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84화 (184/241)

#184 한 걸음 앞으로(7)

내가 인턴 대표가 되던 날, 연국대병원에 플래카드가 걸릴 뻔했다.

"아버지, 굳이 안 오셔도 된다니까요."

<아들이 그렇게 큰 상을 받는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겄냐? 꽃이라도 사 들고 가야…….>

"제발 그러지 마세요."

나는 흥분한 가족들을 극구 만류한 뒤 전화를 끊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나도 얼떨떨하다.

아직 실감이 안 난다. 내가 인턴 대표로 상을 받는다는 게.

"이야~ 연국대 출신도 아니면서 인턴 대표로 당당하게 깃발을 꽂아버리네. 인간 승리다, 인간 승리!"

근욱이는 자기가 더 감격한 듯 나를 축하해 주었다.

"선한 오빠, 축하해요! 올해의 인턴을 타 대학 출신이 받는 거 처음이래요!"

연서는 신난 강아지처럼 웃으며 기뻐했고…….

"나는 네가 받을 줄 알고 있었어. 우리 중에 너 아니면 누가 상을 받겠어?"

소담이는 평소처럼 담담하게 웃었다.

각자 스타일은 달랐지만, 다들 자신의 일처럼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지금부터 연말 시상식을 시작하겠습니다. 호명되시는 분들은 단상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나는 뻣뻣한 걸음으로 단상을 향해 나섰다.

아마 이 영상은 원내 인트라넷을 통해 동영상으로 중계되고 있을 것이다.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부원장 함경일 교수님이 유리로 만든 상패를 전달해 주었다.

악수하며 내 손을 잡는 함경일 교수님의 손은 두텁고 따뜻했다.

"자, 선생님들, 웃으시고요~ 이 사진은 연국대병원 홈페이지에 영원히 남을 테니까 잘 나와야 합니다!"

찰칵, 찰칵!

교수님 바로 옆에서 홍보팀장님이 나를 향해 셔터를 눌러 댔다.

이런 기분은 몇 번을 겪어도 어색하다.

"언제 밥 한번 해야지?"

"예, 교수님."

그렇게 교수님은 따뜻한 미소를 보이며 말하고는, 옆에 있는 수상자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와…… 내가 이 자리에 서다니…….’

처음 이 병원에 왔을 때가 생각난다.

마치 난파된 배에서 떠내려온 듯한 심정이었지.

돌아갈 모교도 없기에, 무조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그리고, 지금.

병원에서 가장 주목받는 존재가 된 기분은 썩 나쁘지 않다.

천장에서 내려오는 조명에 시야가 흐렸지만, 뒤편에 보이는 강당 좌석 여기저기서 핸드폰을 들고 촬영하는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올해의 교수 : 엄서용

―올해의 레지던트 : 김은성

―올해의 간호사 : 임정현

―올해의 인턴 : 신선한

<올해도 연국대병원을 빛내 주신 의료인분들께 다시 한번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강당에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진다.

정신없이 사진 몇 장을 더 찍고 내려오는데,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류명인.

‘얘가 여기는 무슨 일이야?’

내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녀석은 밀랍처럼 하얗게 굳은 얼굴로 저벅저벅 걸어와 대뜸 말했다.

"저 태어나서 1등 뺏긴 거 처음이에요."

"그래?"

"이번엔 양보할게요. 4년 뒤 레지던트 끝날 때 전문의 시험 1등은 내가 할 거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무언가를 불쑥 내민다.

작은 꽃다발이다.

……얘는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다.

"……이거 꽃은 네가 산 거야?

"나한테 줄 꽃다발 미리 사 놓은 거예요. 형한테 꽃다발 전달하는 역할 부탁하려 했는데……."

역시 류명인.

그래도 똑똑한 놈이다.

본인에게 꽃다발 사 줄 친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래, 아무튼 고맙다. 같이 사진이라도 한 장 찍자."

"싫은데요. 패배자가 무슨 사진이에요? 4년 후에 두고 봅시다."

그렇게 말한 뒤 등을 돌려 사라진다.

하여간 진짜 특이한 놈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피식 웃는데, 인파 사이로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어? 선생님들!"

마동섭과 송유주.

두 사람이 찾아와 두 번째 꽃다발을 내게 내밀었다.

바쁘기로는 연국대병원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들일 텐데 여기까지 찾아와 주다니…….

"축하한다."

"고맙습니다. 두 분 다 바쁘실 텐데……."

"어떻게 그냥 넘어가겠어? 새해 찾아오기 전부터 흉부외과의 자랑이 생겼는데."

<흉부외과의 자랑>.

