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226화 (226/241)

#외전 8화. 소년 근욱 (4)

“그래서?”

“헤헤…….”

“맞기만 했다고?”

“네.”

“아이고, 이눔아! 그래서 그렇게 눈탱이가 밤탱이가 돼서 왔다, 이거냐?!”

장팔봉은 황당해했다.

근욱의 얼굴에는 멍이 들었다.

다행히 선생님의 개입으로 싸움이 커지진 않았지만, 몇 대 얻어맞는 건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그 와중에도 근욱은 성질을 꾹 참고 주먹을 휘두르지 않았다.

오직, 장팔봉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잘했죠?”

“잘하긴, 이눔아! 너희 부모님 억장 무너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린다!”

“쳇, 기껏 참았더니.”

“내가 때리지 말랬지, 맞고 다니랬냐?”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한 대 칠 걸…….”

근욱은 입술을 삐죽이더니 중얼거렸다.

아무리 몸이 커졌다 해도, 저러는 걸 보면 아직 어린아이다.

장팔봉은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 껄껄 웃더니 뒷짐을 지고 먼 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산해라.”

“예?”

“수업 끝!”

“아, 사부님! 농담이에요, 농담! 진짜로 저는 얻어맞기만 했다니까요!”

“더 가르칠 게 없어서 그래, 이눔아!”

홀홀홀.

장팔봉은 도인처럼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동안 네가 배운 게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예? 그야 운동하는 법…….”

“아니지.”

장팔봉은 고개를 가로저은 뒤,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규칙을 세우고, 자기와 한 약속을 꾸준히 지키는 것.”

“……!”

“운동뿐만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힘을 얻은 것이지. 홀홀홀.”

“사부님…….”

“눈탱이가 밤탱이 될 때까지 얻어맞으면서도 2년 전에 했던 약속이 머리에 떠오를 놈이면, 앞으로 뭘 해도 잘할 것이다, 이눔아.”

작별을 이야기하는 듯한 뉘앙스가 느껴졌다.

근욱은 눈물을 글썽였다.

공설 체육관에 노을이 지고 있었다.

문득 깨닫는다. 장팔봉의 몸집이 처음 보았을 때보다 작아졌다는 것을.

아니…… 어쩌면 자신이 커진 것일지도 모른다.

“다음 달에 병원 문 닫는다. 나도 은퇴할 때가 됐지. 홀홀홀.”

장팔봉의 말이 이어졌다.

그는 병원을 닫고 자식들이 살고 있는 동네로 이사를 간다고 했다.

근욱은 놀랐고, 이해했지만, 한편으로 서운했다.

그동안 쌓아 온 정이 있는데 이렇게 갑자기 이별이라니?

“그럼 못 보는 거예요?”

“이눔아, 그동안 지겹게 봤으면 됐지. 전화번호 남겨 줄 테니 가끔 안부나 전해라.”

“끄응…….”

“그런 고로, 오늘부터는 특별 수업이다. 잘 들어라.”

근욱의 눈이 커졌다.

특별 수업? 대체 마지막으로 뭘 가르쳐 주시려고?

이어지는 장팔봉의 레슨은, 어찌 보면 평소와 비슷한 주제들이었다.

뼈, 근육, 신경―

하지만, 그 디테일한 내용들은 사뭇 달랐다.

근욱은 비장한 표정으로 새로운 지식을 흡수해 갔다.

* * *

한 달 후.

철인 중학교 체육관.

이곳에는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근욱 vs 중덕.

두 사람이 또다시 서로를 노려보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웬일로 날 불러냈냐?”

“아무리 생각해도 나만 얻어맞은 게 억울해서.”

“그래, 저번에 못다 한 거 마무리 지어 볼까? 여긴 방해할 사람도 없고.”

철인 중학교에는 한때 씨름부가 있었다.

지금은 폐부 되어 없어졌지만, 씨름장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두 사람은 씨름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것은 흡사―

작은 콜로세움이었다.

1 대 1의 결투!

중학교에서 이보다 더 피 끓는 이벤트는 없다.

소문을 들은 학생들이 점점 체육관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선생님이 개입하기 전에 얼른 끝내야 했다.

“항복 선언하는 놈이 지는 거, 맞지?”

“그래. 약속해라.”

“뭘?”

“내가 이기면 그동안 괴롭혔던 거 사과하라고. 나뿐만 아니라, 다른 애들한테도 다 사과해야 된다.”

“하.”

육중덕은 코웃음을 쳤다.

대체 무슨 자신감일까?

1 대 1로 붙자는 말도 어이없었는데, 갈수록 점점 어이없다. 가끔 이렇게 주제도 모르는 놈들이 있다.

더군다나, 저 눈빛.

자신감에 차서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눈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투웅!

두 사람이 격돌했다.

근욱은 아찔한 충격에 이를 악물었다.

