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화. 연서가 웃는 이유 (1)
연서는 웃지 않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사회생활을 위해 항상 웃는 얼굴로 다니곤 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인턴 1년 과정의 막바지.
연서는 예전만큼 자주 웃지 않게 되었다.
특히 지금 같은 상황.
눈앞에서 느끼한 표정으로 꽃다발을 내미는 남자를 보고 있노라면 도저히 미소가 지어지지 않는다.
“이연서. 좋아한다.”
“…….”
“나랑 사귀자.”
연서는 한숨을 쉬었다.
몇 번째일까?
레지던트들의 고백을 받는 게.
인턴 근무가 끝나는 월말마다 긴장된다.
물론 누군가 내게 호감을 표한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매번 거절하는 것도 곤란한 일이었다.
“죄송한데요.”
연서는 고개를 들었다.
상대는 레지던트 3년 차, 이억준.
평소에 친분이 있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진료과의 선배이니만큼, 모질게 거절하기도 뭐했다.
최대한 정중히 얘기하는 수밖에.
“죄송하지만 저는 선배님이랑 사귈 생각이…….”
“아아, 알아. 무슨 말 할지.”
이억준은 손을 내밀며 웃었다.
입술 사이로 라미네이트 된 순백색 앞니가 가지런히 빛났다.
“너, 대학 시절부터 유명했잖아. 열 번 찍어도 안 넘어가는 나무였다고. 어차피 한 번 튕길 거 알고 있었어.”
그렇게 말하며, 이억준이 억지로 꽃다발을 들이밀었다.
“지금 당장 답하라는 거 아니니까 잘 생각해 봐.”
“아뇨, 꽃 다시 가져가 주세요.”
“다음 주까지는 대답해 줬으면 좋겠네. 나도 자존심이 있고 인내심이 많은 편은 아니라서.”
“아뇨, 전…….”
“다음 주에 보자!”
휘잉―
이억준은 자기 할 말만 마치고 사라졌다.
사람 말을 안 듣는 성격일까, 아니면 못 들은 척하는 걸까?
홀로 남은 연서는 비상계단에 선 채 눈을 깜빡였다.
“이건 또 어따 버리지…….”
한숨만 나왔다.
2월의 어느 날.
아직 겨울.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꽃들이 색화지 안에서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마치 봄이라도 온 양.
“…….”
연서는 꽃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깝다.
꽃은 예쁜데.
다른 사람한테 받았더라면, 제법 기뻤을 텐데.
* * *
하루가 저문다.
붉은 노을이 연국대병원 건물 너머로 떨어진다.
고단한 일과가 끝나는 시간.
하지만 여전히 병원에는 많은 사람이 일하고 있다.
응급실, 병동, 수술실…….
바깥이 어두워진 것도 모르고 일하는 사람들이 반딧불처럼 분주하게 병원의 불을 밝힌다.
“하암.”
저녁 10시.
연서는 밀려 있던 인턴 잡(job)들을 마치고 숙소로 향했다.
이제 일이 익숙해져서 손도 빨라졌지만, 오늘처럼 다음날 수술이 많이 잡힌 날은 정말 바빴다.
정규 수술이 끝나고, 여러 가지 동의서를 챙기고, 병리 처방과 검사지를 챙기다 보면 어느새 밤이었다.
인턴의 실수로 수술 진행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되기에, 아무리 말턴(1년의 수련 과정을 마쳐 가는 인턴)이라 해도 소홀할 수 없다.
뭐, 그런 생활도 이제 거의 다 끝나 가지만.
‘인턴도 이번 달까지네…… 정말 긴 1년이었구나.’
저벅, 저벅.
연서는 익숙한 복도를 걸었다.
자신이 입고 있는 수술복과 크록스 신발이 이제는 몸의 일부 같다.
오늘 같은 날은, 욕조에 몸 담그고 음악 들으면서 아무 생각 없이 푹 쉬고 싶은 기분.
