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한 걸음 앞으로(6)
내가 귀를 쫑긋이자, 풍 선생님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아이구, 표정 설레는 거 봐라. 너 진짜 백 교수님 덕후야?"
……덕후 맞는데요?
나는 머쓱히 뺨을 긁적였다.
전설적인 써전(surgeon, 외과의) 백의신 교수.
내가 줄곧 동경해 온 사람이니, 꼭 만나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나는 풍 선생님에게 재촉하듯 캐물었다.
"그래서, 백 교수님은 어디 계신데요?"
"나도 그것까진 몰라. 대충 한국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만 전해 들었던 거라서."
풍 선생님은 내 접시에서 과자 하나를 집어 먹으며 말했다.
"백 선생님이 워낙 마이웨이인 분이라…… 한국 떠날 때도 별말 없이 훌쩍 떠났거든. 아마 한국 오신 거 아무도 모를걸?"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은퇴 이후 행방이 묘연해진 사람이니까.
한때 백의신을 국민 영웅으로 추켜세우던 뉴스와 기사들도 최근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풍 선생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이건 내 생각인데, 아마도 현업으로 복귀하시려는 게 아닐까 싶어. 사실 은퇴하기엔 이른 나이시기도 했으니까."
"복귀요?"
귀가 번쩍 뜨였다.
현업 복귀라…… 가능성 있는 이야기다.
보통 교수님들의 정년 퇴임은 65세에 이루어진다.
그런데, 백의신 교수님은 아직 60이 채 되지 않았다.
앞으로 몇 년은 거뜬하게 현업에서 활동할 수 있다는 뜻이다.
"뭐, 추측이긴 하지만 만약 복귀한다면 연국대병원으로 오시지 않을까? 굳이 다른 병원으로 가실 이유 없을 테니까."
풍 선생은 거기까지 말하더니 입에 지퍼를 채우는 시늉을 했다.
"아 참, 어디 가서 이런 얘기 하지 마라! 오프 더 레코드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흉부외과 의사가 되기로 한 거 축하한다, 이제 의국 동문이네!"
풍 선생은 특유의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동무를 하며 말을 이었다.
"덩치, 꼬맹이 그리고…… 그 너랑 썸 타던 아이돌은 무슨 과로 갔냐?"
"썸이라뇨…… 덩치는 소아과, 꼬맹이는 영상의학과, 아이돌은 내과로 갔어요."
"다들 어울리는 곳으로 갔군. 그런데 너 못 본 새 마른 것 같다?"
"인턴이 살찔 시간이 어딨겠습니까."
"여기서 맛있는 거 배 터지게 먹고 가, 인마. 이따 뒤풀이 올 거지? 나는 허준임이랑 오랜만에 밤새 소주 한잔해야겠다."
허준임 교수님의 이름을 스스럼없이 부르는 걸 보니, 예전에 친했던 사이인 모양이다.
"술은 최고급 위스키 아니면 입에도 안 댄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자식, 기억력 좋네. 누가 똘똘이 아니랄까 봐."
그는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헝클고 사라졌다.
곡담의 재야 고수, 장풍 선생과의 짧은 재회였다.
‘그나저나 백의신 교수님이 연국대병원으로 되돌아올 수도 있다니…….’
만약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진다면 대한민국 의료계의 큰 이슈가 될 것이다.
언론에서도 집중적으로 조명할 만큼 화제가 되겠지.
물론 그보다 중요한 건, 내가 존경하는 사람과 같은 현장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꼭 그렇게 된다면 좋겠다.’
나는 창밖으로 비치는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마천루 위로 별 하나가 유독 빛나는 밤이었다.
마치 북극성처럼, 내 인생의 길잡이가 되어 주었던 백의신 교수.
정말 그 사람을 병원에서 만날 수 있을까?
그렇게 잠시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데, 홀 앞에서 구슬픈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어디로 가야 하죠, 아저씨이~ 우는 손님이 처음인가요~>
여전히 노래 경연대회가 한창이었다.
참가자들은 복면을 쓰고 있었는데, 저 목소리는 안경식 선생님이 분명하다.
<빗속을 와이퍼는 뽀드득 신경질 내는데…… 이별…… 크흡!>
얼마 전 여자 친구에게 실연을 당했다고 했던가?
그래서인지, 안경식의 노래에는 소울이 넘쳤다.
어쩌면 복면 안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워낙 마음이 여린 사람이니까.
"이야~ 안경식 노래 잘하네?"
"쟤는 일 빼고 다 잘해."
몇몇 레지던트들이 웃으며 지나갔다.
칭찬인지 아닌지 모를 미묘한 평가였다.
이날, 노래 경연대회의 최종 우승자는 안경식 선생이 되며 송년회가 마무리되었다.
