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91화 (191/241)

#191 흉부외과의 신선한(8)

‘정신 차리자!’

짝, 짝―

나는 뺨을 두드렸다.

이젠 자는 도중에도 미래를 보게 되다니…….

난데없이 물벼락을 맞은 기분이다.

그 덕분에, 초등학생 시절 이후 처음으로 침대에서 굴러떨어지는 몸 개그를 해야만 했다.

‘단순한 악몽은 아니었어. 분명 미래의 한 장면을 본 거야!’

나는 벌떡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았다.

꿈에서 본 수술방의 장면들이 흐릿해지려 한다.

마치 유리에 서린 손자국처럼, 금방이라도 기억들이 사라질 것 같다.

나는 휘발되기 직전의 정보들을 되새기며 펜을 들어 메모를 시작했다.

‘잊어버리기 전에 하나씩 적어 보자.’

―브이 핍(심실세동).

―탐폰(심낭압전).

―니어 어레스트(거의 심정지).

―컴프레션(가슴압박).

―뒤늦은 절개, 가슴에 가득한 혈종 등등…….

‘총체적 난국이네.’

나는 펜 끝으로 앞머리를 거칠게 헝클었다.

과연 이 내용들이 그대로 재현된다면, 김덕상 환자가 살 수 있을까?

아마 쉽지 않겠지.

산소공급이 부족한 시간이 이어지는 만큼, 살아나더라도 후유증이 심할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꿈에서 본 최악의 상황만은 막아야만 했다.

‘탐폰이 생겼다는 이야기는, 출혈이 심해서 심장 주위에 피가 찼다는 이야기인데…….’

생각해 보면 작년 강남역에서 사고를 당했던 중학생도 탐폰 환자였다.

하지만, 이번 케이스는 훨씬 복잡하다.

케비지(CABG, 관상동맥 우회술) 수술을 받은 환자인 데다가 심실세동 이벤트까지 있다고 했으니까.

이제 막 TS 1년 차가 되는 나에게는 지나치게 어려운 미션인 셈이다.

‘……움직이자. 분명 내가 미래를 바꿀 기회가 있을 거야.’

타악―

나는 얼른 가운을 집어 들고 방을 뛰쳐나왔다.

일단은 가장 먼저 휴게실로 달려가 컴퓨터 앞에 앉아, 차트를 켰다.

지금 내가 환자의 상태를 가장 빨리 확인할 수 있는 건 이 방법이니까.

"……."

딸깍, 딸깍―

마우스로 차트를 넘겼다.

일단 환자의 출혈을 살피는 것이 먼저다.

빠르게 모니터를 살피던 중, 한 가지 중요한 정보가 눈에 들어왔다.

#1 CTD dain

220 180 40

#2 CTD dain

190 170 30

흉관을 통한 배액량의 변화가 시간 단위로 기록되는 중이다.

그런데, 배액량이 최근 한 시간 동안 급격히 줄었다.

‘출혈이 멈추고 있다는 뜻인데, 그럼 좋은 상태 아닌가?’

잠깐, 아니지.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오직 이 차트로만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고 안심할 수는 없다.

‘탐폰이 걸렸다는 건, 출혈 때문에 심장 주위에 혈액이 가득 찼다는 이야기일 텐데…… 차트는 오히려 반대로 이야기하고 있어. 이상한데?’

의심이 점점 커진다.

문득, 머릿속에 백의신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환자를 직접 보고, 느껴야 한다고.

차트로만 환자를 파악하려 하는 순간, 정말 중요한 걸 놓칠 수 있다고.

그 말은 몇 번이고 되새겨 왔기 때문에 내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이건 직접 확인해야 해!’

덜컹!

나는 숙소 문을 박차고 나섰다.

중환자실로 올라가는 길이 평소보다 멀게 느껴졌다.

숨을 몰아쉬며 문 앞에 도착할 무렵, 누군가 놀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선한 쌤? 왜 그래요?"

근무 중이던 차유리 간호사를 마주쳤다.

"김덕상 환자, 괜찮아요?"

"아까 그 환자분이요?"

차유리 선생은 의아한 표정으로 내 질문에 답했다.

"뭐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은데, 약을 좀 많이 쓰고 있긴 해요. 보통 코스랑은 조금은 다르다고 볼 수도 있지만……."

"안경식 선생님이 알고 계신 거죠?"

"물론이죠."

나는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베드로 다가갔다.

다행히 아직 모니터에 표시되는 바이탈 사인은 정상치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정상치라도 환자에게 들어가는 강심제 등 약의 용량이 높다면, 그 상황은 정상이라고 볼 수 없었다.

굽 있는 신발을 신은 채로 잰 키가, 원래 키라고 생각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도부타민(dobutamine, 강심제)에 에피네프린(epinephrine, 강심제)까지…… 원래 이렇게 많이 쓰나요?"

