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 흉부외과의 신선한(11)
[문식] 야, 경식아. 잘 지내냐?
뜬금없는 안부 인사였다.
안경식은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형이 갑자기 웬일이래?’
양문식 선배.
작년에 연국대병원에서 성형외과 전문의 자격증을 따고 나갔던 사람이다.
예전에 성형외과에 지원하라고 부추겼던 바로 그 장본인이기도 했다.
별로 반가워하지 않던 중, 프로필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페라리?’
운전대 위에 손을 올려놓고 있는 사진이었다.
얼마 전에 차를 바꾼 모양이군…….
이 차가 4억쯤 하지, 아마?
게다가 손목에 걸려 있는 시계는 말로만 듣던 초고가 명품이다.
저것도 3천만 원쯤 하던가?
진품인지 가품인지 알 길은 없지만, 아마도 진품일 것이다.
그럴 돈이 충분히 있는 사람이니까.
‘이 형은 여전하구나.’
슈퍼 금수저.
부모님이 유명한 성형외과 의사와 학원 강사라, 본인도 부의 길을 착실하게 따라가는 중이다.
안경식은 이 사람에게 늘 거리감을 느꼈다.
영세한 자영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사는 듯했으니까.
<야, 경식아. 우리 집 한번 놀러 와!>
2년 전쯤이었던가?
의사국가고시를 치고 몇 주간의 휴식이 있던 무렵, 안경식은 동기들과 함께 그의 집에 놀러 간 적 있었다.
화려한 한강의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고층 아파트.
새삼 부의 격차가 체감되는 순간이었다.
이런 곳에서 돈 걱정 없이 사는 삶은 대체 어떤 기분일까 싶었다.
<형, 좋으시겠네요. 저는 흙수저라 이런 집은 꿈도 못 꾸는데…….>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뾰족한 말에, 양문식은 피식 웃으며 와인을 따라 주었다.
<야, 경식아. 수저 색깔이 무슨 상관이야? 너도 의사 면허 땄으면 한강뷰 아파트 정도는 살아 줘야 되지 않겠냐?>
안경식은 솔깃했다.
마음을 읽힌 것 같았다.
솔직히 그런 모습을 한 번쯤 상상해 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돈을 위해 의사가 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람인 이상 욕심이 났다.
<너도 올해 성형외과 지원해. 형이랑 나중에 같이 병원 해서 대박 내자!>
곧 성형외과 치프 레지던트가 될 양문식의 말은 안경식의 귀에 쏙쏙 박혔다.
<인턴 1년 큰 문제 없이 보내고 지원하면 형이 교수님들한테 잘 얘기해서 밀어줄게!>
안경식은 팔랑귀였다.
문식이 형의 말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그리고 약 1년 후.
여러 과들 중에서 고민하던 안경식.
인턴 시절 손으로 직접 하는 술기에 재미를 느꼈던 그는, 성형외과가 그의 재능을 꽃피우기에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좀 무리해서 문식이 형의 말대로 성형외과를 지원했다.
물론 그 결과까지 문식이 형이 책임져 주지는 않았지만.
<어, 떨어졌냐? ㅋㅋㅋ 미안~>
다시 생각해도 썩 좋은 기억은 아니다.
괜히 원망스럽다.
물론 떨어진 이유는 본인의 인턴점수와 면접점수 때문이긴 하다.
하지만, 만약 이 형한테 꼬드김을 당하지 않았다면 1지망을 다른 과로 썼을 텐데…….
‘에잇, 뒤늦게 그런 생각 해 봐야 소용없지, 뭐!’
그는 옛 기억을 떨치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흉부외과에서 하는 술기와 수술도 재미있어. 사람 살리는 의사 아무나 하나~!’
이렇게 자기 위안을 하는 지금 시각은 벌써 새벽 1시.
늦은 시각이었지만 메시지를 무시하기도 뭐해서, 안경식은 적당히 답장을 보냈다.
[경식] 형 웬일이에요? 당직이라 이제 봤어요
숫자 1이 없어지고 금방 답문이 날아온다.
[문식] 일하는 중?
[경식] 네, 형. 안 주무셨네요?
[문식] 어 불금이잖어~ 빡세게 놀아야지 ㅋㅋㅋ
불금?
그런 하루를 보내 본 적이 언제였더라…….
안경식은 심지어 오늘이 금요일이라는 것마저도 잊고 있었다.
