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흉부외과의 신선한(4)
어린 시절.
나는 손으로 하는 건 무조건 잘하는 아이였다.
칼, 가위, 각종 조립 등등…….
뭐든 상관없었다.
어떤 도구든 완벽히 다룰 때까지 집착했고, 언젠가는 내 재능을 살리고 싶었다.
그래서였을까?
우연히 백의신의 다큐멘터리를 보았을 때, 눈앞이 환하게 밝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멋있다…… 저게 외과의사의 세계구나!’
나는 화면 속으로 빨려들어 가듯 집중했다.
화면에 비치던 것은 CABG(관상동맥우회술).
렌즈가 앞으로 툭 튀어나온 확대경을 쓴 채, 하늘색 수술복 위에 상아 색깔의 장갑을 끼고 수술대 앞에 서 있던 백의신.
그의 장갑에는 굳어 있는 피가 군데군데 붉게 묻어 있었다.
나는 빠르고 절도 있게 필드 위에서 움직이는 백의신의 손가락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자르고, 꿰매고…….
그의 손놀림은 자로 잰 듯 날카롭고 정확했다.
사람의 몸을 열고 혈관과 혈관을 이어붙이는 일에 감정은 섞여 있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 무미건조한 과정 속에서, 나는 역설적으로 뜨거운 감정을 느꼈다.
‘나도 저 자리에 서 보고 싶다.’
환자의 오른쪽.
<집도의>의 자리.
그날부터, 나는 백의신과 같은 자리에 서는 날을 마음속으로 그려 왔다.
그리고 오늘.
마침 그때 보았던 것과 똑같은 CABG 수술에서, 나는 처음으로 메스를 쥐게 되었다.
* * *
지잉―
수술방 문이 열린다.
통상 5―6시간이 걸리는 CABG 수술.
나는 김덕상 환자의 수술이 열리는 16번 방으로 들어갔다.
<따라라란―>
차분한 바흐의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오늘은 집도의가 김성탁 교수님이니까 클래식 음악이다.
만약 허준임 교수님이었다면 최신 힙합 음악이었겠지.
이처럼 수술실의 음악으로도 집도의들의 성향을 대략 파악할 수 있었다.
"어, 왔어?"
마동섭 선생님이 나를 반긴다.
오늘도 그는 수술용 루페(loupe, 확대경)를 쓰고, 이마에는 헤드라이트를 두른 상태였다.
"긴장한 건 아니지?"
"괜찮습니다."
"흐흐. 그동안 몇 번 뒤에서도 보고, 맞은편에서 어시스트도 서 봤으니까 잘할 수 있을 거야!"
"오~ 선한 쌤이 오늘 뭔가 하는 거예요?"
옆에서 한창 준비 중이던 수술방 간호사 선생님이 관심을 보였다.
"오늘 선한이가 스터노토미(sternotomy, 흉골 절개) 할 거예요!"
"오, 그래요? 스터노토미도 이와이 하고 나면 커피 쏘나요? 호호."
이와이(祝).
일본어로 ‘축하 행사’를 뜻한다.
첫 집도를 했을 때 쓰이는 용어인데, 옛날부터 잘못 전해 오는 관습적인 표현일 것이다.
어쨌든 처음으로 수술을 하게 된 것을 축하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야기하신 것 같다.
"물론이죠. 끝나고 나면 흉부외과 선생님들께 커피 한 잔 돌리겠습니다."
내 대답에 마동섭이 픽 웃으며 간호사와 농담을 주고받았다.
"에이~ 스터노토미 해 봤다고 쏘라고 하는 건 좀 너무하죠. 흐흐."
"순진한 1년 차 쌤한테 좀 얻어먹으려 했더니 왜 방해하세요? 호호. 아직은 인턴 쌤이라 해야 되려나?"
"너무 그러지 마시고, 선한이도 헤드라이트 하나 챙겨 주세요!"
"네~ 네."
헤드라이트(head light).
머리에 쓰는 나만을 위한 무영등이라고 볼 수 있다.
내 시선이 있는 곳으로 또 하나의 조명을 이마에 두르는 것이다.
특히 심장 수술처럼 세밀함이 요구되는 수술에서는, 헤드라이트를 통해 시야를 더 밝히는 것이 필수적이다.
"선생님, 여기요."
"감사합니다."
나는 간호사 선생님이 챙겨 주신 헤드라이트를 이마에 둘렀다.
탁―
버튼이 눌리자, 내 이마에서 한 줄기 강한 빛이 나오기 시작했다.
‘내 시야를 가장 잘 밝혀 줄 수 있도록 방향을 조정해야 하니까…….’
요령은 간단하다.
일단 왼손 엄지를 시선 방향으로 둔다.
그리고 불빛이 왼손 엄지에 떨어질 수 있도록, 오른손으로 헤드라이트의 위치를 조정한다.
처음 해 보는 일이라 조금 어색했지만, 그동안 보고 배운 게 있어서 금방 할 수 있었다.
"잘 맞췄어?"
나는 헤드라이트 라인 끝을 뒷주머니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손 씻고 들어오자."
