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81화 (181/241)
  • #181 한 걸음 앞으로(4)

    세미나실.

    그 앞에는 면접자들을 위한 의자가 한 줄로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익숙한 얼굴이 나를 반겼다.

    "신선한 선생님, 오랜만이네요?"

    교육수련부 실장님이었다.

    "안녕하세요."

    "일찍 왔네요? 일단 저쪽 복도에서 기다려 줄래요? 내과 면접 거의 끝나 가거든요."

    "예."

    나는 꾸벅 인사를 한 뒤 복도로 향했다.

    의자에 앉아 있던 인턴 동기들도 나에게 눈인사를 한다.

    그중에는 연서도 있었다.

    흉부외과 바로 앞 면접 순서는 내과였고, 내과에 지원한 연서 역시 면접을 기다리고 있었다.

    엄숙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다들 정장을 입고 심호흡을 가다듬고 있다.

    ‘연서는 잘하겠지?’

    이번 해 내과의 경우 16명 정원에 19명이 지원해서, 경쟁이 붙었다고 들었다.

    외부병원에서 인턴 과정을 보낸 2명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내과 교수님의 딸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 중, 적어도 3명은 탈락의 고배를 마시게 되는 것이다.

    ‘연서는 학부 때 성적도 좋고, 인턴 점수도 좋으니 당연히 붙을 거야. 내 걱정이나 하자.’

    그때, 누군가 등을 톡톡 쳤다.

    "형, 일찍 왔네요?"

    그렇다.

    4명의 흉부외과 지원자 중 한 명은 류명인이었다.

    단정한 머리에 정장을 입은 녀석의 외모는 그야말로 모범적인 사회 초년생 그 자체였다.

    소위 말하는 면접 프리패스 상이라고 해야 할까?

    "너 흉부외과 지원했다는 게 사실이었구나."

    내 말에 류명인이 대답 대신 씩 웃었다.

    류명인의 결정은 한동안 뜨거운 관심거리였다.

    누구도 정확한 이유를 몰랐다.

    송유주 선생에 대한 동경심 때문인지, 아니면 나와의 경쟁심 때문인지…….

    어떤 것이 류명인을 이끌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왠지 류명인이라면 이런 선택을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라고 말이다.

    "형은 안 물어봐요? 제가 왜 흉부외과 지원했는지."

    "뭘 물어봐? 너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겠지."

    나는 간단히 일축했다.

    자의식과잉 류명인에게는 관심을 주면 안 된다.

    그러자 류명인은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쿠쿡 하고 웃었다.

    "솔직히 저도 흉부외과에 대한 로망이 있었거든요. 연국대병원 교수가 된다면, 심장 수술하는 흉부외과 교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교수가 되는 건 당연한 거고?"

    "그럼요. 병원장까지 해 봐야 되는 것 아니겠어요?"

    나는 피식 웃었다.

    하긴, 초고속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빠르게 대학 진학을 해서 수석을 놓치지 않았던 녀석이다.

    본인이 원하는 것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

    반에서 1등 하는 꿈 많은 초등학생 같다는 생각에 귀엽게 보이기까지 했다.

    ‘하…… 그런데 만약 흉부외과 합격하고 나면, 이 녀석이랑 4년을 동고동락해야 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새로운 얼굴이 등장했다.

    "다들 일찍 왔네?"

    또 한 명의 원내턴, 신상미.

    얼굴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대화해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류명인은 진작 그녀를 알고 있었던 듯 말했다.

    "누나 안녕."

    "와우, 명인이 안녕!"

    "잘 지냈어?"

    "우리 귀염둥이 명인이랑 밥 한번 먹어야 되는데 누나가 그동안 너무 바빴네?"

    그동안 대화를 많이 나눠 본 적은 없어서 성격이 어떤 사람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말투가 간드러진 타입이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선한 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나는 간단히 인사했다.

    약간 부담스러운 타입인 것 같긴 한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 뒤로 처음 보는 얼굴의 남자가 다가왔다.

    ‘이 사람은…… 원외에서 지원했다던 그분인가?’

    날렵한 인상에 포마드 형태로 올린 머리.

    날쌔고 가벼워 보이는 몸은 한번 보면 잊히지 않을 인상이었다.

    그는 오자마자 우리에게 한 명씩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왕정렬입니다."

    인사는 짧고 굵었다.

    군인인가?

    그렇게 생각될 정도로 절도 있는 인사였다.

    간단하게 인사를 주고받은 우리 네 명은 나란히 세미나실 앞에 앉았다.

    "차례대로 들어가서, 맨 앞에 있는 신선한 선생님부터 본인 이름을 말하면 됩니다."

    교육수련부 실장님은 우리가 방 안으로 들어가서 해야 할 행동을 하나하나 알려 주었다.

    "이름을 다 말하고 나면, 자리에 앉습니다. 그다음은 앞에 계신 교수님들께서 한 명씩 아마 질문을 하실 테니까 대답을 하면 되고……."

    그때, 세미나실 안쪽에서 내과 면접을 마친 인턴들이 걸어 나왔다.

    연서는 후련한 표정이다.

