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206화 (206/241)

#206 매의 눈, 여인의 손, 사자의 심장(9)

‘방법이 하나도 없다고?’

그럴 리 없다.

분명 어딘가 있을 거다.

하다못해 일말의 가능성을 의미하는 빛줄기 하나라도…….

그렇게 생각하려 했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빛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심해 속에서 발목을 붙잡힌 것처럼, 나는 어두컴컴한 미래의 한 장면으로 빨려들어 갔다.

"……에피 들어갑니다, 26분째입니다!"

"POD 5일째지? 소아용 에크모 준비됐나?"

소아심장 중환자실.

의사들의 절박한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한 줌밖에 안 되는 아이의 몸을 살리려 CPR을 하는 모습들이 예전과 똑같다.

나는 투명한 벽 너머에 있는 것처럼 애타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 분 후.

이미 에크모 삽입마저 불가능한 상태까지 온 아이를 두고, 펠로우 선생님이 나지막히 말한다.

"……그만하고, 안영욱 교수님 연락드려."

"……예."

소아심장 중환자실에 침묵이 흐른다.

애써 외면하려는 듯, 몇몇 레지던트들은 굳어 있는 표정으로 자리를 뜬다.

그리고 또 몇몇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숨이 멎은 아이를 바라보고 있다.

아이의 팔다리에는 미동조차 없고, 혈관을 확보하기 위해 수없이 바늘이 지나갔던 양쪽 허벅지에는 피멍만이 푸르게 보일 뿐이다.

그렇게 아기는 천천히 식어 가고 있었다.

-소아 환자의 죽음은 일생에 직면할 수 있는 가장 큰 비극이다.

지난 몇 주간 보았던 ‘선천성 심장질환의 수술적 치료’ 교과서의 첫번째 챕터에 나오는 문구였다.

그리고 지금 그 가장 큰 비극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환자의 죽음.

앞으로 수없이 겪게 될 일.

하지만, 결코 익숙해질 수 없을 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눈으로 보니 확인 사살을 당하는 기분이다.

‘결국 미래를 못 바꾼 건가?’

전에 보았던 것과 모든 상황이 똑같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현장에 나도 있다는 것이다.

복도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안경식 선생에게, 꿈속의 내가 손을 내밀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서, 선한 쌤……."

"일어나세요."

꿈속의 나는 안경식 선생님의 손을 잡는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미래의 내 심정이 어떤지는.

다만, 안경식 선생을 다독이며 작은 목소리로 읊조릴 뿐이다.

"……다들 최선을 다했잖아요."

모든 삶은 유한하다. 그리고 가끔은 지나치게 일찍 끝나기도 한다.

이슬기 환자의 짧은 생은 차가운 중환자실에서 끝을 맞이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은……?"

"아기 엄마가 바깥에서……."

무거운 대화를 나누려던 그때.

송유주 선생의 뒤를 따라, 슬기의 어머니로 짐작되는 한 젊은 여인이 중환자실로 들어온다.

눈은 충혈되다 못해 실핏줄이 터져 있는 것처럼 빨갛다.

방금 전, 바깥에서 모든 상황을 설명받았던 모양이다.

"우리 슬기, 마지막으로 볼 수 있을까 해서요."

"……정리가 거의 되었으니까, 잠시 여기서 기다려 주세요."

곧, 그녀는 마지막까지 슬기를 배웅하기 위해 다가갔다.

보호자의 떨리는 시선이 베드 위의 아기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 슬기, 마지막까지 많이 아파했을까요?"

그렇게 묻는 목소리가 떨린다.

의사들이 이럴 때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물론 아팠을 것이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큰 수술을 받았고, 마지막까지 힘들어했으니까.

하지만, 진실은 때로 지나치게 폭력적이다.

송유주마저도 이 순간만큼은 돌려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아플 일 없을 겁니다."

그 한마디에, 슬기의 엄마는 무너져 내렸다.

"우리 슬기…… 좋은 곳으로 갔겠죠? 거기서는 편하게 숨쉬고 있겠죠……?"

송유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곧, 하얀 포로 뒤덮인 이슬기 환자는 소아용 운반기구에 실려 중환자실을 빠져나간다.

"선생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슬기의 어머니는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졌고, 송유주 선생의 눈시울도 붉어진다.

