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화. 연서가 웃는 이유 (4)
“왜 또 불러내셨어요?”
2월 마지막 주.
인턴 생활이 끝날 무렵.
비상계단에서 연서는 다시 한번 이억준을 마주했다.
그는 초조하게 연서의 앞을 서성거리더니 물었다.
“진짜 마지막으로 묻고 싶어서.”
“죄송한데요, 선배님…….”
“진짜야? 그냥 튕기는 게 아니라 진짜로 거절하는 거라고? 내가 이렇게까지 너한테 진심을 표현했는데?”
연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진심이라는 말을 듣고 나니 좀 미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싫다는데도 계속 불편하게 눈치를 주는 것이 곤란했다.
그래서 더욱 정중하고 확실하게 거절해야겠다 생각했다.
“저번에도 확실히 말씀드렸고, 지금도 변한 거 없어요. 죄송하지만…….”
그때 억준의 입에서 격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X나 튕기네.”
“예?”
“소문이 사실이었네. 너 눈 X나 높다고 소문 다 났던데! 사실이었네, 사실이었어!”
뭐라는 거야?
연서는 눈을 깜빡였다.
자기가 거절당하면 상대 눈이 높은 건가……?
억준은 이미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후라 그런지,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내뱉기 시작했다.
“야, 네 얼굴이 영원할 것 같아?”
“예?”
“외모는 갈수록 가치가 하락하는 자산이야! 아직 어려서 감이 없나 본데, 높게 쳐줄 때 잘 생각해야지!”
“…….”
“그리고 솔직히 너 아나운서나 연예인만큼 예쁜 것도 아니야! 병원 안에서나 예쁘다는 소리 듣는 거지!”
와아.
안 되겠다, 이 인간은.
잠깐이나마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까 했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사람 면전에 대고 값어치 운운하는 가치관이 비루했고, 자존심 상했다고 상대를 깎아내리려는 성질머리가 여유 없고 못나 보였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뭐랄까, 기가 찬다.
안 그래도 없던 호감도가 바닥을 뚫고 한없이 내려간다.
그때, 비상계단의 문이 열리며 미화원이 청소 도구를 가지고 등장했다.
“아유 선생님들, 잠깐 지나갈게요.”
“아이 씨, 아줌마. 지금 중요한 얘기 하고 있는데!”
“예?”
“문 닫으라고. 안 들려요? 거, 일 있으면 나중에 하라고, 나중에!”
훠이, 훠이.
억준이 손짓했다.
마치 모기라도 내쫓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자 미화원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말씀들 나누세요, 선생님들.”
철컥―
비상문이 닫힌다.
억준은 후 하고 앞머리를 불어 올린 뒤 말했다.
“어디까지 얘기했지? 그러니까…….”
“방금 뭐 하신 거예요?”
“응?”
섬뜩했다.
연서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평소에 화 안 내던 사람이 내면 무서운 법인데, 지금 연서의 표정이 그랬다.
조금 전까지의 표정이 기가 찬 표정이었다면, 지금은 완전한 분노였다.
만약 눈빛에 무게가 있다면, 지금 그녀의 눈빛은 천근만큼 묵직하리라.
“의사가 상전이에요?”
“어?”
“의사들은 병원 안에서 다른 사람들한테 막 대해도 돼요? 자기 일 하고 있는 사람한테 함부로 말하고, 손가락질로 이래라저래라 해도 되냐고요.”
“……?”
억준이 당황해서 눈을 껌뻑였다.
살면서 이런 걸로 지적받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부잣집이라고 다 그렇게 자라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억준은 그랬다.
“아니…… 왜 뜬금없는 걸로 시비야? 저 사람들 그냥 우리 병원에서 돈 주고 일 시키는 사람들이잖아.”
“우리는 아니에요?”
“뭐?”
“우리도 병원에서 돈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에요.”
“아니, 저 사람들이랑 우리랑 위치가 같아? 너 진짜 X나 가식적인 애였구나?”
“하아.”
연서는 이마를 짚으며 시선을 돌렸다.
이걸 어디서부터 얘기해야 하나.
근본적으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주변의 노동자들을 자판기 버튼처럼 여기며 자라 왔던 사람과, 그런 노동자 손에 자란 사람의 차이일까?