    아마도 면접 결과가 좋았던 모양이다.

    <잘해요!>

    그렇게 입 모양으로 나를 응원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지나쳤다.

    "흉부외과 지원자분들은 잠시 후에 들어가실게요."

    "예!"

    우리는 잠시 기다렸다.

    잠시 후, 흉부외과 지원자 4명은 세미나실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자, 허준임 교수와 한상기 교수를 포함한 몇몇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우리는 활기차게 인사하면서 면접실에 들어갔다.

    "각자 한 명씩, 간단한 소개와 함께 흉부외과에 지원한 동기를 이야기해 볼까?"

    면접이 시작되었다.

    첫 질문은 평범했다.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하던 중, 타 대학에서 온 인턴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왕정렬입니다!"

    "이름이 멋있네?"

    "예. 제 이름을 거꾸로 뒤집으면 열정왕입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허를 찌르는 멘트였다.

    교수들 사이에서 가벼운 웃음이 번졌다.

    무뚝뚝한 인상과는 달리, 제법 센스가 있는 사람인 듯했다.

    그리고 내 차례가 돌아왔을 때, 나는 준비했던 멘트를 풀었다.

    "안녕하세요, 인턴 신선한입니다. 저는 고등학생 때부터 백의신 교수님을 보고 서전(surgeon, 외과의)의 꿈을 키웠습니다."

    그러자 일순간 분위기가 묘해진다.

    왜 그러지?

    이제 막 흉부외과로 첫발을 들여놓는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허준임 교수를 제외한 다른 교수들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쳐다볼 뿐이었다.

    "어, 그래…… 포부가 큰 친구구만. 그나저나 인턴생활을 잘했나 봐. 성적이 우수하네?"

    "신선한 선생은 올해 뉴스에도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랬었지."

    곧 대화를 나누던 교수들 사이에서 날카로운 질문이 던져진다.

    "신선한 선생. 올해 강남역에서 페리카디오센테시스(pericardiocentesis, 심낭천자)를 시행했던 것 기억하나?"

    이거, 예상했던 질문 중 하나다.

    순간 싸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예, 기억합니다."

    "만약 그런 상황이 또 한 번 생긴다면 어떻게 할 텐가? 똑같은 결정을 내릴 건가?"

    "……."

    이건 테스트다.

    교수님들 중 내 행동을 못마땅해하는 분들도 꽤 있었다고 들었으니까.

    류명인을 포함해 다른 인턴들도 내 대답이 궁금한 듯 내 쪽을 슬쩍 바라보았다.

    나는 천천히 준비한 대답을 꺼냈다.

    "……지금이라면, 구급차에 있는 초음파 기계를 이용해서 더 안전하게 시술할 것 같습니다."

    "결국 하겠다는 거네?"

    "환자를 살릴 수 있는 최선의 방향으로 행동하겠습니다."

    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사고가 있던 그날.

    나는 미래를 보았다. 환자가 죽는 최악의 미래를.

    그러니, 그때 내가 했던 행동에 후회는 없다.

    자신을 살려 줘서 고맙다고 웃던 고등학생 환자의 곰돌이 같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음……."

    교수들의 표정이 묘해진다.

    그중, 흰머리가 가득한 가장 나이 든 교수님이 펜을 종이 위로 탁 하고 떨어트리며 말했다.

    "흉부외과는 생사와 가장 가까이 있는 과야. 레지던트의 경솔한 행동 하나에 환자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다고. 항상 결정 하나하나에 신중하게 책임을 져야 해!"

    "네,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차분히 대답하며 그의 인상을 살폈다.

    ‘저분이 소아심장파트의 안영욱 교수님이구나. 깐깐한 분이라고 듣기는 했었지…….’

    그렇게 차례대로 이어지는 질문 시간이 끝나고, 한상기 교수님은 마지막으로 우리 네 명에게 말했다.

    "경쟁률이 없다고 방심하면 안 됩니다. 지원한 사람 아무나 받아 주지는 않아요."

    그렇게 면접이 끝났다.

    나에 대한 질문은 아까 그것이 끝이었다.

    면접실을 나서며,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망했나?

    망한 거 맞지?

    보통 면접 후에 이렇게 소외감 드는 기분이 들면 떨어진 거라던데…….

    "선한이 형, 그동안 즐거웠어요. 다른 병원 가서도 꼭 행복하세요."

    면접실을 나선 뒤, 류명인이 그렇게 말하며 히죽 웃고 사라졌다.

    * * *

    다음 날.

    원장단 면접은 큰 이벤트 없이 지나갔다.

    원장님의 형식적인 질문과 코멘트가 있었고, 부원장 함경일 교수님은 따뜻하게 우리를 반겨 주었다.

    "흉부외과가 참 힘든 과인데, 이렇게 지원해 줘서 고마워요. 앞으로 우리 연국대병원을 위해 애써 주시길 바랍니다."

    흉부외과 정원 4명에 지원자는 4명.

    원래대로라면, 이 네 명 모두 합격할 수 있을 터.

    하지만 나는 앞선 면접 결과에 확신이 없었다.

