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98화 (198/241)

#198 쫓고 쫓기는 게 우리 인생(5)

"……."

내 이야기가 끝났다.

마동섭 선생님과 안경식 선생님은 말이 없어졌다.

종업원은 먼 산을 바라보았고, 사장님은 말없이 담배 연기를 자욱이 피워 올린다.

몇 초 후, 마동섭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지방색전증? 아니면 폐동맥색전증 가능성이 있었을까……?"

"지방색전증이라고 들었던 것 같아요."

나는 담담히 말했다.

지방색전증(fat embolism).

몸에서 떨어져 나온 작은 지방 덩어리가 혈관을 막는 증상이다.

지방 방울(droplets)이 말초나 폐의 미세혈류에 존재하는 것을 지방색전(fat embolism)이라고 하는데, 이와 관련된 명백한 증상이나 증후를 지방색전증 증후군이라고 한다.

"지방색전증은 책에서만 배우는 질환인 줄 알았는데……."

안경식 선생이 말을 잇지 못한다.

"내 동기 정형외과 친구도 아직 본 적 없다고 했었던 것 같아."

마동섭도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린다.

지방색전증은 다발성 외상이나 긴뼈 골절 환자 중 1%가 채 안 되는 환자에게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중에도 뇌에 발생하는 지방색전증은 더욱 드물다고 교과서에 나와 있다.

그 합병증이, 하필 우리 엄마에게 발생한 것이다.

내가 병원으로 달려간 며칠 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엄마는 중환자실에서 돌아가시고 말았다.

"운이 나빴던 거겠죠."

나는 짧게 말했다.

이 한 문장을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무리 적은 확률의 합병증이라도 막상 나한테 일어나면 그건 100%다.

아주 작은 우연으로 시작된 사건이 한 사람의 생명을 허무하게 가져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참 이상한 기분이었어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같은 공간에서 밥을 먹던 사람이, 갑자기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게."

일상은 공기와도 같아서, 잃기 전에는 그 소중함을 깨달을 수 없었다.

하루, 또 하루.

백사장의 모래처럼 흔하디흔한 나날들.

지나고 난 후에야, 그날들이 알알이 주워 담고 싶어질 빛나는 보석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 그렇게 돼야 했을까요."

작은 술집의 테이블 건너편으로 그림자가 일렁였다.

이제는 어른이 된 내 그림자 속에, 아직 병원에서 울부짖는 중학생이 보이는 듯했다.

"엄마는 그저 자식들 성화에 못 이겨서, 본인 생일에 미역국을 끓이려 장을 보러 갔을 뿐인데."

안경식은 두꺼운 뿔테 안경을 벗고 눈을 비비적거렸다.

마동섭은 턱을 괸 자세 그대로 가만히 눈시울을 붉히며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요."

그 이유는 신만이 아실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사고였다고 생각해야 마음이 편해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만약.

만약이지만…….

대처가 좀 더 빠르게 진행되었다면, 엄마가 그렇게 허무하게 하늘나라로 가는 것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구급차에서 심폐소생술이 늦어서 머리에 저산소성 손상(hypoxic brain damage)이 가해진 것은 아닐까?

수술 후, 대학병원 중환자실에 누울 때까지의 과정에서 뭔가 코스를 바꿀 수 있는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

이런 질문들은 한동안 나를 괴롭혔고, 지금까지도 나를 떠나지 않은 채 머물러 있다.

"뭐, 우울한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요."

나는 감정을 털어 내듯 미소를 지었다.

지난 1년, 미래를 보고 바꾸었던 것을 떠올리면, 우리 엄마의 미래도 바꿀 수 있는 찬스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많다.

하지만 지나간 과거는 되돌이킬 수 없었다.

아무리 내가 비상한 능력을 얻었다 할지라도.

"우리 술이나 더 마셔요. 오늘 술 마시기 딱 좋은 날이잖아요."

"그래, 그러자!"

"사장님, 여기……."

술이 달달한 밤.

눈은 어느새 멎어 가고 있었다.

안경식 선생은 얼마 가지 않아 곯아떨어졌고, 마동섭 선생과 내가 그를 옮겨야 했다.

* * *

다음 날.

안경식 선생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아침 일찍 출근했고, 중환자실 환자들을 살피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주치의 안경식의 모습이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 선생님. 좋은 아침이에요."

