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99화 (199/241)
  • #199 매의 눈, 여인의 손, 사자의 심장(2)

    "에잇, 갑자기 웬 씨피알…… 커피 맛 떨어지게."

    타악!

    백의신은 거칠게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특유의 거친 말투 때문에 ‘CPR’이라는 단어가 욕처럼 들리는 것은 기분 탓일까?

    방송은 계속해서 다급히 반복되고 있다.

    "응급실에서 문제 생겼나 보네요. 그러고 보니 백 교수님은 이런 병원 방송도 오랜만에 들으시겠……."

    커피잔을 들던 병원장은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타닥-

    어느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백의신이 문 바깥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니 백 교수님, 어디 가세요?"

    백의신은 대답 대신 손가락으로 자신의 귀를 톡톡 두드렸다.

    병원장은 조금 생각한 후에야 그 뜻을 해석할 수 있었다.

    나 가는귀 안 먹었다. 방송 잘 들린다.

    그런 의미인 듯했다.

    애초에 CPR 방송을 듣고 달려가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백 교수님, 아직 복귀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일하시게요? 저희 레지던트랑 펠로우들이 어지간히 알아서 잘할 텐데……."

    "걔넬 믿으라고?"

    움찔-

    병원장의 관자놀이가 꿈틀거렸다.

    오래된 자격지심 때문일까?

    백의신이 가볍게 내뱉은 말이 결코 곱게 들리지 않았다.

    <내가 없는 동안 너희가 흉부외과 의사들 제대로 교육이나 시켰겠냐?>

    병원장의 귀에는 그런 뜻으로 들렸다.

    물론 지나친 해석일 수 있겠지만…….

    그동안 백의신의 성격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아무튼 하던 얘기는 나중에 마저 하자고!"

    "예, 복귀하시는 날 환영회는 하셔야죠?"

    "됐어. 환영은 무슨."

    덜컥, 쾅!

    원장실 문이 부서지는 줄 알았다.

    백의신은 마치 로켓이 발사되는 것 같은 기세로 뛰쳐나갔다.

    테이블 위에는 백의신이 남기고 간 커피잔이 찰랑거렸다.

    ‘저 양반, 성격 여전하네.’

    병원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백의신.

    몇 년 만에 보아도 괄괄한 성격은 변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재충전을 하고 와서 더 팔팔해진 것 같달까.

    이제 나이도 나이인 만큼, 적당히 주변 사람들과 녹아들면서 평범하게 커리어의 말년을 채워 주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그렇게 얌전히 있어 줄 리가 없지.’

    사람이 참 유별나달까.

    물론 그게 인기 비결이긴 할 것이다.

    병원 바깥에서는 대한민국 의료계의 상징처럼 여겨질 정도니까.

    하지만, 병원 안에서는 평판이 사뭇 다르다.

    백의신은 언제나 툭 튀어나온 못 같은 존재였다.

    누군가에게는 자기 혼자만 잘난 척하는 의사로, 또 누군가에게는 눈엣가시로 여겨지는 것이 현실.

    ‘오늘도 갑자기 찾아와서 이상한 제안이나 하고 말이야.’

    스윽-

    그는 커피잔 옆에 놓인 종이를 들었다.

    백의신이 자신의 계획을 거칠게 설명한 메모들.

    벌써부터 골치가 아팠다.

    전임 병원장이 가장 대하기 힘들어하던 인물이 바로 백의신이었다는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참 내, 아무도 오라고 안 했는데 갑자기 복귀를 한다고 해선……."

    누구도 듣지 않는 틈을 타서, 병원장은 내심 속마음을 꿍얼거렸다.

    어쨌거나 이미 피할 수 없는 일.

    대체 어디서 정보를 입수했는지는 몰라도, 몇몇 기자들이 벌써부터 대외홍보팀을 통해 연락해 오고 있다.

    그동안은 ‘확인된 바 없다’며 모르쇠로 대응해 왔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용해야 할 시점.

    그는 전화를 들었다.

    "예, 홍보팀장님. 잠시 이야기 좀 하시죠. 저번에 그 SBC에서 우리 쪽 인턴 데리고 인터뷰했던 거 있잖습니까? 이번에 백 교수님 복귀랑 관련해서……."

    밀물이 차오르는 바닷가처럼, 연국대병원에 조금씩 변화가 다가오고 있었다.

    * * *

    5분 전.

    연국대병원 응급실의 여봉철은 정신없이 바빴다.

    생각해 보면 1월은 늘 이랬다.

    기존에 있던 4년 차들이 전문의 시험공부를 하기 위해 뒷방에 가면서, 의사들이 적어지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를 레지던트들은 ‘보릿고개’라고 부르고는 했다.

