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0화. 심장과 사랑의 상관관계에 대한 보고서 (2)
5월 둘째 주, 월요일.
안경식은 깔끔하게 면도했다.
오랜만에 왁스를 발라 머리도 반듯하게 만진 후 출근했다.
그 결과, 무슨 중범죄의 용의자마냥 취조당하고 있다.
“수상하네.”
“…….”
“수상해.”
“며, 면도 좀 하고 다니라면서요? 그래서 깔끔하게 하고 온 건데…… 오늘은 또 무슨 시비를 거시려고요?”
흉부외과 당직실.
마동섭이 파티션 뒤에서 눈만 빼꼼 내민 채 노려보고 있다.
조폭을 연상시키는 험악한 이마에 주름이 생겼다 없어졌다 한다. 마치 ‘너의 마음을 읽고 있다.’는 듯.
그의 입이 열렸다.
“……텅 빈 심장에 새로운 사랑이 들어왔냐?”
미친.
감이 너무 좋다.
저 사람은 아무래도 진로를 잘못 선택한 게 아닐까?
형사가 되어 취조했으면 숱한 범죄자를 잡아들이지 않았을까?
“맞지?”
“맞긴 뭐가 맞아요. 아이씨…….”
“뭐? 아이씨바? 많이 컸다 안경식, 나한테 욕도 다 하고?”
“제가 언제 욕했어요!”
“암만 봐도 수상한데. 야, 신선한. 어떻게 생각하냐?”
마침, 환자에게 선물 받은 바나나 우유를 들고 지나가던 신선한이 답했다.
“봄이니까요.”
“그렇지?”
“도파민과 세로토닌이 분비되기 좋은 환경이라, 안경식 선생님이 충분히 사랑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우리 과 유망주답게 합리적이군.”
“감사합니다.”
이…….
얄미워 죽겠네!
가만 보면 신선한, 저 사람이 더 악질이다. 조곤조곤한 말투로 사람 놀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
선한은 은은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꾸벅 숙이고 지나갔다. 그 표정에는 ‘안경식 선생님 파이팅~’이라는 메시지가 가득했다.
훈훈해서 더 약 오른다.
“뭐 하냐? 엉덩이 치워.”
저벅, 저벅-
송유주가 당직실에 들어온다.
이마에 수술모 자국이 선명한 것이, 오늘도 장시간 수술을 하고 온 모양이다.
마동섭이 엉덩이를 움직여 슬쩍 자리를 비켜주며 물었다.
“수술 끝났어?”
“어.”
“오늘도 빡셌냐?”
“심장은 진짜 알 수가 없다니까.”
“왜?”
“오늘은 펌프 위닝(pump weaning)이 절대 안 될 거 같아서 에크모까지 준비한 환자였는데, 수술방 나올 때쯤엔 엄청나게 잘 뛰더라.”
송유주가 소파에 풀썩 앉으며 말한다.
종종, 환자가 수술장에서 에크모(ECMO)를 가진 채 중환자실로 나와야 하는 경우가 있다.
오늘 그럴 것으로 예상됐던 환자인데, 생각 외로 심장의 기능이 잘 돌아와서 다행이었다는 이야기다.
마동섭은 두꺼운 팔뚝으로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게. 심장은 알 수가 없다니까? 텅 비어 버렸다가, 금방 새로운 사랑으로 가득 차기도 하는 것처럼…….”
“뭔 소리야?”
“있다, 그런 게. 낄낄!”
안 되겠다.
얼른 도망치자.
안경식은 빨개진 얼굴로 당직실을 나섰다.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간 하이에나 같은 마동섭에게 계속 물어뜯길 것이 뻔했다.
“야, 안경식! 어디 가! 새로운 사랑이 누군지는 알려 줘야 할 거 아니야!”
싫다.
안 알려 줄 거다.
죽어도 저 하이에나 같은 마동섭에게만은 들키지 않을 거다.
진실의 방에 끌려가서 얻어맞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 * *
9층 흉부외과 병동.
안경식은 PA 주세영과 함께 둘이서 환자를 살펴보고 오는 길이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중, 그녀가 슬쩍 묻는다.
“경식 쌤. 오늘 무슨 날이에요? 평소보다 신경 좀 쓰셨는데?”
“…….”