* * *
크리스마스.
누군가는 연인과, 누군가는 가족들과 함께 따스한 밤을 지낸다.
하지만 빽빽한 인턴 스케줄 앞에서는 모두가 공평해진다.
성탄절로 시곗바늘이 넘어가는 밤, 인턴 숙소의 휴게실에서 작은 파티가 벌어졌다.
"자자, 당직인 사람들은 알아서 물이든 콜라든 채우고~ 짠한 사람들끼리 짠 한 번 하자구.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짠~!"
종이컵이 부딪힌다.
중원이 형의 주도 아래 몇몇 인턴들이 모여 치킨 파티를 열었다.
이것도 얼마 남지 않은 인턴생활 동안만 겪을 수 있는 추억이겠지.
"올해 다들 수고 많았습니다!"
"근데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솔로여?"
"내년에는 다들 연애해라. 서로 얼굴 보기 지겨우니까."
"누가 할 소리를요?"
"야야, 결혼하기 전에 다들 연애 실컷 해 둬! 결혼하면 끝이야 끝!"
그렇게 덕담 아닌 덕담을 나누는 인턴들이었다.
근욱이, 연서, 소담이, 미선 누나 등등…….
몇몇 인턴들끼리는 더 친해질 수가 없을 정도로 친해졌다.
내년부터는 각자의 길로 흩어질 예정이기에, 오늘 같은 모임이 더 각별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근데 선한이 너 요새 왜 얼굴 보기 힘드냐, 병리과 스케줄 널널하지 않아?"
"쟤 요새 숙소에서 혼자 공부해요."
"뭐? 공부? 시험도 끝났는데 뭔 공부?"
"무슨 Congenital Heart Disease (선천성 심질환) 뭐 이런 거 보고 있어요."
나는 나무젓가락을 뜯고 파닭을 비비며 대답했다.
"이제 흉부외과로 완전히 정해졌으니까요."
"와, 독하다 독해. 그래서 지금부터 준비한다고?"
사실 내 공부에는 이유가 있다.
대혈관 전위(Transposition of Great Arteries).
내가 보았던 미래에서, 아기는 이 질환으로 인해 수술을 받게 된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내가 도움이 되려면, 최소한 완벽하게 이해는 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질환의 수술법은 다양했다. 단순히 며칠을 책을 뒤져 본다고 알 수 있는 그런 류의 질환이 아니었다.
그래서 <전공의시험>이 끝나고도 책을 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자, 거두절미하고. 선물 가져온 사람들 있어? 다 풀어 봐."
중원이 형이 분위기를 환기하며 말했다.
주제는 <가장 쓸데없는 선물>.
각자 만 원 이하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선물을 준비해 오기로 했다.
재작년 달력.
보도블록.
어린이용 화장품.
다른 나라 정치인 사진.
등등…….
온갖 창의력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선물 중에는 1L짜리 하트만 솔루션(Hartmann’s solution, 수액의 한 종류)을 포함한 수액 세트도 있었다.
"수액 가져온 거 누구야?"
"야, 이거 받는 사람한테는 내가 특별히 수액 놔준다."
"형한테 내 몸에 바늘 대라고 어떻게 맡겨요?"
인턴들끼리 서로 낄낄대며 웃었다.
그 외에도 온갖 아이템들이 등장하며 제비뽑기를 통해 돌아갔다.
"다음 연서 차례인가? 5번 선물 어딨어?"
<소리 나는 굴렁쇠>.
이런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선물을 대체 누가 골랐나 싶겠지만 그게 바로 나다.
"연서야, 메리 크리스마스."
"고마워요. 안 그래도 외롭고 심심했는데 이거나 가지고 놀아야겠다!"
연서는 샐쭉한 표정으로 굴렁쇠를 목에 걸었고 모두들 허리를 꺾으며 웃었다.
하지만 가장 압권은 근욱이가 받은 선물이었다.
"아니, 이걸 얻다 써요!"
"푸하핫!"
중원이 형의 얼굴 사진이 프린트된 티셔츠였다.
가위눌릴까 봐 잠옷으로도 못 쓰겠다.
게다가 근욱이의 우람한 몸에 비해 사이즈가 작아서 더 웃겼다.
"야, 내 얼굴이 프린트된 티셔츠가 얼마나 귀한데?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도록……."
"근욱아, 입어 봐!"
"흐아압!"
근욱이가 티셔츠를 억지로 입자 얼굴 프린트 부분이 좌우로 쫘악 찢어졌다.
"안 돼, 내 잘생긴 얼굴!"
"푸하핫!"
그렇게 다들 웃고 떠드는 가운데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야, 근데 너희들 그 소문 들었냐?"