[경식] 근데 진짜 무슨 일이에요? 옆에 TS 환자 생겼어요? ㅋㅋ
[문식] 무슨 TS 환자냐? 갑자기 여기에 너 닮은 애 보여서 연락해 봤지
[경식] 아 ㅋㅋㅋ
[문식] 나 역삼 블러문인데 지금 올래? 택시비는 내가 줄게
[경식] 당직인데 어떻게 가요
[문식] 제껴~
[경식] ㅋㅋㅋ
[문식] 비싼 술 시켰더니 같이 노는 애들 좋아 죽는다
[경식] ㅋㅋㅋ안경식의 입 모양에는 미동도 없었다.
딱히 할 말이 없기에, 의미 없는 ‘ㅋㅋㅋ’만 치게 된다.
곧 사진이 하나 전송되어 올라온다.
푸르스름한 클럽 조명, 테이블 위에 놓인 고급스러운 샴페인 병이 보인다.
‘와, 저거 한 병에 100만 원이라고 했던 거 같은데…….’
경식은 한숨이 나왔다.
대체 저걸 무슨 정신으로 마시는 거야?
남들 한 달 생활비를 입에 털어 넣는 기분은 어떤 것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문식] 이래도 안 올래?
[경식] 저 오늘 ICU 당직이에요. 이따가 CABG 예정 환자도 응급실로 오기로 해서 힘들 것 같습니다~
[문식] ㅋㅋㅋㅋ 야, 너 아직도 그러고 사냐?
울컥.
안경식은 빈정이 상했다.
‘그러고 산다’니?
자신의 노력을 폄하당한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다.
부족한 손이지만, 한 생명을 죽기 일보 직전에서 구해 내느라 진이 빠져 있던 차였다.
[경식] 형, 조금 전에도 저 아니었으면 사람 한 명 죽었어요. 블리딩으로 브이핍에 어레스트 온 환자였어요.
그러자, 휴대폰 화면 너머로 피식 웃는 듯한 답변이 날아온다.
[문식] 야 사람은 어차피 죽어~ 그리고 너 아니면 병원에 일할 사람 없겠냐?
[경식] 없죠
[문식] 아 하긴 TS였지 ㅋㅋㅋ 거기는 그럴 만하다
‘이 형, 다른 과 무시하는 버릇은 여전하네.’
안경식은 슬슬 짜증이 올라왔다.
안 그래도 피곤한데 누구 놀리나?
모든 사람이 이런 것은 아니었지만, 인기과에 들어간 몇몇은 다른 과를 은근히 무시하기도 했다.
물론 속마음을 곧이곧대로 표현할 수는 없었던 안경식은 억지웃음을 지었다.
[경식] 형 저 콜이 와서 가 볼게요, 재밌게 노세요~ ^^적당히 콜 핑계를 대며 대화를 끝내려 한다.
[문식] 하여튼 경식이 성실해~ 그래서 내가 좋아하지
[경식] ㅋㅋ 다음에 봐요
[문식] 그래 밥 한번 먹자
[경식] 네 ㅋ
[문식] 그냥 하는 말 아니고, 진지하게 할 말 있어서 그래 인마~~진지하게 할 말?
그게 대체 뭘까.
막 핸드폰 화면을 끄려던 안경식이 잠시 망설이는 동안, 문식의 추가 메시지가 올라왔다.
[문식] 너 안 바쁠 때 얘기해! 좋은 얘기니깐~
좋은 얘기라.
당장 더 묻고 싶다.
안경식은 당장 전화를 걸고 싶은 마음을 참았다.
이 형이 옛날에 자신에게 했던 말들이 떠오르자 더욱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눈앞에는 종이컵에 담긴 인스턴트커피가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호로록―
입 안에 털어 넣는다.
조금 전에 보았던 100만 원짜리 샴페인 병이 생각나서 커피 맛이 뚝 떨어지고 말았다.
* * *
다음 날.
안경식은 심장외과 중환자실에서 흉관삽관 시술을 하게 되었다.
‘체스트 튜브(chest tube, 흉관) 넣는 거야 뭐, 1년 동안 지겹게 해 왔으니!’
실제로 흉관삽관은 흉부외과 1년 차들이 주로 하는 업무.
안경식도 지난 1년 동안 수십 차례가 넘게 이 일을 했었다.
하지만.
오늘의 환자는 조금 달랐다.
에크모(ECMO)를 사용 중인 환자였기 때문에, 피를 묽게 하는 약이 투입되고 있었다.
즉, 시술 도중 출혈의 위험이 높은 환자.
거기에다가 키 175에 100kg에 가까운 체중의 남자 환자였기 때문에, 가슴에 구멍을 뚫고 흉강까지 접근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안경식은 조심스럽게 시술을 진행한다.
