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229화 (229/241)

#외전 11화. 심장과 사랑의 상관관계에 대한 보고서 (3)

영화는 재미있었다.

두 시간 동안 불꽃이 펑펑 터지는 블록버스터라, 다들 병원 일을 잊고 몰입할 수 있었다.

……안경식만 빼고.

그는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바로 옆자리에 김수정 인턴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곁눈질로 훔쳐볼 때마다, 스크린에 몰입하고 있는 그녀의 눈이 얼마나 빛나던지…….

영화가 끝나자, 시간은 어느덧 늦은 밤이었다. 마동섭이 슬슬 모임을 정리했다.

“인턴 친구들은 다들 병원으로 가나?”

“네, 숙소로 갑니다!”

“그래. 연말에 흉부외과 지원하는 거 잊지 말고. 다들 아까 손모가지 걸었던 거 기억하고 있지?”

“하하하…….”

“농담 같냐?”

“…….”

“잘 생각해라.”

마지막까지 반협박으로 흉부외과 영입을 시도하는 마동섭.

잔뜩 쫄아 버린 인턴들이 택시를 타고 사라진 뒤, 그는 두꺼운 팔뚝을 안경식의 어깨에 둘렀다.

“어이, 안경식이. 우리 진실되게 할 얘기가 있지 않냐?”

“네?”

“다 눈치 깠어, 인마.”

“뭐, 뭘요?”

“야, 신선한. 어떻게 생각하냐?”

마동섭의 짓궂은 질문에, 옆에서 남은 팝콘을 아작거리던 신선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눈치챘습니다. 아까 안경식 선생님의 신체 반응으로요.”

“……또 호르몬 얘기하시려고 그러죠?”

“네.”

스페인에서 실험한 적이 있다.

남자들이 아름다운 낯선 여성과 한 공간에 있으면 어떤 신체 반응이 일어날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 상태가 지속된다면, 심장에 부담이 될 정도로.

코르티솔(cortisol)은 스트레스에 반응하는 호르몬인데, 이 수치가 급격하게 상승한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이 연구팀의 설명이었다.

“에이, 오버하지 마세요! 심장에 부담은 무슨…… 제가 수정 쌤 때문에 그 정도로 긴장하진 않아요!”

“역시 수정 선생님을 좋아하시는 건 맞군요.”

“…….”

안경식의 얼굴이 벌게졌다.

간단한 심문에 걸려들었다.

마동석이 우악스러운 형사라면, 신선한은 지능적인 수사관이랄까.

선한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저야 다른 사람들 연애에 큰 관심 없긴 하지만, 혼자 끙끙대면서 맘에 담아 두실 거면 저희에게 털어놓으세요.”

“하아.”

안경식은 포기했다.

기왕 들킨 거, 어쩔 수 없다.

곧 세 사람은 편의점 앞 벤치에 맥주 캔을 하나씩 들고 앉았다.

지난겨울, ‘안경식 탈주 사건’ 때 술을 마셨던 바로 그 3인조 멤버다.

“에에이! 그래요! 좋아합니다! 저 금사빠 맞습니다!”

안경식은 술이 들어가자마자 속내를 털어놓았다. 마동섭은 낄낄 웃으며 손가락질했다.

“거 봐. 내가 너 금방 다른 여자 좋아할 거라고 말했잖아. 심장이 뭐가 어쩌고 저째?”

“부끄럽슴다.”

“아이고, 재밌다. 낄낄!”

“아, 그만 놀리십쇼! 사람 마음 가지고 그러는 거 아닙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잘 모르겠슴다.”

안경식은 자신 없는 말투로 웅얼거렸다.

보통 남자들끼리 술 먹고 이야기하다 보면 <남자는 직진!>이라든가 <밑져야 본전이니 들이대자!> 같은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마동섭은 신중하게 조언했다.

“잘 생각해라. 너 의대 시절에도 CC(캠퍼스 커플) 한 적 있었지? 작년에도 병원에서 연애했었고? 그런데 이제는 가벼운 호감만으로 움직일 위치는 아니다.”

마동섭의 충고에 안경식은 정신을 퍼뜩 차렸다.

맞는 말이다.

병원 사회는 좁다.

대학을 갓 졸업한 인턴일 때라면 몰라도, 이제는 사회인으로서의 평판도 신경 써야 할 나이다.