체급 차이!

아무리 그동안 단련해 왔어도, 육중덕은 육중덕이었다.

키도 자신보다 한 뼘 이상 컸고, 몸무게도 거의 20kg은 더 나갔다.

“이길 줄 알았냐? 어좁이가 운동 좀 했다고, 이길 줄 알았어?”

콰악!

육중덕의 팔이 김근욱의 목을 조였다.

그동안 수많은 아이를 괴롭혀 왔던 그의 전매특허, 헤드록이었다.

직접 당해 보니, 무릎이 휘청 꺾일 정도로 압박이 심했다.

“네가 아무리 운동했어도 나한텐 안 돼, 새끼야! 약골로 태어났으면, 평생 눈치나 보면서 살아!”

“컥……!”

근욱은 정신이 몽롱해졌다.

경동맥이 눌리면 순간적으로 뇌로 가는 산소가 차단된다.

재빨리 목 옆으로 손을 넣어 공간을 확보했지만, 육중덕의 굵은 팔뚝을 뿌리칠 수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고, 입에 모래가 들어온다.

이대로 지는 건가? 역시 체급 차이는 어쩔 수 없나?

그런데 그 순간.

장팔봉의 꼬장꼬장한 목소리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눔아, 앞으로 맞고 다니지 말라고 가르쳐 주는 거니까, 잘 들어!

장팔봉의 마지막 수업은, 인간의 몸의 <약점>에 대한 것들이었다.

―사람 몸은 어쩔 수 없이 약한 부분이 많아. 가령 팔꿈치는 척골 신경(Ulnar nerve)이 지나가는 곳이야. 여기를 자극받은 사람은 손가락이 저리면서 마음대로 힘을 줄 수가 없지.

퍼억!

근욱이 중덕의 팔꿈치를 가격했다.

상대가 움찔하는 순간, 가까스로 헤드록에서 빠져나온다.

아직 여전히 상대방의 체중에 짓눌려 있는 상태였지만, 이번에는 근욱이 반격할 차례였다.

이번에는, 2년 동안 평소에 착실히 배웠던 힘의 원리가 떠올랐다.

―우리 몸의 가장 큰 근육들은 바로 가슴의 대흉근(pectoralis major muscle), 등의 광배근(latissimus dorsi) 그리고 허벅지의 대퇴 사두근(quadriceps femoris muscle)이다. 여기서 남자의 힘이 나오는 것이야!

다음 순간.

구경하는 학생들의 입에서 탄성이 튀어나왔다.

근욱이 중덕을 들어 올린 것이다.

대체 어떻게?

근욱은 외마디 함성을 내지르며 육중덕을 바닥에 눕혀 버린다.

모래가 하늘로 치솟는다.

근욱의 힘에 쓰러져 버린 중덕은 바닥에서 다시 일어나려 애쓴다.

하지만 이미 근욱은 그라운딩 자세로 중덕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 불꽃이 튄다.

―명치라 불리는 흉골(sternum)의 겸상 돌기(xyphoid process)에 대해서 설명해 줄까?

흉골의 맨 아래 손가락 한마디 정도 되는 튀어나온 뼈가 있는데, 튀어나온 모양은 사람마다 모두 달라.

그리고 이 주위에는 횡격막을 지배하는 신경인 횡격 신경(phrenic nerve)의 분지들이 지나가는데, 여기가 자극을 받으면 횡격막의 움직임이 순간 멈추게 되지.

횡격막은 우리가 숨을 쉴 때 반드시 움직여야 하는 곳이야.

그래서 여기에 자극을 느끼게 된 사람은 순간 숨을 쉴 수 없게 되고, 죽음의 공포까지 느끼게 돼.

함부로 치지 말어. 사람 몸에서 제일 치명적인 급소 중 하나니까!

그냥, 맞고 다니지는 말라고 알려 주는 거니까…… 홀홀홀.

꾸우욱.

근욱은 손으로 육중덕의 흉골의 겸상돌기 뼈를 누르기 시작했다.

육중덕은 순간 머리가 하얘지며 모든 움직임과 생각을 멈추었다.

제압당한다고?

내가?

살면서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일이다.

항상 또래들보다 압도적으로 덩치가 큰 그였기에, 오히려 이런 상황에 대해 면역력이 없다.

“더 할까?”

“헉, 허억…….”

“더 해?”

막상 본인이 직접 겪어 보니,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엄청난 공포였다.

“……그, 그만! 내가 졌다, 졌어! 졌다고!”

육중덕이 겁에 질려 다급히 외쳤다.

근욱은 그제야 힘을 풀고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평생 쓸 힘을 다 쓴 것처럼,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함성과 함께 아이들이 달려온다.

“와아아!”

“근욱이가 이겼어!”