    한마디로 인력난.

    게다가 예비 1년 차들이 하는 꼬라지를 보면 답답해서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마! 정신 안 차리나!"

    "죄송합니다."

    "복통 환자 한 명도 제대로 몬 보면 우짜자는 기고. 니 픽쓰턴 아이가, 레지던트 돼서도 이래 할래? 이알이 장난이야?!"

    ER.

    응급실을 뜻하는 이머전시 룸(Emergency Room)의 약자.

    여봉철 특유의 사투리로 들으면 억양이 남달랐다.

    한참 동안 인턴의 실수를 질책한 뒤, 여봉철은 스테이션으로 돌아와 중얼거렸다.

    "에잇 씨…… 역시 신선한이를 이알로 잡아 왔어야 하는 긴데."

    빠릿빠릿했던 신선한이 오늘따라 그립다.

    작년에 여봉철이 가장 눈여겨보던 인턴.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알고는 했었지.

    하지만 그는 능구렁이 같은 마동섭의 손아귀에 넘어가 흉부외과로 빠져들고 말았다.

    "에효, 놓친 고기 그리워해 봤자 뭐 하겠노…… 일이나 하자."

    한편, 응급실 한쪽 구석.

    심상치 않은 환자가 있었다.

    60대 중반쯤 되었을까?

    깡마른 체형의 한 남성이 응급실 베드에 누워 숨을 헐떡였다.

    이마에 얕게 모여 있는 땀방울들이 환자의 현재 상태를 짐작케 한다.

    안경 낀 보호자 아주머니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앉아 있다가 응급실 구석의 정수기에서 물을 한 모금 들이켠다.

    병원이라는 곳이 어색하지 않아 보이는 몸짓에서, 꽤나 자주 연국대병원을 왔다 갔다 했었다는 것이 짐작된다.

    "……쓰읍."

    환자를 살펴본 응급의학과 2년 차 레지던트가 심각한 표정으로 스테이션으로 돌아간다.

    그리고는 이제 치프가 된 여봉철 선생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다.

    "선생님."

    "와?"

    "장재성 환자 열이 안 잡히고, 랩(lab, 피검사)도 이상하고, 배양 검사를 하긴 했는데……."

    "잉, 그래?"

    "안티(antibiotics, 항생제)는 일단 스타트했고요."

    "피버 포커스(fever focus, 발열의 원인) 어딘 거 같노?"

    여봉철의 즉각적인 질문에 레지던트는 자신 없게 머리를 긁적거렸다.

    "글쎄요. 그게……."

    "뭐, 글쎄요? 콱 마."

    "아, 근데 진짜 어렵습니다. 이 환자 TS에서 3개월 전에 뉴모넥토미(pneumonectomy, 전폐절제술) 받고 나서, 2주 전에 엘로저 시술을 받았다고 하는데 저는 처음 봐서요."

    "뭐? 엘로저?"

    딸깍- 딸깍-

    마우스를 클릭하며, 차트를 바라보는 여봉철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하, 엘로저 프로시져라……."

    여봉철은 코를 긁적이며 환자의 흉부 CT 영상을 열어 본다.

    엘로저 시술(Eloesser procedure).

    1935년 엘로저 박사에 의해 고안된 방법으로 한쪽 옆 가슴 쪽에 구멍(thoracostomy window, 창문)을 만들어 놓는 시술을 말한다.

    손가락 굵기만 한 흉관이 들어가는 그런 작은 구멍이 아니라, 사람 주먹만 한 구멍을 만드는 것이다.

    이 구멍을 통해서 고름을 빼내고 소독을 할 수 있다.

    엘로저 시술은 흉강 내에 결핵으로 인한 농흉이 차 있을 때, 이를 배액하기 위해 처음 고안되었다.

    당시에는 결핵에 대한 적당한 치료약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결핵 치료약이 개발된 현재에는, 만성 농흉(chronic empyema)에서 배액을 위해 시행되는 수술이다.

    "말로만 들었지 이런 환자는 처음 보네요."

    "나도 2년 전인가 한 번 보고, 그 이후로는 처음 본다."

    이론상으로는 간단하다.

    몸 어딘가에 고름이 차면? 기본적인 치료 방법은 고름을 빼내는 것이다.

    이 환자의 경우, 그 부위가 ‘흉강 안쪽’일 뿐이다.

    폐암으로 오른쪽 전폐절제술을 한 뒤, 비어 있는 오른쪽 흉강이 감염되고, 기관지흉막루(Bronchopleural fistula, 기관지 단면에 결손이 생겨 흉강이랑 이어지는 길이 만들어진 상태)가 발생하여 시술을 받은 환자.

