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 쫓고 쫓기는 게 우리 인생(3)
‘이게 무슨 소리야?’
유리잔이 깨진 소리.
나는 얼른 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구석 자리에 안경식이 널브러져 있었고, 그 앞에는 엎질러져 조각난 술잔이 있었다.
"제성함다…… 딸꾹!"
아무래도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만취한 듯하다.
그 와중에도 책임감이 있는지, 본인이 쏟은 잔을 치우려고 어기적대며 몸을 숙인다.
저러다 손 다칠라.
나는 급히 걸어가 안경식 선생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깨진 유리 만지지 마세요."
"어…… 선한 쌤?"
안경식 선생이 놀란 듯 나를 쳐다본다.
이런 상황은 모두에게 위험하지만, 특히 외과의가 손을 다치는 것은 치명적일 수 있다.
곧 사장님이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나타났다.
"일행이세요?"
"예. 언제부터 이러셨나요?"
"서너 시간 됐나? 오픈 시간부터 와서 몇 잔 마셨는지 모르겠어요."
"죄송합니다. 깨진 술잔은 변상해 드릴게요."
"단골이라 그럴 필요는 없고…… 그냥 이따 집에나 잘 데려다주세요."
수염을 기른 사장님이 무덤덤하게 깨진 잔을 슥 치우고 사라진다.
"감사합니다."
나는 안경식 선생을 부축해서 겨우 자리에 앉힌 뒤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래된 술집.
허름하지만, 나름 분위기가 있었다.
LP판들이 벽면에 장식되어 있었고, 스피커에서는 오래된 음악이 흘렀다.
역시 감성적인 안경식 선생의 선택답달까?
[선한] 탈주자 발견. 블루버드입니다.
나는 메시지로 짤막하게 마동섭에게 보고한 뒤 자리에 앉았다.
"선한 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온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안경식의 동공이 흔들리고 있다.
내 갑작스러운 등장에 어지간히 놀랐나 보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기도 전에 격렬한 거부 반응부터 보인다.
"선생님……."
"아, 안 돌아간다고 전해 주세요. 저 이제 TS 아니에요. 끌고 가도 소용없어요."
안경식은 완강히 나를 밀쳐 냈다.
흉부외과라는 전쟁터에서 도망친 탈영병.
지금 그의 눈에는 1년 차 아래인 나조차도 헌병처럼 무서워 보일지 모른다.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말투로 그를 달랬다.
"설마 제가 잡아가려고 왔겠어요? 걱정돼서 온 거예요."
"……."
"다들 걱정하고 있어요. 특히 마동섭 선생님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내 말투에 안경식의 경계심이 다소 누그러지는 듯하다.
곧 술기운으로 가득 찬 푸념이 시작된다.
"……저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어차피 저는 흉부외과랑 안 맞는 놈이에요."
나는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만 입어도 하루 종일 불편한 게 사람이다.
직업이야 오죽할까?
그가 남겼던 장문의 편지에서 수없이 반복된 표현이 바로 ‘버겁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교수님들한테 혼나기만 하고……."
그 또한 알고 있다.
내가 본 것만 해도 여러 번이니까.
사람이 밥을 먹어야 살 수 있는 것처럼, 자존감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루 종일 질책만 받으니 자존감이 바닥을 칠 수밖에.
"그동안 선한 쌤한테도 얼마나 우습게 보였겠어요. 솔직히 저 한심했죠?"
안경식의 자조 섞인 말에, 나는 물잔을 채우며 대답했다.
"그런 적 없어요. 오히려 반대면 몰라도."
안경식 선생은 게슴츠레한 눈을 끔뻑거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선생님처럼 환자 열심히 보는 사람 없었어요, 제가 본 주치의 선생님들 중에서."
"……."
"그리고 설명도 너무 쉽게 해 주시고. 위 연차로 선생님 같은 분이 계셔서 너무 좋다고 생각했고요."
꾸며 낸 이야기가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이야기했을 뿐.
그런데, 내 말에 감동을 받았는지 안경식의 눈빛이 올망올망해진다.
"……."
고개를 푹 떨군 그는 많은 말을 내뱉지 않았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그동안 주치의로서 많은 압박을 받아 왔다는 것을.
"환자를 그만큼 생각하니까 힘드셨던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런 선생님의 모습을 존경합니다."
"흐어어엉……."
결국 안경식이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내 팔을 끌어안고 얼굴을 묻는다.
아이고, 난리 났네.
"선한 쌤, 저 힘들었어요……."
"그렇다고 이렇게 울고, 도망가고 그러시면 어떻게 해요."
"흐어어엉……."
더 이상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술기운에 우는 것인지, 내 말에 감동을 받아 우는 것인지.