“선배님.”
연서는 마지막 남은 친절함을 쥐어짜며 말했다.
“여자는 남자를 볼 때…… 외모, 능력, 재산, 뭐 그런 것도 중요하지만요. 주변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눈여겨봐요.”
물론 그녀도 이억준을 잘 모른다. 하지만 한 달 동안 같이 일하면서 본 것들이 있다.
업무를 지시할 때.
환자를 대할 때.
회식 자리에서 종업원을 대할 때.
주변인들을 대하는 태도들은 언제 어디서나 드러난다.
가령, 이억준은 간호사를 하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아직 일에 익숙하지 않은 신입 간호사들은, 그의 주요 먹잇감이었다.
작은 실수에도 잡아먹을 듯이 화를 내고 소리를 질렀다.
연서가 진아에게 ‘아무리 돈 많아도 안 되는 게 있다.’고 말한 것이 바로 이런 부분이었다.
“아니…… 그딴 게 중요하다고?”
“중요해요.”
“뭐?”
“저한테는 제일 중요해요.”
연서가 선을 긋듯 말했다.
이억준은 여전히 이해를 못 하고 황당해하는 표정이다.
어떤 사람들은 평생 모른 채 살아간다. 자신의 시선 바깥에도 존중받아야 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선배님, 제가 눈이 높은 게 아니라요.”
말할까, 말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연서는 억준의 벙 찐 얼굴을 향해 쐐기를 박았다.
“그냥, 선배님이 X나 별로인 거예요.”
* * *
“또 깠다며?”
“네.”
“무슨 말을 했길래 이억준 얼굴이 시뻘게져서 돌아왔대? 이번엔 완전 잘 익은 토마토 같았다는데?”
곧 자초지종을 듣고 난 구진아는 화를 내며 펄쩍 뛰었다.
“웬일이야! 너한테 그런 말을 했다고?”
“저도 놀랐어요.”
“와아…… 그 인간 돈 많은데 여친은 못 사귀던 이유가 있었네. 자존심 상하니까 본색이 나오네. 잘 거절했다, 잘 거절했어!”
“저 싸가지 없다고 레지던트 사이에서 소문 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걱정하지 마. 이 일로 괜히 이상한 소문 내는 애들 있으면 내가 그냥 콱! 다 조져 버릴 거야! 어딜 우리 연서를!”
진아의 으름장에 연서는 픽 웃었다.
고마웠다.
헤어질 때가 되니 인턴 생활 내내 붙어 있었던 언니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이제 인턴 생활도 끝난다. 의사로서 새로운 인생의 장이 시작되는 것이다.
방을 정리하며, 연서는 말했다.
“1년 동안 고마웠어요, 언니.”
“으이구, 이리 와. 이쁜이!”
와락―
진아가 연서를 격하게 끌어안고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행복하자.”
“언니도요.”
“그리고 잘됐으면 좋겠다. 네가 좋아하는 걔랑.”
“…….”
연서는 진아의 어깨에 턱을 올려놓고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저도 잘됐으면 좋겠는데…… 과연 그런 날이 올까요?
하도 일, 일, 일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아무리 눈치를 줘도 모자라던데.
* * *
인턴 생활이 끝난다.
암센터에서 본관으로 이어지는 복도, 엘리베이터가 있는 코너.
언제나 바쁘게 뛰어다녔던 그 길을, 오늘은 조금 여유 있는 걸음으로 걷는다.
이른 새벽.
오늘도 일하는 사람들이 분주히 오간다.
병원에는 의사와 간호사만 있는 게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다양한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보조원.
미화원.
행정 사무직.
사회복지사.
연구원.
상례사.
식당의 조리사.
이송원.
보안 요원.
빠짐없이 다 열거하기 힘들 만큼, 많은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병원이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일하고 있다.
“아이쿠!”
와르르!
무언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린다.
연서가 고개를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조원이 실수로 옮기던 수액 백을 복도에 흘려 주워 담고 있었다.
워낙 양이 많아서 한참 걸릴 것 같은 상황이었다.
조금 도와줘야 하나, 싶었다.
그리고 그때.
탁탁!
새벽빛이 어스름히 들어오는 복도에 경쾌한 발걸음이 들렸다.
“안녕하세요?”