우리는 환자 소독을 마치고, 개수대로 손을 씻으러 나갔다.
"여태 본 대로 하면 되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고!"
"감사합니다."
"내가 앞에서 도와줄 거니까 문제없을 거야."
마동섭 선생님의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듬직하게 느껴졌다.
‘잘할 수 있어. 어제 교육용 영상도 수십 번 찾아서 돌려봤으니까.’
지잉―
다시 수술방 문이 열린다.
똑바로 누워 있는 환자의 우측 집도의 자리에는 내가, 좌측 어시스트 자리에는 마동섭 선생님이 섰다.
‘……결국 내가 이 자리에 서게 되는구나.’
나는 잠시 감상에 젖었다.
연국대병원 수술실, 환자의 오른쪽.
정확히 어릴 때 보았던 TV 속 백의신이 서 있던 자리라 기분이 묘했다.
물론 나는 아직 집도의가 아니다.
단지 환자의 가슴을 열기 위해 잠시 집도의의 자리에 섰을 뿐.
그런데도, 마음이 설렜다.
드디어 내가 동경하던 세계에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선 느낌이었다.
"김덕상 환자, CABG 수술 시작하겠습니다!"
마동섭 선생님이 외친다.
나는 간호사에게 손을 벌리려 했다.
그런데, 헤드라이트가 내 시선과 똑같이 맞춰지지 않았다.
‘어라? 아까는 잘 맞춰 놓은 거 같았는데…….’
내가 잠시 머뭇거리자, 마동섭 선생님이 바로 눈치를 챘다.
"헤드라이트 잘 안 맞지? 원래 처음에는 맞추기 힘든 거야, 흐흐."
나는 서큐레이팅 널스(nurse, 간호사)에게 부탁하여, 헤드라이트를 다시 한번 세밀하게 조정했다.
이런 소소한 부분이, 내가 아직 초짜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이제 맞습니다."
"그래, 시작해 보자!"
나는 옆으로 손을 내밀었다.
"블랙 실크(black silk, 봉합에 쓰이는 실) 하나 주세요."
그러자 마동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바로 성급하게 칼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 들어갈 자리를 먼저 봐야지."
그렇다.
정중 흉골절개는 말 그대로 가슴의 정중앙에서 시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피부 절개도 정중앙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나는 먼저 흉골의 윗부분과 아랫부분 가운데를 체크했다.
그 후, 간호사에게 받은 실을 쭉 펴서 두 부분을 잇듯 환자의 피부에 대고 눌렀다.
그러자 환자의 피부 위로 움푹 파인 골이 하나 생겼다.
"그래, 그렇게 절개선을 표시하고 시작하는 거야."
마동섭 선생이 내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나는 간호사에게 손을 내밀며, 오랫동안 머릿속으로 그려 왔던 말을 내뱉었다.
"메스!"
흉부외과 신선한으로서, 처음으로 외치는 <메스>였다.
흉부외과 합격 발표를 확인하는 순간보다 더 설렜다.
언제나 이 순간을 기다려 왔으니까.
앞으로 더욱 많고 복잡한 수술에 참여하겠지만,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다.
심장 수술의 첫 단계, 스터노토미.
내 기분은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붕 뜬 기분이었다.
"메스 여기요."
사악―
장갑 위로 느껴지는 금속 재질이 기분 좋다.
나는 메스를 건네받아, 미리 그어 놓은 선을 따라서 절개를 하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
주위가 고요해진다.
시간이 0.1배속으로 느려지는 것 같다.
마치 현실 위에 또 다른 현실이 덧씌워지는 듯한 기분.
‘잠시 잊고 있었네. 한동안 안 보이더니…….’
환자 앞에서 메스를 잡으면 가끔 시작되는 현상.
미래의 수술 과정을 짧게 보여 주는 비전(vision)이 눈앞에 펼쳐졌다.
‘저번에도 내가 해야 할 술기를 미리 한 번 보여 줬었지…… 집중해서 보자. 무언가 잘못되지는 않는지!’
나는 빠르게 흘러가는 슬라이드에 집중했다.
인시젼(incision, 절개).
석션(suction, 피를 기구로 흡입하여 시야를 밝힘).
보비(bovie, 수술용 전기칼)로 태우고…….
곧 환자의 흉골이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엇?’
그런데, 갑자기 흉골 윗면에서 피가 차오른다.
아직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좁은 공간에서 피가 차오르더니, 급기야 피부 바깥까지 넘친다.
‘뭐지? 혈관 어딘가 터진 건가?’
파앗―
비전이 사라진다.
짧고 강렬한 영상이었다.
나는 눈을 몇 번 깜빡여서 잔영을 떨쳐 내었다.
‘뭐가 문제였지?’
스터노토미 과정에서 환자에게 큰 해를 가하게 되는 출혈 이벤트는 거의 없다고 공부했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냥 이대로 진행이 된다면…….
나는 첫 스터노토미 과정에서 어떤 출혈 이벤트를 겪게 된다.
그때, 어제 보았던 동영상에서 영어로 들렸던 코멘트가 머릿속에 스쳐 갔다.