아니면, 지난 1년여 동안의 흉부외과 생활에서 느꼈던 울분이 쏟아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안경식 선생의 등을 토닥거려 주는 것뿐이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대학생 시절 생각나네.’
언제나 친구들의 고민 상담은 내 역할이었다.
왜인지는 모른다. 언제부터 내가 그런 담당이 되었는지는 몰라도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항상 그런 역할이었다.
내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남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역할.
"안경식!"
그때, 마동섭이 씩씩대며 나타났다.
눈보라를 헤치고 달려온 거구의 남자.
그는 지금 분노한 설인처럼 보였다.
안 그래도 덩치가 커서 무서운데, 추위 때문에 얼굴이 벌게져서 지옥에서 온 수문장 같기도 하다.
안경식은 술이 확 깬 듯 어버버했다.
"서, 선배님."
"너 이 자식……."
성큼, 성큼―
마동섭은 핏기가 선 눈빛으로 한기를 몰고 걸어왔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그러고 보니 아까 뭐라고 했더라.
만나면 척추를 반으로 접어 버린다고 했던가?
나는 여차하면 마동섭을 뜯어말릴 생각으로 긴장하고 있었다.
"너 일루 와, 인마!"
홰액!
마동섭이 손을 들었다.
눈을 질끈 감는 안경식.
하지만 우려했던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와락!
마동섭은 벌게진 얼굴로 안경식을 끌어안으며 외쳤다.
"안경 이 자식아! 걱정했잖아!"
"선배님! 죄송해요!"
으허어엉!
두 사람이 울면서 서로를 부둥켜안는다.
이건, 뭐랄까.
어릴 적 헤어진 가족을 상봉하는 장면을 보는 듯하다.
"안경식!"
"동섭 선배님!"
뜨거운 눈물의 포옹이 이어진다.
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머쓱하게 물잔을 홀짝거렸다.
* * *
"뭐? 성형외과 스카우트 제안?"
잠시 후.
마동섭이 기가 막힌 듯 물었다.
테이블에는 어묵탕이 따끈따끈한 김을 내뱉고 있었다.
술집의 분위기에 다소 어울리지 않는 메뉴.
사장님이 저녁을 굶은 우리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 준 것이었다.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다고 잠수를 타? 생각할수록 열받네, 이거. 콱 그냥!"
마동섭은 손에 들고 있는 어묵 꼬치로 안경식을 위협했다.
그러자 수염 난 남자 사장과 어린 여자 종업원이 얼른 마동섭을 만류했다.
"자자, 성내지 마시고. 제가 한 잔 따라 드릴게."
"그래요. 아까 들어 보니까 할 일 다 해 놓고 도망쳤다면서요?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손님은 우리 세 명뿐.
바깥에 눈발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사장과 종업원은 아예 장사를 접은 듯 의자를 끌고 우리 옆에 앉았다.
그래서 술잔은 다섯.
고즈넉한 LP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우리는 마치 모닥불에 모여 앉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어떤 제안을 받은 건데? 얘기나 들어 보자."
"그게……."
안경식에게 듣게 된 자초지종은 이랬다.
옛날에 알고 지내던 선배에게서 제의가 왔었다고 한다.
그 선배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모발이식 일을 할 의사를 구하고 있으니, 올 생각이 없냐고.
"모발이식?"
"우와, 흉부외과 선생님들이 그런 거 하기도 해요?"
"그거 저부터 좀 받읍시다."
옆에서 이마가 훤한 사장님이 흥미를 보였다.
게다가 제시된 금액은, 현재 대학병원 월급의 3배에 달하는 금액.
안경식에게 솔깃한 제안이었다.
"허어, 3배나?"
"월급을 그렇게 많이 준다구요? 나 같아도 당장 때려치우고 달려가지!"
옆에서 사장님과 종업원분이 눈을 빛냈다.
그만큼 큰 금액이었다.
게다가 안경식의 가슴을 정곡으로 찌른 선배의 말은 바로…….
<경식아. 저녁이 있는 삶, 주말이 있는 삶을 살고 싶지 않아? 언제까지 환자 죽고 사는 거 때문에 스트레스받고 살 건데?>
심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있는 삶의 제안.
환자 한 명, 한 명에게 세심하게 신경 쓰느라 휴식도 제대로 취하지 못한 안경식 선생.
게다가 최근 실수까지 저질러 자괴감에 빠져 있던 그는 이 제안을 흘려들을 수 없었다.
"돈도 돈이지만 맘 편하게 살고 싶었단 말이에요."
안경식이 훌쩍였다.
마동섭은 할 말이 궁해진 듯 입맛을 다셨다.