하지만 당연히 병원 안에서 그런 사치가 허용될 리 없다.
“얼른 레지던트 되고 싶다.”
남들은 하루하루 나이 먹는 게 무섭다는데, 연서는 반대였다.
얼른 안정감을 찾고 싶었다.
선배들이 말하기를, 생활에 비교적 여유가 생기는 것은 보통 레지던트 2년쯤부터라고 했으니까.
하루라도 빨리, 퇴근 후 자신만의 공간에서 쉬고 싶은 그녀였다.
삑―
출입구에 카드키를 찍는다.
인턴들이 떠들썩하게 모여 있는 휴게실을 지나 작은 방으로 향한다.
숙소는 기본적으로 2인 1실.
이제 이 생활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해진다.
시원섭섭하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하고.
그런 생각들을 하며 방에 들어가자마자, 대뜸 룸메이트의 질문이 날아온다.
“또 고백받았다며?”
“예?”
“또 깠다며?”
연서는 당황스레 눈을 깜빡였다.
벌써 소문이 났어?
아무리 병원 안에 비밀이 없다지만, 이건 너무 빠르다.
“어떻게 알았어요, 언니?”
“이억준이 꽃다발을 가운 속에 숨겨서 비상계단으로 나갔다는 목격담이 있던데.”
“…….”
“히죽히죽 웃으면서 나갔다가 빈손으로 스테이션에 돌아와서는 간호사들한테 성질냈다더라.”
이층 침대 위에서 얼굴에 마스크팩을 덮은 룸메이트 구진아가 킥킥대며 말했다.
“과연 누구한테 까였길래 간호사들에게 화풀이를 했을까? 설마 교수님은 아닐 테고, 그 과에 레지던트는 남자들뿐이니까…… 후보는 너 하나밖에 없지.”
연서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물었다.
“소문난 거죠?”
“당연.”
“얼마나요?”
“온 병원에 쫘아악.”
“아, 진짜 싫다. 아아아아아아.”
풀썩!
연서는 침대에 얼굴을 박았다.
물론 이런 일이 드물지는 않다. 어느 집단을 가더라도 구설수가 일어나기 쉬운 관계들이 있으니까.
대학 새내기―대학 선배.
교회 동생-교회 오빠.
회사 신입―회사 사수.
등등.
사회 경험을 먼저 쌓은 남자들이, 어린 여자들에게 마음을 품는 경우는 셀 수 없이 많다.
병원에서는 인턴―레지던트 사이가 대표적이다.
특히 연서처럼 외모가 돋보이는 여자 인턴들은 남자 레지던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기 일쑤다.
‘몇 번째냐고, 이게.’
연서는 울고 싶었다.
인기 많아서 좋냐고?
좋기는 개뿔!
가시방석이 따로 없다.
그냥 평범한 인턴으로 열심히 일을 배우며 살아가고 싶었는데, 주위에서 가만 놔두질 않았다.
밥을 사 준다며 따로 불러내질 않나. 이상한 소문이 퍼지질 않나, 레지던트들끼리 신경전을 벌이질 않나…….
그냥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레지던트들 어장 관리하는 인턴>이라고 헛소문이 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연서가 더 이상 함부로 사람들에게 웃고 다니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으휴, 너도 참 피곤하겠다.”
구진아는 혀를 쯧쯧 차더니 금세 표정을 바꾸며 물었다.
“근데, 왜 깠어? 이억준이 좀 재수 없긴 해도 잘난 건 사실이잖아?”
“전 그 사람 잘 몰라요.”
“이억준, 대학교 시절부터 유명했어. 키도 크고, 집안에 돈도 많고, 얼굴도 그 정도면 나쁘지 않고.”
구진아가 2층 침대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며 수다를 쏟아 냈다.
“걔네 집 엄청 잘 산다니까? 할아버지가 건설사 회장이래. 걔가 서울에 가지고 있는 부동산만 백 채가 넘는다는 썰이 있던데? 그 정도 금수저면 경험이라 생각하고 한 번쯤 사귀어 보는 것도…….”