“아이고, 선생님. 안녕하세요?”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한 젊은 의사가 보조원에게 고개를 숙여 다가갔다.
약간 허여멀건 얼굴, 헝클어진 머리. 구깃해진 가운.
아는 뒷모습이다.
연서가 좋아하는 뒷모습이기도 했다.
남자가 옆에 쪼그려 앉자, 보조원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휴, 제가 해야죠! 놔두세요, 선생님.”
“저 지금 안 바빠요.”
“그래도 귀한 손인데 이런 잡일 하시면 안 되는데…….”
“빨리 정리되면 좋잖아요. 이쪽에 담으면 돼요?”
“예, 예.”
남자는 조금 건조하지만 부드러운 말투로 말하며 손을 바삐 움직였다.
조금만 봐도 알 수가 있다. 어떤 태도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인지.
이제 의사라는 위치에도 익숙해질 만도 한데, 저 태도만큼은 한결같다.
처음에는 단순히 어리숙함이라 생각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에게 병원의 길을 묻던 첫인상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땐 그게 재미있고,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연서는 그 모습을 마음 깊숙한 곳에 하나하나 담게 되었다.
“다 됐다.”
“아휴, 감사해요.”
“몇 층 가세요? 홀수 층 가시나요? 여기 엘리베이터 온 것 같은데.”
남자는 일어나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 주었다. 바쁜 일상이 몸에 밴 듯한 동작이다.
보조원은 연신 고맙다고 웃으며 식사는 하셨냐 등의 질문을 주고받았다.
아마 그동안 오가면서 몇 번 인사를 나눈 사이였던 모양이다.
그렇게 보조원이 카트를 끌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진 뒤.
연서는 조심스레 다가가 남자의 등짝을 때렸다.
“선한 오빠!”
찰싹!
타격감이 오늘따라 찰지다.
인턴 동기, 신선한이 놀라서 뒤를 돌아본 뒤 궁시렁거린다.
“연서였구나.”
“굿 모닝!”
“넌 내 등에 원수졌냐?”
“히히.”
“오늘도 신났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너는 늘 그렇게 웃더라.”
“제가요?”
연서는 자신의 볼을 어루만졌다.
어느새 축 처져 있던 자신의 입꼬리가 헤실헤실 올라가 있었다.
언제부터 웃고 있었지?
모르겠다.
그냥 웃자.
그러자 선한은 영문을 모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또 웃어?”
“그냥요.”
연서는 계속 웃었다.
자연스럽게 지어지는 웃음을 감출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아마 이 남자는, 내가 항상 이런 표정이라고 생각하겠지.
사실 요새 웃을 일이 별로 없는데도, 선한을 만날 때면 항상 이렇게 웃음부터 먼저 튀어나왔다.
이건 무슨, 바보도 아니고.
“그나저나 이제 몇 주 후면 우리도 드디어 레지던트네요!”
“그러게. 저번 주에 새로운 인턴들 OT 했다고 하던데. 벌써 1년이 지났네.”
“류명인이 인턴장이라서 거기 가서 한 40분 발표했다고 하던데요?”
“걔는 말 좀 줄여야 돼.”
“크크, 그러게요.”
“앞으로 흉부외과에서 걔랑 같이 4년 지내야 하는데 벌써 귀에서 피 나와.”
연서는 깔깔 웃었다.
별것 아닌 농담도 웃겼다.
한편으로, 이제 본격적으로 과(科)가 달라진다는 실감도 났다.
모든 것은 변한다.
사람의 위치도, 사람 사이의 관계도.
지금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당장 1년, 2년이 지나면 소식이 끊기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오빠.”
“왜?”
“우리 오래 볼 수 있을까요?”
“갑자기 무슨 말이야?”
“그냥…….”
잠시, 연서는 말을 멈추고 생각했다.
앞으로 이 사람과 어떤 관계가 될지는 자신도 잘 모른다.
맺어지거나.
끊어지거나.
관계가 달라지더라도.
설령 그러다 언젠가는 멀어지게 되더라도…….
“그냥, 오래 보고 싶어서요.”
선한은, 연서가 언제나 오랫동안 시선 안에 담아 두고 싶은 사람이었다.
- 1부 외전 : 연서가 웃는 이유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