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그가 향하는 곳(5)
나는 근욱이의 종이를 슬쩍 들여다보았다.
"어느 과 중에서 고민 중이길래?"
"몰러. 일단 바이탈 보는 과는 절대 안 갈 거고, 요새 마방진이 괜찮다던데……."
<마방진>.
마취과, 방사선종양학과, 진단검사의학과를 장난스럽게 일컫는 단어다.
세 가지 과 모두, 환자와의 접점이 적으면서도 매력 있는 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근욱이는 확신이 없어 보였다.
"이 중에 원하는 게 있어?"
"모르겠다. 나 길을 잃은 거 같아. 전공 정하려면 한 달도 안 남았는데 미치겠네."
근욱이는 풀이 죽어 쪼그라들었다.
이건 드문 일이다.
혹독한 삼각근 운동으로 단련된 김근욱의 어깨가 작아지다니?
정말 어지간해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의사가 됐을 때 처음에는 하고 싶은 게 많았던 것 같은데……."
* * *
김근욱. 27세.
그는 슬럼프였다.
권태기에 빠진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뭘 해도 의욕적인 기분이 들지 않았다.
소금물에 너무 많이 데쳐 버린 시금치처럼, 기분이 축축 늘어졌다.
오늘 아침만 해도 출근하기 전에 2층 침대에 멍하니 누워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아, 운석 떨어져서 지구 망했으면 좋겠다.’
지구가 망하면 일 안 해도 되겠지?
근욱은 하늘에서 거대한 돌이 떨어져 병원에 처박히는 장면을 상상했다.
히죽 웃던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운석 떨어지면 환자들은 무슨 죄야?
얼른 다른 생각 해야지.
‘그러고 보니 인턴들 중에서 누가 발가락 부러져서 며칠 쉬었다고 하던데…….’
근욱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 보았다.
출근길에 실수로 넘어져서 계단에서 구르면 3일 정도 쉴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는 또 고개를 저었다.
3일 누워 있으면 근손실 오잖아?
절대 안 되지.
결국 어떻게 해도 출근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삐삐, 삐삐―
최후의 알람이 울린다.
만일을 대비하여 3중으로 맞춰 놓았던 마지막 알람이었다.
새벽 6시 17분.
온갖 망상으로 출근을 미루던 근욱은 한숨을 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오늘 하루도 길겠구만.’
소아과 9동(E) 병동.
레지던트 선생님이 오늘도 가시 돋친 말투로 근욱을 쪼기 시작한다.
"근욱 쌤, 정찬기 환자 PCD(경피적 배액관) 이리게이션(irrigation, 세척) 잘하고 있는 거 맞아요?"
"네, 4시간 간격 맞춰서 하고 있습니다."
"무식하게 힘으로만 뚫으려고 하면 안 되는 거 알죠? 막혔으면 막혔다고 이야기해 줘야 돼요."
"아…… 네."
곧 근욱이가 바로 옆 준비실에 가서 드레싱 준비를 하는데 레지던트 선생님의 혼잣말이 들린다.
"참 나, 믿을 수가 있어야지. 몸만 크면 뭐 해? 근육으로 환자 보는 것도 아니고……."
레지던트 안재수.
이름처럼 재수 없는 성격이다.
첫날부터 근욱이의 트집을 잡기 시작하더니 요즘은 더욱 심해졌다.
‘젠장. 덤벨 5kg도 못 들 것 같이 생겨서는…….’
근욱은 가끔 생각했다.
의사가 내 적성에 맞는 걸까?
한 곳만 죽어라 파서 의사가 됐는데, 여기가 내 길이 아니면 어떡하지?
앞으로 몇 년은 이런 사회에서 목줄이 매인 채 살아야 한다 생각하니 대흉근이 절로 옹졸해진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안재수 선생이 지나가면서 또 한마디 한다.
"뻑뻑한 이리게이션 하면서 힘쓴다고 운동 되는 거 아닙니다? 환자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 알죠?"
아니, 이 사람아.
한 번 말하면 알아듣는다고!
그리고 내가 인턴 잡(job, 일) 하면서까지 헬스 생각할 거 같니?
‘에휴, 벌써 퇴근하고 싶다…… 일이나 얼른 끝내자!’
근욱이가 맡은 병동에는 벌써 29일째 입원하고 있는 9살 여자아이가 있었다.
신경모세포종(Neuroblastoma)으로 입원하여, 항암치료를 받은 환아.
항암치료 기간 동안 격리실에 있다가, 일반 병동으로 이송된 지는 이제 1주일 정도 된 아이였다.
