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한 걸음 앞으로(3)
‘이건 산부인과에서 본 적 있어. 외음부에 헤마토마(hematoma, 혈종)가 있던 케이스!’
나는 3달 전 산부인과에서 겪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새벽 시간.
산부인과 응급 수술이 겹쳐 열리는 바람에, 인턴인 내가 질식 분만 어시스트를 들어가게 되었다.
아무 문제 없이 진행되던 수술은, 아기가 나온 뒤부터 갑자기 급박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마취과에서 필드(field, 수술이 진행되는 복부) 쪽에 있는 산부인과 팀을 향해 외쳤다.
<혈압도 조금씩 떨어지고 맥박수도 오르는데, 필드에 문제없나요?>
경험이 많지 않은 마취과 레지던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산부인과 조재용 교수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여기 헤마토마가 생긴 것 같네요, 블리딩 컨트롤 금방 하겠습니다.>
<네, 일단 RBC 트랜스퓨젼(transfusion, 수혈)하면서 헤모글로빈 팔로업(follow up, 추가 검사) 하겠습니다!>
마취과에서 적혈구 수혈을 급하게 진행했고, 산부인과 팀에서는 출혈 부위를 조절했다.
‘그때를 생각해 보면…….’
나는 시험지 앞에서 펜을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수혈을 하면서, 혈종을 절개해서 혈관을 찾아 지혈하는 거니까…….
‘그래. 답은 3번과 6번!’
나는 자신 있게 답을 체크했다.
감정이 실려 있는 경험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그날, 수술방에서 마취과 선생님의 떨리는 목소리는 나에게 긴장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 경험은 나의 지식과 융화되어, 진짜 살아 있는 의학 지식이 되었다.
‘……지난 1년이 헛되지는 않았구나.’
나는 웃음을 지었다.
1년간 병원에서 겪었던 다양한 경험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 나를 성장시켰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좋아, 다음 문제.’
사르륵―
나는 페이지를 넘겨 담담하게 문제들을 풀어 나갔다.
시험에 몰두한 인턴들의 사인펜이 종이 위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 * *
우리 인턴들이 시험을 보는 동안에도 병원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럼 인턴들이 빠져나간 이 시각, 병원의 인턴 잡(job, 일)은 누가 할까?
레지던트가 한다.
그들은 반나절 동안 인턴으로 되돌아간 기분을 체험하고 있었다.
"인턴들 어디 갔어?"
"오늘 시험일이잖아요."
"아, 맞다. 그랬지! 젠장, 안 그래도 할 일 많아 죽겠는데……!"
레지던트들의 오전 업무가 정신없이 바빠졌다.
평소 궂은일을 도맡던 인턴들이 자리를 비우니, 여간 곤란한 것이 아니다.
"시험장에서 병원까지 15분, 늦기만 해 봐…… 바로 전화할 거야."
EKG(심전도검사)를 찍으며, 산부인과 천사연이 이를 갈았다.
"인턴들 도대체 언제 오는 거야? 시험 끝나면 바로 오겠지……?"
폴리(foley, 소변줄)를 뽑으며, 흉부외과 안경식 선생도 울상을 짓는다.
흔한 말로 인턴은 <병원의 밑바닥>이라고 표현된다.
하지만 병원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모든 구성원들이 유기체처럼 작동해야 한다.
맞물린 톱니바퀴 중 하나라도 빠지면 전체가 멈춰 버릴 수 있으니까.
"올 때가 됐는데, 말턴이라고 전화도 안 받네, 썅!"
내과 김뱀은 엘튜브(L―tube, 비위관)를 집어넣고 나오는 길에 콜폰을 향해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고작 반나절뿐이지만, 인턴들의 소중함을 절절히 깨닫는 레지던트들이었다.
* * *
그렇게 <전공의 시험>이 지나갔고, 이제는 다가오는 면접을 준비해야 했다.
면접이 있기 전날, 뉴스에서는 대설주의보가 흘러나왔다.
<올해 첫눈 소식입니다. 예년보다 많은 적설량이 예상됩니다. 기상청은 서울 경기와 영서 지방에……>
저녁 시간, 밖에 나갔다 들어오던 중원이 형이 휴게실로 들어오며 말했다.
"야, 눈 엄청 오는데?"
"그래요?"
"내 머리 보면 모르겠냐?"
코트를 입은 중원이 형의 까진 이마 위로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오랜만에 눈 맞으면서 감성에 젖어 병원으로 돌아왔지. 어때. 겨울 남자 같냐?"
"치즈 가루 뿌린 메추리알 같습니다, 형님."
"근욱이 넌 인마, 요새 살쪄서 반계탕에 들어간 닭 다리처럼 생겼어."
