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3화. 심장과 사랑의 상관관계에 대한 보고서 (5)
“히히.”
“좋냐?”
“히히히.”
“좋냐고, 인마.”
흉부외과 당직실.
마동섭은 혀를 찼다.
그의 눈앞에는, 종일 스마트폰을 붙들고 히히덕거리는 안경식이 있다.
연애 초기의 행복을 만끽하는 중인 모양인지, 이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아이구, 눈꼴사나워 죽겠네. 내가 도와주긴 했지만 저렇게까지 행복하길 바라지는 않았는데…….”
늦여름.
사랑에 불이 붙었다.
안경식은 그야말로 눈에 뵈는 것 없이 사랑에 빠져들었다.
* * *
병원에서 연애할 공간?
충분히 있다.
사람 사는 곳인데, 젊은 연인들끼리 불이 붙을 만한 공간이 없겠는가?
특히 으슥한 밤이면 더욱 그랬다.
[경식] 쑤 모해?_?
[수정] 방에서 오빠 기다리고 있었죠!_!
[경식] 2층 산부인과 외래 앞에서 볼까?
[수정] 쬬아용 :)
본관 2층 산부인과 외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면 바로 보이는 곳으로, 다른 외래 공간과는 구조가 조금 다르다.
보통 저녁이 되면 대부분의 외래는 문이 잠기고, 외래로 들어가는 문도 닫히게 된다.
하지만, 이곳은 에스컬레이터와 연결된 구조 때문에 저녁에도 복도식 외래를 통과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 말인즉슨―
불 꺼진, 적당히 어두운 공간이라는 소리다.
“오빠!”
“응, 수정아. 먼저 와 있었네!”
“오늘 수술 힘들었죠? 오늘은 많이 안 혼났어요?”
“당연하지. 오늘 수술은…….”
아직 사귄 지 오래되지 않아, 존댓말을 사용하는 김수정.
그런 그녀를 보면 아기 같은 미소가 절로 나오는 안경식.
둘은 오프가 겹치지 않는 날에는 이렇게 병원의 빈 곳을 찾아 만나고 있었다.
오늘은 오프인 김수정이 인턴 숙소에서 안경식의 수술이 끝나는 시간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인턴 숙소에 난리 났었어요!”
“응? 왜?”
“산부인과 천사연 선생님 알죠?”
“응, 알지.”
“그 선생님께 엄청 털리고 있는 인턴이 있었는데.”
“응응.”
“그 인턴이 오늘은 못 참고, 천사연 선생님한테 대들었나 봐요. 그래서 대판 말싸움하고.”
“응응.”
“그러고는 자기 인턴 더러워서 더는 못 해 먹겠다고 짐 싸고, 옆에서는 말리고 하느라 난리도 아니었어요.”
“응응.”
“캐리어 끌고 인턴 숙소 문 앞까지 갔다가 돌아왔…… 오빠, 내 말 듣고 있어요? 손 닳겠어요.”
안경식이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어색하게 내렸다.
새벽 한 시.
조용한 어둠만이 깔려 있는 이곳에서 둘만의 대화가 계속된다.
그동안 이렇게 할 얘기가 많았었는데, 어떻게 참았을까.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외래 복도 맞은편에 발소리가 들린다.
뚜벅, 뚜벅―
“합!”
“헙!”
둘은 말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곳을 쳐다본다.
백팩을 매고 이 늦은 시간에 퇴근하는 실루엣이 익숙하다.
숨을 죽인 채, 안경식이 속삭인다.
“엔에스(NS, 신경외과) 허성진 교수님인가?”
“맞는 것 같아요. 와, 이 시간에 퇴근하시네…….”
“신경외과도 워낙 응급 수술이 많으니까…….”
발걸음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둘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주위가 다시 조용해지고, 발걸음 소리가 사라지는 쪽을 쳐다보던 김수정이 다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눈앞에 커다란 무언가가 있다.
안경식의 얼굴이었다.
“아 깜짝이야.”
“왜?”
“왤케 가까이 있어요, 오빠.”
“그냥.”
“아휴, 참…….”
안경식의 안경이 어둠 속에서 얇게 빛난다.
손가락 하나 들어갈 만큼의 좁은 공간을 두고 얼굴을 마주한 채, 두 사람은 몇 초간 움직임이 멈춰 있다.
안경식의 얼굴이 1밀리미터씩 김수정에게 다가가고.
산부인과 외래 앞에서 둘만의 역사가 기록되려는 순간.
“엣헴.”
“크흠.”
화들짝!
두 사람은 제자리에서 튀어 오른다.
