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 그가 향하는 곳(9)
도도도도―
이나가 복도를 달려온다.
그러더니 근욱의 다리에 찰싹 달라붙으며 말했다.
"고릴라 아저씨, 손!"
"손?"
근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웬 손?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이나는 머뭇거리는 근욱의 손을 끌어당겼다.
"이거 천 원짜리야! 비싼 거니까 떼면 안 돼."
차악!
무언가를 붙인다.
근욱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초등학교 문방구 앞에서 팔 법한 앙증맞은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참 잘했어요>
"……."
볼이 간질간질하다.
가슴속에서 무언가 툭 치고 올라온다.
의사가 되고 난 후 이런 감정을 겪어 본 적이 있었던가?
아니, 처음인 것 같다.
근욱이 살면서 받아 본 모든 상들 중 가장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상이었다.
"빠이빠이!"
이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사라졌다.
그러면서도 마지막까지 못내 아쉬운 듯 손을 흔들었다.
9살의 소아암 환자.
재발 가능성이 있기에, 아직 완치 판정을 내리기는 힘들다. 아마 앞으로도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근욱이는 이나가 언젠가 연국대병원에서 열리는 ‘소아암 어린이 완치 잔치’에 나타날 것임을 의심치 않았다.
"……."
이나가 탄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힌다.
그 후에도, 근욱은 한참 동안 자신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아마 저 아이는 모를 것이다.
고작 천 원짜리 스티커가,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를.
‘의사 되길 잘했다.’
근욱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깊어진 하늘 위로 가을이 지나가고 있었다.
흔히들 하는 말로, ‘의사들은 병원에 청춘을 갈아 넣는다’고 표현한다.
남들이 젊음을 즐기는 동안 병원에 갇혀 있다시피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에도 낭만은 있다.
병원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니까.
‘……나, 환자 보는 거 좋아하네.’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김근욱, 27세.
하늘이 유독 푸르던 10월의 어느 날, 그는 소아과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감수에 도움을 주신 소아청소년과 혈액종양분과 전문의 조희원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한 걸음 앞으로(1)
어릴 때 보았던 아동용 애니메이션에는 멋있는 장면들이 종종 나왔다.
보통 이런 과정을 거치면 더 강해진다.
덩치가 커진다든가, 팔이 두 개 더 달린다든가…….
그런데 모든 진화가 꼭 그렇게 업그레이드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11월.
이맘때가 되면 슬슬 진화를 하는 인턴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바로 <말턴>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이다.
"콜은 쌓았다 가야 제맛이지."
"30분 늦게 출근해도 빵꾸만 안 내면 되는 거 아냐?"
"야, 당직 몰아주고 나가서 밥 먹고 오자!"
……이렇게 적당히 농땡이를 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드레싱 콜 와도 못 갔더니, 나중에 간호사 선생님이 다 해 놨던데?"
"간호사 쌤 샘플링할 때 컬처(culture, 혈액배양검사)도 해 달라고 할까?"
……이렇게 은근슬쩍 간호사들에게 일을 미루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인턴들도 사람이기에 쉬고 싶은 마음들은 있다.
일에 능숙해지고 나면, 정해진 시간 내에 최대 효율을 내려 노력하기도 한다.
하지만 몇몇 인턴들은 그 이상으로 풀어지고 마는데, 이는 대학병원 특유의 성적 시스템 때문이다.
‘왜냐하면, 11월 성적은 인턴들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으니까.’
<인턴 성적>.
3월부터 10월까지 각 달의 성적을 취합하여 매겨지는 점수다.
교육수련부에서는 이 성적을 기반으로 A턴, B턴, C턴으로 등급을 나누어 발표한다.
거기에, 몇몇 병원은 각 등급에서 상/중/하 3단계로 세분화하여 발표하기도 한다.
언제나 경쟁과 줄 세우기에 노출되는 의사사회…… 아니, 우리 사회 전체의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즉 , 11월부터는 인턴들이 나태해질 수 있는 환경이 되는 것이다.
"그래도 선한 쌤은 말턴 됐다고 요령 부리지 않아서 좋아요."
"감사합니다."
"어때요. 올해 인턴 점수는 잘 받을 것 같아요?"
11월.
나는 새로 만난 선생님과 함께 병원 지하의 카페에서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다.
가정의학과 레지던트, 한정식 선생님.
언제나 푸근한 미소를 짓는 선생님이었다.
"솔직히 점수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하기는 했는데……."
내 멋쩍은 대답에, 한정식 선생님은 갓 지은 백반처럼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좋은 성적 나올 거예요. 심지어 우리 과 레지던트들 사이에서도 선한 쌤 이름이 알려질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나를 북돋우며, 한정식 선생님은 느긋이 말을 이어 갔다.
