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73화 (173/241)
  • #173 그가 향하는 곳(4)

    "아무래도 나는 환자 보는 과랑 잘 안 맞는 것 같아."

    "잉?"

    "네가?"

    연서와 내가 동시에 의아하게 물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근욱이의 성향과 정반대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근욱이 너 원래 환자 보는 거 좋아했잖아?"

    내 질문에 근욱이가 고개를 저었다.

    "소아과 하루 돌아보니까, 역시 환자와 얼굴을 맞대는 건 쉬운 게 아니더라. 아이들 보호자는 더하고."

    의외였다.

    그동안 우리가 알던 근욱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분명 원래대로라면…….

    <환자가 의지할 수 있는 국밥 같은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나처럼 몸 좋은 의사가 진료해 주면 환자들이 얼마나 든든하겠냐?>

    <힘 좋으니 힘 쓰는 과 가야지! 으하하!>

    ……언제나 그런 말을 하던 김근욱이었다.

    그런데 최근에 가치관이 바뀐 모양이다.

    "생각해 보니까, 굳이 스트레스받고 환자들이랑 부딪히면서 살고 싶지 않더라. 누가 칭찬해 주는 것도 아니고."

    근욱이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휴게실을 나갔다.

    "어디 가?"

    "q4hr(4시간마다 반복하는) 이리게이션(irrigation, 세척) 있어. 귀찮아 죽겠다."

    <귀찮다>?

    이 또한 근욱이답지 않은 표현이었다.

    물론 인턴 잡이 고된 것은 사실이지만, 근욱이가 저렇게 노골적으로 말하는 건 처음 본다.

    어쩌면 저번 달에 과로에 시달린 여파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근욱이 요새 괜찮은 건가?"

    내 걱정스러운 말에 연서가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제가 보기엔 충분히 정상인 것 같은데요? 일하는 게 가끔 귀찮게 느껴질 수도 있지."

    "좀 혼란을 겪는 것 같아서 그래."

    "사시사철 한결같은 그쪽이 특이한 게 아닐까요? 일중독 신선한 선생님!"

    연서가 펜으로 내 옆구리를 콕 찌르며 핀잔을 준다.

    일중독이라.

    자주 듣는 말이긴 하다.

    소파에 기대어 나른하게 스트레칭을 하는 연서의 말이 이어졌다.

    "근욱 오빠도 그동안 붕 떠 있었잖아요. 선한 오빠랑 같이 너튜브에도 나오고, 기사에도 나오고 하느라…… 이제 슬슬 과몰입에서 빠져나올 때가 됐지. 으갸갸갹!"

    연서는 팔을 뻗은 자세로 누우며 소파와 혼연일체가 된다.

    그러고 보니 얘도 분위기가 좀 변했다.

    여전히 착실하긴 하지만, 더 이상 3월처럼 빠릿빠릿한 기운을 내뿜고 있지는 않다.

    이제 1년을 채워 가는 직장인의 분위기가 느껴진달까?

    <일과 나 사이에 거리 두기>

    <워크―라이프 밸런스>

    <번아웃 방지>

    보통의 직장인들이 그렇듯, 의사들도 똑같이 그런 것들을 고민하며 산다.

    "연서 너는 전공 어떻게 할 거야?"

    "아직 모르겠어요. 일단 말했듯이 소아과는 패스!"

    나도 연서가 소아과를 포기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지난 9월.

    연서는 보호자 한 명에게 엄청나게 혼쭐이 났다.

    소아 혈액배양검사(blood culture)에서 한 번에 혈관 찾기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우수한 인턴이라도 할 수 있는 사소한 실수였다.

    하지만 보호자의 분노를 막을 수 없었고, 급기야 신상 털이까지 이루어졌다.

    <아니, 선생님 보니까 예쁜 척하면서 너튜브에 동영상이나 올리고 그러시던데?! 의사라는 사람이 일은 안 하고! 그러니까 실력이 딸리는 거 아니에요?!>

    그런 경험을 한 번 하면 멘탈이 흔들린다.

    한동안 시달리던 연서는, 결국 모든 SNS를 닫았다.

    "뭐, 예민한 보호자들이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거고…… 나는 나대로 멘탈 지켜야죠!"

    연서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은 냉정하게 판단한다.

    지난 한 달의 소아과 경험은 연서의 진로를 바꾸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소아과 분위기가 요새 안 좋잖아요? 그런 점도 결정에 한몫했고."

    "그건 그래."

    연서 말이 맞다.

