“여러분이 주변으로 시야를 넓힐 수 있는 절호의 시기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20대 초반, 예과 시절입니다.”
<예과>.
우리나라의 의과대학 과정은 일반적인 대학 과정들과 다르다.
예과 2년―
본과 4년―
총 6년의 교육을 받는다.
무려 일제 강점기 때 확립된 제도이며,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물론 예과는 유명무실하기 때문에 없애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비교적 자유롭게 교양 수업도 들어 보고 다양한 소양을 쌓을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예과 과정이기도 하다.
즉, 본 게임에 들어가기에 앞서 숨통을 틀 수 있는 시간인 것이다.
“이제 여러분은 책상을 벗어나 너른 들판에 나왔습니다.”
학장이 강당에 모여 앉은 신입생들을 둘러보았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그들의 눈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대학생 됐으니까 신나게 놀아 보기도 하고, 여행도 다녀 보고, 연애도 해야지요?”
“예!”
“어차피 본과 들어가면 점점 시간이 없어질 테니 그전에 최대한 청춘을 즐기십시오!”
짝짝짝!
박수 소리가 강당을 메웠다. 처음보다 더 우렁찼다. 학장의 말이 생각보다 가슴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래 맞아!’
‘이제 우린 자유인이야!’
‘드디어 대학생이 됐으니까 청춘을 즐기자!’
그렇게 저마다 기대감에 부풀었다.
20대 초반의 신입생들에게 청춘이라는 단어는 마치 유원지에서 파는 솜사탕처럼 달콤하게 다가왔다.
물론…….
그런 설레는 단어에 별 감흥이 없는, 김뱀 같은 학생들도 있었지만.
“자, 학장님께 다시 한번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다음 순서는…….”
“다음으로 이요섭 교육부장님이 의예과 교육 과정을 설명해 드리…….”
“다음으로 정웅진 교수님의 리더십 특강이 있겠습…….”
“다음으로는…….”
그렇게 오전 시간이 흘러갔다.
주로 교육 과정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 그리고 학교생활에 대한 안내가 주 내용이었다.
워낙 지루한 내용이 섞여 있다 보니, 지친 신입생들이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 * *
어느덧 오후 3시.
교수님들의 순서가 끝나고, 이제 학생회가 주최하는 시간이 왔다.
강당에는 연국대 의대 행정팀 몇 명과 학생들만이 남아 있었다.
그쯤 되자, 많은 신입생이 자리에 앉은 채 반쯤 몸이 기울어져 있었다.
“다음은 학생부의 교내 생활에 대한 안내가 있겠습니다.”
언제 끝나나?
다들 그 생각뿐이다.
신입생들은 단상에 오르는 학생회 선배들을 시큰둥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 아.”
한 남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마치 흙에서 막 캐 올린 구황작물처럼 생긴 남자였다.
그는 퉁, 퉁 하고 마이크를 몇 번 두드리더니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는 사람들, 다 일어나. 씨X 것들아, 대학 생활이 장난이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모두 놀란 눈으로 단상 위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본과 2학년―
<부학생회장 나동탁>.
연국대 의대 캠퍼스 생활의 실질적인 권력자가 강당의 분위기를 휘어잡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