미리 모아 둔 자기 골수를 주입하는 ‘자가 조혈모세포 이식’까지 시행받고, 회복할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예, 안녕하세요."
병실로 들어서며, 근욱은 보호자에게 대답했다.
‘영혼 없는 상태’.
근욱이를 한마디로 설명해 주는 단어였다.
얼른 드레싱을 끝내고 돌아갈 생각으로, 근욱은 환자에게 말했다.
"이나야 안녕?"
윤이나, 9세.
눈이 커다랗고 당돌하게 생긴 여자아이가 고개를 든다.
"자, 이나야. 소독할 시간이에요."
그러자 아이는 근욱을 힐긋 바라보더니 고개를 홱 돌리며 말한다.
"무서워."
"응?"
"괴물 아저씨."
근욱이는 충격을 받았다.
괴물이라니?
내가 그렇게 무섭게 생겼나?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던데…….
곧 이나의 어머니가 아이를 가볍게 나무란다.
"이나야, 그렇게 부르면 안 돼. 의사 선생님 안녕하세요~ 해야지."
"괴물 아저씨."
"이나야, 그런 말 하면 못쓴다니까?"
"그럼 고릴라 아저씨."
"……."
"얼굴이 고릴라처럼 생겼어."
하하하.
근욱이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왠지 초등학생에게 뼈를 얻어맞는 기분.
안 그래도 어릴 적 별명이 김고릴라였는데, 오랜만에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선생님, 죄송해요."
"아닙니다. 아이가 관찰력이 좋네요."
근욱이는 애써 농담으로 멘탈을 추슬렀다.
진정하자, 김근욱.
상대는 초등학생이다.
오늘 시행할 소독은 중심정맥관 (central catheter) 소독.
그런데 갑자기 이나가 등을 홱 하고 돌렸다.
"나 안 할래."
"으응?"
"의사 선생님이 못생겨서 소독받기 싫어졌어."
"이나야, 이거 금방 끝나는 거야. 그리고 이나 빨리 퇴원하려면 꼭 소독받아야 해."
"싫어. 다른 선생님은 초콜릿도 줬는데 이 선생님은 안 줘. 그리고 고릴라처럼 못생겼어."
이나는 요지부동이다.
한고집 하는 성격.
그러자 어머니가 곤란한 듯 다시 한번 사과하며 고개를 숙인다.
"죄송해요 선생님. 저희 이나가 고집이 너무 세서……."
근욱이는 시계를 힐긋 바라보았다.
잠시 후 요추천자 어시스트가 예정되어 있다.
만약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면, 분명 안재수 선생에게 탈탈 털릴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이나야, 소독 안 받으면 선생님이 이놈~ 할 거예요!"
근욱은 팔을 벌리며 겁을 주듯 말했다.
이나는 약간 놀란 듯한 눈으로 근욱을 빤히 쳐다본다.
그러더니, 별안간 고개를 푹 숙이고 얼굴을 감싼다.
"우에에에에엥……."
이런, 실수다.
울려 버리다니!
근욱의 등에서 식은땀이 삐질삐질 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흘러가고 있다.
근욱이는 황급히 아이를 달래기 시작했다.
"이나야~ 울지 마. 선생님이 잘못했어."
"후에에엥."
"선생님이 지금 초콜릿은 없는데, 어떻게 해 줄까? 응?"
"고릴라 흉내 내 줘."
"……."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어쩔 수 없다.
뭔들 못 하겠는가.
근욱은 팔을 둥글게 굽혀 고릴라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우, 우, 우!"
푸웁.
옆에 있던 간호사가 고개를 돌린다.
병동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황급히 웃음을 참고, 다른 베드에 있던 아이들이 꺄르르 웃는다.
"우와, 고릴라다!"
"진짜 고릴라야, 엄마!"
졸지에 아이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된 김고릴라였다.
"헉헉…… 자, 이나야. 이제 소독받을 거지?"
그러자 아이는 언제 울었냐는 듯 눈을 땡그랗게 뜨고 말했다.
"싫은데?"
"……."
"하란다고 진짜 하냐? 바보 고릴라야."
김근욱, 27세.
오늘 같은 굴욕은 처음이었다.
결국 까다로운 이나의 비위를 맞추는 데는 10분의 시간이 걸렸고, 지각을 한 근욱은 탈탈 털려야 했다.
‘아오, 진짜!’
윤이나, 9세.
왠지 근욱의 소아과 생활을 오랫동안 괴롭힐 것 같은 예감이 드는 환자였다.
* * *
이나는 특이한 아이였다.
