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쫓고 쫓기는 게 우리 인생(2)
레지던트가 손에 들고 나타난 것은, 반듯하게 접힌 몇 장의 종이였다.
"뭔데, 그거?"
"당직실 테이블 위에 다소곳하게 놓여 있더라."
"설마 안경식 편지야?"
"딱 보면 모르겠냐? 우리 과에서 이런 거 쓸 사람 안경식밖에 없잖아."
두툼한 편지다.
그것도 아주 정성 들여 쓴 듯한.
곧 편지를 돌려 가며 읽는 레지던트들의 표정이 착잡해진다.
"아이고."
"난리 났네, 난리 났어."
"하, 경식이 자식…… 며칠 전부터 불안, 불안하더니만 결국 일 저지르네."
"어떡하죠?"
"뭘 어떡해? 이거 일단 교수님들이랑 치프 쌤들한테는 보여 주지 말고 우리가……."
곧 2, 3년 차가 되는 안경식의 동기와 바로 위 연차 레지던트들이 심각하게 머리를 맞대고 대책회의를 시작한다.
나와 신상미는 멀뚱히 서로를 쳐다보며 입 모양으로만 대화했다.
<무슨 일이야?>
<나도 몰라.>
우리 둘은 슬며시 다가가 레지던트 선생님들의 어깨 너머로 글을 읽었다.
감성적인 안경식 선생답게, 정갈한 글씨로 적은 장문의 글이었다.
……정말 오랜 시간 동안 고민했습니다.
저는 이제 연국대병원 흉부외과를 떠나려 합니다.
그동안 모자란 저를 이끌어 주려 했던 선생님들께 감사할 뿐입니다.
아무래도 저란 놈은 여기까지가 한계인 모양입니다.
애초에 제 간장 종지만 한 그릇에 담기에는, 흉부외과의 일이 너무 크고 무거웠던 것 같습니다.
박수 칠 때 떠나라는 말이 있던가요?
애초에 박수를 받아 본 적도 없었던 저는 떠날 자격조차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업무를 더 이상 감당할 자신이……
"어휴, 인턴 쌤들은 보지 마세요. 좋은 일도 아닌데."
레지던트 한 명이 급히 편지를 접는다.
끝까지 읽진 못했지만, 나는 대충이나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결국 안경식 선생님 멘탈이 무너졌구나.’
아마 한 가지 이유 때문이 아닐 것이다.
이틀에 한 번 꼴로 찾아오는 중환자실 당직 업무.
생명을 다루는 부담감.
계속되는 실수에 대한 자괴감.
작년 말에 있었던 여자 친구와의 이별.
등등…….
마치 물방울이 모여 물 잔이 넘치듯, 여러 이유들이 겹쳐서 작용했겠지.
최근에도 흉관 삽입을 하다가 실수를 저질러 엄청 혼났다고 들었다.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여, 결국 흉부외과 전문의 과정을 포기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나저나 안경식 그만두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냐?"
"망하는 거지. 중환자실 당직 우리가 계속 서야 되는데."
"미치겠네. 안 그래도 이번 달 심장 파트 예정된 수술도 많던데……."
레지던트들의 얼굴이 죽상이 된다.
역시 제일 걱정되는 건 일손 부족인 모양이다.
특히 흉부외과는 손 하나가 아쉬운 곳이다.
아직 인턴인 나조차도 그 사실을 뼈저리게 체감하는 중이니까.
"근데 그 와중에 내일 자 처방까지 미리 다 내놓고 갔어, 이 자식."
"도망가는 와중에도 성실하네, 참 나."
"작년에 승완이 그만둔 지 6개월도 안 되지 않았어? 올해 진짜 걱정되네……."
레지던트들이 모두 한숨을 쉬었다.
물론 이런 일이 흉부외과에서 처음은 아니겠지.
전문의 과정을 이탈하는 것은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고 들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대수롭지 않게 여길 일도 아니었다.
"아무튼 아직 맘 바뀔지도 모르니까 안경식한테 계속 전화해 보자. 일단 편지 얘기는 소문 안 나게 하고…… 인턴 쌤들도 절대 어디 가서 이야기 말고!"
그렇게 서로 이야기를 맞추고 있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흠칫!
다들 소리가 난 쪽을 쳐다보았다.
어떤 의미로는 교수님 못지않게 무서운 존재.
치프 레지던트 중 실세.
막대 사탕을 입에 문 송유주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걸어오고 있었다.
"아, 그게 말이에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하하!"
레지던트들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뒷걸음질 쳤다.
다들 함구하고 넘어가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숨길 새도 없이, 송유주가 편지를 가리키며 물었다.
"뭐야, 그거?"
"아, 그게요……."
"이리 가져와 봐."
그리고 잠시 후.