역시 머리에 왁스까지 바르는 건 오버였던 것일까?
다음부턴 이러지 말자.
주변에서 이렇게까지 의심이 들어올 줄은 몰랐다.
띠링―
그때, 안경식의 핸드폰에 알림이 뜬다.
[인턴 김수정]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해야 하나?
괜히 눈치가 보인다.
안경식은 메시지를 확인한 뒤, 얼른 변명하듯 설명했다.
“백신형 환자 일렉트로(electrolyte, 전해질) 결과 나왔다고 인턴 쌤 노티 왔네요.”
“괜찮다고 하나요?”
“포타슘(potassium, 몸 안의 칼륨 수치) 정상치로 돌아왔다네요.”
“흐음~”
PA 주세영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말한다.
“선생님, 이번 달 인턴 쌤이랑 유난히 친하게 지내는 것 같아요?”
“누구? 김수정 쌤이요?”
“우리 팀 분위기 좋다고 다른 팀들에서 이야기 나오던데요?”
“아 그건…… 인턴 쌤이 일을 잘해서 그렇죠. 다행히 환자들도 별다른 컴플리케이션(complication, 합병증) 없이 퇴원하고 있으니까, 분위기가 좋아 보이나 봐요.”
안경식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한다.
사실 조금 찔리긴 했다.
회진 후, 평소보다 커피 타임을 자주 가지긴 했으니까.
수술에 들어가야 하는 날도, 어떻게든 김수정 인턴 선생님에게 음료수는 사 주고 가는 안경식이었다.
PA 주세영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허공에 말했다.
“인턴 쌤 남자 친구 없는 것 같던데…….”
멈칫.
안경식이 굳는다.
눈은 엘리베이터의 층수를 확인하고 있지만, 손이 갈 곳을 잃는다.
머리와 상관없이 몸이 반응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감정적 동요가 없는 것처럼 무표정을 유지하느라 애쓰는 안경식.
잠시 뜸을 들인 뒤, 그가 입을 연다.
“아, 그래요?”
“인턴 쌤 남자 동기들한테도 인기 많은 것 같은데. 남자 친구 금방 생길 것 같던데…….”
“그렇구나.”
“그렇더라고요, 호호!”
안경식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심란하다.
분명 인턴에게 호감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건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병원 안에서 섣불리 구설수를 만들고 싶지도 않기에…….
아직, 스스로의 마음이 갈피가 잡히지 않는 안경식이었다.
* * *
5월 마지막 주 금요일.
어느덧 한 달이 끝나고, 인턴 페어웰(farewell, 작별 회식) 시간이 왔다.
흉부외과 페어웰은 항상 좋은 음식점을 가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오늘은 무려 파크로랑 호텔의 철판 요릿집이다.
4년 차 마동섭.
2년 차 안경식.
1년 차 신선한.
그리고 김수정을 포함한 5월 렁(lung, 폐) 파트 인턴 3명.
6명이 바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호텔 셰프가 해 주는 철판 요리를 기다리고 있다.
“와, 이런 데 올 줄은 몰랐어요!”
“사진 찍어 올려야겠다!”
“연국대 흉부외과가 돈이 많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구나…….”
인턴들은 황홀한 표정이다.
회식이라고 해서 평범한 고깃집 정도를 생각했는데, 이렇게 고급스러운 음식점을 오게 될 줄은 몰랐다.
고생한 보람이 있구나!
마동섭이 모두의 주목을 불러 모으며 박수를 짝짝 쳤다.
“인턴들, 한 달 동안 애썼다! 이번 달 큰 사고 없이 잘해 줘서 이런 곳으로 데리고 온 거야.”
“네!”
“그럼 맛있게 먹자!”
“잘 먹겠―”
“이거 먹으면 내년에 다들 흉부외과 오는 거다. 손모가지 걸고 약속.”
“…….”
“농담이다. 하하하.”
저기요?
농담같이 안 들리는데요?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조폭같이 생긴 마동섭이 하는 말이니만큼 농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인턴들을 잔뜩 쫄게 만들어 놓은 뒤, 마동섭은 앞에 놓이는 음식들을 흡입하기 시작했다.
“야, 이거 맛있네. 선한아, 이거 무슨 생선이지?”
“농어요.”
“아, 이게 농어구나?”