그녀가 이렇게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모습은 처음이다.

수술 전부터 후까지, 중환자실에서 계속해서 슬기를 보아 왔을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송유주 선생의 큰 슬픔과 상실감을 느낄 수 있었다.

* * *

"……왜 말을 하다 말아?"

"예?"

"방금 뭐 궁금한 거 있는 것처럼 말했잖아."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다시 현재 시점이다.

송유주 선생이 내 앞에 있다.

조금 전 꿈속에서 눈물이 곧 터질 것 같았던 눈은 온데간데없고, 평소처럼 날카로운 눈매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수술 후 5일까지 과정에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건 뭘까요?"

"글쎄. 어떤 수술법으로 하냐에 따라서 다르겠지."

"역시 어떤 수술을 하느냐가……."

"아마 내일 회의에서 결정될 거야, 오늘 나온 이야기대로 흘러갈 확률이 높긴 하지만. 그리고 어떤 교수님이 어떤 수술을 하든 합병증은 일정 확률로 발생할 수밖에 없어."

알고 있다.

내가 감히 개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해야 하는 걸까?

물론 꿈에서 본 대로라면, 슬기를 살릴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하지만 나는 마지막 실낱같은 가능성을 고집스럽게 붙잡고 있었다.

……무언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 일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 * *

D-2.

슬기의 수술이 이틀 남았다.

폭탄의 심지가 타들어 가며 점점 짧아지는 것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기분이다.

바로 오늘 오후 5시 회의에, 이슬기 환자의 수술이 최종적으로 결정될 것이다.

‘그런데 백의신 교수님은 왜 안 보이지?’

이날 아침까지도 백의신 교수님의 모습은 소아심장 중환자실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마동섭 선생님, 백 교수님은 병동이랑 중환자실에서는 잘 안 보이시네요? 바쁜 일이 있으신가 봐요?"

"저기 계시네."

"예?"

나와 함께 프리 회진을 돌던 마동섭이 턱짓으로 병실 한쪽 편에 놓여 있는 TV를 가리켰다.

‘백 교수님?’

TV 속.

백 교수님은 아침 프로그램에 등장해서 인터뷰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교수님이 왜 저기서 나와?’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마동섭이 덧붙였다.

"어제도 대외활동 때문에 바쁘셨대. 혹시 닥터테이너라고 들어봤어? 그런 거 하시려고 하는 걸지도 모르지."

닥터와 엔터테이너의 합성어. 즉 TV에 자주 나오는 의사들을 뜻한다.

한때 그런 의사들이 쏟아져 나온 적이 있었지만, 전반적인 인식은 좋지 않다.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여 잘못된 의학 정보를 자극적으로 전달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쇼닥터라고 불리기도 하는 그런 의사들이었다.

물론 백의신 교수님이 그런 타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뭐, 솔직히 나 같아도 병원보다는 TV 나가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은데? 복귀하자마자 하루종일 수술실에 있는 것보다는."

그렇게 말하는 마동섭 선생은, 백의신이라는 사람에 대해 과도한 기대도 실망도 하지 않는 듯했다.

"이건 나도 들은 얘기인데. 당분간은 대외활동에 집중하시려나 봐. 보건복지부 쪽이랑 미팅도 잡혀 있으시다고 하더라고."

"……."

"그리고 우리 병원 서쪽 부지에 새로 짓고 있는 심혈관 센터 건물, 내년에 완공되는 거 알지? 아마 백의신 교수님 언론에 노출되면 그거 홍보 효과도……."

마동섭의 말이 이어졌다.

물론 의사가 TV에 나오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지만, 내 마음은 더 조급해졌다.

이 중요한 순간, 백의신 교수님은 병원 바깥의 일로 더 바쁜 것 같아 속이 쓰렸다.

"근데 너도 오늘 스케줄 있다고 하지 않았냐?"

"예. 홍보팀에서 영상 하나 기획했다고 해서요."

"크, 멋지다. 너도 이제 반쯤 연예인이네, 연예인이야!"

마동섭은 내 타들어 가는 마음도 모르고 히죽 웃으면서 내 등을 두드렸다.

‘어쩌면 딱 한 번, 기회가 있을지도 몰라.’

몇 시간 남지 않은 동안, 내가 이슬기 환자의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해 보자. 어떻게든.’

