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 그가 향하는 곳(6)
타닥―
걸음이 빨라진다.
근욱은 이나의 EKG 검사를 위해서 급히 병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야간에 급히 검사가 필요하다는 것은, 결코 좋지 않은 상황이 분명했다.
‘아오, 낮까지만 해도 별문제 없었던 것 같은데…… 무슨 일이지?’
촤악―
황급히 커튼을 걷었다.
곧 침대에 누워 있는 이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평상시라면 말장난하면서 근욱이를 반겼을 아이가 이상하게 힘들어 보인다.
안색이 좋지 않고, 약간 식은땀도 흘리는 것 같다.
‘평소와는 뭔가 다른데? 이렇게 힘들어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신경모세포종(Neuroblastoma)>.
배 안에 있는 부신수질 혹은 교감신경절에서 자라나는, 대표적인 소아암이다.
발견되었을 때는 이미 몸 여러 곳에 퍼져 있는 경우가 많다.
이나는 골수까지 암이 퍼져 있어, 항암 치료 후 골수 이식을 받은 상황.
그동안 어른스럽게 버티던 이나가 대단한 것이지, 결코 가볍게 여길 병이 아니다.
즉 언제라도 이런 증상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선생님……."
옆에서 보호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한밤중에 갑자기 딸의 상태가 악화되었으니 놀랐을 것이다.
"우리 이나가 아까부터 심장이 자꾸 이상하게 두근거린다고 하면서 힘들어하네요……."
"예, 일단 심전도부터 찍어 볼게요."
촤악―
근욱은 커튼을 닫고 재빨리 움직였다.
이나의 가슴에 6개의 리드(lead, 단자)를 붙이고 심전도 검사 버튼을 누른다.
인턴생활을 하는 동안 백 번을 넘게 찍어 왔던 심전도였으니, 이제는 손이 능숙하다.
"자, 이나야. 3초만 가만히 있어 보자."
"싫어……."
아이는 칭얼댔다.
하지만 습관적인 거부였을 뿐, 지금은 고집을 부릴 만한 힘도 없어 보인다.
지이잉―
EKG(심전도) 기계가 심장리듬이 기록된 종이를 뱉어 낸다.
그런데 그때.
이나가 갑자기 기침을 심하게 하더니 피가 섞인 가래를 뱉어 내기 시작한다.
"콜록― 콜록―"
"……!"
어라? 얘가 왜 이래?
근욱은 혼란에 빠졌다.
객혈하는 아이를 보자마자 얼어 버린 근욱.
그는 선한처럼 강심장이 아니었고,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어머, 이나야!"
보호자도 놀라서 소리친다.
EKG 검사 종이에서 심박수는 140회를 가리키고 있었다.
‘9살 아이 심박수 정상치가 얼마였더라……? 이거 단순 tachycardia(빈맥)야, 아니면 atrial flutter(심방조동, 부정맥의 일종)야……?’
정상 심박수는 나이에 따라 다르다.
성인의 경우 60―100회이지만, 9살 아이의 경우 대략 50―115회 정도.
즉 지금으로서는 심박수가 빨라졌기에, 부정맥(arrhythmia)인지 감별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어…… 어떻게 해야 하지?’
근욱은 혼란에 빠졌다.
<객혈>과 <비정상 심장 리듬>.
순간적으로 눈앞에 튀어나온 2개의 이상 소견에 눈앞이 깜깜해진다.
마치 라이트 훅과 어퍼컷을 동시에 기습적으로 얻어맞은 듯한 기분.
한 가지 공격에만 제대로 대응하기도 벅찬 초보 복서에게는 가혹한 상황이었다.
‘어…… 그러니까…….’
당황한 채 어버버하며, 노티(notify, 상위 의료진에게 알림)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기까지 시간이 꽤 흐른다.
그때, 우연히 복도를 지나가던 누군가가 소란스러움을 눈치채고 병실 안으로 들어온다.
"뭐예요? 지금 상황?!"
레지던트 안재수.
그는 화가 난 표정이다.
근욱을 한번 노려보더니, 급하게 이나의 산소수치와 심전도를 체크한다.
잠시 후, 이나는 다행히도 정상 바이탈 사인(vital sign, 활력 징후)으로 회복했다.
"선생님…… 어떻게 된 거죠?"
보호자의 물음에, 안재수는 신중히 대답했다.
"골수 이식 후에 여러 가지 증상이 나타날 수 있는데, 너무 걱정하지는 마시고요."
"그럼……?"
"일단 흉부 X―ray 촬영하고, 몇 가지 검사 진행해 보겠습니다."
주치의의 소견이 이어진다.
그 옆에서 근욱은 가만히 손을 모으고 있다.
