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그가 향하는 곳(7)
"근데 근욱이 너, 애들한테 무슨 마법을 부린 거야?"
선한이 진심으로 궁금한 듯 물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가끔 동쪽 병동에 들를 때면, 확실히 달라진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근욱이의 눈빛에 총기가 돌아왔다.
야간 업무에 시달린 탓에 피곤해 보이기는 했지만, 오히려 전보다 빛이 난다.
"아이들이 하루 종일 근욱이 너만 찾던데? 특히 이나는 내가 갈 때마다 고릴라 아저씨 얘기만 하더라."
"흐흐, 비결이 있지. 역시 애들한테는 내가 인기가 더 많구만!"
근욱은 어깨에 힘을 주며 뿌듯하게 웃었다.
그는 어느새 동쪽 병동의 마스코트가 되어 있었다.
어린 환자들이 근욱이의 꽁무니를 아기 오리들처럼 따라다녔다.
"고릴라 선생님이다."
"선생님, 고릴라 흉내 내 줘요!"
"우, 우!"
근욱이 장난스럽게 팬서비스로 고릴라 흉내를 내면 아이들은 자지러졌다.
"고릴…… 아니, 근욱 선생은 아이들이 정말 잘 따르는구만. 내 말보다 인턴 선생 말을 더 잘 듣는 것 같은데?"
심지어 교수조차 회진 중에 그렇게 감탄할 정도였다.
한편, 이나는 며칠의 경과를 지켜본 후 폴리(foley, 소변줄)를 뽑을 수 있었다.
방광염 증상이 호전될 무렵, 근욱이와 이나는 거의 삼촌과 조카 사이가 되었다.
"이나야, 소독하러 왔어. 오늘은 기분이 어때?"
"……."
그런데, 왜일까?
이나의 표정이 오늘따라 뾰로통했다.
근욱은 중심정맥관을 뽑은 자리를 소독하던 중, 이나의 시선을 따라 복도를 바라보았다.
"아빠, 슈퍼맨놀이해 줘!"
"하나, 둘, 셋!"
"우와아!"
부웅―
옆 베드에 입원해 있던 꼬마가 아빠의 손에 이끌려 허공을 날고 있었다.
이나는 마치 정지 버튼이 눌린 듯, 물끄러미 그 모습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이나야, 슈퍼맨놀이하고 싶어?"
"안 하고 싶어.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도리도리.
9세 이나는 고개를 젓는다.
그런데, 말하는 내용과는 달리 입술이 오리처럼 툭 튀어나왔다.
어린 마음에, 아빠와 노는 아이의 모습이 어지간히 부러웠던 모양이다.
근욱은 그런 이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말했다.
"고릴라 아저씨가 저것보다 더 신나는 거 해 줄 수 있는데?"
"정말?"
하나도 안 부럽다던 이나가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럼, 당연하지!"
근욱은 자신 있게 말했다.
9세 여아의 평균 몸무게는 대략 30kg.
김근욱이 즐겨 쓰는 케틀벨 하나만도 못한 무게였다.
물론 병동에서 소란을 피우면 재수 선생에게 좀 혼날 수도 있겠지만…….
뭐 어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이나가 퇴원할 때 슈퍼맨놀이보다 더 재미있는 거 해 줄게. 대신 앞으로 검사받을 때 싫다는 소리 하지 말기."
"……."
"선생님이랑 약속할까?"
"……약속."
"그래, 약속!"
근욱은 씩 웃으며 이나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어느새 아이들의 마음을 휘어잡는 법을 터득해 버린 근욱이었다.
* * *
라포(rapport).
원래 프랑스어로 ‘다리를 놓다’는 의미다.
사람 사이의 공감과 친밀함.
특히 치료자와 환자 사이에 자주 쓰이는 심리학 용어다.
내가 이번 달 소아과에서 주로 배운 것들이기도 했다.
"선한 쌤, 고생 많았어요~!"
구내식당.
나는 강하니 선생과 함께 식사를 했다.
어느덧 10월도 중간을 넘어서 끝이 보인다.
"근데 선한 쌤 픽은 왜 항상 함박스테이크예요?"
"함박에 한이 맺혀서요."
"그래요?"
"예. 저번에 수술과 돌 때……."
