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2화. 심장과 사랑의 상관관계에 대한 보고서 (4)
언제부터였을까.
인턴 김수정도 안경식을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인턴 쌤!”
“…….”
“안 듣끼나? 인턴 쌤!”
“아 넵, 선생님!”
인턴 김수정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응급실 4년 차 레지던트, 여봉철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깜짝이야.
산도적이신 줄.
이 병원엔 왜 이렇게 무섭게 생긴 선생님들이 많은 걸까?
그에 비하면 안경식 선생의 앳된 얼굴은 귀엽게 생긴 편…….
“뭔 생각을 그리하고 있노?”
“죄송합니다.”
“여어 황민규 23세 남자 환자. 흉통으로 왔는데, 왼쪽에 뉴모쏘락스(pneumothorax, 기흉)가 있는 것 같거든.”
“아, 넵.”
“환자 히스토리 테이킹(history taking, 병력 채취) 해가꼬 TS(흉부외과)에 노티(notify, 알림 보고) 쫌 해요. 할 수 있죠?”
“알겠습니다.”
어느새 7월.
그녀는 응급실 인턴으로 일하고 있다.
ER(Emergengy Room, 응급실) 생활은 24시간 단위라서 생활 패턴 적응이 쉽지 않다.
얼른 정신을 차려 환자를 꼼꼼하게 문진한 뒤, 흉부외과 당직의가 누군지 찾아본다.
<안경식>.
곧 표정이 밝아진다.
전화를 걸자 벨 소리가 들리는 것도 잠시, 부리나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엇, 수정 쌤? 무슨 일이에요?
“안경식 선생님, 주무시고 계셨어요?”
―어어…… 새벽 3시에 수술이 끝나 가지고, 잠깐 눈 좀 붙이고 있었어요.
“죄송해요.”
―어어, 아니 아니 아니! 괜찮슴다.
지금은 새벽 6시.
에크모(ECMO) 시술을 하느라, 3시가 다 되어서야 잠이 든 안경식에게 새벽의 콜이 반갑지만은 않으리라.
하지만 성실한 그의 목소리에는 불평불만을 찾아볼 수 없다.
―환자 이름이 어떻게 되죠?
“황민규 23세 남자 환자입니다. 3년 전 왼쪽에 기흉으로 흉관 삽관했던 과거력 있으시고, 금일 새벽부터 발생한 왼쪽 흉통으로 내원하였습니다.”
그녀의 착실한 노티가 이어진다.
“촬영한 엑스레이에서 왼쪽에 뉴모쏘락스(pneumothorax, 기흉) 발견되고 apex로부터 4cm, lateral wall로부터 3cm 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와, 노티 너무 완벽한데요…… 하하.
기분 좋은 칭찬 이후, 침대에서 일어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체스트 튜브(chest tube, 흉관) 넣을 준비 해서 연락주세요.
“넵, 알겠습니다!”
곧 두꺼운 안경을 쓴 안경식 선생이 나타났다.
이제 2년 차인 그는 능숙하게 흉관 삽관을 진행한다.
국소 마취를 한 뒤, 메스(mess, 수술용 칼)를 사용해 환자의 몸을 일부 절개한다.
“아야야…….”
“환자분, 조금만 참아요. 넣고 나면 금방 편해지니까요…….”
안경식은 환자를 안심시켰다. 그러면서도, 손은 흉관 삽관을 마무리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곧, 그는 3―0 나일론(Nylon, 봉합사)으로 흉관을 환자의 피부에 고정하여 술기를 마무리한다.
“…….”
인턴 김수정은 그런 그의 옆모습을 힐긋 바라보았다.
새삼 멋있다.
사실 외모는, 자신의 이상형과 거리가 한참 먼데…….
일할 때는 분위기가 다르다.
성실하게 일하는 모습에 언제부터인가 호감이 가기 시작했다.
자기 일에 집중하는 남자는 언제나 멋있는 법이니까.
잠시 후, 처치실을 나오며 안경식이 말했다.
“엑스레이 찍어 주시고, 한상기 교수님 앞으로 입원장 넣어 주면 돼요.”
“네, 알겠습니다.”
“수정 쌤, 새벽부터 바쁘시네요? 이제 퇴근해야죠?”
“사실 퇴근 시간 조금 지났어요.”
“엇, 그래요?”
안경식이 얼른 시간을 확인하더니 미안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아, 근무 시간이 7시까지구나. 이럴 때는 다른 인턴 선생님께 말하고 교대했어도 되는데…….”
“아니에요. 제가 노티 드린 거니까.”
“미안해서 어쩌지. 마실 거라도 사 줄까요?”