"아, 안 그래도 방금 약도 늘리고, 볼륨도 더 주자고 하셔서 그렇게 하고 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차유리가 한마디를 덧붙인다.

"다행히 체스트 튜브 드레인양은 조금씩 줄고 있는 것 같은데요?"

나는 미간을 좁혔다.

차유리 간호사의 말대로다.

체스트 튜브(chest tube, 흉관)를 통해 나오는 출혈량이 줄고 있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왜 약이 더 필요하고, 볼륨을 더 먹고 있는 걸까?

나는 아까 보았던 유린백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색깔이 훨씬 진해졌잖아?’

유린백에 떨어지고 있는 소변의 색깔은 벌꿀 색깔처럼 진해져 있었고, 떨어지는 속도 역시 현저히 느렸다.

심장의 힘이 부족하다는 대표적인 증거.

나는 예전에 공부했던 것들을 떠올리며, 환자의 상태를 더 면밀히 살펴보았다.

내가 작년의 인턴 초기였다면 아무 생각 없이 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 눈에는 다르게 보였다.

‘강남역 사건 때에도 살펴봤던 벡스 트라이어드(Beck’s triad)를 생각해 보면…….’

먼저 혈압저하.

혈압이 낮아 보이지는 않지만, 혈압이 낮더라도 약물을 통해서 정상처럼 보일 수 있는 상황이다.

두 번째, 경정맥 확대.

중심정맥압이 올라가 있는 증거가 되는 경정맥 확대.

환자 모니터에 나와 있는 CVP(중심정맥압) 값은 10과 11을 왔다 갔다 하고 있다.

"차유리 선생님, 이 환자 CVP가 좀 높아 보이는데요."

"맞아요, 안 그래도……."

차유리 선생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찰나, 마침 안경식 선생이 등장했다.

"선한 쌤? 이 시간에 중환자실에 웬일로?"

나른한 표정이다.

당직 중에 잠깐 눈을 붙이다 왔는지, 머리카락이 솟아 있다.

"환자 드레인양이 갑자기 줄었길래, 환자 상태 좋아진 건지 궁금해서요."

"크~ 역시 선한 쌤. 처음으로 스터노토미 했던 환자라서 신경 많이 쓰시네요, 좋아 좋아."

주치의인 안경식 선생은 히죽 웃으면서 나를 칭찬했다.

"30분 전에 체크했는데, 다행히 출혈은 멎은 것처럼 보여서. 내일 아침 익스투베이션(extubation, 인공호흡기 제거) 하려 해요."

안경식 선생의 하품 섞인 대답.

이 상황에 대해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는 듯한 기색이다.

나는 초조해졌다.

지금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것은 안경식 선생이고, 내가 핸들을 꺾어야 한다.

차가 벼랑으로 굴러떨어지기 전에.

"혹시 환자가 브이 핍이 생기거나, 탐폰 때문에 어레스트까지 나거나 하는 일은 없겠죠?"

"브이 핍? 탐폰?"

"예. 숨어 있는 출혈이 있다든가……."

아마 다른 선생님이었다면 어이없어하거나 화를 버럭 냈을 것이다.

감히 건방지게 아랫사람이 훈수를 두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하지만 안경식 선생은 내 걱정을 진지하게 고민해 주었다.

"드레인양이 줄었으니까, 출혈이 멎었다고 보는 게 맞긴 한데……."

"혹시 다른 이유라면요?"

"예?"

"체스트 튜브가 막혀 있으면, 출혈이 있어도 알 수 없는 거 아닌가요?"

내 말에 안경식 선생의 얼굴빛이 변하기 시작한다.

흉부외과 2년 차.

올해부터 중환자실 주치의를 돌기에, 그 역시 경험이 많지 않을 것이다.

"맞아요. 그럴 수도 있어요……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심장 수술 후 흉관이 혈전으로 막혀 제 기능을 못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럴 때에는 출혈량을 가늠할 수 없는 경우가 많고, 탐폰까지 진행하기도 한다.

탐폰(tamponade).

심장이 압박을 받아 출력이 약해지는 상태를 뜻한다.

바깥에서 볼 때는 상태가 좋아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안에서는 핏덩어리들이 대책 없이 쌓이면서 심장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CVP 1시간 전에 얼마였죠? 지금 바로 ABGA로 헤모글로빈 레벨 확인해 줘요!"

안경식 선생의 목소리가 급해진다.

나른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다.

그는 흉관에 연결되어 있는 라인을 쥐어짜며 차유리 간호사에게 말한다.

"초음파 준비도 좀 해 주세요, 그리고 Chest X―ray 불러 주시고요!"

동시에 그는 백업 당직으로 있는 마동섭 선생님에게 전화를 건다.

