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한 걸음 앞으로(2)
100명이 넘는 인턴들.
그중, <올해의 인턴>은 딱 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명예다.
연말에 열리는 연국대병원 시상식에서 단상에 올라가 상을 받게 된다.
"야, 진짜 선한이 네가 상 받는 거 아니냐?"
근욱이가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대하며 흥분한다.
"솔직히 우리 인턴 중에서 1년 동안 제일 주목받았던 게 너잖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맙긴 한데, 애초에 바라지도 않는다."
나는 근욱이의 호들갑을 웃어넘겼다.
겸손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연국대 출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올해의 인턴>은 전체 기수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그러니 일운대 출신인 나에게 그 자리가 주어질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하긴, 올해의 인턴은 연국대 출신 애들한테 주겠지…… 그래도 A턴 받은 게 어디냐? 너라도 점수 잘 받아서 좋다!"
근욱이가 감격스럽게 내 어깨를 두드린다.
내가 생각해도 장족의 발전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3월만 해도…….
<일운대? 그 폐교된 학교?>
<거기서 제대로 배우기나 했겠어?>
<지방에서 용케 우리 병원에 왔나 본데, 다른 인턴들 따라갈 수 있으려나?>
……그런 편견을 한 몸에 받았던 나다.
그러니 인턴 평가에서 최고점을 받은 것은 의미가 컸다.
"흐흐, 아직까지도 너 은근히 무시하면서 뒷말하는 놈들 코 납작해질 생각 하니, 생각만 해도 즐겁구만!"
같은 타 대학 출신인 근욱이는 나보다 더 기뻐했다.
그리고 그 말대로, 인턴들 사이에서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연서는 A중.
중원이 형은 B중.
소담이는 B상.
등등…….
서로 어떤 점수를 받았는지는 한동안 인턴들 사이에서 끊임없는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내 이야기는 적지 않게 화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어이, A상!"
중원이 형은 아예 내 이름 대신 호칭을 바꾸어 불렀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류명인은 나에 대한 경쟁심을 다시 한번 불태웠다.
"저 부르는 거예요?"
"아니, 너 말고, 인마!"
저 멀리서도 소리만 들으면 바로 반응하는 류명인을 보며, 중원이 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편, 안 좋은 쪽으로 소문이 난 경우도 있었다.
"쟤 맞냐?"
"응, 맞아."
"전설의 D턴이 실존한다니……."
"야, 너무 크게 말하지 마. 듣겠다."
소곤소곤―
식당에서 인턴들 몇몇이 누군가를 힐끔 쳐다보았다.
바로 D턴 조진기.
녀석은 이제 완전히 배 째라는 식으로 일하고 있었다.
"너네 조진기 요새 막장 짓 하고 있는 거 알지?"
"아예 아침에는 출근을 안 한다던데?"
"어쩐지 요 며칠 오픈콜이 계속 울리더라."
오픈콜.
병원 전체에 방송으로 사람을 찾는 콜을 말한다.
<인턴 조진기 선생님. 인턴 조진기 선생님―>
이렇게 이름을 나지막이 두 번 부르는 목소리가 병원에 울린다.
콜을 안 받고 연락이 안 될 경우, 기다리다 못한 주치의나 간호사가 병원 전체 방송으로 찾는 것이다.
인턴의 입장에서 오픈콜을 받으면 머리카락이 쭈뼛 솟을 수밖에 없다.
마치 현상수배범이 된 듯한 기분이랄까?
그런데 그 오픈콜을, 조진기는 최근 세 번이나 받은 것이다.
"심지어 오픈콜 때린 간호사한테 쌍욕까지 했다던데?"
"와…… 저 자식 어떻게 하려고 그러지?"
"어차피 망해서 정신줄 놨나 봐."
의사들 사이에서도 정말 다양한 인간군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순간이었다.
‘뭐, 낙오된 사람은 낙오된 거고…….’
