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82화 (182/241)
  • #182 한 걸음 앞으로(5)

    서울그랑호텔 에메랄드 홀.

    한 해를 마무리하는 <흉부외과 송년회>가 열렸다.

    예비 1년 차로 초대된 나는 당직 일정을 조정한 뒤 참석할 수 있었다.

    "어디 보자…… 이 정도로 차려입으면 되겠지?"

    행사장에 가기 전, 신중하게 옷을 골랐다.

    아무래도 첫인상을 결정하는 자리니 평소보다 신경을 써야겠지.

    정장을 입고, 평소의 더벅머리도 깔끔하게 정돈했다.

    내가 호텔에 도착할 무렵에는 이미 늦은 저녁이었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은데?’

    웅성웅성―

    입구부터 북적인다.

    흉부외과 교수, 레지던트, 펠로우는 물론이고…….

    성인심장/폐식도/소아심장 파트의 병동, 중환자실, 수술실에서 온 간호사들이 보였다.

    또한 흉부외과에 소속되어 있는 PA(병동 전담 간호사), SA(수술방 전담 간호사), 체외순환사 선생님들에게 배정된 테이블도 따로 있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흉부외과를 움직이고 있는 구성원들이 모두 모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지 모른다.

    ‘……내년부터는 나도 이 사람들과 함께 흉부외과의 일원이 되는 거구나.’

    가슴이 설렌다.

    뿌듯한 마음으로 홀을 둘러보았다.

    참여 인원은 대략 120명.

    원형 테이블 수십 개가 있었고, 예비 1년 차들을 위한 테이블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매일 단조로운 병원 풍경만 보다가 호화로운 호텔에 오니 기분이 새롭기도 했다.

    "선한이 형, 왔어요?"

    먼저 도착해 있던 류명인이 나를 반겼다.

    이제 녀석의 얼굴도 자주 보니 정이 들 지경이다.

    철없는 동생 같기도 하고.

    미우나 고우나 앞으로 같이 일해야 할 사이니, 일단 살갑게 인사하기로 했다.

    "명인이, 오늘 잘 차려입고 왔네?"

    "당연하죠. 미래에 병원장이 될 몸이니까 첫인상부터 제대로 남겨야……."

    ……역시 이놈은 잠시라도 띄워 주면 안 된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이따 단상 위에 올라가서 그런 쌉소리 하지 마라."

    그렇게 류명인의 헛소리를 차단하고 있는데, 새로운 얼굴이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아, 예. 안녕하세요."

    왕정렬.

    면접 때 만났던 남자다.

    짧은 머리에 검은 셔츠 차림의 심플한 인상이다.

    지금은 다른 병원 인턴이지만, 내년부터는 연국대병원에서 함께 일하게 될 것이다.

    그는 절도 있는 몸짓으로 내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선한 선생님이죠?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제 얘기를요?"

    "저희 병원에서도 유명하십니다. 강남역 길거리 한복판에서 심낭천자를 한 인턴분이라고."

    그렇게 말하며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흥미가 느껴진다.

    "저번에 면접장에서는 얘기할 겨를이 없었지만, 솔직히 감명받았습니다."

    "아뇨, 그렇게까지 말할 건……."

    "실례지만, 혹시 연배가 어떻게 되십니까?"

    말투가 좀 특이하다.

    군인 같달까?

    사용하는 어휘도 우리 또래 같지 않고 남다르다.

    "만으로 스물일곱입니다. 삼수를 해서요."

    그는 내 나이를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형님이라 부르겠습니다."

    ……갑자기?

    "부담스러운데요?"

    "존경의 의미입니다."

    "……뭐, 편하신 대로 하세요."

    "예, 형님. 내년부터 잘 부탁드립니다."

    정렬 선생은 내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난데없이 형님이라니…….

    좀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왠지 일을 잘할 것 같은 인상이라 호감이 갔다.

    "다들 안녕하세요~?"

    그때 마지막 흉부외과 합격자, 신상미가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나타났다.

    "와~ 비싼 옷 입으니까 다들 인물이 훤하네? 나 아무래도 미남들 사이에서 일하게 되려나 봐!"

    그렇게 말하는 본인의 옷차림이 가장 비싸 보인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 온 사람들 특유의 여유가 느껴진달까?

    신상미가 정장 스커트의 매무새를 정돈하며 자리에 앉자, 류명인이 물었다.

    "누나, 저번부터 묻고 싶었는데…… 대체 왜 흉부외과에 지원했어요? 전혀 안 어울리는 것 같은데."

    신상미는 히죽 웃더니 옆 테이블에는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말했다.

    "왜긴 왜야? 내 학부 성적에, 인턴 점수까지 망해서 왔지."

    "연애를 그렇게 많이 하니까 망하죠."

    "명인아, 남자들이 날 가만히 안 두는 걸 어떡하니?"