아무리 인턴이라지만, 조금 전 냉정하게 대처하지 못했던 것이 부끄럽고 면목이 없다.
"인턴 쌤, 나 좀 봐요."
곧 근욱이는 스테이션에서 재수 선생의 질타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정신 안 차려요?"
"죄송합니다."
"뭐 하는 거냐고. 몸집은 커서 어리바리하면서 멍하니 보고만 있고! 책임질 수도 없으면서!"
"갑자기 당황해서……."
"그걸 말이라고 해요?"
투욱!
재수 선생이 근욱의 어깨를 밀었다.
물론 밀리지는 않았다. 김근욱이니까.
재수 선생은 잠시 당황했지만 근욱의 잘못을 질타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갑자기 객혈을 하면, 빨리 노티하고 세츄레이션(saturation, 산소포화도) 체크부터 했어야지! 바이탈 체크가 기본인 거 몰라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심장리듬 문제도 간단하게 볼 게 아니라고요. 혹시라도 소아 심근염(dilated cardiomyopathy)이라도 걸리면, 50%는 죽거나, 심장 이식을 받아야 하는 지경까지 갈 수 있다고!"
"죄송합니다."
근욱은 연신 사과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안 그래도 쫄았는데, 무시무시한 사망률 이야기를 들으니 더욱 가슴이 쫄렸다.
"앞으로는 뭐 판단하려고 하지 말고, 곧바로 노티부터 해요!"
"예……."
그렇게 탈탈 털린 후, 근욱이는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생각했다.
‘난 환자 보는 의사 하면 안 되는 놈이야, 진짜…….’
물론 몇 초 늦은 노티가 환자의 예후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망률 50%>.
소아과 환자들의 심장 문제를 경험해 본 적 없는 근욱이에게는, 그 숫자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내가 이나에게 해를 가한 건 아니겠지……?’
안 그래도 매너리즘에 빠져 있던 그는 더욱 의기소침해지고 말았다.
<내 어리숙한 판단으로 사람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다>.
그 사실이 너무 무서웠다.
물론 지금이야 시키는 일만 하는 인턴이라지만, 1년 후부터는 자신도 그 짐을 지게 될 것이다.
과연 이 중압감 속에서 평생 일할 수 있을까?
"후우우."
아무도 없는 복도 한가운데서, 근욱은 한숨을 쉬며 벽에 쪼그려 앉았다.
희미한 가을 달빛이 창을 통해 들어왔다.
병원 바닥에 드리워진 자신의 그림자가 보잘것없이 작아 보여 서러웠다.
* * *
다음 날.
윤이나 환자는 더 나빠졌다.
또 하나의 치료 부작용이 관찰되었다.
어젯밤 경미한 폐출혈에 이어서, 출혈성 방광염이 확인된 것이다.
출혈성 방광염(hemorrhagic cystitis).
방광에서 출혈이 발생하여, 출혈로 인한 피딱지(blood clot) 때문에 소변길이 막히지 않도록 해야 하는 상황.
1시간마다 소변줄로 생리식염수를 넣고 빼는 작업을 반복해야만 했다.
"이나야, 안녕."
"고릴라 아저씨, 왜 자꾸 와?"
이전보다 힘이 빠진 목소리로 이나가 근욱이에게 인사한다.
"선생님이 당분간은 이나랑 자주 볼 것 같네?"
근욱은 그렇게 말한 뒤 소변줄로 다가갔다.
소변줄 안에 생리식염수를 밀어 넣고 빼는 작업을 반복한다.
이전 사건으로 죄책감을 가지고 있던 그는, 단순한 업무에도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1시간마다 시행해야 하는 이리게이션(irrigation, 세척) 작업은 만만치 않았다.
결국 잠자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오, 졸려 죽겠네…….’
꾸벅―
근욱은 고개를 떨구었다.
1시간씩 졸았다가 깼다가, 무한 반복이다.
게다가 다음 날에는 정상 출근을 해야 하니 생활리듬이 망가질 수밖에 없다.
오직 파릇파릇한 20대 인턴들의 체력을 갈아 넣어야만 가능한 업무였다.
이렇게 며칠을 지내는 동안, 보호자와 이야기도 많이 나눌 수 있었다.
"선생님, 우리 이나 때문에 고생 너무 많으시죠?"
보호자는 미안한 표정으로 근욱이에게 비타민 드링크를 권했다.
그 옆에서 이나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깨어 있을 때는 악동이지만, 잠든 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천사 같았다.
"우리 이나가 버릇없게 굴어서 죄송해요."
"에이, 뭘요."
