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203화 (203/241)
  • #203 매의 눈, 여인의 손, 사자의 심장(6)

    "……?"

    별안간 회식 장소에 적막이 감돌았다.

    백의신 교수가 떨어트린 술병이 산산조각 난 채 바닥에 구른다.

    곧 종업원들이 달려와 술병 조각들을 순식간에 치웠다.

    "손님, 다치셨어요?"

    "아뇨, 죄송하게 됐습니다. 이게 왜 갑자기 미끄러졌을까?"

    그는 짧게 사과한 뒤 우리를 향해 말했다.

    "봤냐? 너네한테는 아직 술도 따라 주지 말라는 건가 보다. 갑자기 술병이 미끄러지는 거 보니까."

    "……."

    "거기 소주 새 거 하나 가져와 봐."

    콸콸-

    공손히 술잔을 받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술이 잔에 가득 차다 못해 넘쳐흘렀다.

    취하신 걸까?

    아니,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다.

    백의신 교수님의 얼굴은 평소와 똑같고, 목소리에도 전혀 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많이 줬나?"

    "아닙니다."

    "넘치는 사랑으로 받겠습니당~!"

    신상미의 싹싹한 말투.

    물론 백의신의 철벽같은 무표정을 뚫는 데는 실패했다.

    머쓱해진 우리는 고개를 돌려 술을 들이켠 뒤, 인사를 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몇 분 후.

    백의신 교수는 바깥으로 향했다.

    아무 말 없이, 벌떡 일어나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주인공이 사라진 회식 자리에서 모두들 어리둥절하고 있었고,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마동섭 선생이 조심스레 우리에게 손짓한 뒤 속삭였다.

    "아까 무슨 일이야?"

    "백 교수님이 술병을 떨어트리셨어요."

    "혹시 너희들이 뭐 실수해 가지고 화나서 술병 집어던지신 건 아니지?"

    "헉…… 그런가? 아까 제가 너무 재수없게 콧소리 섞었나 봐요! 어떡해?"

    겁먹은 듯한 신상미의 뻘소리에 나는 간단히 덧붙였다.

    "그냥 손이 미끄러지신 것 같아요."

    "그래? 그런 거면 다행이고."

    마동섭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어느 술자리에서나 흔하게 일어날 수 있는 해프닝.

    유난스럽게 여길 것도 없었다.

    그런데 몇몇 사람들은 은밀한 시선으로 무언의 대화를 주고받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렇게 회식이 마무리되고 난 뒤, 모두 몇 그룹으로 나뉘어 택시에 올라탔다.

    이비인후과를 돌고 있는 류명인도 한 박자 늦게 합류하여 우리와 함께했다.

    "아휴, 소화 안 돼."

    "내가 뭐 먹었는지도 모르겠어."

    "회식이고 뭐고 다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인턴들끼리 놀 때가 맘 편하고 좋았지."

    나, 신상미, 그리고 류명인.

    예비 1년 차들만 남게 되자 긴장이 풀렸다.

    택시가 출발하자마자 우리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일제히 숨을 내쉬었다.

    곧 뒷좌석에 앉은 두 사람의 수다가 이어졌다.

    "근데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요?"

    "나는 백 교수님이 연국대병원 슈퍼스타인 줄 알았거든. 근데 왜 다들 불편해하는 것 같지?"

    "누나 같으면 편하겠어요? 교통정리 잘되고 있는 4차선 도로에 갑자기 탱크가 등장한 거나 마찬가진데."

    "어쭈, 류명인. 비유 좀 친다?"

    "물론 백의신 교수님이 한때 연국대병원 흉부외과의 최고봉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교수님들이 잘 이끌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복귀를 하셨으니, 교수님들도 생각이 많으시겠지."

    "그래, 맞아. 게다가 백 교수님 성격에, 옛날에도 다른 교수들한테 살갑게 대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

    일리 있는 말이다.

    교수와 제자 사이.

    갈굼과 핍박을 많이 받던 제자들도 언젠가는 교수 직함을 달게 된다.

    너무 심하게 당하다 보면, 한때 사제지간이었다 하더라도 그 관계가 썩 좋지만은 않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더 이상 눈치를 볼 필요 없는 위치에 서게 되면, 옛 스승인 노교수와 적당한 관계만을 유지하려 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그래서 몇몇 과의 의국 분위기가 안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우리 흉부외과도 그렇게 되는 걸까?

    "원래 한참 현역일 때도 백 교수님 너무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대요. 혼자만 국민스타 행세하면서, 주변 사람들은 엄청 쥐어짠다고."

    뒷자리 상석에 앉은 류명인이 알은체를 했다.