언뜻 지나칠 수 있는 문장이었지만.
‘……그래. 어떤 문제일지 알 것 같아.’
오늘을 위해 몇 번이나 재생해 봤기에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나는 어렴풋이 눈치챈 후 고개를 끄덕였다.
"왜, 문제 있어?"
"아닙니다."
나는 차분히 대답했다.
만약 미래를 보지 않은 채 진행했다면, 분명 당황했을 것이다.
하지만 미리 어느 부분에서 문제가 생길지 확인했으니…….
‘할 수 있어.’
게다가 마동섭이 바로 앞에서 언제든지 도와줄 수 있는 상황.
나는 비젼을 통해 본 출혈에 조심하면서, 진행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미래의 문제점을 단편적으로 알고 있으니, 그만큼 주의를 기울여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인시젼(incision, 절개) 들어갑니다."
스윽―
나는 환자의 몸에 메스를 가져갔다.
미리 마킹해 둔 선을 따라, 나는 담담하게 20cm 넘게 메스를 길게 그었다.
‘이렇게 길게 절개를 해 보는 건 처음이다.’
주우욱―
피부 위에 선이 그어진다.
예전에 흉관을 넣을 때, 2cm 남짓 절개를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주르륵―
나의 메스가 움직이는 길을 따라 선홍색 피가 흘렀다.
마동섭 선생님은 그 피를 거즈와 석션을 사용해서 닦아 주었고, 내 시야를 밝혀 주었다.
"굿, 인시젼 좋았어."
마동섭은 짧게 내 절개술을 칭찬했다.
"이제 보비로 흉골이 보일 때까지 깊이 들어가 보자. 저번에 말했듯이, 양측 pectoralis muscle(대흉근) 사이로 들어가야 해, 그게 정 가운데 미드라인(mid―line)이니까! 오케이?"
우리의 가슴 양쪽에 있는 근육들은 몸 가운데 흉골에서 뻗어 나가게 된다.
이 양쪽 가슴 근육의 사이가 바로 흉골의 정중앙 선, 미드라인이 된다.
만약 중앙으로 절개를 하지 못하게 되면?
불필요하게 갈비뼈에 손상을 줄 수 있고, 수술 후 호흡운동과 상처 회복에 문제를 일으킨다.
심장 수술 같은 큰 수술에서는, 이런 작은 문제라도 환자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
그렇기에 흉골 가운데로 절개를 하고, 잘 봉합해 주는 것은 중요했다.
"보비 주세요."
나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메스를 간호사에게 건네주고 보비를 쥐었다.
그 후, 조심스럽게 피부 아래에 있는 지방층을 태우면서 깊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치이익―
보비.
칼보다는 펜같이 생긴 이 도구에는 두 가지 버튼이 존재한다.
하나는 절개용(cut), 하나는 지혈용(coaguation).
흐르는 전류와 전압의 차이를 조절해 그 용도에 맞게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보비를 통해 지혈을 하면서 지방층을 박리하자, 분홍색으로 된 근육의 끝자락에 있는 근섬유(muscle fiber)들이 살며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근육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양측 근섬유들이 교차하는 곳으로 가다 보면…… 그래, 여기가 미드라인이구나!’
근육 사이로, 마침내 스터넘(sternum, 흉골)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석션을 들고 있는 마동섭 선생님의 손도 분주하게 움직였고, 내가 찾은 스터넘을 석션 끝으로 정리하면서 가리켰다.
"자, 이제 아래쪽부터 정리해 보자!"
마동섭 선생님의 석션은 흉골의 아랫면으로 향했다.
흉골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윗부분인 매누브리움(Manubrium), 가운데 부분인 바디(Body), 그리고 꼬리처럼 달려 있는 자이포이드(Xiphoid process)가 그 세 부분이다.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는 자이포이드는 사람마다 생김새가 모두 다르다.
얇은 사람, 두꺼운 사람, 앞쪽 방향으로 튀어나온 사람 등등…….
사람의 얼굴이 다르게 생긴 것처럼, 자이포이드도 모두 달랐다.
"이분은 자이포이드가 이쁘게 생기셨네, 흐흐. 별거 없어! 자이포이드 밑면에 스터노포미 쏘(saw, 톱)이 들어갈 수 있게 박리 좀 해 놓자."
마동섭 선생님의 리드 아래, 나는 보비를 이용하여 자이포이드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배운 대로, 라잇 앵글 포셉(right angle forcep, 수술기구)과 손가락을 이용해 스터노토미 쏘(saw, 톱)가 들어갈 공간을 확보했다.
"자, 다 됐으면 이제 위쪽 동네로 가자!"
마동섭 선생님이 이야기하는 위쪽 동네는 스터넘의 윗면, 매누브리움을 말했다.
‘이 근처다, 출혈이 발생하는 곳! 여기를 조심해야 돼!’
나는 집중력을 다잡았다.
처음이지만, 처음이 아닌 느낌.
미래를 보았기 때문일까?
평소보다 감각이 날카로워질 뿐, 긴장되지는 않았다.
나는 문제의 흉골 윗면으로 손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