1년의 수련을 거친 우리 인턴들은, 드디어 최후의 관문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 * *
11월이 끝나 갈 무렵.
인턴 숙소의 풍경이 며칠 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바로 <전공의 시험>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
인턴들의 신경은 예민해진다.
<의사국가고시>를 치른 지 1년이 지난 이 시점.
전국의 모든 인턴들은 레지던트가 되기 위해 <전공의 필기시험>을 치러야만 한다.
이 준비를 위해, 인턴들은 익숙해진 인턴 업무와 시험공부를 병행했다.
항상 왁자지껄했던 인턴 숙소의 휴게실도 조용해지는 시간이 늘었다.
1년 전 국가고시를 준비할 때 보았던 각자의 노트와 책들이 인턴 숙소 곳곳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2달 전부터 이 시험을 준비한 인턴들이 있는 반면, 어떤 인턴들은 업무에 치여 제대로 시작도 못 했다.
―얘들아 공부 잘돼 가니?
―여기에 글 쓸 시간에 기출문제 하나 더 봐라 ㅋㅋㅋ―뼈 때리네 ㅋㅋㅋ―아 진짜 GS(외과) 이식 파트 공부할 시간을 1분도 안 준다…… 11월에 스케줄 널널한 사람들 부럽다 ㅠㅠ―나는 경쟁률 낮은 과여서 시험 그닥 상관없음. 다들 파이팅해~―자랑이냐? 경쟁률 낮은 과에 지원한 게? 10년 후에 누가 웃고 있을까?
―위에 놈 왜 급발진함?
―왜 싸우냐 ㅋㅋㅋ
―시험 앞두고 다들 예민보스 다 됐네 ㅎㅎ 전공의 시험은 평타만 쳐도 된다니까 너무 걱정들 말아~레지던트 어레인지(arrange, 배정)가 이미 끝난 과에 지원하는 인턴들은 거의 공부를 하지 않았다.
합격이 기정사실화되어 있는 인턴들에게, <전공의 필기시험>과 진료과/원장단 면접은 단순한 통과의례에 불과했다.
그래서 몇몇은 시험 점수가 중요한 인턴 동료들의 당직을 대신 서 주기도 했다.
"선한 쌤은 어때요, 공부 잘돼 가요?"
회진이 끝난 후, 가정의학과 한정식 선생이 내게 물었다.
레지던트가 인턴의 사정까지 챙겨 주다니, 정말 마음의 여유가 넘치는 선생님이었다.
"예,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공은 확실히 정한 거고?"
"저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마음 정했습니다."
"와, 남다른 결정인데 정말 멋지네. 응원할게요!"
한정식 선생은 숭늉처럼 그윽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북돋아 주었다.
이제 인턴들은 각자의 지망을 정하고 있었다.
연서는 내과.
소담이는 영상의학과.
중원이 형은 마취과.
근욱이는 소아과.
미선 누나는 재활의학과.
등등…….
모두 각자의 길을 선택한다.
1년간 같은 인턴이었지만, 이제는 다른 길로 흩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제법 쌀쌀한 어느 저녁.
나는 휴게실에 있는 컴퓨터로 병원 사이트에 접속하고 있었다.
내 등 뒤에서 동기들이 모여 내 손끝을 주목했다.
"정말 갈 거냐?"
"신선한, 가나요?"
"결국 그 강을 건너는 거예요?"
"야, 그 마우스 클릭하기 전에 지금이라도 다시 한번 생각해 봐! 기껏 A턴 받아 놓고 가시밭길 가는 거 실화냐?"
주변에서 과장된 반응이 연신 쏟아진다.
물론 내 마우스 클릭에 망설임은 담겨 있지 않았다.
내 마음은 진작부터 정해져 있었으니까.
"으, 나는 못 보겠다."
중원이 형이 과장된 포즈로 눈을 가렸다.
나는 픽 웃었다.