근욱이 다크서클로 퀭해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보호자는 잠든 이나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이나가 집에 혼자 있는 시간도 많았고, 제가 교육에 신경을 많이 못 써서……."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보호자는 미혼모였다.
1시간마다 찾아가다 보니, 시시콜콜한 가정사까지 전부 알게 되었다.
그만큼 보호자와 인턴이 마주하는 시간이 많았던 것이다.
"항암 치료 받을 때 이나 힘들어하는 거 보면서, 암 걸린 게 엄마 탓인가 싶고…… 미안해서 모진 소리를 더 못 하겠어요."
그동안 이나가 받은 항암 치료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첫째. 골수를 미리 뽑는다.
둘째. 강한 항암 치료로 암세포를 죽인다. 이때, 몸 안의 골수세포들도 항암제를 이기지 못하고 죽어 버리고 만다.
셋째. 뽑아 놓은 골수를 다시 채워 준다.
지금은 셋째 단계.
이전 단계에서의 고통은 말도 못 하게 컸을 것이다.
암세포만 골라서 죽이기는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다른 몸 안의 세포들도 죽을 수밖에 없다.
머리가 빠지는 것은 기본이고, 장 속의 점막이 무너져 내려 식사도 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성인들도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이 항암 치료다.
‘……이 작은 몸으로 그 과정을 어떻게 견뎠을까?’
근욱은 이나가 새삼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휴, 안 그래도 피곤한 선생님한테 별말을 다 하네. 아무튼 우리 이나 때문에 죄송해요."
보호자가 고개를 꾸벅 숙이자, 근욱이는 황급히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어휴,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이나가 어린 나이에 암이라는 큰 병이랑 싸우고 있잖아요! 그것만 해도 정말 대단한 거예요. 어릴 때는 좀 개구져도 괜찮습니다!"
근욱이의 반응에 보호자는 놀란 듯했다.
그러더니, 이윽고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그렇게 말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선생님. 우리 이나가 선생님 덕분에 힘을 많이 얻는 것 같아요."
근욱이는 마음이 뒤숭숭했다.
내가 뭘 했다고?
아직 인턴인데?
누군가에게 감사 인사를 받는다는 것이 겸연쩍었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의지하는 대상이 된다는 것은, 썩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왜 의사가 되려고 했더라…….’
근욱은 문득 어릴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12살 때, 팔이 부러져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그때 자신을 치료해 주던 의사 선생님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우리 근욱이, 아주 의젓하게 잘 참았네! 선생님 말 잘 들어줘서 고마워.>
사소한 말 한마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근욱이 줄곧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이상적인 의사의 모습은 바로 그런 모습이었다.
‘그래. 어린 나이에 이렇게 힘든 항암 치료를 견뎌 낸 환자들도 있는데…… 내가 몸 좀 피곤하면 어때?’
근욱이의 마음속에서, 아주 조금 남아 있던 불씨가 다시 온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어푸푸―
근욱이는 화장실에서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환자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보다는, 내가 뭐라도 해 줄 수 있는 것이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 잠 깨고 며칠만 고생하자!"
다음 날 새벽 6시.
이나는 눈을 떴다.
그러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잠들기 전과 마찬가지로, 근욱이 묵묵히 이리게이션을 하고 있었다.
이나의 눈에는, 마치 근욱이 밤새 자신을 지켜 준 것처럼 보였다.
"굿 모닝."
"고릴라 아저씨다."
근욱은 대답 대신 인중을 늘리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나는 재밌다는 듯 헤헤 웃더니, 다시 졸린 듯 눈을 감으며 종알거렸다.
"……고릴라 아저씨 맨날맨날 봤으면 좋겠다."
그 한마디가 묘하게 간지럽고 뭉클거려, 근욱의 가슴에 오랫동안 남았다.
* * *
그렇게 10여 일이 지났다.
그동안 근욱이와 선한이는 밤샘 이리게이션을 당직 때마다 번갈아 가면서 했다.
다음 날 저녁 오프(off)에는 뻗어서 잠만 자는 시간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10월 후반부가 찾아올 무렵, 다행히 이나의 출혈성 경향은 멈추게 되었다.
출혈성 방광염(hemorrhagic cystitis)이 회복된 것이다.
"다행이다……."
털썩!
지친 근욱이와 선한이는 소파에 쓰러졌다.
그동안 인턴 잡에 충분히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업무는 또 신세계였다.
크게 한 방이 아니라, 잽을 아주 오랫동안 여러 대 맞은 기분.
소아과에서 이렇게 또 새로운 경험을 겪게 된 두 사람이었다.
"고생 많았다."
"너도."
며칠 동안 밤잠을 이루지 못한 선한과 근욱은 퀭한 얼굴로 주먹을 부딪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