편지를 읽던 송유주의 눈썹이 꿈틀 치솟는다.
평소에 언제나 칼 같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얼굴에서 드물게 감정이 느껴진다.
"그러니까, 안경식이 아침회의에 안 나타난 이유가 이거라고?"
으득―
막대 사탕이 입 안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흉부외과 병동에 싸늘한 한기가 느껴진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송유주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멀리 못 갔을 거야."
꾸깃―
손안에서 편지가 구겨진다.
송유주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흡사 도망친 노비를 쫓으라 명하는 추노꾼 같은 모습이었다.
"산 채로 잡아 와."
* * *
그날 저녁.
흉부외과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안경식 선생이 계속 연락이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하루의 업무를 마무리할 무렵, 마동섭 선생이 찾아왔다.
"친구야, 잠시 나 좀 볼까?"
나는 마동섭 선생을 따라 조용한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혹시 최근에 안경이랑 이야기 좀 해 봤어? 뭐 이상한 낌새가 있거나, 갑자기 안 하던 말을 했다든가……."
그렇게 묻는 마동섭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다.
그야 걱정될 만도 하겠지.
흉부외과에서 안경식 선생을 가장 챙겨 주던 사람이 마동섭 선생이었으니까.
"저한테도 별말은 없었어요."
"그래?"
"예. 평소랑 거의 같았습니다."
내 대답에도 불구하고 마동섭은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나는 조심스레 말했다.
"스트레스 때문에 잠시 탈선하신 게 아닐까요? 자존감에 상처도 입었고, 일이 워낙 힘드니까."
"……."
"어쩌면 맘이 변해서 돌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니,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마동섭은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만에 하나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길까 봐."
"안 좋은 일이요?"
"어디 가서 함부로 얘기하지 마라. 다른 사람이 알면 별로 좋은 얘기도 아니니까."
마동섭은 비상문 쪽을 한 번 살펴보더니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옆 동네 NS(신경외과)에서 잠수 타더니 펜타닐(pentanyl, 마약성 진통제) 투약하고 응급실 실려 온 레지던트가 있었거든."
"예?"
"Respiratory depression(호흡 억제)으로, 거의 arrest(심정지) 직전이었다고 하더라."
"헉……."
"다행히 후유증 없이 회복되었는데, 사람들 말로는 suicide attempt(자살 시도)였다는 소리가 있어."
내 눈이 커졌다.
처음 듣는 얘기다.
병원에서 그런 일이 정말로 일어난단 말이야?
"그 친구도 레지던트 예비 2년 차였어. 안 그래도 우울증으로 관리받고 있던 친구였는데, 업무 스트레스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
"저런……."
"아무래도 중환자실에서 환자한테 처방한 뒤에 약을 빼돌렸겠지? 마약류라서 난리가 났을 거야."
"많이 힘들었나 보네요."
"그치, NS(신경외과) 2년 차도 워낙에 힘들다고 유명하니까."
나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의사들도 사람이다.
때로는 정신적인 문제를 겪기도 한다.
다른 사람을 치료하는 직업이지만, 역설적으로 본인을 돌보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특히 수술과 의사.
이들은 햇볕도 자주 쬐지 못하고, 업무량도 상당하다.
게다가 외과 수술은 특성상 조금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
‘잘하면 본전이고, 못하면 환자가 잘못될 수도 있으니까.’
심지어 해외에서는 의사들의 자살률이 일반인에 비해 2배 이상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병원 바깥에서는 좀처럼 들여다보이지 않는, 의사사회의 가장 어두운 그늘이다.
"그래도 생명에 지장은 없어서 다행이네요."
"정말 위험했지. 사실 의사들은 극단적인 시도를 했을 때 성공률도 높은 편이거든."
"그런가요?"
"의학 지식이 머릿속에 가득 있으니, 방법을 너무나도 잘 알잖아."
끔찍한 이야기였다.
비상계단에 음습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흐른다.
마동섭은 꺼림칙한 기분을 환기하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에이 씨,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이 얘기는 그만하자! 아무리 그래도 안경식이 그런 짓을 할 놈은 아니니까."
물론 알 수 없는 일이다.
천 길 물속은 알아도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겉보기에 멀쩡한 사람도, 속은 병든 나무처럼 썩어 들어갈 수 있는 법.
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동섭을 안심시켰다.
"네, 우려하실 정도로 큰일은 없을 겁니다."
나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내가 그동안 보아 온 안경식 선생님은 그럴 분이 아니었으니까.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성실하게 노력하던 만큼, 자신 역시 소중히 여길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겠지? 하여튼 쓸데없는 걱정이나 시키고 말이야. 연락만 닿으면 내 이 자식을 그냥……."