    물론 예비 1년 차인 우리는 알 수 없다. 윗선에서 어떤 이유로 백 교수를 꺼려 하는지.

    단순한 시기?

    옛날에 노예처럼 혹사당했던 기억들?

    아니면 정치적인 이유?

    뭐가 됐든, 조직 안의 사람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아까 술병 떨어질 때 깜짝 놀랐어요."

    "그치? 나 심장 떨어질 뻔했다니까. 그 소문이 사실일지도."

    "아하, 그 소문?"

    대화가 점점 의미심장하게 흘러간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나는 고개를 돌려 물었다.

    "무슨 소문?"

    "백 교수님이 몸에 이상이 생겨서 은퇴했었다는 소문이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듣는 정보다.

    "그런 말이 있었어?"

    "선한이 형은 진짜로 소문에 어두운가 봐요. 백 교수님 손 자유자재로 못 움직인다는 썰 못 들어 봤어요? 병원 떠나실 때 말 많았다던데."

    가슴이 덜컥했다.

    ……손에 문제가 있다고?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외과의사로서 치명적일 것이다.

    오죽하면 외과의사들 사이에서는 이런 오래된 우스갯소리도 있다.

    <문 닫히는 엘리베이터 잡으려면, 손 대신 차라리 머리를 들이밀어라.>

    그만큼 수술을 하는 의사들에게 손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어떤 수술이든 1mm의 오차로 결과가 달라지고, 환자의 생명까지 좌우될 수 있으니까.

    "소문에도 다양한 버전이 있더라구요. 허리디스크로 오래 못 서 있는다고 하더라, 목디스크로 고개를 오래 못 숙인다더라, 노안 때문에 수술이 힘들다는 썰도 있고…… 제일 유력한 건 TOS예요."

    TOS(Thoracic Outlet Syndrome).

    흉곽출구 증후군.

    흉곽 위쪽의 구조물로 인해 빗장뼈 아래 있는 혈관 및 신경이 압박을 받는 상태를 뜻한다.

    대표적인 증상은, 팔이 아프고 감각이 떨어지며 저리는 것.

    몸이 붓거나 피부색에 변화가 오기도 한다.

    때때로 손이 파랗게 변하며 차가워지는 현상도 생긴다고 들었다.

    ‘그러고 보니 백 교수님이 TOS 관련 논문도 쓰셨던 것 같은데…….’

    한때 백의신이라는 이름으로 검색하여 모든 논문을 훑어본 적이 있었다.

    역시 백의신.

    임상에서도 괴물 같은 실력을 발휘하는 사람이지만, 연구 실적도 상당했다.

    그 연구는 심장 파트와 일반흉부 파트를 넘나들었는데, 심지어 몇 개의 논문은 임팩트 팩터(impact factor, 논문의 등급을 나타낸 점수) 20점이 넘는 저널에 실리기도 했다.

    그 여러 개의 논문 중 하나가 TOS 관련 연구였던 기억이 난다.

    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고 있을 때, 류명인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튼 원래는 절대 수술실 못 들어가는 컨디션인데, 정년까지 한 자리 맡으려고 병원으로 복귀했다는 소문도 돌더라구요."

    류명인이 덧붙인 말이 결코 내게는 가볍게 들리지 않았다.

    "아마 뜬소문일 거야. 확인 안 된 이야기는 함부로 퍼트리지 말자."

    내 반응이 다소 날카로웠는지, 두 사람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참. 선한이 형 백 교수님 덕후였지."

    "진짜?"

    "선한이 형 앞에서 백 교수님 욕하면 안 돼요. 팬클럽 앞에서 아이돌 욕하는 거랑 비슷하다구요."

    "야, 팬질할 사람이 없어서 교수님 팬질을 하냐? 차라리 아이돌을 파! 요새 예쁜 애들 많더만!"

    신상미의 말에 나는 픽 웃고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적막한 도시의 밤풍경이 빠르게 뒤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인간 백의신’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그가 병원으로 돌아온 뒤, 며칠간 내가 들었던 주변인들의 새로운 평가들을 모아 보자면…….

    장갑만 끼면 성격이 변하는 사람.

    17번 방의 폭군.

    같이 일하기 꺼려지는 사람.

    의외로 관심종자.

    ‘죄다 부정적인 것들뿐이네.’

    나는 착잡한 기분을 느꼈다.

    바로 어제.

    나는 응급실에서 백의신의 실력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과감하게 환자의 흉강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출혈 부위를 정확히 막고 환자을 살려 내는 모습.

    그것은 줄곧 내가 동경해 왔던 이상적이고 멋진 모습이었다.

    ‘다른 사람들 말은 신경쓰지 말자. 백 교수님은 나에게 영웅이니까.’