나는 수저를 들면서 예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함박을 막 입에 넣으려다가 환자 카인(car―in)을 하러 달려가야 했던 이야기.
그러자 강하니 선생은 웃으며 박수를 쳤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눈을 마주치며 재미있게 들어주는 것이 그녀의 특징이었다.
"강하니 선생님은 정말 상대 말을 잘 들어주시는 것 같아요. 환자나 보호자 대하실 때도 그렇고…… 덕분에 한 달 동안 많이 배웠습니다."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이번 달 내 목표는 <라포 형성 배우기>.
그런 점에서, 강하니 선생은 훌륭한 표본이었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해 봤자 나는 반절밖에 따라 할 수 없었다.
"선한 쌤도 잘했어요."
"환자나 보호자 대하는 건 할수록 어려운 것 같아요."
"그쵸? 정답이 없어서 그래요."
물론 라포 형성에 대한 매뉴얼은 존재한다.
충분한 의료적인 정보 공유.
개인적 유대감 형성.
환자와 눈 마주치기.
미소 짓기.
등등…….
그런데, 꼭 그 방법이 모두에게 통하는 것도 아니다.
특히 소아과에서는 가끔 보호자가 무의식적으로 라포 형성을 방해하기도 한다.
<의사 선생님이 이놈 하고 잡아간다!>
<우리 아들 누가 울렸어요? 의사 선생님 어딨어, 때찌해 줄게, 때찌!>
그런 사소한 말들이, 아이들로 하여금 의사를 ‘적대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만드는 일도 생긴다.
"뭐, 라포 쌓는 게 중요하긴 한데…… 라포 형성이 조오금~ 미숙하더라도, 좋은 의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가요?"
"혹시 흉부외과 유주 선생님 아세요?"
"아하."
나는 그 이름을 듣고 곧바로 이해했다.
송유주 선생.
최고의 실력을 가진 흉부외과 의사.
하지만 라포 능력은 제로에 가깝다.
담배를 피우던 환자에게 "빨리 죽고 싶으세요?"라며 공기를 얼어붙게 했던 장면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 이름 외우는 데도 힘을 쏟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송유주 선생이 나쁜 의사인가?
그렇다고 볼 수 없다.
수술실에서 송유주 선생은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 중 한 명일 테니까.
"결국 사람마다 자기에게 맞는 길이 있는 거죠."
"말씀 듣고 보니 그렇네요."
"요새 MBTI 검사가 왜 유행하겠어요? 자기가 어떤 성향인지 아는 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거예요."
"……."
"선한 쌤도 자기에게 맞는 전공 잘 골라 보세요."
그녀의 말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난 어떤 성향일까?
일단 손 쓰는 것을 좋아한다.
수술 도구만 보면 사족을 못 쓰니까.
손으로 하는 건 뭐든지 남들보다 잘할 자신 있다.
또한, 무언가를 끈덕지게 붙잡고 늘어질 수 있다는 것 또한 장점이다.
반면, 한번 집중을 하면 좀처럼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은 단점이다.
그리고…….
‘가끔 미래가 눈앞에 보이지.’
하지만 요새 의문이 든다.
과연 이 능력이 평생 갈까?
안 그래도 저번 달 이후, 미래가 보이는 현상은 단 한 번도 발생하지 않고 있다.
‘이 능력은 언제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아.’
아직도 미스터리다.
왜 나에게 이런 능력이 주어졌는지.
뭘 잘못 먹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천재지변 같은 건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것투성이지만, 적어도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만약 이게 언젠가 없어진다 해도 상관없어.’
내 목표는 하나다.
언젠가는 백의신 같은 의사가 되겠다는 것.
그 마음속 목적지를 향한 이정표는 풍화되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아니, 아마 의사로 살아가는 평생 동안 그럴 것이다.
* * *
10월 말.
병원 안에 여기저기 호박 장식이 보였다.
특히 이 분위기는 소아과에서 더욱 도드라졌다.
<해피 핼러윈!>
그렇게 쓰여 있는 기다란 장식이 소아과 복도에 걸쳐져 있다.
이렇게 아이들을 위한 정서적인 배려도 이루어지는 것이 소아과 병동의 특징이었다.
"호박 인형이다!"