어제 출근하지 않았던 몇몇 중환자실 간호사들은 안경식 선생이 도망갔다가 왔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선생님, 3번 환자 알부민(albumin) 레벨 2.6 나왔던데, 어떻게 할까요?"

"안 그래도 처방 냈어요. 4시간 동안 천천히 주세요."

누구보다 일찍 중환자실 환자들을 체크한 뒤, 아침 회의 장소로 향한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스으윽―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자, 미리 도착해 있던 몇몇 교수와 펠로우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경식아."

그때, 김성탁 교수가 안경식을 부른다.

"네…… 네?"

안경식이 덫을 밟은 쥐처럼 깜짝 놀라며 대답한다.

어제 하루 자리를 비운 그에게 어떤 말을 하실지 무서워 덜덜 떨고 있는 게 보인다.

하지만, 김성탁 교수는 점잖은 목소리로 물어본다.

"아이씨유(ICU, 중환자실) 이재진 씨 괜찮니?"

"아, 네. 아침에 봤는데, 오늘 병동 올라가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알았다."

"……?"

불호령이 떨어질 거라 생각했지만, 일상적인 질문에 오히려 안경식은 더 놀란다.

그렇게 아침 회의는 시작되었고, 평소처럼 끝이 나고 다들 회의실을 나간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안경식에게 질책하는 사람은 없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왔냐?"

몇몇 레지던트들이 그렇게 말하며 안경식의 어깨를 툭 하고 두드려 줄 뿐이었다.

송유주 선생도.

심지어 교수님들도.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굴었고, 아침 컨퍼런스 회의는 그렇게 물 흐르듯 지나갔다.

‘……다들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줘서 다행이네.’

그리고 며칠 후 회진 시간.

나와 안경식 선생님, 그리고 몇몇 간호사들이 김성탁 교수님을 따라서 회진을 돌고 있었다.

우리는 김덕상 환자의 앞에 섰다.

"어때요, 병동에서 좀 돌아다녀 보셨어요?"

"아, 네. 많이 좋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저한테 감사하실 게 아니라, 여기 계신 안경식 선생한테 고마워하셔야 돼요."

교수는 공을 안경식 선생에게 돌렸다.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김성탁 교수가 레지던트에게 공을 넘기는 장면은.

"여기 선생님 아니었으면 중환자실에서 큰일 날 뻔했습니다."

계속되는 교수의 칭찬에 안경식 선생은 몸 둘 바를 몰랐다.

두꺼운 안경 속의 눈동자가 지진을 일으키고 있다.

그때, 환자의 보호자인 노모가 안경식의 손을 덥석 잡았다.

"선생님, 고마워요."

"예? 아니…… 그……."

"우리 애가 이 나이 먹도록 운이라고는 없었는데, 그래도 병원에서 좋은 선생님 만나서 목숨은 건져 가나 봐요…… 고마워요, 고마워."

그렇게 말하는 노모의 주름진 손이 애처롭다.

안경식의 얼굴은 이제 달구어진 것처럼 빨개졌다.

아마 처음이었던 모양이다.

환자와 보호자에게 이 정도로 격한 감사의 인사를 받아 본 것은.

"아무튼 환자분 상태는 좋습니다. 우리 병원에서 좋은 주치의 만나신 게 다행이에요, 허허."

그렇게 김성탁 교수는 평소처럼 다음 환자를 보러 빠른 걸음으로 이동했고, 우리는 그를 따라 걸어갔다.

뒤따르는 안경식 선생의 눈시울이 붉어진 것이 보였다.

"교수님…… 감사합니다."

"아니다, 고생했다."

많은 것이 함축된 대답이었다.

우리는 훈훈한 분위기 속에 회진을 마쳤다.

그리고 얼마 후.

여담이지만, 퇴원을 앞둔 김덕상 환자에게는 행운이 하나 더 찾아왔다고 한다.

<왕바이오 임상 3상 연구 결과 발표, 1차 지표 유의성 확보!>

<왕바이오 유럽 대표 제약회사와 LO(라이센스 아웃) 체결>

"가즈아아아!"

"환자분, 진정하셔야 돼요!"

왕바이오 주식은 대박이 났고.

환자는 수술 부위가 터지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펄쩍 뛰며 좋아했다고 한다.

"와, 부럽다 부러워."

"뭐가 부럽냐? 저 스트레스 때문에 협심증 온 걸지도 몰라. 그것 때문에 수술받고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그래도 5연속 상한가 종목 한번 쥐어 보는 게 소원이다."

