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225화 (225/241)
  • #외전 7화. 소년 근욱 (3)

    저녁 8시.

    공설 체육관에는 저녁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듬성듬성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장팔봉은 멀리서도 보였다.

    하얀 머리.

    하얀 트레이닝복.

    하얀 운동화.

    달밤에 체조하는 노인들이야 많지만, 그중에도 장팔봉은 유난히 눈에 띄는 편이었다.

    “선생님, 저 왔어요! 헤헤헤.”

    근욱이 슬쩍 다가갔다.

    국민 체조를 하며 몸을 풀던 장팔봉이 고개를 돌렸다.

    “진짜 왔구먼.”

    “그럼요! 매일 이 시간에 체육관에 계신다고 하셨잖아요.”

    “정말 운동 배우고 싶으냐?”

    “네!”

    “그럼 오늘부터 체육관에서는 사부님이라고 불러라.”

    “예, 사부님!”

    근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말씀이라면 뭐든 잘 듣는 근욱이었다.

    장팔봉이 말했던 대로, 발목이 나은 뒤 저녁 시간에 맞추어 체육관으로 부리나케 튀어나왔다.

    한편, 조금은 미심쩍기도 했다.

    아무리 장팔봉 선생님이 명의(名醫)라지만, 과연 운동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까?

    “시작하기 전에 해부학적인 문제를 하나 내 볼까? 정형외과에서 바라보는 인간의 몸을 세 단어로 표현한다면?”

    근욱이 자신감 있게 외쳤다.

    “머리 가슴 배!”

    “틀렸다, 이눔아! 곤충도 아니고.”

    “피, 땀, 눈물?”

    “그건 뭔 뜬금없는 소리인고?”

    “에이, 뭔데요? 그냥 가르쳐 주세요!”

    “<뼈>. <근육>. <신경>. 이 세 가지가 정형외과에서 다루는 전문 분야라고 할 수 있지. 홀홀홀.”

    펄럭―

    장팔봉은 트레이닝복을 벗었다.

    흰색 러닝셔츠 안쪽으로 탄탄한 몸이 드러났다.

    실전 근육.

    오랜 운동으로 다져진 몸.

    도저히 초로의 노인이라고 볼 수 없는 몸이었다.

    근욱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마치 오랜 세월 동안 수련을 거듭한 은둔 무림 고수를 보는 기분이었다.

    어쩐지 평소의 자세부터 보통 노인네가 아니다 싶었더니만, 몸이 저렇게까지 좋을 줄이야!

    “읏차!”

    타악!

    장팔봉은 철봉에 매달린 채 공중에서 수평으로 누웠다.

    간단해 보이지만, 결코 아무나 할 수 없는 동작.

    프런트 레버(front lever)라고 부르는 고난도의 자세였다.

    그걸 바라보는 근욱의 입이 쩍 벌어졌다.

    저게 노인의 몸으로 가능해?

    “세상천지에 내 마음대로 되는 것? 하나도 없다. 얼굴도, 키도, 부모의 재산도, 사람 사이의 인연도, 팔자도 내 맘대로 할 수 없지.”

    장팔봉은 아예 철봉 위에 올라탔다. 그가 바람개비처럼 몸을 휘두를 때마다 바람이 휭휭 불었다.

    “그런데 세상천지에 그나마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내 몸이니라! 운동을 한다는 건 그 즐거움을 깨닫는 것이지!”

    타악!

    그는 철봉에서 뛰어 착지했다.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넋을 잃고 보다가 박수를 쳤다.

    근욱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시나마 장팔봉을 의심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

    역시 최고!

    존엄 그 자체!

    그는 역시 정체를 숨긴 재야의 은둔 고수였던 것이다.

    “선생님, 아니 사부님! 저 운동 좀 가르쳐 주세요!”

    넙죽!

    근욱은 땅바닥에 개구리처럼 엎드렸다.

    장팔봉은 껄껄 웃으면서 답했다.

    “정말 운동을 배우고 싶으냐?”

    “예!”

    “꾸준히 할 자신은 있고?”

    “열심히 해 볼게요!”

    근욱은 절실했다.

    지금이야 인터넷에서 운동 방법을 찾아볼 수 있지만…….

    당시엔 그런 고급 정보를 얻는 것이 쉽지 않았다.

    잘못된 운동으로 오히려 몸을 망치는 경우도 허다했다.

    가령, 윗몸 일으키기를 하면 무조건 좋은 줄 알고 허리를 맨땅에 팍팍 튕기면서 허리뼈를 망가뜨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장팔봉은 달랐다.

    그는 인간의 몸에 대해 해박하고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한 가지 조건이 있다. 힘 세졌다고 애들 패고 다니지 말어. 학교에서 싸움질했다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바로 아웃이야!”

    “예!”

    근욱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매일, 매일.

    근욱은 공설 체육관에서 운동을 배웠다.

    처음에는 며칠이나 가겠나 싶었지만, 한 달이 되고 두 달이 되자 장팔봉은 은근히 놀랐다.

    “욘석아, 오늘도 왔냐?”

    “그럼요, 선생님!”

    “아이구, 귀찮아 죽겠네. 거머리 같은 녀석에게 제대로 빨대 꽂혔구먼.”

    툴툴대면서도, 장팔봉은 근욱에게 여러 운동의 원리들을 알려 주었다.

    “아하, 이렇게 하는 거구나.”

    “이놈아, 운동 시작한 지 석 달밖에 안 됐다. 어설프게 알 때가 제일 무식한 거야! 자만하지 말어!”

    “헤헤헤. 넵!”

    배움은 끝이 없었다.