그동안 충분히 고민했고, 흉부외과에 이야기도 해 뒀다.
딸깍―
나는 망설임 없이 흉부외과 지원 버튼을 눌렀다.
[지원 완료]
―수련의 신선한 님의 흉부외과 지원이 완료되었습니다.
그렇게 11월이 지나고, 12월이 왔다.
시험까지 D―4.
* * *
12월 6일.
전공의 시험 당일 아침이 밝았다.
평소보다 조금 쌀쌀한 기운을 느끼며, 인턴들은 오랜만에 병원을 나섰다.
"와 씨, 새벽 5시까지 수술방에 있다가 시험 보러 간다!"
"나도 어제 잠 거의 못 잤다. 꼭 이런 날 콜이 터져요!"
시험 당일 새벽까지 당직을 섰던 인턴들도 있었고, 수술방에 새벽까지 있다가 나온 인턴들도 있었다.
시험과 별개로 병원은 24시간 돌아가야 하는 곳이었고, 우리 중 누군가는 아침 7시까지 일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아침 8시.
우리를 시험장까지 안내할 버스가 병원 정문에서 대기 중이었다.
버스를 타는 순간까지도 콜을 받는 인턴도 있었다.
"오늘 전공의 시험 있어서 외부로 나가는 중입니다. 주치의 선생님한테 말씀드렸으니, 그쪽으로 전화해 주세요!"
"넌 시험 날 아침까지 콜 받냐?"
"나 콜폰이랑 개인폰 합쳤잖아. 병동에 인계가 제대로 안 되었나 봐."
급하게 편의점에서 산 빵과 우유를 먹는 동기들부터, 버스에 타자마자 곯아떨어지는 애들, 버스에서도 노트를 보며 공부하는 애들까지.
버스 안의 모습은 부산스러웠다.
그렇게 우리는 대절 버스 3대에 나누어 타고 시험 장소로 향했다.
오랜만에 보는 시험장 풍경이다.
연국대병원을 포함한 근처 병원의 인턴들이 한곳에 모인다.
수능 시험, 혹은 토익 시험이 그러하듯 학교 앞에는 컴퓨터용 수성 사인펜을 파는 아주머니들이 보였다.
"다들 잘 보고 와요~!"
"감사합니다."
연국대병원 교육수련부에서 챙겨 준 따뜻한 캔 커피를 하나 들고 교실로 향했다.
‘왜 항상 시험 날은 추운 걸까?’
바람이 제법 시리다.
한때 그런 말이 있었지.
<나 빼고 다 시험 망해라!>
이런 스산한 기운이 모여 시험장의 기온을 낮추는 거라고.
물론 황당무계한 우스갯소리긴 하지만, 그만큼 시험은 무한경쟁의 장이라는 뜻이다.
‘돌이켜 보면 정말 인생의 절반이 시험이었구나…….’
정말 징하다.
고등학생 시절 내신은 말할 것도 없고.
수능도 세 번이나 봤다.
의대 6년의 공부.
치열했던 의사국가고시.
그리고 이번 전공의 시험까지…….
의사들은 젊은 시절 평생을 시험성적에 매달려 산다.
그 사실이 가끔은 씁쓸하게 느껴지지만, 의사가 되어 가는 과정의 일부라 생각하면 납득도 된다.
‘뭐, 이번만 넘기면 당분간 내 인생에 시험은 없을 테니까!’
레지던트 4년이 끝나면 또 한 번의 시험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그건 그때의 일이다.
"선한 오빠!"
그렇게 막 교실로 들어가려 할 때, 누군가 내 등을 툭 쳤다.
연서였다.
쌀쌀한 날씨 탓에 발개진 볼로 웃으며 나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앙증맞게 생긴, 작은 1회용 손난로였다.
"오늘 추운데 왜 그렇게 얇게 입고 왔어요? 그러다 감기 걸려요."