    나는 그렇게 혼자만의 생각을 갈무리했고, 두 사람의 말은 이어졌다.

    "어쨌든 백 교수님 수술에는 꼭 들어가 봐야지! 그래야 나중에 도망치더라도 평생 말할 거리 생기는 거 아냐?"

    "아직도 도망칠 생각 해요?"

    "당연하지, 여차하면 튈 거라니까."

    "제가 볼 때 누나는 평생 말로만 도망간다고 하면서 흉부외과 지박령 될 것 같아요."

    "야,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아악, 뼈 맞았어!"

    뒷좌석에서 류명인이 쥐어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사실 나도 궁금했다.

    명성이 자자한 백의신의 수술.

    과연 어떤 수술을 하시게 될까?

    그리고 며칠 후.

    복귀 후 그의 첫 수술이 결정되었을 때, 모두가 놀라 버렸다.

    * * *

    "하지정맥류?"

    의국에 모여 있던 흉부외과의 레지던트, 펠로우들은 당황스러워하는 눈치였다.

    "혹시 몸풀기로 시작하신 건가?"

    "뭐, 그럴 수 있지."

    "뭐야, 너네 하지정맥류 수술 무시하냐? 그것도 얼마나 중요한 수술인데."

    "그렇긴 한데 아무래도 백 교수님한테는 어울리지 않잖아. 애초에 원래 그쪽 전문도 아니셨고……."

    다들 의아하게 여기면서 말을 아꼈다.

    하지정맥류.

    ‘하지’는 다리를 뜻하고, ‘정맥류’는 심장으로 향해야 할 정맥의 피가 역류한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원래는 일방통행이어야 할 도로에 역주행이 발생하는 것.

    그 결과, 압력을 이기지 못해 정맥이 확장되고 비틀리며 늘어나게 된다.

    이 질환이 발생하면, 다리 쪽 피부에 시퍼렇고 꼬불꼬불하게 혈관이 도드라져 보여 미관상 좋지 않을뿐더러 통증도 생길 수 있다.

    치료 방법은 여러 가지.

    그중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문제를 일으키는 정맥을 아예 제거해 버리는 것이다.

    ‘비교적 간단하게 없앨 수 있으니까.’

    근래에는 혈관 안에 얇은 레이저 라인을 집어넣고, 그 레이저를 통해 혈관을 태우는 수술 방법이 주로 쓰인다.

    물론 몇몇 튀어나와 있는 혈관들은 직접 칼로 피부를 찢고 혈관을 잘라서 없애기도 한다.

    다리에 있는 혈관이 왜 흉부외과의 소관인가 싶겠지만, 몸에 있는 주요 혈관을 다루는 것은 흉부외과의 일이다.

    흉부외과의 정식 학회명이 <흉부심장혈관외과 학회>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서 하지정맥류 하시다 개업하시려는 거 아니야 혹시?"

    실제로 흉부외과의사가 개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분야가 하지정맥류 분야이기도 하다.

    "그러게. 흉부외과 심장 파트 수술 중에서 제일 간단한 수술을 첫 수술로 고르시다니……."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

    계속해서 같은 수술이 반복되었고 의아함은 증폭되었다.

    -너네들 백 모 교수 어떻게 생각하냐?

    -이제 손 잘 못 쓴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럼 하지정맥류 수술도 하면 안 되는 거잖아

    -그냥 개업하기 전에 몸 풀러 온 것 같음

    -이미 한물간 거 아닌가?

    -다들 말 너무 심한 거 아님?

    -애초에 너무 명성이 과장됐어 ㅋㅋㅋ 전설은 개뿔, 혼자만 TV 나와서 멋있는 척하고 ㅋㅋㅋ 몇몇 악플러들 때문에 이제는 거의 쓰레기장이 된 익명 커뮤니티에서의 뒷담화는 보다 노골적이었다.

    [단독] 백의신 교수, 정상적으로 수술 못 하는 상태? 내부자 증언 이어져…….

    심지어 황색 저널에서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자극적인 보도자료를 내기도 했다.

    그렇게 그를 둘러싼 소문은 점점 기정사실화되는 분위기였다.

    ‘다들 말이 많네.’

    백 교수님에 대한 믿음에 흔들림이 없던 나에게는 덧없는 소리들로 보였다.

    하여간, 확실한 건.

    백의신 교수는 타고난 이슈메이커라는 사실이었다.

    일거수일투족이 이렇게까지 주목받는 의사는 아마 대한민국에 한 사람뿐일 것이다.

    * * *

    1월 셋째 주.

    겨울바람이 스산하게 부는 날이었다.

    외래를 통해서 소아심장 중환자실로 아기가 한 명 입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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