중원이 형과 근욱이는 평소처럼 서로를 비난하면서 낄낄댔다.
가만 보면 이 두 사람은 정말 만담 콤비 같다.
[연서] 오프인 사람들 바깥으로 나옵시다!
띠링―
연서가 단체톡방에 메시지를 올렸다.
첨부된 사진에는 눈사람을 만들고 있는 몇몇 인턴들이 보였다.
눈이 쌓이자마자 부리나케 달려 나간 걸 보니, 연서는 역시 전생에 강아지가 아니었을까?
"재밌겠다. 밖에서 눈사람 만드나 보네! 선한아, 우리도 나가자!"
"잘 다녀와."
내 심드렁한 말에, 근욱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마디 던졌다.
"아재 같은 놈."
뭐라고?
충격을 금치 못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근욱이한테 아저씨라는 소리를 듣다니…….
"내가 왜 아저씨야?"
"눈 오는 날 설레지 않으면 그때부터 아저씨라잖아."
처음 듣는 얘기다.
하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어서 기분 나빠.
"선한이 너 인마, 얼굴만 상큼하면 뭐 해? 감성이 메마르는 순간 청춘은 끝나는 거라고! 병원에서 1년 구르더니만 정신이 황폐해져서……."
"알았다, 알았어."
근욱이의 공격이 길어지기 전에 나는 외투를 집어 들었다.
"으, 추워!"
병원 바깥으로 나서자 싸늘한 공기가 코 속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막상 나오니 좋았다.
병원 건물에서 장례식장까지 이어지는 가로수길.
지난봄에는 꽃잎이 흩날리면서 인턴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바로 그 거리.
지금 그 풍경은, 다른 의미로 절경이었다.
"와, 눈 쌓인 거 봐라!"
근욱이가 풍경에 감탄했다.
눈은 세상의 경계를 하얗게 지워 버린다.
길과 길 사이, 하늘과 땅 사이.
그래서 지금 병원은 온통 하얗게 보였다.
길가에 있는 가로등 아래, 밝은 빛이 내려오는 길에는 눈발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그 앞에 다가가 우두커니 서서 가로등 위를 쳐다본다.
‘연국대 병원에서 맞는 첫눈인가? 1년이 갔구나, 정말…….’
아스라한 조명 아래서, 우리에게만 눈발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새롭네요."
"우리 병원이 이렇게 예뻤나?"
<우리 병원>.
중원이 형이 그런 말을 했고, 이제는 그 단어가 내게도 익숙하다.
내년에도 연국대병원에서 일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도 이 공간에 정이 들어 버린 것이다.
"……근데 저게 뭐야?"
"세상에."
우리는 곧 할 말을 잃었다.
연서의 지휘 아래, 인턴들이 힘을 합쳐 어마어마한 크기의 눈 덩어리를 만들고 있었다.
마치 고대 피라미드 노동현장을 방불케 하는 노동현장이다.
눈사람에 저렇게까지 진심이라고?
"선한 오빠, 어서 와요!"
"꼭 이렇게까지 해야 했니?"
"내일 병원에 오는 사람들은 이거 보면서 잠깐이라도 웃지 않을까요?"
그것은 거대한 오리였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눈으로 된 작은 오리를 대량생산 하고 있었다.
어디서 가져온 건지 ‘오리 모양 집게’로 바닥에서 작업 중이었다.
누가 노동에 단련된 인턴들 아니랄까 봐, 작업 방식도 상당히 체계적이었다.
마치 CPR 상황에서 한 줄로 서서 가슴압박 차례를 기다리는 것처럼, 모두들 진지하게 차례대로 큰 오리 위에 작은 오리를 올리고 있었다.
"그럼 나도 거들어 볼……."
퍼억!
그때, 별안간 내 뒤통수에 눈덩이가 날아왔다.
누군가 하고 돌아보았더니 근욱이가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덤벼라 신선한!"
도전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나는 연서에게 물었다.
"오리 하나 써도 돼?"
"쓰세요."
"땡큐."
나는 연서에게 지원받은 오리 한 마리를 근욱이의 목덜미에 거칠게 욱여넣었다.
"으어억!"
근욱이가 꽈배기처럼 몸을 꼬았다.
곧 눈싸움이 번지며 평화롭던 거리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인턴들은 오랜만에 동심으로 돌아간 듯 웃었다.
찰칵!
곳곳에서 사진을 찍는 소리도 들린다.
"하하, 인턴들인가 보네."
"재밌게들 노네요."
교수님 몇몇이 지나가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평소라면 ‘의사의 품위’ 운운하며 지적할 법도 한데, 오늘만큼은 눈감아 주는 모양이다.
그렇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아끼듯, 연국대병원에서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드는 인턴들이었다.