나이에 비해 과하게 어른스러운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
가끔 우는 척을 해서 어른들을 곤란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사실 웬만한 일에는 울지도 않았다.
가령 채혈을 할 때도 눈살을 찡그리기만 할 뿐, 칭얼대지 않는다.
문제는, 고집이 너무 셌다.
아이들을 많이 다루어 보았던 간호사들도 두 손 두 발 다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근욱 쌤, 이나 또 고집 피우던데요."
"또요?"
"좀 어떻게 해 봐요. 그나마 근욱 쌤 말은 듣잖아요?"
간호사가 곤란한 듯 말했다.
어느새 김근욱은 이나의 전담 마크맨이 되어 있었다.
그는 한숨을 쉬고는 씩씩하게 병실로 들어갔다.
"이나야, 안녕?"
그러자 베개를 끌어안고 꽁한 표정으로 있던 이나가 쫑긋 고개를 들었다.
"고릴라 아저씨다."
"응, 그래. 고릴라 아저씨예요. 우끼끼끼!"
근욱이는 우스꽝스럽게 인중을 늘리고 턱을 긁으면서 다가갔다.
일종의 자진 납세였다.
그러자 이나는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근욱을 바라보았다.
"어휴, 그건 고릴라 아니고 원숭이잖아. 의사면서 그런 것도 구분할 줄 몰라?"
"……."
"무식하긴."
참자, 참자.
초등학생을 상대로 열받으면 안 되지.
근욱이는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며 말했다.
"이나야, 오늘도 검사받아야 돼."
"싫어."
"고릴라 흉내 다시 제대로 내 줄까?"
"질렸어."
"그럼 어떻게 할까?"
"……나 고릴라 아저씨 머리 묶기 놀이 할래."
"그래, 그래."
근욱이는 앞머리를 내어 준 대가로, 호흡기 바이러스 PCR 검사를 시행할 수 있었다.
그동안 보호자는 다시 한번 몸 둘 바를 모르고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 죄송해요. 저희 아이가 고집이 너무 세서…… 뭐 하나에 꽂히면 아무도 못 말려요."
"괜찮습니다. 안 그래도 헤어스타일 바꿔 보고 싶었어요."
"매번 죄송해서 어떡해요."
이나의 어머니는 유일한 보호자였다.
며칠간 지켜본 결과, 아버지는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었다.
무언가 사정이 있을까?
알 수 없다.
그저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근욱이는 막연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자, 됐다!"
근욱은 검사를 마쳤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의 앞머리는 형광색 고무 끈으로 묶인 채 하늘로 치솟아 있었다.
"와, 머리 묶은 고릴라다!"
"엄마, 저 아저씨 이상해!"
왁자지껄.
주변에 아이들이 모여든다.
그동안 몇 번 유인원 흉내를 내서 그런지, 김근욱은 소아과 동병동의 고릴라로 낙인찍혀 있었다.
"히히히, 고릴라 아저씨 완전 웃겨!"
이나는 배를 잡고 웃었다.
묘하게 어른스러운 아이였지만, 역시 이런 순간만큼은 평범한 또래처럼 해맑은 웃음을 지었다.
‘참 내…… 나 놀리는 게 그렇게 재밌나?’
근욱은 병실을 나서며 투덜거렸다.
그래도 왜인지,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어쨌든 저 꼬마 때문에 심심하지는 않네.’
활력이 없던 근욱의 일상에 조금씩 맑은 공기가 들어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 * *
그날 저녁.
근욱은 편의점을 서성였다.
그의 눈은 신중하게 초콜릿 코너를 훑고 있었다.
‘와, 씨. 요새 애들은 호강하는구만.’
초콜릿 안에 장난감도 넣어 준단 말이야?
나 때는 이런 거 없었는데!
근욱은 감탄하며 알처럼 생긴 초콜릿 몇 개를 챙겼다.
‘좋아. 이거 몇 개 주머니에 넣어 다녀야겠다!’
그러면 몇 번 이나를 달랠 수 있겠지?
악동 같은 아이를 달래는 데는 초콜릿이 최고니까.
혹시 마음에 안 든다고 할지 모르니까 다른 것도 사자.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자신도 모르게 바구니에 초콜릿을 쓸어 담는 근욱이었다.
따르르르―
그때, 주머니 속의 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얼른 콜을 받자, 곧바로 수화기 너머에서 빠른 목소리가 들렸다.
"인턴 선생님, 72호실에 윤이나 환자 EKG 있습니다. 급해요―!"
EKG(심전도) 검사 시행 콜이라니.
갑자기 왜?
근욱이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분을 느꼈다.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의 발은 빠르게 병동으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