“아무리 돈 많아도 안 되는 게 있잖아요, 언니.”
연서는 잘라 내듯 말했다.
딱 부러지는 성격.
평소에는 강아지처럼 순하지만, 한번 선을 그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 성격.
그런 성격을 알기에, 구진아도 더 이상 오지랖을 부리지 않았다.
그 대신 피식 웃으며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으이구, 내가 너처럼 예쁜 얼굴로 태어났으면 돈 많은 남자 다 꼬시고 다녔다. 이억준이 뭐야? 오억준, 구억준, 다 꼬시고 다녔다.”
“싫어요.”
“백억준 정도면 사귈만 하지 않아?”
“음…….”
“천억준은?”
“그쯤 되면 느낌이 다르네요.”
“정말?”
“농담이에요. 그만 놀려요, 언니…….”
연서가 배게 사이로 앓는 소리를 냈다.
진아는 깔깔 웃었다.
그녀는 남의 연애사에 미주알고주알 참견하는 것이 낙이었다. 인턴들 사이에서 연애 솔루션 담당으로 유명했고, 그녀의 손에서 탄생한 커플만 올해로 다섯 쌍이다.
그런데…….
정작 바로 옆에 있는, 가장 예쁜 동기인 연서는 메마른 1년을 보내고 있다.
보는 눈이 까다로운 건지, 아니면 맘에 두고 있는 다른 사람이 있는 건지.
‘하여간 좀 신기한 애야.’
이연서.
인턴 첫 달에 그녀를 봤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다.
예쁜 얼굴.
친근하고 밝은 성격.
가만히 있기만 해도, 순정 만화처럼 얼굴 주위에 꽃이 피고 햇살이 떨어지는 듯한 분위기.
평생 실물로 본 일반인 중에서 가장 예쁜 아이가 바로 연서였다.
‘와, 무슨 CF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생겼냐? 저런 얼굴로 태어났으면 세상에 근심 걱정 하나도 없겠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다들 각자의 인생에서 싸우고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그녀는 연서를 관찰하며 알게 되었다.
게다가…….
마음속에 묘한 그늘이 있다.
얼핏 밝은 아이처럼 보이지만, 그렇지만도 않았다.
남들 눈에는 부러움의 대상이겠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묘하게 짠해지는 것이 연서라는 아이였다.
뭐라 딱 집어 설명할 수 없지만, 여하간 느낌이 그랬다.
“연서야. 고민 있으면 혼자 속 썩지 말고 언제든지 언니한테 말해. 알겠지?”
“고마워요, 언니.”
연서는 힘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표정마저 가련한 순정 만화의 여주인공 같다고 생각하는 진아였다.
그때, 책상 위에 충전 케이블을 꽂아 두었던 연서의 핸드폰이 울렸다.
―겸둥이♡―
구진아의 눈이 반짝 빛났다.
“겸둥이? 남자야?”
“네, 남자요.”
“오오, 뭐야 뭐야? 숨겨 둔 애인이 있었어? 그래서 네가 그동안 남자들한테 철벽을 그렇게…….”
“남동생.”
“친동생? 에이.”
진아는 김이 팍 샌 듯 돌아누웠다.
연서는 픽 웃으며 폰을 들었다. 곧 수화기 너머에서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주안아.”
연서의 목소리가 다정해진다.
열 살 터울의 남동생.
그러고 보니 오늘 미소를 지어 보는 것도 처음인 것 같다.
인턴 생활이 바빠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가족들은 연서에게 가장 소중한 일상의 버팀목이었다.
“웬일이야, 이 늦은 시간에 우리 막둥이가 누나한테 전화를 다 하고?”
하지만, 잠시 후.
연서의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벌떡 일어난 그녀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엄마가? 응급실?”
“어어?”
돌아누웠던 진아가 화들짝 놀랐다.
응급실이라니?
갑자기 무슨?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니, 통화하는 연서의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