마침 복도를 지나가던 마동섭과 신선한이 수술복 차림으로 자신들을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발걸음 소리가 났을 텐데, 워낙 집중(?)하느라 이번에는 알아채지 못했다.
마동섭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어, 거 뭐냐. 수술 끝나고 돌아가는 길인데…… 좀 이따 사람들 우르르 지나갈 것 같으니까 조심하라고.”
“…….”
“파이팅~”
뭐가 파이팅이라는 건지.
마동섭은 장난스럽게 주먹을 불끈 쥐며 두 사람을 응원(?)하고 갈 길을 갔다.
신선한은 그 뒤를 따라가다, 안경식에게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쥐었다.
“파이팅.”
“…….”
안경식과 김수정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새빨개졌다.
병원에서 연애할 공간?
물론 없는 건 아니었지만…… 100퍼센트 안전한 곳은 없었다.
아무래도 다음부터는 다른 곳을 찾아봐야 할 것 같았다.
* * *
새벽 2시.
야심한 밤이지만, 연국대병원의 수술방 복도는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본관 총 28개의 수술방 중, 9개의 수술방에서는 응급 수술이 한참 진행 중이었다.
그리고 빈 수술방으로 슬며시 걸어가는 남녀가 있다.
“오빠, 다 기억나는 거 맞아요? 나 이번 달 인턴한테 인계받으면 되는데…….”
“나도 비뇨기과 돌았었어. 걱정하지 마, 오빠가 잘 인계해 줄게.”
안경식이 수술방 인계를 해 주겠다며, 김수정을 데리고 비뇨기과 수술방으로 향했다.
다행히 비뇨기과의 응급 수술은 없었고, 둘은 비뇨기과 수술이 주로 열리는 7번 방으로 향했다.
지잉―
7번 방의 문이 열렸다.
환한 수술실 복도와 달리 7번 방 안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가득했다.
“보자, 여기 불 켜는 데가 어디 있더라. 여기쯤 있으려나.”
틱―
안경식이 불을 켜자 수술방 안이 구석구석 보인다.
빈 수술방은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고, 비어 있는 베드가 수술방 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다.
둘이 수술방 안으로 들어오자, 문이 다시 닫힌다.
몇 평 안 되는 공간에 적막이 가득하다.
각자의 얇은 수술복만이 둘 사이에서 몸을 간지럽히고 있다.
안경식은 간질간질한 기분을 느끼며 수술방 구석으로 향한다.
“수정아, 잠깐만 여기 있어 봐. 포지셔너(positioner, 수술용 자세를 잡게 하는 기구들)를 여기에 넣어 놓았던 거 같은데?”
안경식이 수술방 구석의 서랍을 열자, 여러 가지 수술 기구들과 포지셔너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쪽 서랍에 항상 보관해 놓으니까, 여기에서 찾으면 돼.”
안경식은 포지셔너를 들고 이것저것 김수정에게 설명한다.
“이건 이렇게 잡고, 베드 이쪽에다가 끼면 돼.”
“아, 이렇게요?”
“응, 그렇지. 반시풀 알지?”
“반시풀?”
“반시계 방향으로 돌리면 풀린다고 부르는 말이야, 교수님 앞에서 급하게 하다 보면 헷갈릴 수 있으니까…….”
“아하.”
그렇게 몇 분간 안경식이 비뇨기과 수술에 필요한 환자의 수술 자세와 그 자세를 잡기 위해서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포지셔너(positioner, 수술용 자세를 잡게 하는 기구들) 사용법에 대해서 가르쳐 준다.
“다음 주부터 잘할 수 있겠지?”
“오빠 설명 들으니까 한 번에 이해가 확 되는데요?”
“그치? 나랑 오길 잘했지?”
“역시 오빠는 일 가르쳐 줄 때 제일 멋있는 듯.”
“헤헤.”
“그럼 이제 나갈까요?”
수술방 불을 끄고 김수정이 수술방을 나가려 자동문에 발을 집어넣으려던 찰나.
덥석.
안경식이 갑자기 김수정의 손을 잡는다.
“응?”
김수정이 안경식의 눈을 쳐다보고,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다.
“왤케 또 가까이 왔어요, 오빠.”
“그냥…….”
“아이, 참. 정말…….”
수술방 문에 뚫려 있는, 기다랗고 얇은 직사각형 유리를 통해서 들어오는 불빛만이 두 사람을 비추고 있다.
안경식은 김수정에게 다가간다.
환자가 없고,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7번 수술방 안.
김수정은 마스크를 턱까지 내린다.
