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227화 (227/241)

#외전 9화. 심장과 사랑의 상관관계에 대한 보고서 (1)

어느 날 밤, 문득.

안경식(흉부외과, R2)은 자신이 감정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즐겁지 않다.

석 달 전, 여자 친구와 헤어진 후의 여파 때문일까?

적막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안경식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공허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인X타그램에 적었다.

<심장이 텅 비어 있는 것 같다…… Cardiac muscle atrophy가 오기 전에…… 다시 사랑을 담을 수 있을까……?>

심장 근육이 위축되면서 약해지는 것을 말하는 의학 용어다.

그리고 다음 날.

마동섭(흉부외과, R4)은 한마디로 그의 글귀를 평했다.

“염병한다.”

“나, 남의 감성을 그렇게 함부로 매도하지 마시라구요……!”

“이런 게 흑역사라는 거야.”

흉부외과 당직실.

마동섭은 스마트폰 화면을 보며 배를 잡고 웃었다.

그는 언제나 후배인 안경식을 놀리는 것이 인생의 낙이었다.

밤중에 올라온 게시글이 오늘 아침에 지워지기 전, 잽싸게 캡처해 놓은 것이 신의 한 수였다.

“다시 봐도 웃겨 죽겠네. 심장이 뭐가 어째? 낄낄낄!”

“말이 그렇다는 거죠. 그만큼 감정이 공허해졌다, 이 말이라고요…….”

“야, 신선한! 어떻게 생각하냐?”

옆자리에서 정규 처방을 내고 있던 선한(흉부외과, R1)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심장은 사랑을 느끼는 기관이 아니죠.”

“옳지.”

“사랑은 도파민, 세로토닌, 옥시토신 등의 호르몬 효과로 뇌에서 일어나는 작용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훌륭하다.”

“감사합니다.”

신선한은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며 다음 날 처방을 내는 데 열중했다.

이…….

메마르기 짝이 없는 인간들 같으니!

안경식은 한숨을 푹 쉬었다.

흉부외과에서 소위 ‘문과적 감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가 유일했다.

물론 의사라는 직업 자체의 성향이 다소 딱딱할 수 있겠지만, 이놈의 흉부외과는 유독 심했다.

자신의 촉촉한 감성에 공감해 줄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

“안경, 비켜.”

송유주 선배?

말해 뭐 해.

저 사람이야말로 ‘이과 끝판왕’이다.

핏자국이 묻어 있는 수술복 차림으로 터덜터덜 걸어와 소파에 풀썩 앉는다.

늘 존경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인간적인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마동섭이 주머니에서 막대사탕을 꺼내 송유주에게 건네며 물었다.

“수술 잘 끝났냐?”

“어. 빡세다.”

“왜?”

“펌프 위닝 하는데, 심장에 에어(air, 공기)가 많이 들어가 있어서 빼는 데 고생했거든.”

펌프 위닝(pump weaning).

환자의 심폐기 의존도를 줄이는 심장 수술의 후반부 과정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심장 안에 있는 공기를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 공기가 머리 방향으로 날아가면 뇌 색전증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잘 끝났나 보네?”

“어, 다행히.”

“여기 더 빡센 환자 있는데 어떡하냐. 심장이 텅 비어 버린 응급 환자가 있는데?”

막대사탕을 까서 입에 넣던 송유주(흉부외과, R4)는 눈썹을 찡그렸다.

“뭔 소리야. 심장에 에어(air, 공기) 들어갔어? 누가?”

말을 말자.

난 여기서 도망쳐야겠어.

괜히 밤기운에 취해 감성 글을 썼다가 놀림만 받은 안경식은 낄낄대는 마동섭을 피해 당직실을 나섰다.

창밖으로 봄이 오고 있었다.

* * *

봄기운이 완연한 5월.

흉부외과 스테이션에 어색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

하얀색 가운을 입은 남자와 여자 그리고 연두색 재킷을 입은 여자.

세 명이 모여 인사를 나눈다.

“안녕하세요, 이번 달 렁(lung, 폐) 파트 인턴 김수정이라고 합니다!”

여자 의사가 밝은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한다.

깨끗한 의사 가운.

가운 주머니에 꽂힌 캐릭터 볼펜들.

그녀의 온몸이 ‘저는 인턴입니다!’라고 외치고 있다.

“네, 저는 2년 차 안경식이에요. 한 달 잘해 봅시다.”

안경식이 안경을 치켜올리며 마주 인사했다.

같은 옷이라고 볼 수 없는 구깃구깃한 의사 가운.

타이(tie, 수술할 때 시행하는 매듭) 연습의 흔적으로 보이는, 단추에 달린 수술용 봉합사.

당직을 섰는지 급하게 출근했는지, 면도 되지 않은 거무튀튀한 턱수염.

그의 온몸에서 흉부외과 2년 차 레지던트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월초부터 너무 꾸질꾸질하게 하고 나왔나?’

새삼 민망하다.

깔끔한 인턴을 앞에 두고 있자니, 자신의 행색이 신경 쓰인다.

하루 이틀 이러고 다닌 것도 아닌데 오늘따라 유독 민망한 건 왜일까?

