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233화 (233/241)

#외전 15화. 뱀과 야생 고양이 (1)

<의대생>.

대한민국 수험생이라면 한 번쯤 머리에 떠올려 봤을 단어.

김범수에게 그것은 막연한 희망 사항이 아니었다.

독을 품은 것처럼, 조용히 밀어붙여 온 목표였다.

‘나는 의대 못 가면 죽는 병 걸렸다. 무조건 간다!’

김범수는 독했다.

오죽하면 별명이 <김뱀>일까?

단순히 날카롭게 생긴 눈매 때문만이 아니었다. 한 번 공부하기 시작하면 독하게 집중하는 모습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채성남고 3학년 1반 교실.

김뱀은 초조한 마음으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교실 앞쪽에서는 이미 몇 명의 학생이 컴퓨터 앞에 붙어, 떠들썩하게 합격 발표를 확인하는 중이다.

“야, 정원아. 붙었냐?”

“붙었다!”

“야, 축하한다!”

“우와아! 엄마한테 전화해야지!”

누군가는 환호하면서 복도로 뛰쳐나가는 반면.

“아, 씨…… 떨어졌어.”

“그래도 가군은 붙었다면서?”

“그렇기는 한데 진짜 가고 싶은 곳은 여기였거든. 나 이제 어떡하냐, 재수해야 하나?”

“힘내라, 야…….”

누군가는 쓴맛을 본다.

초, 중, 고등학교 내내 계속되었던 입시 레이스의 끝.

누군가는 천국을, 누군가는 지옥을 경험한다.

방방 뛰며 기뻐하던 학생들도, 옆자리 친구들이 낙담하는 것을 보며 눈치껏 입을 다물게 된다. 그만큼 희비가 엇갈리는 현장이었다.

“혹시 컴퓨터 쓸 사람 또 있어? 아직 합격 발표 못 본 사람?”

“나 확인할게.”

김뱀이 나섰다.

순간 학생들 사이에서 미묘한 긴장이 흘렀다.

그럴 만도 했다. 김뱀은 좀 특이한 친구였으니까.

보통 공부 잘하는 친구들은 캐릭터가 비슷비슷하기 마련인데, 김뱀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가까이하기 어려운 친구>.

김뱀은 그런 존재였다.

그런 김뱀이 어느 대학을 지원했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다.

대한민국 최고 바늘구멍이라고 불리는 <연국대학교 의과대학>.

물론 그의 성적이 높긴 했지만, 다소 무리해서 지원한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범수가 연국대 의대 지망했지?”

“응.”

김뱀이 자리를 비집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러자 등 뒤에서 뿔테 안경을 쓴 친구들이 모여 수군댔다.

“연국대 의대 커트가 어떻게 되지?”

“물수능 때는 한 문제만 틀려도 떨어졌대.”

“헐…….”

“엄청 빡세네.”

“근데 만약 범수 합격하면 우리 학교에서 처음으로 연국대 의대생 나오는 거 아니냐? 합격하면 대박이겠다.”

등 뒤에서 수군거림이 이어진다.

후우우우우.

김뱀은 깊게 심호흡한 뒤, 창을 열어 사이트에 접속했다.

<연국대학교>.

홈페이지 상단의 심벌마크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을 듯 선명했다. 지난 3년간, 저 빌어먹을 마크를 한시라도 잊어 본 적이 없다.

타다닥―

수험 번호를 입력했다. 손이 떨려서 몇 번이나 오타를 냈다. 브라우저의 로딩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제발.’

김뱀의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흘렀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없는 종교도 만들어서 믿고 싶은 기분이다.

잠시 후.

스크린 위에 결과 창이 뜨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험번호 : XXX……

성명 : 김범수

전형구분 : 일반

모집단위 : 의예과

축하합니다. 귀하는 20XX년 연국대학교 일반전형으로 최종 합격하였습니다.

“와아아!”

“범수 연국대 의대 합격했어!”

“뭐? 진짜로?!”

우당탕!

김뱀은 벌떡 일어나다가 책상에 무릎을 박았다.

하지만 아픈 줄도, 쪽팔린 줄도 몰랐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래 처음으로 김뱀은 교실에서 소리를 질렀다.

“으아아아!”

드디어…… 드디어!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던가?

이 거지 같은 고등학교에서. 하루하루가 고역이었던 이 고등학교에서!

김뱀의 학창 생활은 절대 순탄치 않았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 독해졌다. 독해지고 독해져서, 결국 이렇게 목표를 이루어 낸 것이다.

“범수야, 축하해!”

“너는 진짜 인정이다.”

“부럽다.”

다들 김뱀에게 한마디씩 건넸다.