"뭐, 11월이라 인턴들도 이제 다들 술기에 능숙하긴 하겠지만…… 특히 선한 쌤은 그중에서도 손이 좋다고 유명하던데요?"
같은 의사들이 나를 인정하며 해 주는 칭찬은 언제 들어도 기분이 좋다.
"아닙니다. 호스피스 병동 환자들에게는 더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호스피스 병동 환자들은 같은 술기를 하더라도 페인 컨트롤(pain control, 통증 조절)에 더 신경 써 줘야 돼요."
"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정의학과에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괴로움을 덜기 위해 입원하게 되는 호스피스 병동이 있고, 주로 말기 암 환자들이 많았다.
"뭐, 잔소리 안 해도 알아서 잘하시겠지만."
한정식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며 동치미처럼 맑은 미소를 지었다.
호로록―
나는 김이 올라오는 컵 끝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한 모금 마시자, 향기로운 캐모마일 향이 입 안에 그윽하게 퍼진다.
‘여유롭네.’
비교체험 극과 극이랄까?
흉부외과나 신경외과 같은 수술과가, 비바람이 몰아치는 야생이었다면…….
이곳은 따스한 모닥불이 지펴진 아늑한 동굴.
가정의학과 소속의 입원환자가 많지 않다 보니, 업무도 그만큼 적고 여유로웠다.
같은 병원이라는 공간 안에 있는데도, 상당한 온도 차이가 느껴졌다.
‘덕분에 연말은 큰일 없이 평화롭게 보내겠군.’
나는 최고의 스케줄을 확보한 상태였다.
예전 트레이딩 시즌 때 조진기와 황금 스케줄을 맞바꾸었기 때문이다.
11월 : 가정의학과.
12월 : 병리과.
둘 다 인턴 잡이 편하기로 유명한 과다.
나는 오랜만에 QOL(퀄리티 오브 라이프, 삶의 질)을 만끽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럴 때일수록 시간을 허투루 쓰지 말아야겠지.’
당분간 내가 매진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공부.
원래 인턴들은 따로 시간을 내어 공부하기 힘들다. 대부분 일과가 끝나면 지쳐 쓰러지니까.
하지만 연말에는 인턴들도 공부를 해야 한다. 당장 12월 초에 전공의 시험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또 하나의 목표가 있는데…….
‘내가 봤던 미래의 아기가 죽지 않도록 해야 해.’
TGA, VSD, PS.
(대혈관전위, 심실중격결손, 폐동맥협착)
나는 이 질환에 대해 10퍼센트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다.
"남은 시간 동안 최대한 레벨업해 둬야지, 뭐."
사륵―
나는 책상에 앉아 전공의 시험 대비 기출문제집을 펼쳤다.
인턴생활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책의 페이지를 넘겼고, 그만큼 빠르게 달력의 페이지도 한 장씩 넘어갔다.
* * *
11월 중순.
인턴들에게 <그날>이 왔다.
나는 호스피스 병동 환자에게 조영제 CT검사에 대한 동의서를 받고 있었다.
그때, 주머니 속 콜폰이 울렸다.
지이잉―
별거 아닌 문자겠거니 하고, 보호자에게 조영제 부작용에 대해서 설명했다.
그런데, 진동이 끊이질 않고 계속된다.
지잉― 지잉― 지이이잉―
메시지가 정신없이 쌓인다.
이 정도 알람이라면, 인턴들 사이에서 굉장한 사건이 생겼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예전 반진호 사건이라든지, 내가 근욱이와 함께 피투성이로 응급실을 방문했을 때처럼 말이다.
‘무슨 일일까?’
동의서를 받은 뒤, 병동 복도로 나오면서 콜폰을 확인해 보았다.
[천호] 점수 떴다!
[미선] 아 망함 ㅠㅠ
[기영] 선한아 점수 봤어?
[중원] 야 선한아, 전설의 D턴이 나온 거 알고 있냐?
드디어 인턴 점수가 나온 모양이다.
개인톡, 단체톡 할 거 없이 난리가 났다.
각자 미래의 방향이 결정될 중요한 순간이니 관심이 뜨거울 수밖에 없다.
그중 한 녀석의 메시지가 눈에 띈다.
[명인] 형, 인턴평가점수 어떻게 나왔어요? 난 당연히 A상.
A상.
최고점이라는 소리다.
하긴, 류명인이라면 그런 점수를 받을 만도 하지.
나는 답문을 하지 않고 문자 수신함을 열어 보았다.