그제야 안경식은 깨달았다.

마동섭이 단순히 오지랖으로 이러는 게 아니라, 나름 사회생활 선배로서 조언하고 있다는 것을.

“뭐, 좋아하는데 꾹 참으라는 말은 아니고…… 신중할 필요는 있단 말이지. 이제 너도 누군가에게는 <윗사람>이라는 거 생각하고 상대 마음도 잘 헤아려야 해.”

안경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동섭의 말이 맞다.

인턴―레지던트도 기본적으로 ‘위아래’가 성립되는 관계다.

물론 김수정도 자신을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만약 그게 일방적인 착각이라면?

인턴이 생글생글 웃으며 친근하게 대해 준다 한들, 그게 ‘사회생활’인지 ‘호감 표현’인지 웬만한 남자들의 눈치로는 분간하기도 쉽지 않다.

그렇기에 더욱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 마동섭의 조언이었다.

“만약 서로에 대한 호감에 확신이 든다면, 주변 눈치보다는 감정에 충실히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신선한의 말에, 안경식은 씁쓸한 미소와 함께 맥주 캔을 들었다.

확신?

그만한 자신감은 없다.

안경식은 원래 자존감이 높은 편은 아니었다.

외모는 평균, 키는 평균 이하.

집안도 그리 넉넉하지 않다.

연국대병원 의사가 된 후에는 꽤 으쓱하긴 했지만, 흉부외과에 들어와서는 그 으쓱했던 어깨도 쏙 들어갔다.

<의사>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면 부러울 것이 없을 거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다.

매일 교수님에게 꾸중을 받다 보면, 심한 날에는 가끔 자신이 쓰레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랬기에.

어쩌면 그래서 김수정과의 관계가 특별하게 느껴졌던 것일지도 모른다.

―드레싱도 직접 챙겨 주시고, 뭐 물어보면 바로바로 답 주시고…….

늘 꾸중만 받던 흉부외과에서, 누군가 날 인정해 주었고.

―매일 잘 알려 주시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다고 말해 주었기에…….

그래서 설렜던 거다.

단지 그뿐.

안경식은 한숨을 푹 쉬고 맥주 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 잠시 너무 들떴던 것 같아요.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나가게 두는 게 좋을 것 같슴다.”

“괜찮겠어?”

“인연이면 어떻게든 다시 이어지겠죠.”

안경식은 맥주 한 모금으로 마른 목을 축였다.

그래, 가만히 두자.

이 또한 지나가겠지.

호르몬에 못된 장난질을 하는 봄이 가고, 슬슬 여름이 다가오고 있으니까.

* * *

6월 첫째 주.

해가 지고 난 저녁 8시.

무려 7시간 동안 진행된 대동맥 치환 수술 후, 안경식이 환자 베드를 끌고 수술장을 나온다.

드르르륵―

환자의 양옆에는 수술에 참여했던 흉부외과 의사와 마취과 의사가 함께하고 있다.

중환자실의 문이 열리자 안경식이 크게 외친다.

“14번 방에서 나온 손병기 님 어디로 갈까요?”

보통 수술이 끝나면 환자는 회복실로 갔다가 안정을 찾고 중환자실로 이동한다.

하지만 심장 수술같이 위험한 수술은 끝나자마자 바로 중환자실로 직행하게 된다.

환자의 안전을 위해 집중 관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 3번 자리 오세요.”

안경식은 베드를 끌고 3번 자리에 도착한 뒤, 미리 준비되어 있던 인공호흡기에 환자의 목에 들어가 있는 기관 튜브를 연결했다.

“PEEP(호기 말 양압, 인공호흡기 항목 중 하나) 10으로 해 주시고, 니카디핀(Nikadipine) 200mcg 주세요.”

인공호흡기 세팅을 조절하고, 혈압이 높아지지 않게 약을 준다.

그제야 안경식은 마스크를 벗고, 머리를 덮고 있던 수술 모자도 벗었다.

꿀꺽― 꿀꺽―

스테이션에서 냉수 한 잔을 들이킨다.

7시간 만에 마시는 물.

차가운 감각이 식도를 타고 넘어간다.

“푸하.”

긴장이 풀린다.

‘물이 달다’라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아무리 물을 마셔도 가슴 한구석은 여전히 답답하다.