“앗, 저 인계해야 해서요…….”
“아, 그럼…….”
안경식의 표정이 대놓고 시무룩해진다.
김수정은 웃음을 참으며 생각했다.
은근 저 소심한 모습이 순수한 매력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너드남’이 유행이라더니 저 사람이 바로 그런 타입인가!
“하던 인계 금방하고 다시 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하하, 네…… 그럼 밖에서 기다릴게요.”
오랜만에 병원 지하 카페로 향하는 안경식과 김수정.
그들은 음료를 들고 병원 밖으로 나가 본다.
병원 밖으로 나가는 길은 출근하는 수많은 사람을 뚫고 흐름을 역행하는 길이었다.
“사람들 출근하느라 바쁘네요?”
“그러게요.”
그렇게 두 사람은 일상의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응급실 인턴의 생활.
흉부외과의 새로운 사건들.
오프 때 하는 일들.
그리고…….
“선생님과 저는 꽤 자주 마주치는 것 같아요.”
“그렇네요. 우연인가…… 하하.”
우연히 같은 파트에 배정되어서 5월 한 달 동안 함께했고.
또 한 번의 우연으로 중환자실에서 볼 수 있었던 6월.
그리고 7월의 한가운데, 마지막 우연이 될지 모르는 지금…….
앞으로는 이렇게 자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이제 숙소 들어가서 자야겠네요? 일어나서는 계획 있어요?”
“글쎄요. 잠 푹 자고 일어나서 밥 먹어야겠죠?”
“뭐 먹을 거에요?”
“모르겠어요, 아마 동기들이랑…….”
“저랑 같이 먹을래요?”
“네?”
그 순간, 24시간을 깨어 있었기에 몽롱했던 인턴 김수정의 정신이 또렷해졌다.
“저랑 먹어요.”
평소의 소심하던 안경식이 아니었다.
두꺼운 안경 너머로, 맑은 눈빛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멈춰 섰다.
연국대 병원 빌딩 옆으로, 아침 햇살이 두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 * *
그날 저녁.
안경식은 시계를 바라보고 있다.
1분이 1시간처럼 흘러간다. 이렇게 저녁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얼마 만인가 싶다.
‘헤헤헤.’
사실 데이트 신청을 할 때는 심장이 입 바깥으로 튀어나올 뻔했지만, 그녀가 받아 주어서 다행이었다.
‘오늘 컨디션도 좋고!’
유난히 수술이 적었던 하루.
한 개의 수술방에서만 수술이 진행 중이었고, 나머지 수술방은 모두 당일 배정된 수술이 끝났다.
중환자실에는 흉부외과 의사 몇몇이 내일 수술 일정에 대해서 평화롭게 이야기하고 있다.
‘식당도 야경이 좋은 곳으로 예약했고…… 오늘이 바로 결전의 날이다!’
하지만 기대에 부푼 안경식의 생각과는 다르게, 흉부외과의 사정은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김판호 환자 ILD biopsy(간질성 폐 질환의 수술적 조직 검사) 오늘 하신다고 하는데?”
“엥? 그거 내일이었잖아.”
“내일 렁티(Lung transplantation, 폐 이식 수술) 생길 수도 있다고, 오늘 늦게라도 한다고 하시네.”
“아, 그래? 경식아, 수술방 어레인지(arrange, 준비) 좀 해 주라.”
“네, 알겠습니다.”
안경식은 펠로우의 말에 전화를 들고 수술방을 잡았다.
분명 여기까지는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교수님의 스케줄에 맞추어 수술 일정이 조정되는 것은 흔한 일이니까.
그런데, 슬슬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가만 보자, 오늘 당직이…… 신선한이네? 근데 얘 지금 수술방 들어가 있잖아. 금방 안 끝날 것 같은데?”
펠로우가 당직 표를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오늘 당직이 못 들어가면 내일 당직이 들어가야 한다는 소리인데…….”
당직 표 위의 날짜를 따라가던 그의 손이 멈춘다.
“경식아, 네가 내일 온콜(on-call) 당직인 거 같다?”
“네?”
안경식은 놀란 눈으로 당직 표를 바라보았다.
펠로우 선생님의 말씀이 맞았다.
그 말인즉슨…….
당직의가 다른 수술에 들어가 있을 때는, 그가 수술방에 들어가야만 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안경식, 네가 들어가야겠는데? 얼른 준비해라.”
“아…….”
“왜 그래?”
“아닙, 아닙니다.”
안경식은 더듬거리며 대답한 뒤 안경을 매만졌다.
작년 겨울, <흉부외과 탈주>라는 대형 사고를 친 안경식.