    근육과 뼈의 움직임을 알게 되었다.

    근 성장의 원리를 알게 되었다.

    ‘먹는 것’과 ‘휴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게 되었다.

    턱걸이를 완벽한 자세로 여러 개 할 수 있게 되었다.

    평소 바른 자세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스스로의 몸을 이해하고, 가꾸고, 성장시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운동에 재미 붙였다고 욕심내지 말어. 네 나이 때는 잘 먹고 잘 자는 게 훨씬 중요하니까.”

    “네!”

    근욱은 성실했고, 장팔봉은 신중했다. 성장기의 성장에 방해가 되지 않고 자극이 되는 운동 위주로 가르쳤다.

    그렇게 계절이 바뀌고.

    2학년이 되고.

    3학년이 될 무렵-

    근욱이는 이제 더 이상 어좁이라고 놀림받지 않게 되었다.

    친구들은 어느새 다른 별명으로 그를 부르기 시작했다.

    “야, 김근육!”

    “팔뚝 좀 만져 보자!”

    “김근육! 나도 운동 좀 가르쳐 주라!”

    이때부터 이상하게 남자들에게만 인기가 많은 그였지만…….

    그래도 좋았다.

    하루하루가 새로웠다.

    일상에 활력이 생겼고, 대인 관계에는 자신감이 생겼다.

    무엇보다, 스스로의 몸을 싫어하지 않게 된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그리고, 한편.

    육중덕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 * *

    퍼억!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안경을 쓴 뚱뚱한 중학생이 비명을 지르며 복도로 주르륵 미끄러진다.

    “니 킥!”

    “아아악!”

    “엄살 부리지 마, 인마.”

    “뼈 맞았어, 뼈!”

    “웃기지 마, 너는 살밖에 없잖어! 얼른 안 일어나?”

    육중덕은 낄낄대며 학생을 괴롭혔다.

    1학년 때만 해도, 덩치 큰 초등학생이 교복을 입고 장난을 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선을 넘은 지 오래다.

    아무도 제지할 수 없는 장난이 폭력으로 돌변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3학년이 된 지금, 이제 그는 중학교에서 아무도 제지할 수 없는 폭군이었다.

    “이번엔 헤드록이다!”

    “아아, 아파!”

    “돼지야, 10초 안에 벗어나면 만 원 준다. 하나, 둘~”

    “컥, 컥!”

    육중덕의 우람한 팔뚝이 학생의 목을 쥐어짰다.

    복도를 지나던 학생들은 슬금슬금 그를 피했다.

    만약 그의 심기를 거스르면, 자신이 다음 타깃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그때.

    옆에서 나타난 누군가 육중덕의 팔을 덥석 잡았다.

    “그만해, 인마. 남의 반 복도까지 와서 뭐 하는 짓인데?”

    사아―

    주위가 조용해졌다.

    육중덕은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의 팔을 잡다니, 누군지 몰라도 용기가 대단하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며 험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그는―

    이윽고, 흠칫 놀랐다.

    ‘뭐야, 이놈?’

    어좁이 김근욱.

    그는 더 이상 어좁이가 아니다.

    키도 어느 정도 눈높이에 맞을뿐더러, 어깨도 제법 넓다.

    그동안 녀석의 몸이 커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가까이에서 몸을 맞대고 보니, 확실히 힘도 많이 세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새끼, 많이 컸네. 이제 나랑 맞먹으려 드네?”

    육중덕은 위협적으로 눈알을 부라렸다.

    하지만 근욱은 겁을 먹지 않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는 몰랐다.

    중학교 3년 동안, 근욱이 키운 것은 몸뿐만이 아니라 자신감이었다는 것을.

    “너보다 약한 애 괴롭히면 즐겁냐? 스파링 대상 찾으려면 체육관에 가든가 해. 나는 분명히 말했다.”

    근욱은 그렇게 말하고 등을 돌렸다.

    그런데 그때.

    퍼억!

    엉덩이에 무릎이 박혔다.

    몸이 휘청하고 꺾일 정도였다.

    근욱이는 욱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육중덕이 낄낄대고 있었다.

    “플라잉 니 킥이다, 새끼야.”

    “아, 진짜 이 씨…….”

    “억울하면 나랑 한판 뜨든가. 예전처럼 뼈 부러질까 봐 겁나냐? 어좁이 시절 생각나서 못 하겠어?”

    “이 새끼가 근데.”

    근욱의 눈에도 불꽃이 튀었다.

    복도는 순식간에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이곳 철인 중학교에서 두 사람은 남다른 피지컬로 유명한 쌍두마차였다.

    타고난 거구, 육중덕.

    노력파 몸짱, 김근욱.

    두 사람의 대결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대며 부풀어 오르는 대결이었다.

    “쫄았냐?”

    “에이 씨, 그래! 스파링인지 뭔지 한판 떠!”

    근욱이도 성질이 있다.

    도무지 못 참겠다.

    이 정도까지 도발당했는데 가만히 있자니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자신감도 있다.

    상대가 아무리 육중덕이라지만, 그동안 장팔봉에게 가르침 받은 운동 실력으로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

    ‘아차!’

    근욱은 그제야 장팔봉이 당부했던 말을 떠올렸다.

    오래돼서 잊고 있었지만, 처음 운동을 배울 때 들었던 말.

    ―힘세졌다고 애들 패고 다니지 말어. 학교에서 싸움질했다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바로 아웃이야!

    망했다.

    어떡하죠, 사부님?

    이미 싸움 났는데요?

    김근욱은 난감한 표정으로 자기 안면을 향해 날아오는 육중덕의 우람한 팔뚝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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