평소에 친하지 않더라도 이 순간만큼은 다들 축하해 주는 분위기다. 같은 수험생으로서 얼마나 큰 성취인지 알기 때문이다.

분위기가 깨진 것은 그때였다.

“야, 새끼들아!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드르륵!

교실 앞문이 열렸다.

인상이 험악한 학생들이 들어오자, 조금 전까지 떠들썩했던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소위 말하는 <일진>들.

이곳 채성남고는 유독 일진들이 많은 고등학교로 유명했다.

“뭐야, 너네 컴퓨터 앞에서 뭐 하냐? 야동 보냐?”

“그게 아니라, 범수가 연국대 의대 합격해서…….”

“뭐?”

일진들의 눈이 커졌다.

“야, 뱀 새끼 연국대 의대 합격했대!”

우르르!

곧 희귀한 광경이 펼쳐졌다.

사방팔방에서 일진들이 몰려와 김뱀의 뒤통수를 치며 축하해 주기 시작한 것이다.

“이야. 뱀 새끼, 진짜 합격한 거야?”

“종일 공부만 한 보람이 있네!”

“자랑스럽다!”

“우리 나중에 아픈 데 있으면 너 찾아가면 친구할인 되는 거냐? 졸업하고 모른 척하기만 해 봐라!”

일진들이 축하의 말을 쏟아 내는 동안, 다른 학생들은 슬금슬금 시선을 피했다.

<일진들과 친한 전교 1등>.

이것이 다들 김뱀을 어려워하는 이유였다.

보통 비슷비슷한 부류끼리 어울리기 마련인데, 김뱀은 오히려 일진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야, 우리 친구 중에 연국대 의대 합격하는 놈이 생기다니!”

“뱀 새끼, 한턱 쏘냐?”

“쏴야지, 친구야?”

일진들의 축하가 이어진다.

표현은 거칠지만, 다들 진심으로 김뱀의 합격을 축하해 주는 분위기다.

아마 평소대로라면, 매점으로 가서 김뱀이 기분 좋게 지갑을 여는 상황으로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때, 김뱀의 입이 열렸다.

“꺼져.”

“뭐?”

“다 꺼지라고.”

김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모두의 예상을 뒤집어 버렸다.

“왜 그래, 인마?”

“친구? 웃기지 마. 너희가 언제부터 내 친구였냐?”

사아아―

교실의 분위기가 얼었다.

모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김뱀을 바라보았다.

일진들도 당황했다.

그동안 3년 내내, 자신들의 옆에서 함께 웃으며 지냈던 김뱀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왜?

잠시 후, 겨우 상황을 파악한 일진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이…… 이 뱀 새끼가, 갑자기 미쳤냐? 3년 동안 우리랑 잘 지내 놓고…….”

“그건 고등학교까지지.”

스윽―

김뱀은 안경을 벗었다.

뿔테 안경에 가려져 있던 뾰족한 눈매에 경멸의 기운이 흘렀다.

“그동안 너희 역겨운 모습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아냐?”

“뭐?”

“툭하면 주먹질에, 친구들 괴롭히고, 용돈 뜯고, 불법 도박하고, 수업 시간에는 엎드려 자고…… 본인 미래에 대해서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있냐?”

“…….”

“하긴 너희 같은 한심한 놈들도 있어야 이 사회가 굴러가긴 하겠지. 모두가 위로 올라갈 순 없으니까.”

일진들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터질 듯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혀에 독이 있다.

그것도 맹독.

이렇게 독설을 혀 밑에 꾹꾹 눌러 담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3년 내내 보여 주었던 모습이, 전부 가면이었던 것이다.

“이 새끼가…….”

“말 다 했냐?”

“이제 졸업할 때 되니까 본색이 나오냐?”

일촉즉발.

일진들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한마디만 더 내뱉으면 죽여 버리겠다는 듯한 분위기였다.

김뱀은 피식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뭐, 너희한테는 미리 고맙다는 말 해 둔다. 이 사회의 밑바닥 깔아 줘서.”

“이 XX……!”

퍼억!

주먹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김뱀의 터진 붉은 입술에서는 신음 대신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동안 이날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 홀가분한 표정이다.

“때릴 테면 때려라, 지긋지긋한 새끼들아. 어차피 졸업하면 너희 볼 일 없으니까.”

“야, 밟아!”

“눈깔부터 재수 없었어, 저거!”

―퍽, 퍽!

발길이 날아든다.

김뱀은 웃었다. 맞고 있어도 기분이 좋았다. 무려 3년을 버틴 끝에 지을 수 있었던 후련한 미소였다.

‘그래, 때릴 테면 때려라.’

―퍽, 퍽!

“…….”

―퍽, 퍽!

좀 많이 때리는 것 같다.

아무도 안 말려?