    <쟤 받아 주면 흉부외과에서 어떤 사고를 칠지 모른다>고 나를 쳐냈을 수도 있겠지.

    ‘궁금해 죽겠네…… 꼭 이럴 때 미래는 안 보이더라.’

    은근히 피 말리는 날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합격자 발표는 빨랐다.

    면접이 끝난 지 이틀이 되던 날.

    나는 사이트에 접속해 반가운 한 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신선한 선생님은 흉부외과 지원에 합격했습니다.]

    "나이스!"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연국대병원 흉부외과>.

    한때 백의신 교수가 이름을 드높였던 곳.

    지금도 대한민국 최고의 흉부외과!

    내가 목표로 했던 곳에, 드디어 한 걸음씩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해냈다……!’

    두근, 두근.

    가슴이 뛴다.

    인턴 합격을 했을 때, 과연 이 병원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궁금했었다.

    어쩌면 이 병원에서의 생활이 1년 만에 끝날 수도 있었으니까.

    지금 눈앞에 적혀 있는 몇 줄의 합격 통지를 위해 지나왔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3월의 어리바리하던 내 모습과 내과, 중환자의학과, 응급의학과, 흉부외과, 신경외과, 파견, 산부인과, 소아과…….

    하나같이 쉬운 달은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 모든 과정의 노력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가장 먼저 이 소식을 전하고 싶은 사람은…….’

    나는 곧바로 집에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 저 합격했어요."

    <뭣이?>

    "흉부외과 지원했다고 했잖아요. 합격 발표 났는데, 당당히 합격했습니다."

    <아이고 장허다!>

    곧 아버지와 누나들의 릴레이 통화들이 이어졌다.

    물론 모두가 나 같은 것은 아니었다.

    경쟁사회에서,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울기 마련이었다.

    ―아…… 나 위로 좀 ㅠㅠ 성형외과 떨어짐.

    ―힘내라.

    ―내가 떨턴이라니!

    ―나도 떨턴인데, 1년 해외여행이나 실컷 할라구!

    ―남자는 1년 쉬고 싶어도 못 쉰다ㅠ 군대 끌려가야 하니까.

    ―걱정하지 마 ㅋㅋㅋ 떨턴이 대수냐? 나 아는 형은 군대 갔다 와서 오히려 잘됐음레지던트 합격자 발표가 나고 나면, 불합격한 인턴들이 발생한다.

    이들은 <말턴>에서 다시 한번 진화하여 떨어진 인턴이 된다.

    이름하여, <떨턴>.

    인턴계의 최종 진화형이었다.

    이들에게는 몇 가지 선택지가 존재하게 된다.

    첫째, 1월 추가 모집을 노린다.

    둘째, 1년의 쉬는 시간을 가지고, 내년에 다시 지원한다.

    하지만 쉬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도 남자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군 미필 남자들은 2월 말 훈련소로 직행해야만 했다.

    [선한] 다들 어떻게 됐어?

    [연서] 저 내과 붙었음

    [근욱] 나 소아과 붙었음!

    [중원] 안녕하세요 마취과 오중원입니다

    [소담] 영상의학과 합격했어

    [연서] 우왕, 소담 언니 축하!!

    나와 가까운 인턴들은 다행히 대부분 원하는 과에 안착했다.

    류명인도 흉부외과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미선] 나는 재활의학과 떨어졌어…….

    [연서] 으앙 ㅠㅠㅠ

    [중원] 미선 아줌마ㅠㅠ 오히려 잘된 거일 수 있어! 연국대 병원 벗어나면, 훨씬 행복하게 산다고 하더라!!

    [미선] 그래 맞아! 육아하면서, 내년을 노려 보거나 천천히 생각해 봐야지!

    [선한] 다 같이 술 한번 먹어요

    [미선] 고마워 선한아 ㅎㅎ

    모두가 원하는 과를 가지는 않지만, 각자의 길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겪었다.

    그런데, 소문으로는 조진기는 끝까지 피부과를 고집했다가 떨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인턴들끼리의 술자리에 나타나서 한바탕 진상을 부렸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야이 XXX들아! 너네끼리 합격하면 좋냐, XXX들아!>

    당시 현장에 있었던 중원이 형은 한마디로 조진기에 대한 평을 요약했다.

    "어휴, 그 자식은 욕하기도 아까워, 혹시라도 욕먹고 오래 살까 봐."

    어느새 조진기는 주변 사람들이 모두 피하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2월에, 녀석의 미래는 예정되어 있었다.

    <대한민국 병무청은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그렇게 조진기는 마지막까지 추태를 부린 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혔다.

    * * *

    12월 중순이 지날 무렵.

    나는 하나의 안내 문자를 받았다.

    "송년회?"

    <흉부외과 송년회>.

    매년 열리는 연례행사로, 연국대 병원 클래스에 맞게 서울그랑호텔 에메랄드 홀에서 열린다.

    ‘이런 것도 하는구나……!’

    문자를 받으니,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한 가족이 되었구나 하는 실감이 났다.

    그런데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이곳에서, 예상치 못한 누군가를 만나게 될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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