문득, 마동섭이 했던 장난스러운 말이 떠올랐다.

―야, 언제까지 실연의 아픔에 빠진 남자 코스프레 할래? 면도라도 깔끔하게 하고 다녀라. 그래야 새로운 사랑을 텅 빈 심장에 담을 거 아냐? 낄낄낄!

갑자기 그 말이 왜 떠오르는지.

안경식은 헛기침한 뒤 얼른 옆에 있는 여성을 소개했다.

“크흠흠…… 여기는 우리 한상기 교수님 파트 PA 주세영 선생님이에요.”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인턴 선생님. 한 달 동안 잘 부탁해요! 호호호.”

인상이 좋은 두 아이의 엄마 주세영이 넉살 좋게 웃으며 인사한다.

그녀가 걸친 연두색 재킷 상의는 연국대병원의 전담 간호사(PA, Physician Assistant) 복장이다.

PA는 한상기 교수의 환자들을 외래에서부터 입원 병동까지 다양한 부분에서 챙겨 주는 일을 한다.

―교수 한상기

―레지던트 2년 차 안경식

―전담 간호사(PA) 주세영

―인턴 김수정

이렇게 네 명이 이번 달 한상기 교수의 환자들을 책임지게 된다.

“잘 부탁드립니다!”

인턴이 재차 인사하는 모습을 보며, 안경식은 생각했다.

‘긴장한 모양이네.’

하긴, 아직 5월이니까.

인턴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새로울 때다.

특히 흉부외과는 어려운 관문이니 더욱 긴장되겠지.

‘내가 잘 가르쳐 줘야겠다.’

그렇게 스테이션 앞에서, 조금은 어색한 첫 만남과 함께 새로운 달이 시작되었다.

* * *

5월 첫째 주 금요일.

“교수님, 수고하셨습니다!”

“그래요, 다들 수고해요.”

오전 회진이 끝났다.

한상기 교수는 연구실로 돌아간다.

회진이 끝나고 나면 레지던트, 인턴, PA는 회진 내용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진다.

교수님의 오더를 상기하면서 그날 진행해야 할 일들을 챙기는 시간이다.

인턴이 주치의를 하게 되는 흉부외과의 특성상, 이렇게 정리하면서 인턴에게 해야 할 일들을 한 번 더 짚어 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김종천 환자는 NPO(금식)하고 CT(영상 검사) 처방 내고, 푸시(push, 순서를 당기기 위한 전화) 해야 돼요. 인턴 쌤이 최대한 빨리 응급 처방 내고…….”

안경식이 환자에 대해 설명한다.

혹시라도 인턴이 못 알아들을까 봐, 최대한 차분히 얘기했다.

모든 것이 ‘빨리빨리’ 흘러가야 하는 야생의 흉부외과에서, 그는 다소 예외적인 성격을 가진 레지던트였다.

“넵, 알겠습니다. 넵, 넵.”

타다닥―

인턴 김수정은 바로 키보드를 두드려 처방을 낸다.

인턴이라 헤맬 만도 한데, 나름대로 빠릿하게 잘 따라온다.

사회 초년생답게 <넵>을 연발하며 안경식의 말을 잘 경청하고 있다.

“CT실 푸시는 제가 할게요!”

PA 주세영이 전화기를 든다.

주치의 경험이 부족한 인턴을 도와주는 일이 담당 PA의 주요 업무이기도 하다.

그렇게 세 명은 꽤 순조롭게 소통하며 일 처리를 해 나갔다.

“정리는 다 된 것 같고, 당장 급한 건 없죠? 오늘은 환자들도 스테이블(stable, 안정적) 한 것 같고, 여유 있으니까…….”

안경식은 시계를 확인했다.

매주 금요일은 한상기 교수의 수술과 외래가 모두 없는 날이라 비교적 여유 있는 하루를 보낼 수 있다.

“같이 잠깐 지하에 카페 갈까요?”

“좋아요! 인턴 선생님도 같이 가실 거죠?”

“넵!”

환자 명단을 들고 있던 인턴 김수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일이 익숙하지 않아 여유가 많지 않은 인턴이지만, 모닝커피를 즐길 수 있다는데 빠질 수 없다.

“갑시다.”

드르륵―

안경식이 의자를 밀고 일어선다.

힘든 한 주의 마지막 날 찾아온 여유 때문일까?

안경식의 표정이 밝다.

김수정 인턴도, 주세영 PA도 산뜻한 기분으로 뒤따른다.

곧 그들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지하에 있는 커피숍으로 향했다.

벚꽃 시즌은 이미 지났지만, 아직 카페 인테리어에는 연분홍색 꽃잎이 가득 달려 있었다.

“저는 아아요.”

“인턴 선생님은요?”

“저는 커피 말고…… 음…… 뭐 먹지?”

“고민되시면 제가 골라 드릴까요?”

“아, 넵!”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랑, 딸기바나나 주스 둘 주세요.”

안경식이 주문하고 카드를 점원에게 건네자 PA가 농담을 건넨다.

“올~ 메뉴 정해 주고 카드 내미는 남자. 멋있는데요?”

“하하…….”

