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217화 (217/241)

#217 매의 눈, 여인의 손, 사자의 심장(20)

같은 시각.

송유주는 홀로 소아 심장 중환자실 스테이션에 앉아 있었다.

바로 앞 베드에는, 방금 수술을 끝내고 나온 슬기가 안정된 상태로 잠들어 있다.

"……."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얼마 만이더라?

이렇게 격렬하고 큰 감흥을 받아본 것이.

백의신의 수술을 눈앞에서 지켜보고 보조했던 3시간 동안, 인생에서 무언가가 변한 기분이다.

‘그 정도로 높은 수준의 수술은 처음 봤어.’

자극이라는 것은 점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첫 절개.

첫 집도.

한때 가슴이 뛰었던 경험들은 색이 바랜 지 오래다.

앞으로 새로운 자극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 곧 치프 레지던트가 되고, 펠로우가 되고, 그렇게 몇 년이 지나면 교수가 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뻔하고 비슷비슷한 일상들을 견디는 일만 남았겠거니 하고 지루해하던 차였다.

‘망망대해에서 방향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그런데, 찾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이정표를.

이제 그녀는 바다 위에 있지 않았다.

단단한 길 위에 두 발을 디딘 듯한 기분.

더 멀리, 더 높은 곳으로 걸어가고 싶다는 충동이 느껴지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고생했다."

문득 옆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동기 마동섭이 웃고 있다.

송유주는 그가 내민 막대사탕을 받아 들었다.

"당 좀 채워라."

"땡큐."

"수술이 잘 끝나서 천만다행이네. 강당에서 지켜보는데도 손에 땀이 흐르더라. 아까 펌프 위닝 할 때는 식겁했잖아!"

"나도 놀랐어."

송유주는 1시간 전의 일을 생각했다.

‘터널 효과’.

무언가에 매몰되면 그 외의 것들이 보이지 않게 된다.

아마 수술실에서 산소포화도가 떨어지는 순간, 대부분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심장 수술에 문제가 있었구나’라고.

왜냐하면 국내 최초로 시연된 수술이었으니까.

마동섭은 피식 웃더니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그런데, 웃기는 게 뭔 줄 알아? 우리 중에서 흔들리지 않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지켜보는 놈이 딱 하나였어."

"누구?"

"누구긴 누구겠어."

"신선한?"

송유주는 어느새 인턴의 이름 석 자를 정확히 외우고 있었다.

"그래. 그놈이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하더라. 심장이 아니라 폐에 문제 있는 거 아니냐고."

"……."

"심지어 백의신 교수님이랑 거의 동시에 알아채던데?"

송유주의 눈썹이 올라갔다.

물론 냉정히 생각하면 어렵지 않은 판단이다.

펌프 위닝이 어려울 때 확인해야 되는 여러 가지 중 하나가 폐의 상태니까.

하지만 모두들 당황했을 때 흔들리지 않고 냉정한 판단력을 유지했다는 것은…….

"재밌지 않냐? 인턴 주제에."

"그러게. 인턴 주제에."

두 사람은 픽 웃었다.

언젠가 비슷한 대화를 한 적 있었다.

신선한이라는 인턴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도 그랬었지.

그게 어느덧 1년 전의 일이고, 이제 그 인턴은 흉부외과에 들어오게 된다.

"재미있네."

송유주는 그렇게 말한 뒤, 스스로의 말을 곱씹었다.

그래, 재미있다.

뻔하지 않다.

흥미로운 자극들이 자신을 매 순간 앞으로 이끈다.

마동섭은 송유주의 눈빛이 오랜만에 생기로 차오르는 것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앉아서 좀 더 쉴래?"

"쉬기는 개뿔. 지금 바로 소아과 병동 가서 씨라인(c-line, 중심정맥관) 잡아 줘야 해."

"오늘 백의신 교수님이 발표한 내용 들어 보니까, 유주 너는 앞으로도 편하게 일하진 못하겠던데?"

"아, 개 빡세."

송유주는 수술복을 툭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과는 이제 시작일 뿐.

큰 수술을 하나 끝냈다고 쉴 수 있을 만큼 흉부외과의 삶은 녹록치 않다.

"오늘 밤에 당직실에서 니가 좋아하는 그 족발이나 시켜 먹을까?"

"네가 사."

"콜."

"예비 1년 차들도 불러?"

"그래, 그러자."

곧 치프 레지던트가 될 두 사람은 중환자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생각했다.

앞으로 흉부외과 생활이, 아주 조금 더 재미있어질지도 모른다고.

* * *

2월 말.

겨울이 지나간다.

