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89화 (189/241)
  • #189 흉부외과의 신선한(6)

    화면에 뜬 발신인은 안경식 선생님이었다.

    "예, 흉부외과 신선한입니다."

    <바빠요?>

    "죄송합니다. 손에 뭘 들고 있어서 바로 전화를 못 받았습니다."

    <아니아니, 죄송할 건 없고.>

    안경식 선생의 유순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만약 성격이 까칠한 레지던트들이었다면…….

    <재깍재깍 안 받아요? 말턴이라고 빠져 가지고!>

    ……그렇게 소리를 버럭 지를 수도 있었다.

    가뜩이나 아침에 교수님들에게 털렸다고 하니, 그 화를 나에게 풀 수도 있었겠지.

    그렇게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인격자에 속했다.

    <잠깐 나 좀 도와줄래요? 16번 수술방으로 와 주면 좋을 것 같은데.>

    "16번 방이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덕상 환자.

    아까 전 내가 있었던 바로 그 수술실이다.

    <베인 하베스트(Great Saphenous Vein harvest, 대복재정맥 채취) 해야 하는데, 어시스트 해 줄 사람이 필요해서.>

    "네, 바로 가겠습니다."

    수술 과정에서 다리에 있는 대복재정맥을 채취해야 하는 데 도움이 필요한 모양이다.

    나는 전화를 끊고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아 참, 그 전에 할 일은 해야지.

    바쁘다, 바빠!

    나는 커피 더미를 수술실 라운지에 내려놓고, 떡메모지를 하나 떼어 붙여 놓았다.

    그리고 <16번 방 수술실>이라고 거친 글씨로 휘갈겨 쓴 뒤 바로 수술방으로 향했다.

    ‘그나저나 한 수술실에 다른 이유로 두 번 불려 가게 되다니…….’

    왠지 기분이 묘했다.

    그간의 경험 때문일까?

    내가 같은 환자와 여러 번 얽히면, 보통은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갔으니까.

    ‘괜한 걱정이겠지.’

    지잉―

    나는 다시 한번 16번 방으로 들어갔다.

    수술실은 아까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김성탁 교수님이 자리하고 있는 필드에는 무게감이 느껴졌고, 고요한 와중에 울려 퍼지는 클래식은 더욱 선명했다.

    마취과 인력, 체외순환사 모두 수술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역시 심장 수술은 수술방 분위기부터 달라.’

    심장 쪽에서는 김성탁 교수님, 마동섭 선생님, 그리고 SA(수술지원 간호사) 선생님이 한창 수술에 몰입 중이었다.

    ‘안경식 선생님은…….’

    그때 안경식 선생님이 앞에서 슬쩍 손을 든다.

    교수님과 마동섭 선생님이 가슴 쪽에서 수술을 하고 있다면, 안경식 선생님은 환자의 다리에 붙어 있었다.

    ‘대복재정맥은 다리에 있는 정맥이니까, 아래쪽에 서 계시는 거구나.’

    심장 수술을 하는데 다리에서 무엇을 하느냐고?

    <관상동맥 우회술>은 심장에 있는 관상동맥이 좁아져 있어 우회하는 길을 만들어 주는 수술이다.

    주로 가슴에 있는 내흉동맥을 사용하여 우회하는 길을 만들어 주지만…….

    또 하나 자주 쓰이는 혈관은 바로 다리에 있는 대복재정맥(GSV, Great Saphenous Vein)이다.

    ‘우리 몸에 없어도 되는 정맥 중에서, 이 혈관이 굴곡되지 않고 편평하게 생겼으니까.’

    김덕상 환자의 수술에서도 다리 쪽에 있는 대복재 정맥이, 대동맥과 관상동맥을 이어 주는 우회로로 쓰일 예정이었다.

    이 정맥을 떼어 내기 위해 안경식 선생님은 수술방에 투입되었다.

    그리고 혼자서 시야 확보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나를 불러 리트랙터를 당기는 역할을 시키려 한 것이다.

    이처럼, 한 수술에도 여러 손이 필요한 상황이 흉부외과에서는 빈번하게 일어났다.

    ‘왔어요?’

    안경식 선생님은 눈짓으로만 말했다.

    교수님이 수술 중이시라, 감히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하는 모습이다.

    가뜩이나 오전에 교수님에게 털려서 그런지, 평소보다 어깨가 더 좁아 보인다.

    ‘안녕하세요.’

    ‘얼른 가서 손 씻고 오세요.’

    안경식 선생은 손짓으로만 내게 사인을 보냈다.

    나는 개수대에서 손을 씻고 수술필드로 들어갔다.

    간호사가 입혀 주는 옷을 입고 환자의 다리 쪽으로 들어가자, 안경식 선생님이 교수님께 조심스럽게 말한다.