‘아우― 내 손가락 끝이 흉강(thoracic cavity, 폐가 있는 공간)까지 들어가지도 않네?’
본래 흉관을 넣는 과정에는, 내가 만들어 놓은 구멍으로 손가락을 넣어 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야 흉강까지 길이 잘 만들어져 있는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끙끙―
안경식이 손가락을 넣어 보지만, 여전히 지방과 근육층 사이에 손끝이 위치한다.
‘일단 넣자!’
안경식은 28Fr. 굵기의 두꺼운 흉관을 밀어 넣는다.
흉관을 넣고 난 뒤, 확인한 X―ray에서도 그 위치는 애매하다.
‘……잘 들어간 거 맞지?’
정신없이 몰려드는 중환자들이 많았기에, 안경식은 서둘러 마무리하고 자리를 뜬다.
그리고 그날 오후.
안경식의 전화기에 교수님의 이름이 뜬다.
<야이 시끼야! 너 이거 체스트 튜브(chest tube, 흉관) 어디에다가 넣은 거야?!>
교수님의 목소리가 사납기 그지없다.
안경식의 등골에 소름이 쭈뼛 돋았다.
내가 뭔가 실수라도 한 걸까?
<너 이제 2년 차 아니냐? 저번에 칭찬 한번 해 줬더니 바로 이렇게 사고를 치냐? 응?!>
흉부 CT에서 확인된 흉관의 위치는 갈비뼈 바깥이었다.
즉, 흉강 안으로 집어넣지 못하고 가슴의 지방과 근육층 사이로 흉관을 집어넣은 것이다.
‘맙소사, 이런 실수를 하다니…….’
안경식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다.
잘못 넣은 흉관을 제거하고 다시 넣으면 되지 않냐고?
에크모 때문에 피를 묽게 하고 있었던 환자.
안경식이 넣은 흉관을 빼자 그 자리에는 출혈이 계속되었다.
그렇게 환자는 출혈 때문에 며칠을 고생하고 나서야 회복기에 접어들 수 있었다.
그 며칠 동안 안경식이 교수님에게 털린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얘 체스트 튜브 넣는 거 처음부터 다시 가르쳐라, 동섭아!>
이날의 사건 이후로 안경식은 나날이 위축되고 의기소침해졌다.
중환자실은 물론, 병동과 수술장에서 모두 뒤에서 수군대는 것 같다.
‘체스트 튜브도 못 넣는 놈.’
물론 그 환자가 어려운 케이스였던 것을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안경식은 자격지심에 사로잡혔다.
‘1년 차 때 마스터해야 하는 흉관삽관도 못하는 내가…… 나중에 큰 수술을 할 수 있을까?’
안경식.
시작한 지 이제 1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의 흉부외과 인생 최대 위기가 찾아오고 있었다.
#쫓고 쫓기는 게 우리 인생(1)
1월의 어느 날.
폭설이 내리는 오전이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병동에서 처방을 내고 드레싱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선한아, 나 동의서 받고 올 테니까, 내 환자들 급한 추가 처방 좀 내 줘."
"응 알았어, 김성탁 교수님 30분 있다 회진 오신다고 해서, 난 여기 스테이션에 있을게."
"오늘 신환 6명 입원 예정이던데, 나 이러다 진짜 도망가는 거 아닌가 몰라~!"
오늘도 반쯤 농담 삼아 탈출 각을 재고 있는 신상미.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의 시작.
그런데 무언가 분위기가 달랐다.
스테이션 복도에서 레지던트 선생님들과 펠로우 선생님들이 급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소리가 들렸다.
"안경식 못 봤어?"
"오늘 아침에 컨퍼런스에도 안 보이더니. 얘, 이렇게 지각한 적은 없지 않아?"
"이상하다. 이 자식 왜 출근을 안 하지?"
"전화해 봤어? 어디 당직실에서 뻗어 있는 거 아니야?"
"전화를 안 받아요. 당직실 다 가 봤는데 안 보이던데……."
레지던트들이 그런 이야기를 심각한 표정으로 나누고 있었다.
‘전화를 안 받는다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병원 사람들은 언제든 전화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TS의 특성을 생각해 보면 더더욱 그렇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안경식 선생님인데…….’
안경식 = 성실함.
다른 건 몰라도, 이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전화를 안 받는다니?
그 말인즉슨…….
무언가 심각한 일이 생겼다는 소리다.
창밖으로 눈발이 세차게 몰아치는 겨울날, 흉부외과 병동의 분위기는 뒤숭숭해지고 있었다.
"야, 이거 봐 봐!"
B22
그때 레지던트 한 명이 헐레벌떡 무언가를 들고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