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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218화 (1부 에필로그) (218/241)
  • #218 1부 에필로그

    연국대병원.

    대한민국 대형 병원 중 1위.

    그 타이틀에 걸맞게 수많은 의료진들이 종사하는 곳.

    이곳에는 매년 100명이 넘는 인턴이 사회생활의 첫발을 들이게 된다.

    "안녕하세요, 제주도에서 온 인턴 감규린입니다!"

    감규린은 신입 중 가장 눈에 띄는 인턴이었다.

    25세, 최강 동안.

    파릇파릇한 뉴페이스!

    하지만, 그 파릇파릇함을 오래 유지할 수 있을 만큼 병원은 만만치 않았다.

    한 달 후, 감규린은 말린 귤처럼 되고 말았다.

    "아이고, 우리 감귤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탱탱했었는데 푸석푸석해진 거 봐라."

    "귤이 죽어욧……."

    감규린은 숙소로 돌아와 앓는 소리를 하며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인턴 숙소는 기본적으로 2인 1실.

    룸메이트와 함께 지내는 하루하루가 새롭다.

    다행히 이야기가 잘 통하는 언니를 만나서 병원 생활에 위로가 되고 있다.

    "심장내과 첫날은 어땠어?"

    "어휴, 힘들어요. PCI(심혈관조영술) 시술 부위 피 안 나게 드레싱 하느라 손가락 쥐날 것 같아요."

    "맞아, 그렇다고 하더라."

    "소아과는 좀 어때요?"

    "야, 말도 마. 소아과는……."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는 시간.

    두 사람은 아늑한 숙소에서 한동안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레지던트 선생님들에 대한 이야기는 단골 소재였다.

    인턴들의 입장에서, 그나마 자신들의 처지와 가장 가까운 게 그들이었으니까.

    "소아과 레지던트 선생님들은 어때요?"

    그러자 언니의 얼굴에 히죽 웃음이 번진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인데, 그래도 다행이야. 나랑 같은 병동에서 일하는 소아과 레지던트 선생님이 엄청 착하고 재미있기로 유명하거든."

    "정말요?"

    "응. 아이들도 잘 보고…… 힘든 일 있으면 자기한테 말하라고 하는데 든든하더라니까."

    "우와아, 멋있다."

    "아까는 칭얼대는 애들 네 명을 동시에 들고 놀아 주던데?"

    "아이 네 명을 어떻게 동시에 들어요? 헐크도 아니고."

    감규린은 배를 잡고 깔깔 웃었지만 언니는 진지했다.

    "아니, 진짜라니까? 팔뚝이 내 허벅지만 해. 3년 차 선생님인데, 별명이 근욱몬이래."

    레지던트 3년 차.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존재들.

    인턴들이 옆에서 거울처럼 보고 배워야 할 사람들이기도 하다.

    어떤 레지던트와 함께 일하느냐에 따라 한 달의 컨디션이 결정된다.

    그런 의미에서, 소아과에서 좋은 레지던트를 만난 것은 꽤 행운이라고 볼 수 있었다.

    "특히 3년 차 선생님들이 인턴 시절부터 화려했다던데? 황금 기수라나 뭐라나…… 아무튼 전설적인 사람들이 꽤 많대."

    "전설이요?"

    "방금 말한 근욱몬 선생님도 그렇고, 지금 너 일하는 내과에도 한 분 있잖아."

    "아, 누구신지 알 것 같아요."

    감규린은 기억을 떠올렸다.

    내과의 비주얼.

    미친 미모로 유명한 사람이 있었지.

    오죽하면 의사가 아니라 연예인을 했어도 성공했을 거라고 다들 입을 모아 이야기하곤 했다.

    그런데 심지어 일도 잘하기로 소문났다고 한다.

    ‘그래, 나도 그렇게 멋진 의사가 될 거야!’

    감규린은 다짐했다.

    목표를 잃지 말자.

    초심을 되찾자.

    제주도에서 올라올 때, 서울에서 꼭 멋진 의사가 되기로 했었으니까.

    그렇게 혼자 열정을 되새기고 있을 때, 언니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뭐니 뭐니 해도 제일 유명한 레지던트는 그 사람이지."

    "그 사람이 누군데요?"

    "왜, 있잖아. 흉부외과에……."

    한참 듣다 보니, 문득 잠이 쏟아졌다.

    2층 침대 아래에서 이야기를 듣던 규린의 눈꺼풀이 꿈뻑꿈뻑 감겼다.

    * * *

    새벽 1시 반.

    고요한 당직실 침대 위 핸드폰에서 탄산소년의 4집 타이틀 곡이 울려 퍼진다.

    몇 년 사이 월드스타가 되어 버린 그들의 감미로운 목소리.

    하지만 지금 이 시간에 듣기에는 그리 반갑지 않았다.

    "아…… 나 방금 자려고 누웠는데!"

    감규린이 절규했다.

    그러자 윗층에 있던 언니도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한다.