    연애라…….

    언뜻 얘기는 들었다.

    올해 남자 친구를 세 번 바꾼 인턴 동기가 있다고.

    그게 이 사람이었구나?

    인턴 사이에서 <자유로운 연애주의자>로 알려진 사람이 바로 신상미였다.

    "와, 근데 선한 쌤 정장 입으니까 정말 잘생겼네요? 사실 평소에도 말 붙이고 싶었는데, 저랑 아직 연락처 교환 안 하셨죠~?"

    ……저 콧소리 섞인 목소리는 적응이 안 될 것 같다.

    내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류명인이 가로막았다.

    "누나, 선한이 형한테 작업 걸지 마요! 올해에만 네 번째 남친 만들려고 그래요?"

    "안 돼?"

    "안 되죠!"

    "알았어, 그럼 내년까지 참아 볼게. 며칠 안 남았으니까."

    신상미는 그렇게 말하며 깔깔 웃었다.

    ……아무래도 성격이 특이한 사람들이 모인 듯하다.

    중2병 류명인.

    군인 스타일 왕정렬.

    자유로운 영혼 신상미.

    그리고 나까지.

    ‘4명 전부 각양각색이네.’

    이렇게 넷이서 동기가 되어 흉부외과 레지던트 생활을 해야 한다.

    류명인은 나를 견제하려 들 게 뻔하고, 반면 왕정렬은 내게 호감과 신뢰를 내비쳤다.

    한편 신상미에게서는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이 느껴진다.

    ‘……뭐, 앞으로 지루하지는 않겠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마침 행사를 시작하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들 이렇게 오셔서 자리를 빛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인심장 파트 쪽 테이블이 조금 비어 있네요? 아, 심장이식이 진행 중이라고요? 폐식도 파트는…….>

    오늘의 사회를 맡은 것은 허준임 교수님이었다.

    <네, 여러분. 올해도 참 다사다난했습니다. 특히 올해는 다들 아시다시피, 수술실 확장 공사가 끝나서 수술 건수가 작년보다 많이 늘어났습니다. 1년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역시 속사포로 쏟아져 나오는 그의 언변은 사회자에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송년회 1부는 지난 1년간의 흉부외과 대소사를 정리하는 시간이었다.

    홀 앞의 큰 화면에 몇몇 슬라이드가 지나간다.

    다음은 신입 1년 차 레지던트와 신입 펠로우의 자기소개 시간이었다.

    <자, 다음은 저희 흉부외과의 뉴페이스! 예비 1년 차들을 소개하는 시간이 있겠습니다!>

    곧 우리 네 명은 단상 위로 올라갔다.

    "안녕하세요, 신선한입니다."

    사람들이 웅성댄다.

    ‘쟤가 그 인턴이야?’

    ‘그런가 봐.’

    등등…….

    수군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내 얼굴로 수많은 시선이 꽂히는 것이 느껴졌다.

    "연국대학교 흉부외과의 일원이 될 수 있어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곧 박수 소리와 함께 몇몇의 환호성도 들린다.

    비로소 이 단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실감이 났다.

    "안녕하세요, 류명인입니다. 연국대병원 흉부외과가 세계 최고의 흉부외과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장내가 술렁인다.

    ‘아니 저게 레지던트 1년 차로 들어오는 사람이 할 멘트야?’

    ‘말만 들으면 신입 교수가 들어온 줄 알겠어.’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분위기다.

    물론 류명인의 성격을 알던 나로서는, 오히려 자제해 줘서 고마울 지경이었다.

    "안녕하세요. 신상미입니다~ 멋진 흉부외과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교수님들뿐만 아니라, 흉부외과 식구들 모두에게 한 수 배우고 싶습니다. 앞으로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와아―

    환호성이 들린다.

    <수술과는 남자들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그건 이제 옛말이다.

    신상미의 당찬 말투는 모두의 호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왕정렬입니다. 이름을 거꾸로 하면 열정왕입니다. 연국대병원에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군인처럼 절도 있는 말투.

    아무래도 저 레퍼토리는 고정인 것 같다.

    ‘FM 스타일이네?’

    ‘저놈 일 잘할 것 같네.’

    그런 호의적인 눈빛들과 함께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 그럼 다음은 신입 전임강사 선생님들의…….>

    그 뒤 신입 펠로우 선생님의 인사 시간이 끝나고, 1년을 마무리하는 흉부외과 교수님들의 코멘트가 이어졌다.

    * * *

    <자 2부에서는 ‘흉부외과 복면가왕’ 행사가 준비되어 있고요, 이외에도 여러분들을 위한 선물이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마이크에서 노랫소리가 울려 퍼진다.

    송년회 1부가 진지했다면, 2부는 본격적으로 파티 분위기였다.