    "교수님, 여기 예비 1년 차 신선한 선생님입니다. GSV 하베스트 하는데 도와 달라고 불렀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신선한입니다!"

    "어, 그래? 우리 인턴이잖아. 회진 때마다 매일 보이던데."

    김성탁 교수는 수술에 열중하느라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명 나를 향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름 많이 들었다. 나중에 회식할 때 와라 선한아, 알겠지?"

    수술 중이었지만, 입으로는 나를 향해 반갑게 인사해 주었다.

    마치 수술실에 흐르는 비발디 음악처럼 평온한 말투였다.

    ‘좋으신 분 같네.’

    혹은 단순히 지금 기분이 좋으시거나.

    분위기가 썩 괜찮자, 마동섭이 눈치를 보다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이 환자 스터노토미도 신선한 선생님이 했습니다."

    그러자 교수님이 조금 더 관심을 보였다.

    "아, 그래? 1년 차 되기도 전에 벌써?"

    "네, 워낙 하고 싶어 하기도 하고, 수술방에 자주 들어와서 보기도 했어서. 제가 도와주면서 시켜 줬습니다."

    "오, 그래?"

    교수님은 슬쩍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본 뒤 말했다.

    "열정 좋아. 앞으로도 동섭이한테 많이 배워 둬. 쭉 한 팀으로 일할 거니까."

    <한 팀>.

    교수님들에게도 이제 그런 말을 듣게 되었다.

    짧은 대화가 끝나고 교수님과 마동섭 선생님은 필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 맞춰서 안경식 선생님과 나도 환자의 왼쪽 다리 편에 나란히 섰다.

    "이거 들고 제가 당기라는 곳 당기면 돼요, 알겠죠?"

    "예."

    난생처음 보는 대복재정맥 채취(GSV harvest)였다.

    안경식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리트랙터를 들고 시야를 만들어 주었다.

    <대복재정맥 채취>.

    말 그대로, 환자의 하지에 지나가는 정맥을 떼어 내는 작업이다.

    이 작업을 위해서는 정맥 주위를 잘 박리하여 정맥을 드러내야 하고, 좌우로 뻗어 나가는 가지(branch)들을 정리해 주어야 한다.

    길게 절개하여 시행될 수도 있지만, 드문드문 절개하여 환자의 상처를 최소화하는 방법이 이 수술에서 사용되었다.

    그렇다 보니, 누군가 리트랙터를 통해서 시야를 확보해 주어야만 했고, 그 역할이 오늘 나의 주 임무였다.

    발목 쪽부터 시작된 정맥 채취는 순탄하게 흘러가는가 싶었다.

    하지만…….

    "경식아, 얼마큼 했어? 아직도야?"

    김성탁 교수님이 안경식에게 물었다.

    "네, 거의 다 했습니다."

    교수님은 슬쩍 다리 쪽을 쳐다보았다.

    못마땅해하는 눈빛.

    내가 보기에도 아직 반 정도밖에 진행이 안 된 것 같았다.

    "경식아, 얼마나 더 걸리냐고. 정확히 말을 해."

    "15분만 더 주시면……."

    안경식이 버벅이자, 교수의 말이 갑자기 거칠어졌다.

    "야, 시끼야. 여기 벌써 다 되어 가는데, 너 아직도 그러고 있으면 어떻게 하냐?!"

    흠칫!

    안경식 선생님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수술실의 비발디 선율은 어느새 묵직한 베토벤으로 바뀌어 있었다.

    "정신 안 차릴래?"

    "죄송합니다."

    "답답한 시끼야, 너 이제 2년 차야. 네 앞에 지금 네가 가르쳐야 할 1년 차도 들어왔잖아. 2년 차가 돼서 아직도……."

    교수는 뭐라 더 말하려다가 내 쪽을 슬쩍 보더니 마스크 아래로 한숨을 쉬었다.

    "얼른 해라."

    "……예."

    안경식은 안쓰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뭔가 본인이 원하는 대로 진행이 안 돼 보였다.

    오히려 교수님의 한마디에 마음이 더 급해진 듯했다.

    심장 쪽에서의 진행 과정에 비해 다리에서 정맥을 채취하는 과정이 느린 상황이었다.

    ‘내가 더 열심히 도와드려야겠다.’

    아까 스터노토미하면서 혈관을 찾았던 경험 덕분일까?

    대복재정맥에서 나오는 가지들이 눈에 쉽게 들어왔다.

    나는 안경식 선생님이 나아가야 할 길을 당기고, 석션해 가면서 밝혀 주었다.

    내 어시스트가 능숙해질수록 안경식 선생님의 속도도 빨라졌다.

    조금은 도움이 된 것일까?

    평정심을 잃고 허둥대던 그의 손은, 내 어시스트와 함께 안정을 되찾아 갔다.

    "……."