“그런데 안경식 선생님은 맨날 주스만 시키네요? 커피 시키는 거 못 본 거 같아요.”

“아침도 못 먹었고, 저는 카페인 들어가면 밤에 잠이 안 오더라고요. 저는 카페인이 안 받는 몸이라…….”

“아, 저도 그래요!”

마지막 말은 인턴 김수정의 것이었다.

뜻하지 않은 공감대가 생겼다.

안경식은 멋쩍게 웃으며 그녀와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누었다.

비록 초면에는 서로 어색했지만, 며칠 일하다 보니 조금씩 대화가 자연스러워지고 있었다.

“그나저나, 인턴 쌤은 어때요? 흉부외과에서 주치의 해 보니까 힘들지 않아요? 한 주 어땠어요?”

자리를 잡고 앉은 안경식이 물었다.

경험이 많지 않은 인턴들에게, 흉부외과에서 주치의 역할을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일 테니까.

그러자 인턴 김수정이 조심스레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아직도 좀 어렵긴 한데요. 그래도 선생님이 많이 도와주셔서 생각보다는 할 만해요.”

“저요?”

“넵.”

안경식은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다 되물었다.

“내가 도와준 게 있었나?”

“드레싱(dressing, 상처 소독)도 직접 챙겨 주시고, 뭐 물어보면 바로바로 답 주시고……."

“아 저번에 김병섭 환자? 그 환자 운드(wound, 상처)는 내가 꼭 봐야 해서 드레싱 한 건데…….”

“매일 잘 알려 주시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수정은 생긋 웃으며 감사함을 표현한다.

안경식도 멋쩍게 웃는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

뭐냐, 이 분위기는?

도로 어색해졌다.

그런데 불편한 어색함이 아니라…… 뭐랄까, 조금 간질간질한 어색함이다.

대화가 끊기자,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PA 주세영이 끼어들었다.

“맞아요, 단톡방에서도 선생님이 바로바로 대응해 줘서 요새 너무 좋아요! 안경식 선생님은 정말 성실하시다니까. 호호호!”

익숙하지 않은 칭찬 릴레이에, 안경식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말했다.

“해야 되는 일 한 건데 이렇게 띄워 주시네…… 아무튼 뭐 인턴 쌤한테 도움이 되었다고 하니 다행이에요, 하하하!”

지잉―

마침 울리는 진동벨.

안경식과 김수정은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제가 가져올게요!”

“아뇨, 인턴 쌤 고생하니까 앉아 계세요.”

“아녜요, 제가!”

“싸우지들 말고, 제가 갔다 올게용~ 호호호.”

주세영 PA가 눈웃음을 지으며 일어나자, 티격태격하던 안경식과 김수정은 머쓱해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 후.

셋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주일 동안 봤었던 환자들의 치료 과정 이야기, 한상기 교수님의 습관들, 흉부외과 다른 교수님에 관한 일화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수다에 빠져 있던 그때, 김수정 인턴의 전화기가 울렸다.

“넵, 인턴입니다. 지금 처방 넣을게요!”

“저도 오후에 있는 연구 미팅 준비를 해야 해서, 이제 일어설까요?”

역시 흉부외과에서 여유로운 시간이 오래 갈 리 없다.

짧은 티타임이 끝나고, 세 명은 각자의 일을 하기 위해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안경식이 문득 물었다.

“근데, 옛날 노래 좋아하세요?”

“넵? 어떻게 아셨어요?”

“아까 벨 소리가 옛날 발라드던데…….”

“아…… 저 옛날 노래 좋아해서 혼자 코인 노래방 가서 한 시간 동안 옛날 노래만 부른 적도 있어요!”

인턴 김수정이 웃으며 답했다.

이제 조금 편해졌는지, 자신의 사적인 얘기도 슬쩍 얹는 모습이다.

그러자 PA 주세영이 빼꼼 대화에 끼어들었다.

“인턴 쌤, 안경식 선생님 노래 잘하는 거 몰랐죠?”

“정말요?”

“그럼요. 작년 흉부외과 송년회에서 복면가왕 대회를 했는데, 안경식 선생님이 1등 했잖아요. 저는 초빙 가수 온 줄 알았다니까?”

“아니…… 뭐…… 하하하.”

안경식이 부끄럽게 웃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병원의 에티켓에 맞게,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말을 아꼈다.

그동안, 벨 소리로 들었던 노래의 멜로디가 안경식의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인턴이 나랑 공통점이 많네…….’

커피 못 마시는 거.

옛날 노래 좋아하는 거.

그리고 또…….

“…….”

그게 전부인가?

고작 두 가지뿐인데, 공통점이 엄청 많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안경식이 고개를 갸웃댈 때, 문득 귓가에 마동섭의 환청이 들렸다.

―야, 선한아! 두고 봐라. 안경식 저거 금사빠라서 금방 새로운 사랑에 빠진다니까. 내기할래? 낄낄낄!

‘아니야!’

안경식은 얼른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 버렸다.

절대 마동섭의 말대로 되지 않을 거라 다짐해 보는 그였지만…….

언제나 그렇듯 사람 마음이라는 게,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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