    퇴원 후 집에서 관리를 하는 도중, 발열을 주소로 응급실로 내원한 상황이었다.

    "CT만 보면 오른쪽은 폐를 다 잘라 버린 상태고, 오른쪽 옆구리에다 구멍을 하나 만들어 놨네."

    여봉철은 혀를 내둘렀다.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 퇴원을 해서 집에서 지내 왔다고?

    놀랍지만 사실이다.

    주먹 하나가 들어갈 정도의 커다란 구멍을 통해서 흉강 안을 소독하며 지냈을 것이다.

    집에서 소독된 거즈를 흉강 안으로 넣었다 빼면서 스스로 관리하는 것이 몇 주 이상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환자가 열이 나고, 혈액에서 균이 자라는 상황.

    즉, 오른쪽 흉강에 있는 농흉에 의한 감염이 전신에 퍼지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셉시스(sepsis, 패혈증)로 진행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거 TS(흉부외과) 빨리 내려오라 캐서 봐야 된다."

    여봉철이 막 전화를 들어 올리려고 할 때.

    갑자기 장재성 환자 쪽에서 간호사의 놀란 목소리가 들린다.

    "선생님! 여기 혈압 체크가 안 돼요! 어레스트(arrest, 심정지)예요!"

    "뭐?!"

    환자 바로 옆에 있던 아내도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타닥-

    여봉철과 응급실 2년 차 레지던트는 환자 쪽으로 급히 달려간다.

    "뭐야? 갑자기 어레스트? 이렇게 급하게 넘어갈 상태는 아니었는데?!"

    "소생실로 옮기고, 흉부외과 CPR 방송 냅시다!"

    여봉철이 소리쳤고, 동시에 응급실 레지던트가 가슴 압박을 시작한다.

    파악, 파악!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가슴 압박을 하자, 입고 있는 츄리닝의 오른쪽 가슴 쪽에서 빨간 피가 묻어 나오는 것이 보인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모두 깜짝 놀란다.

    "뭐고, 가슴 쪽에서 출혈 있는 거 아이가?"

    여봉철은 급히 환자의 옷을 찢는다.

    지이익-

    그리고 잠시 후, 모두의 눈이 커졌다.

    "헉……."

    물론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보니, 비주얼은 꽤 충격적이었다.

    마치 사람 몸에 동굴이 하나 있는 것 같달까.

    그리고 그 동굴 속에는 피 묻은 거즈가 보인다.

    오른쪽 가슴에 있는 엘로저 창(window, 구멍) 안에 있는 거즈가 빨간 피를 가득 머금고, 미처 흡수하지 못한 피가 몸 밖으로 흐르고 있었다.

    "가슴 안에 어디 터진 거 아이가? 일단 응급 수혈! 볼륨부터 따라갑시다!!"

    여봉철이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고, 병원 안에는 방송이 울리기 시작했다.

    파악, 파악!

    심폐소생술이 계속된다.

    환자의 전신에 혈류를 공급해 주려면 이 방법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마치 옆이 깨진 독처럼, 몸의 커다란 구멍으로 피가 계속해서 새어 나온다.

    꿀럭, 꿀럭!

    가슴 압박이 더해질수록, 리듬에 맞춰 출혈도 더해지는 상황이다.

    "에헤이, 난리 났네……!"

    "이, 이거 계속해도 되는 거죠? 이 구멍으로 출혈 계속되는 거 같은데요?"

    "……일단은 볼륨 따라가면서 컴프레션 하자! TS 연락 한번 더 해 주이소!!"

    여봉철은 단호한 목소리로 크게 소리친다.

    하지만 그 역시 난처함을 감출 수 없었다.

    콩쥐한테는 밑 빠진 독을 막아 줄 두꺼비라도 있었지…… 지금은 어떻게 하지?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흔치 않은 상황에, 응급실은 혼돈에 빠지고 있었다.

    * * *

    17층 흉부외과 병동.

    스테이션에서 환자의 처방을 작성하던 나는 고개를 들었다.

    "흉부외과 CPR이다!"

    드르륵!

    나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자 내 옆에서 초점 없는 눈빛으로 차트를 바라보고 있던 신상미가 투덜댔다.

    "야, 응급실 CPR인데 우리가 가야 돼? 아직 우리 소속상으로는 TS 인턴이잖아."

    "무슨 소리야, 우리도 이제 흉부외과 사람이지."

    신상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가운을 들고 달려 나가고 있었다.

    "야, 같이 가! 너만 가면 나는 뭐가 되냐?"

    타닥-

    신상미는 볼멘소리를 하면서 뒤늦게 내 뒤를 따랐다.

    급하게 중환자용 엘리베이터를 잡고 우리는 1층 응급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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