    "야아, 벨 소리 좀 안 나게 해라……."

    "저도 그러고 싶어요……."

    "어떻게 귤이 너는 진짜 이런 타이밍에만 콜이 오냐. 방 어디에 CCTV라도 달린 거 아냐?"

    "그런가 봐요."

    감규린은 잠이 덜 깬 상태에서 통화 버튼을 누른다.

    그런데, 전화기 너머로부터 들려오는 중환자실 간호사의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인턴 선생님, 여기 7번 환자 EKG요, 급해요!>

    "갈게욧!"

    잠이 확 깬다.

    벌떡!

    조금 전까지 칭얼대며 잠투정을 부리던 감규린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일어났다.

    심장내과 중환자실 담당 인턴이니만큼, 위중한 환자들도 많다.

    감규린은 급히 2층 침대에서 내려와 신발 안에 발을 구겨 넣고, 방문을 열고 뛰쳐 나갔다.

    ‘으아아아, 무슨 일이지? 제발 큰일 아니었으면 좋겠다……!’

    지이잉-

    3층 중환자실에 들어갔다.

    오늘의 야간 당직 레지던트 선생님이 7번 환자 앞에서 서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본인이 EKG를 찍기 위해 리드(lead, 전극도자)를 붙이고 있다.

    타닥-

    감규린은 급히 환자에게 뛰어가며 말했다.

    "헥, 헥, 선생님! 제가 하겠습니다!"

    당황하는 감규린에게, 당직 레지던트는 긴 머리를 뒤로 넘기며 말한다.

    "아니, 신경 쓸 것 없어요. 급하면 가까이 있는 사람이 하는 거지."

    EKG 검사는 그리 힘든 검사가 아니다.

    원칙적으로는 ‘인턴 잡’으로 되어 있지만, 환자가 위급한 상황에서는 가까이에 있는 의료진이 검사하는 것이 맞다.

    물론 개중에는 끝까지 인턴이 하도록, 손끝 하나 안 대려 하는 악질 레지던트들도 있지만…….

    적어도 눈앞의 여자는, 그런 성격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아닙니다. 제가 할게요!"

    감규린의 손은 바쁘게 움직인다.

    그녀는 당직 레지던트 선생님과 함께 환자에게 EKG 리드를 붙였다.

    그런데, 슬쩍 보이는 당직 레지던트 선생님의 얼굴에서 빛이 난다.

    ‘우와…… 딱 봐도 알겠네. 이 사람이 바로 그 내과 대표 비주얼이구나!’

    너무 예쁜 거 아냐?

    여자가 봐도 반하겠네.

    화장기 하나도 없는 얼굴에서 이 정도 빛이 날 수 있나?

    <내과 의사 이연서>

    명찰에 그렇게 적혀 있다.

    감규린은 잠시 딴생각에 빠졌다가 모니터에서 울리는 알람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어휴, 이런 생각 할 때가 아니지. 환자한테 집중하자!’

    띠잉 띠잉-

    심장 리듬뿐만 아니라, 혈압까지 떨어지고 있다.

    인턴 1개월 차 감규린의 손은 떨려 온다.

    어떻게 하지?

    인턴 일을 시작하고, 눈앞에서 환자의 혈압이 이렇게 실시간으로 떨어지는 것은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어……."

    머리가 하얘진다.

    분명 이럴 때를 위해 공부했는데?

    예과 2년, 본과 4년.

    대체 뭘 배웠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머릿속이 백지처럼 하얘지는 순간, 당직 레지던트가 침착한 목소리로 외쳤다.

    "하트만(hartmann solution, 수액의 한 종류) 300 풀드립하고, 노르에피(norepi, 강심제) 더블링(doubling, 2배) 해 주세요!"

    당직 레지던트 이연서.

    그녀는 당황하지 않고 중환자실 상황을 지휘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곧 환자의 혈압이 안정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멋있다…….’

    이게 내과 3년 차의 침착함인가?

    감규린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몇 초 후,

    잠시 회복되는가 싶었던 환자의 혈압은 심전도 리듬의 변화와 함께 수직낙하한다.

    당직 레지던트의 목소리도 바빠졌다.

    "V. fib이에요!"

    브이핍.

    심실세동이라는 뜻.

    환자의 심실이 불규칙적으로 뛰고 있었다.

    "제세동기! 인턴 쌤은 컴프레션(compression, 가슴압박) 시작하고!"

    "네…… 네!"

    상황이 급박해진다.

    당직 레지던트는 능수능란하게 의료진들에게 각자 할 일을 지정해 준다.

    감규린은 환자의 위에 올라타 가슴압박을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최대한 정확한 자세와 리듬으로 가슴을 압박했다.

    그동안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제세동기를 가져온다.

    "200J 차지(charge, 충전)!"

    쾅-

    제세동 후 환자의 리듬은 잠시 정상으로 돌아온다.

    혈압도 조금은 회복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심장리듬에는 비정상적인 파형들이 계속해서 불규칙하게 나타난다.