마동섭은 이를 갈며 다시 한번 폰을 꺼내어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속절없는 통화 연결음만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그런데 그때.
통화 연결음이 멎고,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드디어 전화를 받네?"
<여부세요?>
"야 안경! 이 새끼, 너 지금 어디야!"
<제성함다…… 딸꾹!>
취했네, 취했어.
혀가 꼬부라져 거의 인사불성이 된 듯한 목소리다.
지금 시각은 오후 8시.
"너 인마, 갑자기 편지 한 장만 남기고 사라지면 어떡해? 사람들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사람들히 제 걱정을 하기는 하나 부네요?>
"뭐?"
<걱정 마십셔. 저 갠찬씀다. 딸꾹!>
꼬장이 장난 아니다.
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수화기 너머로부터 알코올 냄새가 풀풀 풍겨오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제성함다…… 저는 그럼 술 더 마셔야 해서 이만!>
전화가 뚝 끊긴다.
마동섭은 전화를 노려보며 씩씩댔다.
이제 걱정을 덜었으니 화를 낼 차례였다.
"대충 어딘지 알 것 같다."
"그래요?"
"안경식이랑 나랑 같은 동네거든. 예전에 대학교 시절부터 몇 번 술 마신 적 있는데 그 술집 중 하나일 거야. 옛날 음악이 뒤에서 흐르는 거 보니까."
마동섭 선생은 두꺼운 팔로 비상계단 문을 열려다가 나를 돌아보았다.
"친구, 혹시 오늘 시간 되냐? 같이 갈래?"
오늘?
마침 나는 당직이 아니다.
원래는 숙소에서 모자란 잠을 보충하려 했다.
하지만 상황이 심각하게 흘러가는 것을 보니, 마동섭의 제안을 거절하기도 뭐했다.
"네, 저도 가겠습니다."
"옷 갈아입고 정문에서 봐."
나는 마동섭을 따라 복도로 나서며 물었다.
"그런데 제가 따라가면 안경식 선생님 마음을 돌리는 데 도움이 될까요?"
"무슨 소리야. 누가 설득하는 거 도와 달래?"
마동섭은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혹시 내가 안경식 쥐어 패거든 나 좀 뜯어말리라고. 지금 기분 같아선 그 자식 척추 꺾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저기요, 너무 무서운데요?
심지어 농담이 아닌 것 같아서 더 무섭다.
아무래도 내 역할은 설득이 아니라 중재인 모양이다.
오늘 밤, 유혈 사태를 목격하고 싶지 않다면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
* * *
휘이이잉―
성난 바람이 분다.
눈발이 흩날리며 얼굴을 사정없이 때린다.
눈이 땅 아래로부터 하늘을 향해 내리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와 씨. 무슨 날씨가 이러냐? 오늘 지구 종말의 날이라도 돼?"
마동섭과 나는 병원 앞에서 택시를 잡았다.
"망할 놈. 눈 오는 날 이런 개고생이나 시키고 말이야. 잡히면 가만 안 둔다."
부우웅―
택시는 서울을 벗어나 경기 남부를 향해 달렸다.
평소라면 조금 더 속도를 낼 수 있었겠지만, 눈길이라 움직임이 더뎠다.
그동안 마동섭은 추위로 굳은 손으로 스마트폰 지도를 보며 작전을 세웠다.
"대충 짐작 가는 게 네 군데 정도 있거든? 두 군데씩 나눠서 찾아보자."
"예."
"발견하면 서로 연락하기로 하고, 여차하면 튈 수도 있으니까 잘 잡아 둬라."
마동섭의 표정은 군사작전을 앞둔 것처럼 비장했다.
나도 덩달아 비장해졌다.
정말 추노꾼이 된 기분이군…….
"찾으면 연락해!"
"예!"
포획작전 시작.
마동섭과 나는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예정대로 찢어졌다.
촌스러운 네온사인이 사방에 휘황찬란한 유흥가였다.
눈이 오는 날씨인데도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어디선가 자글자글하게 고기를 굽는 냄새가 날아와 허기를 자극했다.
‘여기는 아니고.’
첫 번째로 간 곳은 꼬치구이집이었다.
사람들이 자리마다 빼곡히 앉아 술잔을 나누고 있었지만, 그중 안경식의 모습은 없었다.
‘그다음은…….’
나는 마동섭이 가르쳐 준 두 번째 공간을 찾아 나섰다.
허름한 골목.
얼핏 보면 술집이 아닌 것처럼 오래된 간판이 걸려 있는 가게였다.
한마디로, 아는 사람만 찾기 좋은 공간.
‘왠지 여기일 것 같은데?’
이럴 때 내 촉은 틀린 적이 없다.
나는 허름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막 가게 안으로 발을 내딛는 그때, 안쪽에서 와장창하고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