“6월부터 제철이라서요. 여름이 오고 있긴 하네요.”
“역시 이런 건 선한이한테 물어보면 정확하다니까. 인턴들, 이 녀석 가락시장 횟집 아들인 거 알고 있었나?”
“정말요?”
인턴들이 신기하다는 듯 선한을 바라보았다.
그 후로는 똑같은 레퍼토리다.
횟집 삼 남매의 막내아들―
<신선한>이라는 이름의 유래―
등등.
인턴들의 입장에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 한동안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월초에는 좀 긴장했었는데, 막상 흉부외과 레지던트들을 경험하다 보니 분위기가 좋은 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
한편.
안경식은 말이 없다.
아까부터 초조한 건 왜일까?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니, 심란한 마음이 배로 커진다.
인턴 김수정에게 말이라도 몇 마디 더 건네 보고 싶은데…….
틈이 보이지 않는다.
하필 자리도 가장 먼 곳이라 억지로 말 걸기가 부자연스럽다.
철판 요리에서 열기가 뿜어질 때마다, 김이 서리는 두꺼운 안경을 공연히 만지작거릴 뿐이다.
그런 안경식의 초조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동섭이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를 옮겼다.
“그러고 보니 다들 그 영화 봤어? 엄청 재밌다던데, 그…….”
마동섭이 운을 트자, 새로 개봉한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 액션 장면을 엄청나게 잘 찍었다는데요?”
“평점도 좋아요.”
“저도 작년부터 엄청나게 기다렸던 영화인데…… 사실 개봉한 줄도 몰랐습니다.”
“아니, 우리 여섯 명 중에 이 영화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어? 벌써 관객 수가 500만이 넘었다는데?”
“그야…….”
일이 많았으니까요.
……라는 말을, 인턴들은 눈물과 함께 삼켰다.
바쁜 흉부외과 생활은 레지던트도, 인턴도 마찬가지다.
오프에는 잠과 휴식을 선택해야 하는 그들의 일상에 최신 영화가 들어올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의외로 안경식이 혼자 손을 들며 담담히 말했다.
“저는 봤습니다.”
“언제?”
“저, 살고 있는 오피스텔 바로 옆에 영화관이 있거든요. 그저께 심야 시간에 혼자 슥 다녀왔슴다.”
“에이~ 무슨 영화관을 혼자서 가냐? 궁상맞게.”
“왜요, 저는 영화관 혼자 가는 것도 좋아하는데…….”
안경식이 소심하게 웅얼거릴 때, 테이블 반대편에서 누군가 얼른 말했다.
“아, 저도 좋아해요. 혼자 영화관 가는 거…… 대학생 때는 영화관에서 혼자 영화 세 편씩 연달아 보고 그랬어요!”
목소리는 인턴 김수정의 것이었다.
안경식은 기뻤다.
오늘 처음으로 교감했다. 그녀와 공감대가 하나 더 생긴 것 같기도 하다.
그 순간, 마동섭은 미묘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느낌이 온 듯.
마동섭이 헛기침한 뒤 새로운 제안을 했다.
“크흠, 근데 우리 어차피 법인 카드에 돈 많이 채워져 있어서 남거든? 오늘 마지막 날인데 밥 먹고 영화까지 볼까?”
“그래도 돼요?”
“가고 싶은 사람 손!”
“손이요.”
가장 먼저 선한이 동조하며 손을 들었다. 그러자 눈치를 보던 인턴들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손을 들었다.
“저도 보고 싶습니다!”
“저도요!”
“영화관 시간표는 제가 알아볼게요!”
인턴 김수정이 신나는 표정으로 말하는 것을 힐끗 바라본 뒤, 안경식은 얼른 자신도 손을 들었다.
“아, 그럼 저도 두 번 볼게요. 봤던 영화 또 보는 거 좋아하니까…….”
흠칫.
안경식은 어깨를 떨었다.
테이블 반대편에서, 마동섭이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눈앞에 든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딱 걸렸다, 요놈! 하는 표정이었다.
그 순간, 얼마 전에 보았던 유명한 영화 대사가 생각났다.
―그놈은 미끼를 던져 분 것이고…… 자네 딸은 그 미끼를 확 물어분 것이여…….
물고 말았다.
마동섭의 미끼를.
……이건 아무래도, 한 달짜리 놀림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