교육수련부 이름으로 나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교육수련부입니다. 귀하의 올해 인턴성적은……]
첫 화면에서 보이는 글자는 여기까지였다.
‘이게 뭐라고 긴장되지?’
두근, 두근.
가슴이 뛴다.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나는 병동 복도에서 조심스럽게 문자를 열어 보았다.
[교육수련부입니다. 귀하의 올해 인턴성적은 A상입니다. 문의 사항이 있을 시 교육수련부 방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최고점!
기분이 좋았다.
그동안의 고생이 보상받는 느낌이랄까?
A상이 몇 명인지, 그중에 1등은 누구일지 모르겠지만 내 알 바 아니다.
여기 먼 연국대병원까지 와서 인정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가장 중요했다.
[명인] 그래서 점수 몇 점이냐구요
[명인] 선한이 형
[명인] 빨리 말해 줘요 현기증 나니까
지잉, 지잉, 지잉―
류명인의 집요한 메시지가 뜬다.
어휴, 귀찮은 녀석.
내가 답문 하나 봐라.
조금은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톡방에 있는 글들을 하나씩 확인해 보았다.
그런데 평소라면 가만히 있지 않을 녀석 한 명이 아까부터 말이 없다.
‘그러고 보니 근욱이가 조용하네…… 중환자의학과에서 바쁜가?’
잠시 후, 숙소.
방문을 열자, 침대에 걸터앉아 덤벨을 들고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근욱이가 보였다.
<크와아악~ @#[email protected]#!!!>
옆에 둔 폰에서는 거친 헤비메탈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노래 선곡이 심상치 않은 걸 보니, 무언가 스트레스를 받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근욱, 무슨 일 있어?"
내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이던 근욱이가 입을 열었다.
"C턴이다."
"뭐?"
"망할 놈의 병원. 어디 휴가라도 다녀오고 싶다. 보는 애들마다 성적 얘기라서."
"……."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나처럼 근욱이도 외부대학 출신이다.
연국대병원 출신들과 경쟁하여 원하는 과를 가기는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인턴 성적은 중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C턴이라니?
"……괜찮냐?"
할 말이 궁해진다.
나는 녀석의 어깨를 잡고 위로했다.
갑자기 근욱이와 인턴 끝나고 이별하게 되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근욱이는 덤벨을 내려놓고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 씨…… 왜 점수가 이따위가 됐지. 그때 외과에서 괜히 개겼나?"
"어떻게 개겼는데?"
"맨날 수술방에 늦게 들어오는 레지던트 있길래. <환자들이 오래 기다리는 것 같다>라고 말했지."
새삼 느끼지만, 근욱이는 은근히 할 말 하는 성격이다.
아마 레지던트에게는 <제때제때 다녀라>는 식으로 받아들어졌을 것이다.
"그거 때문에 밉보인 거야?"
"뭐, 그거 때문만은 아니겠지. 여기저기서 조금씩 밉보였더니 이렇게 됐나 봐."
"……."
인턴들의 특성상 모두가 열심히 하기 때문에, 대부분 각 과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 마련이다.
그래서 막상 합산 점수에서 그렇게 편차가 크지 않다.
그렇다 보니 한 과에서라도 밉보이게 되면, 인턴 성적은 몇 단계나 떨어질 수밖에 없다.
"뭐, 근데 상관없어! C를 줄 테면 주라지."
잠시 후 근욱이는 씩 웃으며 내게 무언가를 보여 주었다.
"이거 보이냐?"
<참 잘했어요>
이나에게서 받았다는 그 스티커다.
그날 이후, 근욱이는 스티커를 언제나 IC카드 뒷면에 붙인 채 다니고 있었다.
"결국 소아과로 마음 정한 거야?"
"그래! 다행히 소아과는 올해 지원율이 낮아서 경쟁이 없는 것 같으니까. 연국대병원 안 되면 모교 소아과라도 가지, 뭐!"
긍정왕 김근욱.
내가 이 친구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신에 대한 평가에 대해 크게 휘둘리지 않는다.
비록 낮은 점수를 받았지만, 근욱이가 그보다 훨씬 좋은 의사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다.
"그나저나 선한이 너는? 설마 A상이라도 받은 건 아니겠지? 크크."
"맞아. A상."
"뭐?!"
근욱의 눈이 반갑게 커진다.
이렇게 구김 없는 태도로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것 또한 근욱이의 장점이었다.
그걸 알기에, 나도 불편함 없이 말할 수 있었다.
"야, 경사 났구만! 이거 신선한이 올해의 인턴 먹는 거 아니야?"
<올해의 인턴>.
한동안 잊고 있던 그 단어를 오랜만에 듣게 되자 귀가 언뜻 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