"뭐, 무슨 길을 선택하든 네 자유지만."
벌컥, 벌컥.
그는 맥주를 들이켠 뒤 큰 목소리로 다그쳤다.
"자식아, 그쪽으로 가면 마냥 행복할 것 같아?"
"지금보단 낫겠죠."
"아마 그 병원 가면 너 만만하게 보면서 종 부리듯 할걸?"
"지금도 종이잖아요."
"뭐 인마? 하긴 그건 맞는 말이긴 해!"
이건 무슨 만담이야?
옆에서 가만히 듣던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양문식은 진짜 아니야. 그 인간 연국대병원에 있을 때도 소문 안 좋았던 거 모르냐?"
"그랬어요?"
"레지던트 때부터 환자들 막 대한다고 소문난 인간이야. 인성 개차반이라고."
"……."
"양문식 그 인간 옆에서 흑화될래? 난 너처럼 환자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TS에서 의미 있는 일들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동섭이 이마가 훤한 사장님 눈치를 살짝 보며 말을 덧붙인다.
"물론 모발 한 올, 한 올 심어 주는 것도 중요하고 의미가 있긴 한데……."
안경식은 점점 말이 없어졌다.
마동섭의 설득이 먹히고 있는 것일까?
벌써부터 은근히 마음속으로 후회하고 있는 것이 눈빛으로 느껴졌다.
"어떡하죠?"
"뭘 어떡해? 돌아와야지."
"무단으로 출근도 안 했는데 어떻게 그래요?"
"잘못했습니다 하고 대가리 박아야지. 너 같은 놈 한둘인 줄 알아? 아마 교수님들도 그러려니 하고 이해해 줄 거야."
안경식은 한참 고민한 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마시고 죽어! 선한이 너도 우리 집에서 자고 내일 출근하자!"
"네, 그럴게요."
"사장님, 여기 술 아무거나 가져다주세요!"
"그럽시다. 선생님들, 저 담배 좀 태워도 되겠습니까?"
"어헛, 흉부외과 의사들 앞에서 담배는 무슨 담배요?"
"그래요, 저희 사장님 담배 좀 끊게 해 주세요 선생님들!"
한 잔, 두 잔.
빈 잔들이 늘어났다.
마동섭은 오늘 술집의 매출을 혼자 책임질 기세였다.
나도 덩달아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술집 구석의 스피커는 색이 바랜 듯한 음률로 흘러간 옛 가요들을 노래하고 있었다.
"근데요, 선하니 혀엉. 궁금한 게 있는데에."
몇 잔이나 더 마셨을까?
술에 거나하게 취한 안경식이 혀 꼬인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어느새 나를 형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어뜨케 그러케 지치지도 않고 열심히 일할 수가 있쓰요? 저도 나름대로 한다고는 하는데에…… 솔직히 선한이 형 보면서 제가 더 작아 보여쓰요."
"맞아. 나도 가끔은 놀란다니까. 열정맨이야, 열정맨! ?말 나온 김에 우리한테 비결 좀 가르쳐 주라."
마동섭이 맞장구를 친다.
뭐라 대답해야 할까.
나는 가만히 미소를 짓다 가볍게 대답했다.
"어머니 때문인가 봐요."
"어머니?"
"제가 어릴 때 병원에서 돌아가셨거든요."
"아……."
취기 때문일까?
평소보다 말이 많아진다.
테이블 위에 놓인 초가 일렁이며 내 손등 위에 유리잔의 그림자를 떨어트리고 있었다.
"환자들 보다 보면 저도 모르게 어머니 생각이 나서 눈에 더 밟혀요."
"……."
짧은 적막이 흐른다.
조금 전까지 혀 꼬인 말투로 꼬장을 늘어놓던 안경식도 눈을 끔뻑이며 말이 없어진다.
마동섭은 공연히 빈 맥주잔을 들었다 놨다 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머니께서…… 몸이 안 좋으셨어?"
"아뇨, 건강하셨어요. 오히려 누구보다 더."
"혹시 무슨 일이었는지 물어봐도 되냐? 불편하면 얘기 안 해도 되고."
마동섭의 조심스러운 질문.
나는 기억을 떠올렸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다.
깊은 곳에 묻어 두려 했지만, 마치 얇은 모래로 덮어놓은 것처럼 금방 모습이 드러난다.
"그때도 지금처럼 겨울이었네요."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치익―
사장님은 카운터로 걸어가더니 가만히 담배에 불을 붙였고, 이번에는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한없이 내리는 눈은 세상을 지우며, 술집을 고립된 공간처럼 만들고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였어요."
나는 그동안 병원의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가슴속에 숨겨 두었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