그녀의 입술이 보인다.
안경식도 마스크를 내리고 입술을 드러낸다.
처음부터 인계는 핑계일 뿐이었지만, 막상 이런 상황이 되니 긴장된다.
‘수술방에서 스킨십은 좀 그런가? 아니야. 아무도 없는 수술방에서 역사가 이루어진 적도 있다는 얘기를 선배에게 들었는데 뭐…….’
안경식이 망설이다 다시 김수정의 손을 꽉 쥐고 얼굴을 가까이하려는 그때.
지잉―
“힉!”
“엄마얏!”
수술방 문이 열렸다.
제자리에서 펄쩍 튀어 오르는 두 사람.
곧 어디서 많이 보았던 그림자가 둘 나타난다.
마동섭과 신선한이다.
“그래서 그 환자는 다음부터는…… 아이 씨 깜짝이야. 너 여기서 뭐 하냐?”
민망한 상황.
안경식은 헛기침을 했다.
그 옆에서 인턴 김수정은 마스크를 눈까지 올렸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수술방 서랍 안에라도 숨고 싶었다.
“어어. 잠깐 스코프(scope, 복강경/흉강경에 쓰이는 수술 기구) 기계 보려고 왔는데……. 크흠. 조금 이따가 와야겠네. 즐거운 시간 마저 보내라.”
동섭이 음흉하게 웃으며 자리를 비키자, 선한이 빙긋 웃으며 말한다.
“안경식 선생님.”
“네…….”
“수술방에서는 곤란해요.”
“넹…….”
안경식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김수정은 원망스럽게 안경식의 어깨를 퍽퍽 쳤다.
그래도 소문을 낼 사람들에게 들킨 것은 아니라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렇게 꿈만 같던 시간이 지나갔고…….
이토록이나 뜨거웠던 사랑도, 결국 온도가 떨어지는 때가 왔다.
* * *
[경식] 쑤, 오늘 내가 콜 대신 받아 줄까? 공부할 시간 없는 거 아니야? ㅠㅠ
[수정] 오빠가 콜 받았다고 소문나면 나 인턴 숙소에 얼굴 못 들고 다녀 ㅋㅋ
[경식] ㅋㅋㅋ 알았엉
[수정] 나 공부하다가 쉴 때 연락할게요
가을이 지난 뒤.
겨울이 다가왔다.
인턴인 그녀에게는 <시험>과 <면접>이라는 관문이 기다리고 있다.
안경식은 그녀를 열심히 도왔다. 만약 그녀가 떨어지면, 같은 병원에 없고, 당연히 멀어질 테니까.
[경식] 파이팅! 할 수 있어!
같은 병원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에, 안경식은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결국 김수정은 신경과에 합격한다.
[경식] 축하해!
[수정] 고마워요, 오빠 :)
[경식] NR(신경과) 1년 차 김수정! 멋지다! 흐흐흐
하지만, 마냥 좋을 줄만 알았던 그들 사이에도 조금씩 마찰이 생긴다.
“많이 힘들지?”
“어 그래도 위에 선배들이 많이 도와줘서, 몇 시간이라도 더 잤어.”
안경식은 신경과의 일상에까지 들어가서 여자친구를 도와줄 수는 없었다.
“어, 그래, 다행이네…….”
바쁜 서로의 일상에 만남도 줄어들고.
같은 병원에서 일함에도 불구하고 잠깐 얼굴 보는 것도 쉽지 않다.
“오늘 쑤 일 끝날 때까지 기다릴게!”
“언제 끝날지 모르니까 먼저 가.”
“아니야, 나 끝까지 기다릴게. 오늘 우리 기념일이잖아…….”
서로 일하는 필드가 다른 만큼, 공감대도 점점 줄어든다.
“……오늘 나올 수 있었네?”
“……다행히 기준 선배가 챙겨 줘서.”
“아, 그래? 좋은 분인가 보네.”
“응. 교수님들이랑 간호사 선생님들도 다 좋아하는 분이야. 엄청 좋아.”
“아…… 응, 그래. 그렇구나.”
대화에서, 모르는 사람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 안경식은 조금씩 불편해진다.
그것과는 별개로 수정이와 안경식의 소통은 점차 줄어들기만 하고…….
[경식] 날이 춥다
[경식] 따뜻하게 이불 잘 덮고
[경식] 잘 자
지워지지 않는 숫자 1.
조금씩 사라져 가는 둘만의 메시지.
안경식도 서로의 틈이 멀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도 바보는 아니였으니까.
안경식은 자신의 사랑이 곧 끝나게 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