아직 봄이라고 하기에는 이르지만, 이제 예전만큼 춥지 않다.

근욱이와 나는 1년 동안 썼던 방을 정리해 나갔다.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짐들을 종이 박스에 넣으니 숙소가 금세 휑해졌다.

"드디어 서로에게서 해방인가?"

"누가 할 소릴."

"우리 그동안 오피스 부부처럼 붙어서 지냈잖아. 떨어져 지내더라도 바람 피우면 안 된다, 선한아!"

"징그러운 소리 하지 마."

나는 들러붙는 근욱이를 떼어 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조금 아쉽기도 했다.

가족이 아닌데도, 1년간 이렇게 누군가와 가까이 지내 본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뭐, 앞으로도 자주 볼 거니까!"

"그래. 우리는 소아 심장 컨퍼런스에서 만날 수 있지 않겠어? 소아과랑 흉부외과의 접점이니까."

"흉부외과에서 잘 지내라!"

"그래, 너도 애들이랑 잘 지내."

"걱정 마라. 나는 소아과가 천직이다!"

근욱이가 씩씩하게 웃는다.

어느덧 새벽이 밝아 온다.

우리는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식당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동기들끼리 모여 밥을 먹는데,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번 백의신 교수님의 수술은 국내 최초로 시연된 수술이라고 하는데…… 딸에게 그 수술을 받게 하는 것이 두렵진 않으셨나요?>

곧 화면에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슬기의 보호자.

전국적으로 화제가 된 수술이었던 만큼, 언론에서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었다.

<당연히 두렵긴 했어요. 하지만 최선을 다해 주시리라 믿었고…….>

슬기의 엄마는 아기를 안은 채, 웃으며 덧붙였다.

<백 교수님뿐만 아니라 모든 선생님들께 감사해요. 슬기와 제가 함께 살아갈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수술 5일째.

내가 보았던 미래는 일어나지 않았다.

슬기의 운명이 바뀐 것이다.

대략 2주 후 슬기는 무사히 퇴원했고, 저렇게 보호자의 밝은 얼굴도 TV에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아마 앞으로도 건강하게 자랄 수 있겠지.

‘건강하렴, 슬기야.’

나는 미소를 지으며 화면 속 슬기를 배웅했다.

그 이후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그날 이후, 나는 미래를 본 적이 한 번도 없으니까.

한 달 전-

내가 슬기의 미래를 보았을 때.

분명 슬기를 살릴 수 있는 가능성은 ‘제로’였다.

빛 한 줄기 없던 공간에는 어두컴컴한 미래들뿐.

하지만 나는 결국 백의신이라는 카드를 이용해서 미래를 바꾸었다.

그 이후로 한 달이 넘도록, 나에게 예지몽은 찾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혹시 그 이후로 능력이 없어진 건가?’

잘 모르겠다.

아직은 확실치 않다.

단순히 주변에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만약, 미래를 보는 능력이 사라진 거라고 한다면…….

‘좀 아쉽긴 하네.’

시원섭섭하달까.

밥을 먹거나, 잠을 자거나, 미팅을 할 때도 불청객처럼 찾아오던 ‘예지’들.

막상 그것이 사라지니, 신체 감각의 일부를 잃은 느낌도 든다.

‘이 능력은 대체 어디에서 왔던 걸까?’

정말 무언가를 잘못 먹어서였나?

그게 아니라면…….

백의신 교수와의 만남을 위해 하늘이 준 기회였을까?

알 수 없다.

마치 1년 동안 긴 꿈을 꾼 것 같다.

아마 이런 경험은 누구에게 말해도 믿어 주지 않겠지.

‘뭐, 상관 없어.’

능력이 사라지면 어때?

덕분에 1년 동안 많은 환자들의 미래를 바꾸었다.

그리고, 앞으로 의사로 살며 언제든지 떠올릴 수 있는 철칙도 하나 얻게 되었다.

‘어떤 환자라도, 쉽게 포기하지 말 것.’

확실한 죽음이 예정되어 있던 이슬기 환자.

그 미래를 바꾼 것은 나의 의지였다.

그러니, 앞으로도 그 의지를 잃지 않을 것이다.

의사는 환자를 살리는 사람이니까, 끝까지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어쩌면 ‘능력’은, 지난 1년간 내게 그것을 가르쳐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선한이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무것도 아냐."

"얘는 가만 보면 혼자 멍하니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니까."

"냅둬. 쟤 이상한 거 하루 이틀이냐? 하여간 우리 동기 중에 저놈은 1년 내내 제일 특이한 놈이었어."

근욱이와 중원이 형의 말을 웃어넘기며 숟가락을 드는데, 문자 한 통이 폰으로 도착했다.