이쯤 되면 멈출 때도 됐는데…….

그, 그만 때려!

그만……!

* * *

<새내기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연국대학교 의과대학 학생회>

늦겨울의 캠퍼스.

눈치 없이 벌써 피어난 새싹들이 즐비했다. 그리고 그 새싹들보다 더 파릇파릇한 신입생들이 줄지어 캠퍼스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범수야, 좀 웃어라.”

“웃은 거야.”

“그게?”

“더 웃으면 입술 아파. 대충 찍어.”

“야 인마, 어떻게 대충 찍냐? 형이 직업의식이라는 게 있잖냐. 대학 간판 가리지 말고, 좀 옆으로 서 봐. 그렇지.”

찰칵!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김뱀은 인상을 찡그리며 입술을 매만졌다.

고등학교 졸업한 지가 언제인데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았다. 그날 생각보다 너무 많이 얻어맞았기 때문이다.

물론 속은 후련했다. 자신을 때린 일진들에게 소송을 걸어 놨고, 결코 합의를 봐줄 생각은 없었다.

“소감이 어때? 그토록 바라던 연국대학교 의대생이 된 거.”

카메라를 든 사촌 형이 웃으며 묻자, 김뱀이 안경을 치켜올리며 대답했다.

“특목고는 못 갔지만, 이제라도 엘리트 집단에 합류한 걸 다행으로 생각해. 적어도 여기는 답 없는 인간들이 모인 곳은 아닐 테니까.”

김뱀은 두 번 다시 돌아가기 싫은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렸다.

일진들이 기강을 잡고 있는 채성남고에서 그들과 친하게 지냈던 것은, 김뱀 나름의 생존 전략이었다.

가끔 담배도 피우는 척했다.

욕도 했다.

지갑도 아낌없이 열었고, 저속한 농담에 동조하며 일진들의 비위를 맞췄다.

다른 학생들이 ‘삥’을 뜯기거나 얻어맞을 때, 김뱀은 그 옆에서 영어 단어장을 손에 든 채 쿨한 표정으로 방관했다.

일진들은 <공부 잘하는 친구>를 옆에 둔 것을 훈장처럼 여기며 잘해 주었다.

그 덕분일까?

김뱀은 일진들의 타깃에서 3년 동안 안전하게 벗어날 수 있었다.

‘안 그랬으면 재수 없는 놈이라고 괴롭힘당하느라 공부를 못 했을지도 몰라…… 중학교 때 그랬던 것처럼.’

그렇다.

인생은 전략이다.

상황에 맞추어 전략을 세우고, 자기 모습을 적응시키는 것― 그것이 김범수라는 인간의 생존 방식이다.

“여기서는 나와 안 맞는 놈들한테 억지로 맞출 필요 없겠지. 상식적인 인간들만 모여 있을 테니까.”

“으이그, 막상 겪어 봐라.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

“……?”

사촌 형은 픽 웃으며 김뱀의 옷매무새를 만져 주었다.

“아무튼 한 번뿐인 대학 생활이니까, 다양한 친구를 사귀어 봐. 대학 시절 추억 평생 간다?”

“…….”

“입학 축하한다. 동생!”

그렇게 사촌 형이 김뱀을 다독이고 자가용을 끌고 떠나간 뒤.

‘친구라…….’

김뱀은 생각했다.

나한테 친구가 있던가?

잘 모르겠다.

일진들?

말할 것도 없다. 그냥 적당히 비위를 맞춰 줬던 거다.

모범생들?

물론 고등학교 때 같이 공부하던 녀석들은 있었지. 하지만 그냥 경쟁자들이었지, 친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걔네가 친구들이었으면 내가 그날 얻어맞을 때 한 명이라도 말렸겠지. 선생님을 부르는 척이라도 했거나.’

졸업하고 나서 김뱀은 동창들의 연락처를 미련 없이 삭제해 버렸다. 폰 번호도 바꾸었고 자신의 흔적을 다 지워 버렸다.

마치 허물 벗듯.

말 그대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래. 인간관계 리셋이야. 이제부터 시작이다.’

<연국대학교 의과대학>.

여기에서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자!

어두컴컴했던 고등학생 김범수의 인생을 뒤로하고, 김뱀은 밝은 빛이 쏟아지는 캠퍼스를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정확히 5분 후, 그의 의지는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무슨 캠퍼스가 이렇게 넓어?”

김뱀은 길치였다.

명석한 두뇌에도 불구하고, 길을 찾는 데는 재주가 없었다.

한참 길을 헤매던 그는, 마침 지나가던 사람을 붙잡았다.

“저기요, 말 좀 물을게요.”

“음?”

김뱀이 만난 첫 번째 친구의 인상은 다소 독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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