    그렇게 십여 분 후.

    안경식 선생은 무사히 대복재정맥 채취를 끝낼 수 있었다.

    "수고했어요…… 이제 가 봐도 돼요."

    그렇게 내게 속삭이는 안경식 선생의 목소리는 거의 땅을 파고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나는 교수님께 인사를 하고 수술방을 나왔다.

    "안경식. 내가 뭔 말 할지 알지?"

    "죄송합니다."

    "이거 네가 떼어 낸 거 봐 봐. 옆에 다 새는 거 보이지? 이래 가지고 이거 어떻게 쓰냐, 응?"

    지잉―

    내 등 뒤로 수술실 문이 닫혔다.

    나오는 도중에도 안경식 선생님은 떼어 낸 대복재정맥에 대해서 교수님께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한 팀이라…….’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막연히 긍정적인 감정만 들었다.

    흉부외과의 가족이 된 기분이었으니까.

    하지만 꼭 그 단어가 따스한 온도만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팀원으로서의 의무.

    책임감.

    부담감.

    그 모든 것을 자각하라는 뜻이기도 했다.

    인턴 때와는 전혀 다른 압박이 주어지며,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가차 없는 질타가 이어질 것이다.

    ‘장난 아니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한편, 안경식 선생이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외과 변규남 선생은 멘탈이라도 튼튼했었지.

    안경식 선생은 유리처럼 섬세한 감성을 가진 사람인 것 같은데…….

    ‘저 사람, 멘탈 괜찮을까?’

    * * *

    그렇게 수술방을 나와서 나는 다시 병동으로 향했다.

    수술실에서 일하는 동안 또 일이 쌓여 있었으니까.

    ‘오늘 점심은 스킵이다!’

    그렇게 몇 시간을 일했을까.

    업무를 거의 끝내 놓고 나니 저녁 7시였다.

    그때,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린다.

    [경식] 병동에 환자들 괜찮아요? 별일 없으면 아이씨유 와서 족발 먹어요.

    안경식 선생님은 저녁을 먹으면서 중환자실 환자들에 대해 인계해 주겠다며 나를 불렀다.

    ‘어차피 중환자실에서 내일 병동으로 올 환자들은, 내가 주치의가 되는 거니까…….’

    중환자실 주치의인 안경식 선생님의 환자 인계는 중요했다.

    나는 답문을 보냈다.

    [선한] 네, 하던 일만 마치고 바로 가겠습니다.

    [경식] 족발은 제가 쏨.

    [선한] 앗, 감사합니다!

    [경식] 아까 도와준 거 고마워서리 ㅎㅎ

    역시 성격 하나만큼은 좋은 사람이다.

    멘탈은 어떤 상태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급히 병동 일을 마치고 중환자실을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여기도 앞으로 나의 터전이 될 곳이구나.’

    흉부외과 심장외과 중환자실(03H).

    눈앞에 가장 먼저 보이는 환자는 수술이 끝난 김덕상 환자였다.

    ‘나의 첫 스터노토미 환자. 별일 없어야 할 텐데…….’

    안경식 선생님이 기다리고 있는 회의실에 가기 전에, 나는 김덕상 환자를 먼저 살펴보았다.

    슈욱― 슈욱―

    그는 아직 인공호흡기에 의존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바이탈 사인은 정상.

    나는 모니터에 떠 있는 김덕상 환자의 여러 가지 생체 징후를 바라보았다.

    ‘소변 잘 나오는 게 중요하다고, 아침에 김성탁 교수님이 회진 때 말씀하셨지.’

    유뇨무사.

    <소변이 나오면 환자는 죽지 않는다>고 김성탁 교수님은 이야기했었다.

    ‘물론 생사를 오가는 환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지만…….’

    나는 허리를 살짝 숙여, 김덕상 환자의 유린백(urine bag, 소변통)에서 떨어지는 소변 한 방울, 한 방울을 쳐다보았다.

    똑― 똑―

    적당한 진하기의 소변이 유린백에 쌓여가고 있었다.

    ‘김덕상 님 담당 간호사님도 열심히 환자 보고 있겠지?’

    그때, 누군가 내 등을 톡톡 쳤다.

    "선한 쌤, 오랜만이네요!"

    누구지?

    이곳에 나에게 이렇게 친근하게 말을 걸 만한 간호사 선생님은 없을 텐데…….

    "결국 연국대병원 써전(surgeon, 외과의)이 됐네요?"

    익숙한 목소리였다.

    중환자실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씩씩하고 야무진 기운이 느껴진다.

    고개를 돌린 내 입가에 반가운 미소가 지어졌다.

    "차유리 선생님이 왜 여기서 나와요?"

    지난 5월.

    중환자실에서 섬망 환자 어택중 님의 생사를 논할 때 친해졌던 바로 그 간호사 선생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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