    시끌벅적한 노래 대결이 이어지는 가운데, 나는 다과를 가지러 홀 뒤쪽으로 향했다.

    "어이, 친구야!"

    "아, 선생님들 안녕하세요!"

    홀 중간에서 반가운 얼굴을 마주쳤다.

    송유주와 마동섭.

    마동섭 선생님의 슈트 차림은 위압감이 넘친다.

    조폭 룩의 완성이랄까?

    그 옆에 있는 송유주 선생님도 슈트 차림이었지만, 호리호리한 체형이라 대조가 확실했다.

    "3월부터 이제 흉부외과 생활 시작이겠네?"

    "1월에도 흉부외과 인턴 스케줄이 한 번 더 있습니다."

    "아, 그래? 픽스(fix)턴인가?"

    픽스턴.

    인턴이 합격하고 난 뒤, 소속이 확정된 상태로 해당 진료과에서 인턴생활을 하는 것을 뜻한다.

    "저번에는 폐식도 파트 했으니까, 이번에는 심장 파트에 배정해야겠네."

    곧 치프(chief)가 될 마동섭이 말했다.

    1월 말 2월 초에는 전공의 4년 차들이 전문의가 되기 위한 국가고시 시험을 치른다.

    그래서 1월부터는 서서히 업무에서 손을 떼게 되고, 자연스럽게 3년 차인 마동섭과 송유주는 사실상 흉부외과의 치프 역할을 한다.

    즉 이들이 레지던트 최고참에 오르며, 당연히 인턴들의 파트 배정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씩 웃더니 살갑게 내 어깨를 주물렀다.

    "뭐, 실질적으로는 1월부터 한 가족이나 다름없네. 환영한다! 우리도 그때 심장 파트니까 많이 가르쳐 줄게. 유주 너도 한마디 해 줘!"

    마동섭의 말에, 칵테일 잔을 손에 들고 있던 송유주는 무심하게 고개를 까닥였다.

    "어, 잘해라."

    송유주답게 담백한 한마디였다.

    마동섭은 껄껄 웃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혹시 교수님들 마주치면 모르는 얼굴이라도 인사 잘하고 다녀! 첫인상이 중요하니까."

    "예, 감사합니다."

    나는 뒤편에 마련된 다과 코너에서 쿠키 몇 개를 집으러 나갔다.

    지나가는 교수님들에게 연신 인사를 하느라, 주위를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했다.

    그때, 누군가 내 어깨를 짚었다.

    "어이, 똘똘이."

    똘똘이?

    이 굵직한 저음의 목소리는 어디선가 들어 봤던 것 같은데…….

    내 기억상, 나를 저런 호칭으로 부를 만한 사람은 딱 한 명밖에 없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놀랐다.

    "풍 선생님?"

    곡담의 수호자.

    응급의학과 장풍 선생님.

    지난여름 파견근무 이후, 반년 만의 재회였다.

    생각지도 못한 만남에 나는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선생님.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

    "크크, 어쩐 일이긴? 나도 연국대 흉부외과 출신이잖아, 인마!"

    풍 선생은 껄껄 웃었다.

    졸업한 의국 동문들에게도 초대장이 간다고 들었는데, 진짜인가 보다.

    오랜만에 보는 풍 선생의 비주얼은 내 기억보다 훨씬 단정했다.

    다소 산만하게 길었던 머리는 질끈 묶었고, 수염도 깔끔하게 다듬었다.

    옛날 로커처럼 거칠었던 비주얼이 지금은 그나마 현대인처럼 바뀌었다.

    "정장 차림은 처음 보는데 잘 어울리시네요."

    "당연하지. 내가 젊을 때는 모델 지망생이었어! 아마 데뷔했으면 대한민국 런웨이 씹어 먹었을걸?"

    역시 풍 선생님.

    만나자마자 대뜸 실없는 허풍부터 시작한다.

    오랜만에 들으니 저 허풍마저 반갑군.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원래 선생님도 매년 참석하셨던 거예요?"

    "아니, 나도 서울 올라온 건 오랜만이야. 오늘 뵐 분이 있어서 왔는데 안 보이시네……."

    뵐 분이라.

    아마 예전에 연이 있던 교수님을 말하는 거겠지.

    그런데 이어지는 풍 선생의 말은 놀라웠다.

    "어디 가서 얘기하지는 마라. 사실 나 백 선생님 뵈러 왔어."

    백 선생님?

    내 눈이 커졌다.

    세상에 백 씨 성을 가진 흉부외과 의사가 한둘이겠냐마는…….

    "설마, 백의신 교수님이요?"

    "어, 그래. 백 교수님 한동안 해외에 잠적하고 계시다가 최근에 한국 오셨다고 들었거든."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나의 인생 방향은 백의신 교수에게서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흉부외과에 오게 된 시작점에 있던 사람이 바로 백의신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지금 여기에 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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