"나 주는 거야?"
"응. 오다 주웠다!"
연서의 농담에 나는 픽 웃었다.
안 그래도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캔 커피가 빠르게 식어 가던 차였다.
"고마워. 잘 쓸게."
"시험 잘 봐요! 어차피 A상에 TS(흉부외과) 지원이라 이름만 잘 써도 합격하겠지만."
"그래, 연서 너도 잘 봐!"
나는 연서와 헤어진 뒤 차가운 기운이 감도는 의자에 앉았다.
<전공의 필기시험>
―내과
―외과
―소아청소년과
―산부인과
이렇게 메이저(major) 4개 과에 국한되어 시험을 치르게 된다.
각각 2~30문제씩.
총 2시간.
의사국가고시에서 다루었던 내용과 시험 범위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여기에 인턴 기간 동안 직접 환자들을 마주하며 쌓은 경험들을 추가하여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보는 테스트의 성격이 강하다.
이틀간 진행되는 의사국가고시 필기시험에 비하면, 120분의 시험은 간단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래도 시험은 시험.
시험은 언제나 긴장된다.
<지금부터 전공의 필기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수련의 여러분께서는 모두…….>
휘리릭―
곧 시험지가 각자의 책상에 펼쳐진다.
일사불란하게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교실에 가득 찬다.
나는 앞 페이지부터 차분하게 문제를 풀어 가기 시작했다.
[외과 문제]
서혜부 탈장에 대한 설명이다. 다음 설명 중 틀린 것은?
1) 간접 서혜부 탈장은 오른쪽에 많다.
2) 간접 서혜부 탈장이……
3) 대퇴부 탈장은……
4) 여성에서 가장 흔한 형태는 대퇴탈장이다.
5) 직접 서혜부 탈장 수술 후 재발은……
‘간접 서혜부 탈장은 오른쪽이 왼쪽보다 흔한 건 맞고…….’ 빠르게 보기 하나하나를 체크해 가던 나는 4번에서 멈추었다.
‘여성에서도 가장 흔한 탈장 형태는 서혜부 탈장(inguinal hernia)인데? 정답은 4번.’
나는 답을 체크했다.
대부분의 문제들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변별력이 있는 문제들도 있었다.
한 문제, 한 문제 나아가던 나는 이윽고 산부인과 파트에 다다랐다.
『임신 38주인 30세 미분만부가 3,150g 남아를 질분만 후 질출혈이 지속되었고…….
혈압 85/60mmHg, 맥박 120회/분, 호흡 25회/분…….
복부검사에서 자궁바닥은 배꼽 아래에서 단단하게 만져졌고, 골반검사에서 자궁목의 열상은 없었다.
왼쪽 외음부에 10cm 크기의 심한 압통이 있는 덩이가 보였다. 혈액검사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혈색소 7.8g/dL, 백혈구…….
이 상황에서 적합한 처치를 다음(1―8) 중에서 두 가지 고르시오.』
정상 질식 분만 후, 혈압 저하와 함께 맥박이 빨라지면서 혈색소 수치가 떨어진 케이스.
자궁바닥은 잘 만져진다 했으니까, 자궁내번증은 아닌 것 같고…….
자궁목에 열상도 없다고 했으니까, 자궁목에서 나오는 출혈도 아니다.
그런데 외음부에 덩이가 발견된다고?
보기에는 다음 8가지가 있었다.
1. 경과관찰
2. 리토드린
3. 농축적혈구
4. 도수정복(manual reduction)
5. 페서리
6. 절개 후 혈관결찰술
7. 자궁내 풍선압박술(intrauterine ballooning)
8. 자궁절제술
언뜻 보기에 어려운 문제처럼 보인다.
하지만.
‘알 것 같아.’
그동안의 경험 덕분일까?
나는 금방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글로 배운 지식보다 한 단계 위의 지식은, 바로 경험과 연결된 지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