“야, 얘들아! 김근욱이 육중덕 이겼다!”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그동안 육중덕의 괴롭힘에 시달리던 아이들은, 자신이 이긴 것처럼 기뻐했다.

더군다나, 한때 어좁이라고 놀림받던 김근욱이!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컸다.

그것은 흡사―

혁명이었다.

반격이었다.

모든 비실거리는 멸치들을 위한 희망의 불씨였다!

그 후로 김근욱은 모두의 입소문에 오르내리며 철인 중학교의 새로운 전설이 되었…….

* * *

“에이, 뻥 치시네.”

“크크크.”

“근욱 쌤, 일진 웹툰을 너무 많이 보신 거 아닙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계셔.”

“아니 진짜라니까요! 아직도 철인 중학교 가면 제 이야기가 전설로 내려오고 있을걸요?!”

헬스 동호회의 회식 자리.

근욱의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이 배를 잡고 웃는다.

원래 기억이라는 게 일부의 진실과 과장이 뒤섞여 만들어지는 법.

여자 의사가 한참 웃더니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아, 근욱 쌤, 진짜 웃겨. 아무튼 그때 은둔 고수 사부님의 가르침을 받고 운동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뭐 그런 말이죠?”

“그렇죠.”

“그래서 그다음은요?”

“그 뒤로는, 뭐…….”

별거 없다.

근욱은 고등학생이 되었다.

때마침 부모님의 근무지가 변경되어 경기도로 이사했다.

한때 사부라고 부르던 장팔봉 선생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자연스레 소식이 끊겼다.

가끔 생각이 나서 검색 엔진으로 찾아보아도, 같은 이름의 병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뭐, 아무튼 그때 그분에게 영감을 받아서 지금의 근욱 쌤이 탄생했다는 거네요! 의사라는 직업에도 꿈을 가지게 됐고요.”

“그렇죠.”

“그런데 왜 정형외과를 안 가셨어요?”

“저요?”

“어릴 때 존경하던 의사 선생님이 정형외과였다면서요. 근욱 쌤 피지컬도 좋으시겠다, 힘도 세시고. OS(Orthopedic Surgery, 정형외과)를 위해 태어나신 분 같은데!”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입을 모아 찬성했다.

“그러게요?”

“정형외과 김근욱! 너무 잘 어울렸을 것 같은데.”

“물론 소아과도 힘쓸 일이 은근히 많긴 하지만, 정형외과만큼은 아니니까요.”

“생각할수록 아쉽네. 우리 과 오시지 그랬습니까!”

근욱은 뺨을 긁적였다.

소아과를 선택한 이유?

아주 사소한 계기였다.

2년 전, 인턴 시절.

지독한 슬럼프에 빠져 있을 때, <참 잘했어요>라고 손등에 도장을 찍어 주던 어린 환자.

……하지만 그 기억을 말하기에는 어쩐지 쑥스럽다.

그래서 근욱은 어깨를 으쓱인 뒤 간단하게 대답했다.

“전 소아과가 좋습니다. OS는 남자밖에 없잖아요.”

“…….”

다들 할 말을 잃었다.

한편으로는 납득하는 분위기이기도 하다.

정형외과는 대표적인 남초 과다.

어느 정도냐고?

전국적으로 여자 전공의의 비율이 3퍼센트도 채 되지 않을 정도.

아무래도 업무 특성상 힘을 써야 하는 일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들고, 자르고, 조이고…….

괜히 정형외과 의사들이 스스로를 ‘목수’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물론 직업적으로 전망이 밝아서 인기가 많은 과이긴 하지만, 남초 특유의 분위기를 기피하는 사람도 있다.

“하긴 그래.”

“거긴 분위기가 좀…….”

“와, 듣는 OS 섭섭하네!”

“남자만 있다는 게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저긴 완전 군대라니까, 군대!”

“아, 남자들만 있는 게 어때서요? 우리끼리 얼마나 돈독한 줄 알아요? 모르면 가만히 계세요!”

한동안 웃고 떠드는 소리가 떠들썩하게 이어졌다.

그 사이, 근욱은 땅거미가 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옛날이야기를 하니 추억이 샘솟았다.

그는 산 너머 먼 곳을 향해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사부님…… 아니, 장팔봉 선생님.’

잘 지내시죠?

건강하십니까?

그때 선생님에게 신세를 졌던 그 소년은 선생님처럼 의사가 됐습니다. 물론 정형외과를 가진 않았습니다만…….

뭐, 그래도.

선생님이 저에게 그랬던 것처럼, 저도 어린 환자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을 의사가 되고 싶네요.

여름철, 꼬마들에게 커다란 그늘을 내어주는 듬직한 고목나무처럼요.

―1부 외전: 소년 근욱 完

*집필에 도움을 주신 정형외과의 신동협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본편에 묘사된 싸움은 과장과 허구가 섞여 있으니 절대 따라 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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