마동섭의 말을 들으니 가슴이 간질거렸다.

소속이 있다는 건 좋은 거구나…….

벌써부터 품 안의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봄이 되면, 나는 이제 정식으로 흉부외과 의사가 된다.

"그러고 보니 유주 너도 올해의 인턴 출신이잖아? 너랑 꼭 닮은 사람 후임으로 받는 기분이 어때?"

"닮기는 무슨."

송유주는 심드렁한 표정이다.

딱 봐도 마동섭에게 억지로 불려 나온 듯하다.

"야, 너무 무뚝뚝하게 굴지 말고 한마디 해 줘라. 이제부터 우리 가족인데!"

눈치를 주는 마동섭의 말에 송유주는 내게 한마디를 던졌다.

"야, 웰컴 투 흉부외과."

"감사합니다."

"잘해라."

나는 미소를 지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

"잘할 겁니다."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설렌다.

왜인지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다.

창밖에 눈이 소복하게 쌓이던 1월.

나는 드디어 흉부외과 심장 파트에서 일하게 되었다.

#흉부외과의 신선한(1)

김덕상은 눈 오는 날이 싫었다.

그의 나이 49세.

평생 살면서, 눈 오는 날 좋은 일이 생겼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날도, 부인과 이혼했던 날도…… 언제나 눈이 펑펑 내렸다.

더군다나 오늘처럼 배달 업무를 해야 하는 날이면 더더욱 날씨가 원망스러웠다.

"제기럴, 마지막 배달은 괜히 받았나……."

그는 눈발을 헤치고 주택으로 향했다.

매서운 겨울바람에 발개진 손에는 단단히 포장된 치킨이 들려 있었다.

삐리리―

추위로 굽은 손을 펴 도어벨을 누르자 안쪽에서 까칠한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그, 눈길에 오느라……."

"다 식었겠네. 분명 총알 배달이라고 해서 시켰는데 어떡할 거예요?"

사람이 이런 날씨에 어떻게 총알처럼 움직입니까?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곧이곧대로 속내를 얘기할 순 없었다.

덕상은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그래도 많이 식지는 않았을 거여요."

"끝까지 죄송하단 말이 없네요?"

"……죄송합니다."

"물은 사 왔어요?"

"예?"

"제가 추가 요청에 물 좀 사 오라고 적어 놨잖아요. 심부름값 드린다구요."

덕상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저희는 배달만 합니다. 심부름은 안 해요."

"어휴…… 됐고, 이리 주세요."

쾅!

문이 닫혔다.

덕상은 열이 받아 얼굴이 벌게졌다.

물론 그 열을 식히는 데는 큰 노력이 들지 않았다. 연립주택을 나서자마자 시린 한기가 낡은 패딩 사이로 몰아닥쳤으니까.

"옌장, 더럽게 춥네."

그는 하릴없이 옷깃을 스몄다.

내일모레 50인데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남들은 이 나이 때면 벌어 놓은 돈 굴리면서 유유자적하게 산다던데…….

‘유유자적은 개뿔, 남은 건 빚밖에 없구만.’

그는 픽 웃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눈발이 흩날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는 자신의 인생을 반추해 보았다.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을 때.

운 좋게 사업이 번창하던 시절에는 세상이 모두 내 것인 줄만 알았다.

백화점에서 가격표를 보지 않고 물건들을 샀다.

결혼식도 호화롭게 치렀고, 자식들에게는 좋은 것만 입혔다.

……그러다 사업이 망하고.

두 번 망하고.

세 번째 기회는 절대 주어지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자신의 인생에는 별거와 이혼, 빚 그리고 망가진 건강만이 남았다.

"제기럴, 담배도 없네."

그는 빈 담뱃갑을 탈탈 털었다.

문득 10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났다.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아버지도 담배를 그렇게 자주 태우셨지.

휴일도 없이 밤낮으로 일했던 아버지를 지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쉬긴 뭘 쉬어? 하루 쉬면 돈이 얼만데…… 빚 갚으려면 일해야지.’

덕상은 책임감이 있었다.

빚을 갚는 것도, 양육비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오늘은 점심부터 7시간 동안 쉬지 않고 배달을 했으니 뜨신 물에 몸을 풀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며 원룸으로 향하는데, 입구 근처 골목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선생님."

"어잇 씨 깜짝이야."

"한두 번 보는 사이도 아닌데 뭘 그렇게 놀랍니까? 제가 저승사자도 아닌데."

저승사자보다 무서운 건 빚쟁이고 했던가?

눈앞에 나타난 것은, 대부업체에에서 고용된 남자였다.

나이는 아들뻘 정도.