신입 2년 차가 중환자실 주치의가 되는 초반에는, 백업 당직으로 고연차 레지던트가 병원에 상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일로 바쁘신가? 전화를 안 받으시네……!"

뚜르르르―

공허한 연결음만이 울린다.

마동섭 선생님은 통화가 되지 않고, 안경식 선생은 발을 동동 구른다.

옆에 있는 나는 신중히 환자의 모니터링 화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곧 안경식 선생이 초음파 기계를 가슴에 대어 보지만, 익숙지 않은 손놀림이다.

원하는 뷰(view, 장면)를 잡지 못하고 있는 사이, 흉부 엑스레이 촬영을 위한 기계가 아이씨유에 도착했다.

"촬영하겠습니다!"

삑―

그 자리에서 바로 확인이 가능한, 포터블 X―ray 기계.

안경식 선생과 나는 화면에 나타난 결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앞의 결과에 말을 잇지 못했다.

‘……심장이 커졌어!’

내 생각은 옳았다.

심장 주위에는 이미 혈전이 가득 차, X―ray에서 보이는 하얀 부분은 매우 커져 있었다.

흉관이 막혀 있어 출혈량이 적은 것 ‘처럼’ 보였던 것이었다.

안경식 선생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서, 선한 쌤 말이 맞네요…… 튜브가 펑션(funtion, 기능) 못 하고 있는 게 맞네요. 수술방 들어가야 돼요, 이 환자는!"

안경식이 수술장에 연락하여 응급 수술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환자의 모니터에 나타나는 심장 리듬이 불규칙해지기 시작한다.

혈압도 하강 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심전도 그래프가 더 기괴한 모양으로 요동친다.

"브이 핍(V. fib, 심실세동)이에요!"

차유리 간호사의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젠장…… 꿈에서 본 그 상황과 똑같이 흘러가고 있어!’

꿈에서도 마동섭은 심실세동 이벤트부터 시작되었다고 했다.

유일한 차이라면…….

수술실로 가기 전,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뿐이다.

"어, 뭐, 뭐야?!"

안경식 선생은 패닉에 빠졌다.

드르륵―

차유리 간호사가 어느새 제세동기를 끌고 오고 있다.

"선생님 여기요!"

차유리 간호사가 제세동기를 안경식에게 건넸다.

중환자실 근무만 5년 차, 그녀의 지난 세월은 헛되지 않았다.

빠릿빠릿한 그녀의 움직임에 제세동기는 환자 옆에서 이미 준비가 완료되었다.

다른 몇 명의 간호사도 김덕상 환자의 베드로 몰려들고 있었다.

안경식 선생도 정신을 차리고, 제세동기 패들을 양손에 든다.

"100줄(J) 차지(charge, 충전)!"

차유리 간호사가 제세동기에 있는 손잡이를 100까지 돌리고, 차지 버튼을 누른다.

순식간에 100까지 숫자가 올라간다.

"물러나세요!"

쾅―

환자에게 100J의 힘으로 전기충격이 가해진다.

심전도에 보이는 심장 리듬이 잠시 일자로 누웠다가, 다시 모양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환자의 심장 리듬은 여전히 불규칙하고 요란스럽게 요동치는 심실세동이다.

혈압 역시 체크되지 않는다.

"200줄(J) 차지(Charge, 충전)!"

쾅―

이번엔 200J의 쇼크가 가해진다.

순간, 환자 모니터의 심전도가 일그러지면서 모양이 사라지는 듯하다가 다시 심장 리듬을 그린다.

"돌아왔나……?"

모두가 숨죽여 환자의 모니터에 나타나는 심전도 파형에 집중한다.

다행히 정상 리듬을 보인다.

하지만, 잠시였을 뿐.

심장 리듬은 잠깐 정상으로 돌아오는가 싶더니, 다시 조금씩 불규칙해지는 양상이다.

‘심장 근처에 혈종들이 가득한데, 이것들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니 환자가 좋아질 리가 없지!’

내 생각과 안경식 선생의 생각은 같았을 것이다.

"수술방 들어가야 해요! 선한 쌤, 마취과에 지금 당장 응급 수술 들어가야 된다고 전화해요!"

그러는 사이, 다시 환자는 심실세동 상태에 빠진다.

"또 브이 핍(V. fib, 심실세동)이에요!"

심장이 부르르 떨고 있는 상황이니, 혈압도 당연히 잡히지 않는다.

"다시 200줄(J) 차지(Charge, 충전)!"

안경식 선생은 다시 한번 제세동(쇼크)을 시행한다.

김덕상 환자의 생과 사의 경계에서, 심장외과 중환자실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핸들을 꺾어 보려 했지만, 이미 가드레일을 벗어난 차는 벼랑 끝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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