[교육수련부]

연국대병원 전공의 1년 차 여러분들을 환영합니다. 기존에 원내에서 일하던 인턴 분들은 교육수련부 사무실에서 새로운 명찰을 받아 가시길 바랍니다.

"아, 맞아. 명찰 갈아야지!"

"밥 먹고 바로 받으러 가자."

의사 명찰.

금속 재질의 클립으로, 의사 재킷의 왼쪽 가슴 주머니에 달도록 되어 있다.

그동안은 소속이 정해져 있지 않기에, 단순히 ‘의사’라고만 적혀 있었다.

의사 신선한

→ 흉부외과 의사 신선한

이렇게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시간인 것이다.

"선한이 형!"

잠시 후, 교육수련부 사무실 앞에서 누군가 나를 불러세웠다.

류명인 녀석은 헐레벌떡 달려오더니 나에게 명찰을 척 내밀었다.

"바꾸실래요?"

"뭘 바꿔?"

"인턴 명찰 교환식 하자구요."

"……내가 네 명찰을 얻다 써?"

나는 질색했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서로의 명찰을 교환하는 동기들이 많았다.

뭐랄까, 풋풋하고 귀엽네.

서로에 대한 우정과 애정의 표현이랄까?

그만큼 인턴들끼리 많이 정들어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제 명찰 나중에 비싸게 팔 수도 있을걸요? 저 인턴 대표 수료자라구요."

녀석이 으스댄다.

참고로 얼마 전, 류명인은 인턴수료식에서 대표로 수료증을 받았다.

수료식이라고 해 봤자 조촐한 행사다.

왠지 백 명의 인턴들이 강당에 모여서 히포크라테스 선서라도 할 것 같지만…….

실제론 그런 거 없다.

인턴들이 다들 바쁘기 때문에, 한곳에 모일 시간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근욱이와 중원이 형이 녀석을 놀렸다.

"우리 수료식 언제 하긴 했냐?"

"그러게요."

"아, 형들. 관심 좀 가져 줘요! 저 심지어 1년 내내 인턴장이었다구요!"

"그런 게 있었어?"

"나도 몰러."

두 사람은 낄낄댔고 류명인은 씩씩대며 그 뒤를 따랐다.

나는 다시 한 번 1년간 가슴에 달았던 명찰을 쓰다듬었다.

<의사 신선한>.

이 명찰은 누구에게도 주지 않고, 평생 동안 간직할 예정이다.

‘……의사 신선한.’

나는 한 번 더 되뇌었다.

앞으로 내가 평생 의사로서 얼마나 오랫동안 일하게 될까?

아마도 수십 년.

하지만 아무런 수식 없이 <의사>라는 명찰을 가슴에 달고 일하는 것은, 그중에서도 딱 1년뿐일 것이다.

가장 찬란했던 20대의 일부.

청춘의 나날들.

다시 돌아오지 않을 빛나는 모든 기억들이, 명찰 하나에 담겨 있는 듯했다.

"선한 오빠!"

"다들 오랜만이네."

연서와 소담이었다.

반가운 얼굴이 하나둘씩 모인다.

동고동락했던 동기들.

이제 다들 뿔뿔이 각자의 길로 흩어진다.

각자 걸어가야 할 길로.

"우리 명찰 모아서 기념사진이나 찍을까요?"

"그럴까?"

"옆에 청진기도 놓자."

"크크, 멋 부리기는. 너희들 인턴 하면서 청진기 몇 번 써 봤냐?"

"아,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요."

"우리 꼬맹이는 이제 영상의학과 가면 청진기 쓸 일 진짜 없을지도 몰라."

"바보야, 너도 소아과 가면 이렇게 큰 청진기는 쓸 일 없을걸?"

"둘은 또 싸워? 그러다 정 들겠다."

"야, 그만하고 사진이나 찍자!"

우리는 함께 떠들고 웃으면서 명찰을 한자리에 모았다.

의사 신선한

의사 김근욱

의사 이연서

의사 함소담

의사 오중원

의사 류명인

"예쁘게들 좀 놔 봐."

"됐다. 손 치워요!"

"자, 찍는다!"

인턴 동기들은 왁자지껄하게 사진 버튼을 눌렀다.

나는 사진을 찍는 대신, 이 순간을 조용히 웃으며 마음속에 담아 두었다.

무엇을 위해 의사가 되었는지 헷갈릴 때.

내가 초심을 잃어버릴 때.

그때, 떠올릴 것이다.

지금 이 순간들을.

언제든.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 1부 完

다음 화에서 에필로그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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