연국대병원의 정보통 중원이 형이 말문을 열었다.
"무슨 소문이요?"
"영상의학과 추근덕, 다른 병원으로 옮겨 간다더라."
추근덕이라.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다.
내가 약점을 쥐고 있던 영상의학과 의사였지.
내가 호출할 때마다 추근덕은 밥 먹던 중에도 후다닥 달려와 영상 판독을 해야만 했다.
그동안 몇 번 알뜰하고 유용하게 써먹었었지.
"왜요? 그 인간, 연국대병원에서 교수 하려던 거 아니었어요?"
"사생활 문제가 터졌다더라."
"설마 불륜?"
"어. 직장까지 소문이 퍼져서 사실상 쫓겨나는 거라 하더라구."
소문은 발이 달린 것처럼 빠르게 퍼진다.
결혼까지 한 추근덕의 사생활 문제는 병원 안에 일파만파 퍼졌다고 한다.
안 그래도 여러 가지로 행실이 좋지 않기로 소문난 사람이었기에, 결국 연국대병원에 발을 붙이지 못한 모양이다.
"어제는 얼굴에 시퍼렇게 멍이 들어서 출근했다던데?"
"아내에게 얻어맞은 건가?"
"그랬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지."
"푸핫, 꼴좋다!"
얼굴의 멍이라…….
역시 내가 보았던 미래는 바뀌지 않은 모양이군.
나는 가만히 듣다가 흡족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아내의 프라이팬에 참교육을 당했나 보네요. 자업자득이지, 뭐."
내 말에 모두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프라이팬?"
"아, 그냥 해 본 소리예요. 왠지 그걸로 얻어맞았을 것 같아서."
나는 혼자 속으로 웃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나는 미래예지로 그 생생한 장면을 보았다.
막장 드라마 못지않게 흥미진진한 장면이었지.
그 이후의 스토리는 나도 알 수 없었는데, 다른 병원으로 옮겨 간다니…….
이보다 더 깔끔한 결말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요새 소담이 표정이 좋았구나?"
"으응. 다행이야."
내년에 영상의학과로 가게 될 소담이가 행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정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 추근덕의 갑질, 폭언폭행, 성희롱을 경계하지 않아도 되겠지.
물론 내 맘대로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이 사라진다는 건 조금 아쉽긴 하지만…….
‘잘 가라, 추근덕.’
그동안 잘 써먹었다.
너의 부러진 앞니에 명복을 빌어 주마.
그렇게 또 한 명의 의사가 기억 너머로 사라졌고…….
해가 바뀌기 전, 연국대병원은 올해 마지막 행사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 * *
12월의 끝자락.
류명인은 책상 위의 핸드폰을 노려보고 있었다.
1등이 아니면 못 참는 성격은 부모님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아들, 2등은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아! 무슨 말인지 알지?>
류명인은 그런 부모님의 기대에 항상 부응해 왔었다.
살아오면서 그룹 내 일등을 놓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수석 입학.
수석 졸업.
그러니 다른 인턴들에 비해, 류명인은 다가올 행사에 대해 예민해져 있었다.
<연말 시상식>.
올해의 교수.
올해의 레지던트.
올해의 간호사.
등등…….
매년 연국대병원 직원들 중, 각 분야에서 한 명씩 뽑아 상을 주는 시상식이다.
현실적으로 모든 직원들이 참석할 수 없기에,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생중계된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류명인이 노리는 것은 <올해의 인턴>.
인턴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명예로, 100여 명의 인턴 중 인턴 성적에서 1등을 차지한 이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과연 누구에게 이 상이 돌아갈까?
모두가 궁금해하는 가운데, 류명인은 당연히 인턴 1등은 자신의 차지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야 우주의 섭리에 들어맞으니까.
‘근데…… 왜 연락이 안 오지?’
시상식은 바로 내일이다.
류명인은 손톱을 물어뜯으며, 책상 위에 올려진 핸드폰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교육수련부에서 연락이 올 때가 됐는데……."
"야, 다리 좀 그만 떨어. 너 때문에 방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아!"
"왜 연락이 안 오지?"
"아오, 저거 누가 안 잡아가나."
룸메이트가 지겹다는 듯 침대에 누워 등을 돌렸다.
띠링!
그때, 핸드폰에서 알람과 함께 진동이 울렸다.
류명인은 빛의 속도로 반응하여 핸드폰 화면을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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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명인 회원님. 업계 1위 선한카드입니다. 2월 말까지 쭉 혜택받고 단기카드대출 이용해 보세요.
"아오 씨…… 1위? 하필 선한카드?"
파악!
안 그래도 신선한에게 경쟁심을 느끼고 있던 류명인은 베개 위로 핸드폰을 집어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