    그러다, 이내 다시 심실세동 리듬으로 돌아가 버린다.

    "다시 200J 차지(charge, 충전)!"

    쾅-

    다시 환자의 리듬은 정상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마도 일시적인 것뿐일 터.

    분명 추가적인 조치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CPR 방송 내 달라 해 줘요!"

    간호사에게 오더를 내린 당직 레지던트는 혼잣말을 하면서 전화기를 든다.

    "Refractory V fib.인 거 같은데……."

    그러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한다.

    "흉부외과 당직 폰이죠? 저희 오늘 PCI 받은 환자인데, Refractory V fib. 이라 에크모 컨택……."

    그런데 그 순간.

    지이잉-

    중환자실 문이 열린다.

    감규린은 놀란 눈으로 문 쪽을 쳐다보았다.

    ‘뭐야, 아직 노티도 안 끝났는데……?’

    드르륵-

    몇 명의 의사들이 무언가를 끌고 우르르 심장내과 중환자실로 들어온다.

    기계와 함께, 여러 기구들이 들어 있는 카트도 보인다.

    ‘저건…… 에크모?’

    에크모(ECMO).

    환자의 심폐기능을 보조할 수 있는 비장의 수단.

    감규린은 이 기계를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곧, 한 박자 늦게 방송이 울려 퍼진다.

    방송이 울리기도 전에 에크모 삽입을 위한 흉부외과 팀이 도착한 것이다.

    모두가 놀란 상황.

    그 선두에 서 있던 남자가 말한다.

    "연서, 오랜만."

    "아니, 어떻게 전화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와요?"

    "아까 보니까 어레스트 날 것 같더라."

    "참 나……."

    "일단 환자부터 보자."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더없이 침착했다.

    "인턴 선생님, 잠깐 나와 볼래요?"

    "네, 네!"

    감규린은 화들짝 놀라며 물러섰다.

    뭐라고 해야 할까.

    분명 얼굴은 부드럽고 선하게 생겼는데…….

    묘하게 카리스마 있네.

    그런 생각을 하며, 감규린은 힐끗 명찰을 바라본다.

    거기엔 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특이한 이름이 쓰여 있었다.

    <흉부외과 의사 신선한>

    곧 에크모를 삽입하는 것을 보며, 감규린은 깜짝 놀랐다.

    새로 나타난 남자의 손은 능수능란했다.

    정말 레지던트 3년 차가 맞을까?

    섬세한 손길로 혈관을 찾아내고, 다른 레지던트들을 지휘하며 에크모를 삽입한다.

    ‘이 사람이 말로만 듣던 그 사람이구나.’

    감규린은 넋을 놓고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몇 분이 경과된 후.

    "에크모 잘 도는 것 같네요."

    "다들 수고했어요. 일단 앤지오(angio, 관상동맥 조영술) 다시 해 봐야겠어요."

    "그래요."

    "선한 오빠, 고생했어요."

    "연서 너도."

    상황이 금세 마무리된다.

    자칫 생명이 위험했던 환자를 살린 것이다.

    그런데도 남자의 목소리는 격양된 느낌 없이 평소와 똑같다.

    마치 당연한 일을 한 것처럼.

    조금 전까지 상황을 주도했던 두 의사는 이야기를 나누며 중환자실 바깥으로 향했다.

    감규린은 우물쭈물하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저, 선생님들. 죄송합니다! 아까 어버버하고 아무것도 못 해서……!"

    그러자 두 사람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규린을 쳐다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티 없이 맑은 미소들이었다.

    그중 남자가 말했다.

    "괜찮아요, 아직 인턴이니까. 방금 연서 선생님이 했던 것처럼 늦지 않게 연락 잘하고, 침착하게 대응하면 돼요."

    멋있다.

    감규린이 줄곧 꿈꿔 오던 멋진 의사의 모습.

    그녀는, 자신이 닮아 가고 싶은 의사의 모습들을 비로소 눈앞에서 찾은 기분이었다.

    그때 남자가 문득 생각난 듯 덧붙였다.

    "아, 그래도 아까 컴프레션은 잘하던데요?"

    "넵, 감사합……."

    감규린은 고개를 꾸벅 숙이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신선한 선생님은 내가 컴프레션 하는 모습을 못 보지 않았나?’

    그냥 해 준 말인가?

    어디 다른 곳에서 지켜본 것도 아닐 텐데.

    감규린의 얼굴에 해소되지 않을 물음표가 떴다.

    어쩐지, 그 물음표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았다.

    * * *

    "근데 선한 쌤."

    "예?"

    "어떻게 그렇게 위급한 환자가 생길 때마다 타이밍 좋게 나타나요?"

    중환자실 스테이션을 지나치는 길.

    간호사 선생님들이 궁금한 듯 묻는다.

    "그냥, 감이에요."

    나는 언제나처럼 웃으며 답했다.

    나에게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조금은 이상한 능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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