"우와아~"
병동의 아이들은 자원봉사자들이 만들어 준 작은 인형들을 안고 좋아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평화롭게 인턴 잡을 처리하고 있을 때.
따르르르―
익숙하지 않은 번호가 내 콜폰에 찍혔다.
"인턴 선생님, 여기 초음파실 동반 있어요!"
전화기 건너 들리는 목소리는 NICU(신생아 중환자실)였다.
<동반>.
인턴의 주 업무 중 하나였다.
NICU 아기들이 초음파 검사를 받을 때는 항상 의사가 동반을 해야 한다.
그런데, 수십 명의 아기들이 있다 보니 검사가 동시에 진행될 때도 있다.
그래서 NICU 담당 인턴이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에는 병동 인턴인 나에게까지 콜이 오게 된다.
"예, 가겠습니다!"
타닥―
나는 하던 일을 마치고, 서둘러 NICU로 향했다.
"여기예요, 인턴 선생님!"
NICU에는 간호사 선생님과 이송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곧 베드에 누워 있는 아이와 함께,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소아초음파실로 향했다.
‘검사하는 동안 아기를 잘 어르고 달래는 게 중요했었지…….’
소아초음파실에 도착한 나는, 베드에서 아이를 꺼내어 초음파 검사용 베드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아기의 옷을 벗기고 기저귀를 내렸다.
몇 번 해 보다 보니, 아기의 기저귀도 요령이 생겨 능숙하게 벗길 수 있었다.
"이번 달 인턴 쌤이 아기를 잘 다루네."
"아, 감사합니다."
"예행연습하고 있다고 생각해~ 나중에 애 아빠 되면 아내한테 사랑받아야지."
"하하."
나이가 지긋한 영상의학과 선생님이 던진 짓궂은 농담에 나는 멋쩍게 웃었다.
이제 해야 할 일은 아기의 미쉐린 캐릭터같이 포동포동한 다리를 잡고 있는 것.
아이가 움직이지 않아야, 검사가 계획대로 진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가야, 잠시만~"
물론 아이와 교감하면서 가만히 있게 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검사 도중, 아이가 울면서 뒤척이기 시작했다.
으아앙―
나는 당황하지 않고 미리 준비해 둔 비장의 아이템을 꺼냈다.
바로 <공갈 젖꼭지>다.
"자, 올롤롤로~"
젖꼭지를 우는 아이의 입에 물려 주니, 곧 울음이 그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역시 아무리 어르고 달래 봤자 이게 특효약이지.’ 우리 인턴들 사이에 전해지는 노하우였다.
동반을 하는 경우, 공갈 젖꼭지나 젖병은 필수 아이템이라는 것.
아무리 말로 어르고 달래 봤자 입에 무언가를 물려 주는 것이 즉효 약이기 때문이다.
"자, 아가야. 고생했어~"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아이를 데리고 다시 NICU로 돌아왔다.
이곳에 입원한 채 인큐베이터 안에 들어가 있는 아기들은 전부 제각각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신생아 호흡곤란 증후군(RDS, Respiratory distress syndrome).
심실중격 결손(Ventricular septal defect).
괴사성 장염(Necrotizing enterocolitis).
등등…….
‘다들 건강하게 자라났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를 자리에 옮겨 놓고, 한 줄로 늘어서 있는 인큐베이터를 뒤로한 채 NICU를 나가려는 찰나.
‘어……?’
파앗―
시야가 어두워진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기분에 정신이 번쩍 든다.
시간감각이 왜곡되고 풍경이 제멋대로 뒤섞이며 빠르게 재구성된다.
마치 댐이 무너지는 것처럼, 현실감각이 급속도로 없어진다.
그리고, 미래의 한 장면이 내 눈앞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 * *
여기는……?
흉부외과 소아심장 중환자실 (03PH, Pediatric Heart)!
나는 03PH 입구 쪽에 서 있다.
‘환자 이송 중에 잠깐 여기에 들러 본 적이 있었지…….’
그런데 이상했다.
지금 소아과에 돌고 있는 나한테 흉부외과 중환자실을 보여 주는 이유가 뭘까?
그때, 코너를 돌아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발걸음을 옮겨 보았다.
"……!"
바닥에 주저앉아, 익숙한 얼굴의 누군가가 서글프게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