* * *
시간이 순식간에 흘렀다.
흉부외과 지원 후 전공의 시험까지 끝나고, 다음 코스는 <면접>이었다.
‘정장을 이렇게 갖춰 입는 건 오랜만이네.’
슥, 슥―
나는 거울을 보며 익숙지 않은 넥타이를 맸다.
레지던트 지원자의 면접은 두 단계로 진행된다.
첫째, 진료과인 흉부외과 면접.
둘째, 원장단 면접.
‘그러고 보니 인턴 들어올 때도 면접을 봤었지…… 그때 어떤 교수님이 내 면접을 봤었는지 기억도 안 나네.’
12월 병리과에서의 인턴 업무는 지난달 가정의학과보다 더 널널했다.
그래서 나는 다른 동기들보다 여유롭게 면접을 준비할 수 있었다.
옷장의 정장 세트와 넥타이, 셔츠를 챙기면서 면접에서 어떤 질문을 받을지 생각해 보았다.
‘흉부외과를 왜 지원했는지 물어보려나?’
나는 지난 1년을 돌아보았다.
그동안 연국대 블로그에 몇 번 내 이름과 사진이 올라간 적 있었다.
강남역 한복판에서 심낭천자 후 환자를 응급실로 데려왔을 때…….
노을 누나의 힘든 출산 후 퇴원할 때…….
아, 그리고 곡담에서 지역신문에도 내 이름이 나온 적이 있었지.
그건 여기 연국대병원 사람들한테까지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겠지?
‘생각해 보면 별일이 다 있었네.’
나는 피식 웃었다.
지난 1년 동안의 내 행적을 보고, 특이하고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떤 압박 면접이 진행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데, 룸메이트 근욱이가 문을 열고 급하게 들어왔다.
"야, 선한아. 이 넥타이가 그렇게 이상하냐?"
소아과 면접은 흉부외과보다 훨씬 일찍 진행되었다.
그래서 이미 옷을 갈아입고 면접을 보러 간 줄 알았는데, 갑자기 방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 녀석의 넥타이가 심히 요란스럽다.
안 그래도 몸집도 큰 놈이, 은색 빛이 도는 그레이 정장을 입어서 튄다 싶었는데…….
자주색 넥타이가 요란스러운 게 도저히 면접용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혹시 결혼식 가니?"
"끙…… 아니면 이걸 하고 가야 하나?"
새로운 넥타이를 옷장에서 꺼냈는데, 이번엔 거무튀튀한 게 더욱 아닌 것 같다.
"장례식 가냐고."
"아, 어렵네! 나 이거 두 개밖에 없는데…… 평소에 정장을 입을 일이 있어야지. 아무거나 둘러야겠다."
나는 둘 중 고민하는 근욱이를 뜯어말렸다.
"야, 내 거 차라리 매라. 너 면접 끝나고 나한테 줘도 될 것 같아. 흉부외과는 어차피 오후 늦게 면접 있으니까."
"오케이, 땡큐!"
근욱이는 내가 벗어 준 타이를 허둥지둥 목에 두르다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선한아, 타이 좀 매 줘."
"아오."
손이 많이 가는 녀석.
나는 근욱이의 목에 플레인 노트로 타이를 매어 주었다.
근욱이는 서둘러 넥타이를 바꿔 매고는 소아과 면접이 있는 세미나실로 향했다.
"다녀온다!"
그리고 얼마 후.
근욱이는 침울해진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면접 잘 봤어?"
"와 씨, 인턴 성적 왜 이렇게 받았냐고 털렸다. 그래도 경쟁률 1:1인데 떨어뜨리지는 않겠지?"
"원내턴이니까 그래도 잘 봐주겠지."
나는 근욱이가 허둥지둥 벗어 주는 타이를 넘겨받으며 녀석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가 봤을 때 근욱이 넌 A턴이야! 걱정하지 마."
"그래, 고맙다! 난 콜 받은 거 처리하러 간다!"
근욱이는 금세 옷을 갈아입고 다시 일하러 병동으로 달려갔다.
이제는 내 차례다.
‘조금 긴장되네.’
타이를 매며 거울을 본다.
뒷목이 빳빳하고 가슴이 간질간질하다.
자신 있게 면접 보자고 마음먹었지만, 막상 출발하려니 몸이 굳는 것 같다.
우리 같은 사회 초년생의 면접이 모두 그러하겠지.
"내가 가락시장 신씨 횟집 막내아들 신선한이다, 이 자식들아."
나는 아무도 듣지 않을 주문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샘솟는다.
허공에 몇 번 헛기침을 하며 목을 푼 뒤, 조금 일찍 면접이 시행되는 세미나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