나는 계획을 세웠다.

‘0’을 ‘0.1’로 만드는 노력이라도 해 보지 않는다면, 나는 이 순간을 두고두고 후회할 테니까.

* * *

그날 저녁.

나는 병원장님의 특별 허가로 반나절 오프를 받게 되었다.

바쁜 흉부외과 인턴 생활 중에 황금 같은 휴식 시간이라 볼 수도 있었지만, 내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자기야, 얼른 타!"

"팀장님, 안녕하세요."

"인사할 시간 없다니까. 차 막혀서 촬영장 가려면 얼른 출발해야 돼요!"

나는 얼른 홍보팀장님이 끌고 나타난 승용차의 조수석에 올라탔다.

그리고, 흠칫 굳었다.

뒷좌석에는 이미 백의신 교수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대답은 없다.

자고 있는 건가?

나는 머쓱히 차에 올라탄 뒤 정자세로 앉아 안전벨트를 맸다.

‘백의신 교수님과 같은 차에 타게 되는 날이 오다니…….’

현실감이 없다.

인턴 합격했다고 가락시장에서 축하주 마셨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 후 1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

그중에서도 백의신 교수님을 만난 최근 며칠이 가장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내가 돌처럼 굳어 있는 사이, 홍보팀장님이 어색한 분위기를 환기하듯 외치며 차를 출발시켰다.

"자, 여기서 촬영장까지 한 30분 걸립니다! 가는 동안 신나는 노래라도……."

"정신 사나워요."

"넵."

홍보팀장은 머쓱한 표정으로 곧바로 라디오를 껐다.

극도로 예민한 신경.

백의신 교수님은 실제로 수술실에서도 음악을 틀지 않는 주의라고 들었다.

마취과 모니터링 기계에서 들리는, 산소포화도에 따라 높낮이가 달라지는 기계음만이 그가 수술방에서 주의깊게 듣는 소리라고 했었다.

그래서 가는 동안, 내내 차 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엔진 소리와 길 위를 미끄러지는 타이어의 마찰음만 요란하던 중, 적막을 깬 건 나였다.

"교수님."

"왜?"

"외람되지만 뭐 하나만 여쭤봐도……."

"외람되면 묻지 마."

지금은 타이밍이 아닌 걸까?

나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백의신 교수가 귀찮다는 듯 물었다.

"뭔데?"

"어제 소아 컨퍼런스에서 보니, TGA로 수술받아야 하는 아기가 한명 있었습니다."

"TGA?"

백의신의 목소리가 조금 달라졌다.

금방 생기가 돌아왔다고 해야 할까?

내가 알던 그 목소리다.

조금 전까지 촬영을 앞두고 귀찮아하던 기색은 온데간데없다.

‘역시 백 교수님도 수술 얘기만 나오면 사람이 바뀌는구나.’

나는 마음속으로 조금의 안도감을 느꼈다.

승용차가 커브길을 도는 동안, 나는 빠르게 말했다.

"VSD와 PS가 같이 있어서 수술방법을 정하기가 어렵다고 논의를 했었고, 몇가지 수술법이 거론되었습니다."

"정답이 아직까지 없는 분야지, 거기는."

현대의학의 난제라 불리는 병.

수술과의 의사들이라면 열정을 보이지 않을 수 없는 화제였다.

백의신의 반응에 힘입어, 나는 그동안 공부한 것들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스탠다드로 여겨지던 Rastelli 수술도 생존율이……."

내 말에 의외로 막힘이 없자, 홍보 팀장이 눈을 치켜뜬다.

뒷좌석이라 얼굴이 보이지는 않지만, 백의신 교수 역시 흥미를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REV 수술법과 Nikaidoh 수술법 같은 경우에는……."

컨퍼런스에서 나왔던 세 가지 수술법의 장단점, 그리고 최근까지 발표된 연구 결과들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직 1년 차도 되지 않은 내 입에서 이런 이야기가 술술 나오는 것에 그는 분명 놀랐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수술 후 5일 만에 사망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이렇게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보다 더한 동기부여는 없다.

나는 내 힘으로 한 명의 목숨을 구해야만 했다.

잠시 후, 내 말을 듣고 난 뒤 그의 입에서 나온 다음 질문은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네가 집도의라면 어떻게 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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