영화에서 보던 조폭 같은 얼굴은 아니고, 오히려 번듯한 직장인처럼 보이는 인상이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빚 독촉하러 찾아오는 거, 불법 아닌가?"

"저녁 9시까지는 불법 아닙니다, 선생님. 저희 업체 이래 봬도 채권추심법 준수하니까요."

포마드 머리를 한 남자의 말투는 사무적이었다.

덕상은 핸드폰 시계를 힐긋 바라보았다.

저녁 8시 50분.

불법 아니네, 망할.

그는 털모자를 벗어 쌓인 눈을 털며 한숨을 쉬었다.

"……왜 또 왔어? 빚 열심히 갚고 있는데."

"저라고 선생님 얼굴 보고 싶어서 온 거 아닙니다. 저도 칼퇴하고 싶었어요. 오전에 연락을 안 받으셨잖아요."

"일하느라……."

"요새는 무슨 일 하시는데요?"

"그냥 온갖 아르바이트지 뭘."

거짓이 아니었다.

사업이 망한 후 몇 년간, 김덕상은 안 해 본 알바가 없었다.

그중, 요새는 뭐니 뭐니 해도 배달이 최고다.

하루 종일 바쁘게 일하면 벌이가 제법 나쁘지 않아, 통장에도 아주 조금씩이지만 돈이 쌓였다.

"빚 갚느라 고생하시는 거 압니다. 선생님은 모범적인 채무자예요. 얼른 다 갚으셔서 서로 볼 일 없으면 합니다."

"그래, 그래야지."

덕상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주머니를 뒤졌다.

아, 담배 다 떨어졌었지. 망할.

그 모습을 보던 포마드 남자가 자신의 담배를 꺼냈다.

"한 대 피우실랍니까?"

"좋지."

치익―

불이 붙는다.

두 사람은 잠시 가로등 아래서 맞담배를 피웠다.

부자지간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나이 차이지만, 마주 서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았다.

"……."

……벌써 몇 달째일까. 이런 어색한 만남이.

채무자와 채권추심자는 결코 정이 들 수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을 찾아와 안부라도 물어 주는 사람은 이 남자밖에 없었다.

자신을 괴롭히는 빚이, 오히려 마지막 남은 세상과의 연결 고리라 생각하니 담배 맛이 썼다.

"오늘 그냥 소재만 확인하러 온 거니까 너무 원망 마세요. 저처럼 신사적으로 빚 독촉하는 사람 없잖아요."

"알지…… 알아."

"밥은 먹고 다니십니까? 운동은 좀 하시구요?"

"밥이야 뭐 대충 먹고…… 하루 중에 주식 들여다보는 게 낙이지 뭐."

주식 이야기가 나오자, 담배를 피우던 남자가 언뜻 고개를 들었다.

"주식이요?"

"아, 그게……."

"요새 좋은 종목 있습니까?"

휴, 다행이다.

주식 살 돈 있으면 빚이나 갚으라고 혼낼 줄 알았더니…….

역시 눈앞의 남자도 결국 대한민국의 평범한 청년 중 하나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인생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들 눈이 벌겋게 재테크 방법을 찾아다니는 시대다.

"왕바이오라고 있어."

"왕바이오?"

"자네도 알지?"

"들어는 봤죠. 주식 검색어 순위에서 항상 톱10에 있었던 거 같은데?"

3상 발표 앞두고 다들 기대하는 기업.

세계적인 K―바이오 기업이 될 거라고 화제가 되는 중이었다.

"그치, 근데 지금 들어가기엔 늦었을 거야. 나는 운 좋게 허리에 들어갔지."

"오……."

남자가 관심을 보인다.

곧바로 스마트폰을 열어 주식 창을 검색해 본다.

그런데, 곧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

"왜…… 왜 그렇게 봐?"

"선생님."

"왜, 빚 갚을 돈으로 주식 한다고 뭐라 그러려고? 내가 돈 벌면 빚을 더 빨리 갚을 수 있으니까 좋은 거잖어."

그런데,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충격적이었다.

"그거 오늘 장 마감할 때 떡락했는데요."

"뭐……?"

덕상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진다.

아까 장 마감 20분 전까지만 해도 수익률이 제법 괜찮았었는데?

"뉴스 보니까 유상증자 발표했네요……."

"뭐라고? 유증 작년에도 했는데?!"

남자가 허둥지둥 스마트폰을 켜더니, 갑자기 가슴을 움켜잡는다.

"선생님?"

"으……."

"왜 그래요? 어디 안 좋은 거 아니에요?"

마치 떨어진 주식 차트처럼, 덕상의 안색이 나빠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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