그 후 대부분의 교수도, 펠로우도 그를 너그럽게 감싸 주는 분위기였지만 사실 몇몇은 아직도 눈에 쌍심지를 켜고 지켜보고 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저 데이트 약속이 있는데요?’라고 말할 순 없었다.
‘아아…… 오늘 약속 어떡하지…… 내일 당직인 것까지 신경은 못 썼네…….’
마음이 초조해진다.
약속 시간까지 단 한 시간.
수술방에 환자가 들어갔다가 나올 때까지는 적어도 두 시간이 필요했다.
물리적으로 약속 시간을 맞추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하필이면 오늘 교수님이 수술 일정을 앞당겨 버리다니…… 왜 하필 오늘…….’
안경식의 속은 타들어 갔다.
김수정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하나, 혹시 아직 자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의 속은 뭉그러졌고,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아……. 하늘이시여, 저에게 이런 시련을…….’
별수 없다.
약속을 취소하는 수밖에.
두 번의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때.
그의 눈에 사복을 입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마동섭이 들어왔다.
‘혹시……!’
마동섭에게 당직을 바꿔 줄 수 있냐고 물어볼까?
왠지 무섭다.
아무리 친하다 할지라도, 퇴근 중인 치프 레지던트에게 감히 ‘당직을 바꿔 달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안경식의 발은 이미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선생님…… 저 혹시 내일 온콜 당직을 좀 바꿔 주실 수 있을까요……?”
“뭐?”
“한 번만요.”
“내일 온콜 당직? 스케줄 한 번 보고 이따가 문자 줄게.”
그렇게 말하며, 마동섭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안 돼!
안경식은 잽싸게 손을 뻗었다.
평소라면 감히 그의 퇴근길을 제지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안경식은 달랐다. 아까부터 어디서 이런 용기가 생기는 건지 스스로도 모를 일이었다.
안경식은 그의 뒷덜미를 덥석 잡았다.
“컥.”
“헉, 죄송.”
“어이씨, 뭐야, 인마?”
“그게…… 오늘 온콜 당직이 수술 중이라서, 내일 당직이면 좀 이따 수술 들어가셔야 합니다.”
“이놈이?”
“헤헤…….”
“나 옷 갈아입고 퇴근 중인 거 안 보이냐? 그리고 감히 내 멱살을 잡아?”
“아니 멱살이 아니라, 급하게 아무 곳이나 잡다 보니…… 아무튼 선생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오늘 이 수술 들어가 주시면 제가 당직 두 번 더 서 드릴게요.”
“뭔데? 오늘 무슨 약속 있어? 너 원래 안 이렇잖아.”
“저…… 사실은 오늘 데이트 잡았습니다…… 인간적으로 오늘만큼은 살려 주세요.”
안경식의 대답을 들은 마동섭의 표정이 변한다. 그는 잇몸을 드러내면서 씨익― 웃으며 말한다.
“데. 이. 트?”
“아, 목소리 좀 줄여 주세요.”
“누군데?”
“그 김수정 인턴이라고…….”
마동섭의 잇몸이 더욱 드러난다. 그는 안경식에게 어깨동무하고 말한다.
“언제부터냐?”
“네?”
“언제부터 1일이었냐고.”
“아직……. 오늘 어쩌면…….”
“그래. 기왕이면 나가는 김에 오늘부터 1일로 돌아와라. 안 그러면 한 달 풀(full, 전부) 당직일 줄 알아!”
처억!
엄지를 올린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 남자끼리의 결연한 의지가 통한다.
그렇게 안경식은 중환자실에서 풀려나,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뛰어갔다.
* * *
병원 정문 앞.
은색 자동차 한 대가 비상등을 켜고, 로비 앞을 둥글게 돌아가는 도로 위에 서 있다.
몇몇 택시 사이로 보이는 이 차로, 로비의 회전문에서 한 여성이 뛰어나온다.
“아, 늦어서 죄송해요!”
“아니에요, 수정 쌤. 어서 타요.”
부우웅―
차는 병원을 빠져나간다.
그러고 보니 둘이서 병원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처음이다.
그동안 경식은 옆좌석을 힐긋 바라보았다. 좋은 향기가 난다.
“언제 일어났어요?”
“두 시간 전에요. 그래도 사람같이 하고 나와야 할 것 같아서 신경 좀 썼어요.”
“하하…….”
“첫 데이트니까요.”
“첫 데…….”
쿵덕, 쿵덕.
심장이 튀어나올 뻔했다.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꽉 들어간다.
어쩌면, 사랑은 정말 심장으로 느끼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안경식은 들뜬 표정으로 페달을 밟았다.
여름 저녁의 도로 위로, 달아오른 공기가 두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