"그건 그래. 들어갈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에 계속 상한가 치더라, 쩝……."

몇몇 사람들이 식당에서 그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인생은 수많은 불운과 행운의 연속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저는 하나도 안 부러운데요? 흉부외과에 오게 된 게 제 인생 최고의 행운입니다!"

"야, 오버하지 마."

"정말입니다, 선배님들!"

안경식은 어느덧 다시 열정맨이 되어 있었다.

"저 이제 절대 멘탈 안 흔들리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인생은 역전의 연속이라 하지 않습니까? 언젠가 제 시간이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덕상 환자의 왕바이오처럼!"

안경식 선생이 평소처럼 기운을 차려서 다행이다.

하지만, 나는 잊지 않고 있다.

내가 지난달 보았던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것을.

‘내가 봤던 미래에서 안경식 선생은 주저앉아 울고 있었어.’

아마도 내가 인턴으로서 심장 파트에서 마주해야 할 마지막 관문.

<소아심장환자 이슬기>.

여태껏 보았던 어떤 환자보다 어려운 케이스가 기다리고 있다.

‘과연 내가 그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껏 그래 왔듯 나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번 달 내 숙소 책상에는 언제나 선천성 심질환 교과서가 놓여 있는 중이다.

그리고, 책상 벽면에는 노을 누나가 선물로 보내 준 아기의 사진엽서도 붙어 있다.

그 엽서 마지막 줄에, 노을 누나는 오래된 격언을 적어 두었다.

―We cannot direct the wind, but we can adjust the sails.

―우리가 바람을 바꿀 수는 없지만, 돛을 다르게 펼칠 수는 있다.

그렇게 1월은 그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매의 눈, 여인의 손, 사자의 심장(1)

연국대병원 병원장실.

고급스러운 가구들로 구성된 집무실에 약간의 긴장이 흐르고 있다.

병원장, 이윤중.

그는 백의신과 함께 연국대병원 소아심장 팀을 이끌었던 소아과 심장 파트 의사였다.

그는 뜻하지 않게 방문한 손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평소답지 않게 약간 긴장한 기색으로, 그가 말했다.

"선생님 갑자기 외국 가시는 바람에, 제가 병원장 돼 버렸잖아요."

"왜, 병원장 싫어? 젊은 나이에 연국대병원 병원장, 폼 나잖아."

"저 별로 안 하고 싶었습니다."

이윤중 병원장은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듯 말했다.

그는 환자 보는 것을 최우선으로 하는 의사였다.

그래서 많은 행정 업무에 노출되는 병원장 자리는 그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연국대병원의 최대 강점인 <심장 파트>에서 병원장이 나와야 한다는 압박에 못 이겨, 결국은 병원장 자리를 승낙하고 말았다.

‘뭐, 솔직히 아주 싫지만은 않았지만…….’

물론 커다란 명예가 있다.

대한민국 최고의 병원을 책임지는 병원장!

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드라마에서처럼 모두가 군침을 흘리는 자리인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중요한 자리인 만큼 부담도 큰 자리였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윤중 교수는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다.

"선생님처럼 저도 환자 보는 거 더 좋아하지. 원장 자리에서 일하는 건 고역입니다. 백 교수님."

그러자 눈앞의 남자가 피식 웃었다.

백의신.

오랜만에 본 그는 전보다 에너지가 넘쳐 보였다.

정장을 격식 있게 갖추어 입은 병원장과는 달리, 백의신은 한두 살 더 나이가 많음에도 활동적인 복장이었다.

"그런데 백 교수님, 갑자기 마음 바꾼 이유가 뭡니까? 은퇴하셨다가 갑자기 복귀를 하시겠다고……."

호로록―

백의신은 팔을 걷어붙여 커피를 들이켠 뒤 대답했다.

"돈 떨어졌어."

"농담 마시고. 진짜 궁금해서 그래요."

"아니, 진짜야. 미국 가서 라스베이거스에서 흥청망청 쓰다 보니까 통장이 텅텅 비었더라고. 나 월급 좀 줘라."

백의신의 말에 이윤중 병원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도박?

백의신은 그런 것에 빠질 위인이 아니다.

분명 실없는 소리로 넘어가려는 의도였고, 병원장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때, 회의를 하고 있던 방에 방송이 울려 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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