마치 채울 수 없는 갈증에 계속해서 시달리는 듯한…….

그때, 그의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응? 저 뒷모습……?'

안경식의 눈이 커졌다.

익숙한 실루엣이 환자의 드레싱(dressing, 소독)을 마치고 뒤돌아선다.

그 뒷모습의 주인공이 누군지 확인한 순간, 안경식의 입이 자동으로 열렸다.

“수정 쌤?”

“앗, 안녕하세요, 선생님! 잘 지내셨죠?”

줄곧 보고 싶던 얼굴이, 자신을 발견하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오…… 오랜만이네요, 여기는 무슨 일이에요?"

“외과 중환자실이랑 흉부외과 중환자실 둘 다 콜 받아요! 지난달에 인턴 한 명이 도망가서, 그렇게 됐거든요.”

“에? 왜 도망갔대요?”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인턴이 수련 과정 도중 도망가는 경우도 있다.

“인턴 점수 잘 안 나올 것 같으니까 중간에 그만두겠다고 하네요? 내년에 다른 곳에서 인턴 다시 할 거라면서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더라고요.”

“아아.”

“이번 달이라도 끝내고 가든가…… 너무 무책임하지 않아요?”

“하하. 그, 그러게요.”

안경식은 시선을 회피한다.

자신도 흉부외과에서 도망친 적이 있어서 양심이 쿡쿡 찔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탈주한 인턴에게 고마운 심정이다.

그 덕분에, 이렇게 김수정 인턴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선생님 긴 수술 고생 많으셨어요. 힘드시죠?”

<고생 많으셨어요>.

그녀의 한마디에 7시간 동안 쌓인 피로가 날아간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이렇게 큰 힘이 있다는 걸, 안경식은 처음 깨달았다.

“……흉부외과 수술이 다 그렇죠. 오늘은 그래도 일찍 끝난 편이에요.”

“흉부외과 선생님들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

“아니에요…… 아무튼 앞으로도 종종 보겠네요. 환자들 드레싱 잘해 줘요. 수정 쌤 워낙 꼼꼼하게 잘 봐주겠지만.”

“앗 넵, 감사합니다!”

그 후.

몇 번의 당직이 겹쳤던 두 사람.

중환자실에서 마주치게 되면, 그들은 종종 음료수를 사러 지하로 내려가고는 했다.

마실 게 없냐고?

있다.

스테이션의 휴게실에도 커피가 있고, 복도 자판기도 있다.

그런데도 굳이 내려가야 하는 이유를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병원에서 조용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한밤중.

지하의 카페는 영업하지 않기에 편의점으로 향했다.

하나씩 고른 음료수를 손에 들고, 편의점 맞은편 의자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중환자실은 어떤 것 같아요?”

“네, 흉부외과보다는 편한 것 같아요.”

“하하. 흉부외과에서 너무 괴롭혔죠?”

“아니, 그런 뜻은 아니구요!”

“나도 인턴 때 신경외과 중환자실을 돌았었어요.”

“아 정말요? 친구 얘기 들어 보니까, 신경외과 중환자실은 브레인(brain, 뇌) CT 찍으러 가는 환자들 동반하는 일이 많다고…….”

며칠 못 봤을 뿐이다.

그런데, 할 얘기가 얼마나 쌓여 있던지.

두 사람의 대화는 콜 폰에 전화가 올 때까지 끊이지 않았다.

“이런, 가 봐야겠네…… 수고하고, 또 봐요.”

“네, 선생님. 수고하세요!”

아쉬운 표정으로 흉부외과 중환자실로 걸어가며, 핸드폰의 시계를 본 안경식은 깜짝 놀랐다.

‘으아, 잠깐 얘기한 줄 알았는데…… 40분이 지났다고?’

시간 감각이 흐려진다.

기분이 구름 위에 붕 뜬 것 같다.

중환자실로 바삐 걸어가는 그의 발걸음은 한없이 가벼워 보였다.

이 넓은 병원에서 두 달이나 연속으로 만나게 되었다면, 어쩌면 인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에 의미를 부여하게 되면, 그것이 인연이 되는 법이니까.

―참 나, 뭐? <이 또한 지나가리라?> 지나가긴 개뿔!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

마동섭의 낄낄대는 목소리가 벌써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지만, 애써 모른 척하는 안경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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