    최근 소아과는 적은 지원자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아이들의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감소 중이기 때문이다.

    수요와 공급의 원칙이 적용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는 곧바로 지원율 변화로 나타난다.

    "요새 대한민국 역대급 인구 절벽이라고 난리잖아요. 의사들도 당연히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지."

    소아과의 인기는 날로 하락 중이다.

    사명감을 가지거나, 혹은 정말 아이들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면 기피하는 현실.

    오죽하면 지원한 사람들을 보면서 ‘아버지한테 물려받을 소아과가 있나?’라고 생각할 정도니까.

    이런 현실은 연국대병원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10월이 다 되었지만, 아직까지 소아과에 지원하겠다고 선언한 인턴은 2―3명에 불과했다.

    정원이 10명임을 고려했을 때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나저나 선한 오빠는 어때요? 소아과 체험해 본 소감이."

    이제는 소파와 완전히 한 몸이 된 연서가 나른하게 묻는다.

    내 소감?

    아직 잘 모르겠다.

    일단 다른 과에 비해 감정 소모가 좀 있다.

    하지만 여태까지 내가 겪었던 모든 과들은 각자의 매력과 보람이 있었다.

    그러니, 아마 소아과도 그럴 것이다.

    "아직 정신없긴 한데, 며칠 지내면서 감잡히면 재밌어질 것 같아."

    "이거 봐. 사람이 참 한결같다니까?"

    연서는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 나른한 표정으로 배시시 웃었다.

    * * *

    소아청소년과 인턴 근무지는 크게 셋으로 나뉜다.

    ―병동

    ―응급실

    ―신생아 중환자실(NICU)

    <병동>은 환자 및 보호자들과 자주 만난다.

    <응급실>은 다양한 환자와 보호자들이 들어오지만, 얼굴을 오래 보지는 않는다.

    는 가장 편하다. 인턴이 할 일이 많지 않고, 결정적으로 보호자들을 대면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나는 환자를 오래 보아야 하는 병동 소속이었다.

    ‘이제 병동 일도 슬슬 적응이 되는데?’

    3일 차 저녁.

    나는 여유롭게 퇴근길 복도를 걸었다.

    그동안 여러 일들을 겪으며 성장했기 때문일까?

    막상 진입장벽을 넘으니, 소아과도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 귀여운 아이들을 자주 보니 은근히 힐링도 된다.

    병동 일을 마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숙소로 향하는데, 이번 달 소아과 톡방에서 알람이 울렸다.

    [준화] ER(응급실)에 소아 컬처(blood culture, 혈액배양검사) 도와줄 수 있는 분?! 급함 ㅠㅠㅠㅠ준화는 나보다 두 살 어린 인턴 동기로, 얼굴은 귀엽지만 술기가 약간 서툴렀다.

    나는 편의점에서 사 오던 에너지바를 입에 물고 답문을 보냈다.

    [선한] 지금 숙소 가는 길인데, ER 들를까?

    [준화] 선한이 형!

    [근욱] 오~ 영웅 등장!

    [다솔] 외쳐 갓선한!

    [경민] 갓! 선! 한!

    ……인턴들 사이에서 내 명성은 조금 많이 과장되게 표현되고 있었다.

    [선한] 무슨 환자인데?

    [준화] neutropenic fever(호중구 감소성 발열) 환자인데, 15분 경과됐음…… 이미 한 번 Fail! 혈관 안 보여요ㅠㅠ

    [선한] 15분 안에 컬처 해야 안티(anti, 항생제) 들어갈 수 있다는 거네?

    타임 리밋이 빠듯하다.

    나는 재빨리 답문을 보냈다.

    [선한] IV 팀(혈관 찾기 전문팀) 부르는 게 낫지 않아?

    [준화] IV 팀도 일 겹쳐서 당장은 못 온대요 ㅠㅠ

    [선한] 지금 감.

    [근욱] 오오~

    [다솔] 역시 갓선한!

    [준화] 술기 대회 1등 선한이 형, 와서 솜씨 좀 보여 줘요!

    나를 애타게 찾는 헬프 요청에, 나는 숙소로 향하던 발걸음을 응급실로 옮겼다.

    소아 블러드 컬쳐(blood culture).

    ‘소아과 인턴 잡의 꽃’이라 불리는, 인턴들 사이에서 최고 난도의 술기 중 하나였다.

    소아는 혈관을 찾는 것 자체도 어렵지만, 찾았다 하더라도 이를 바늘로 찌르기는 쉽지 않다.

    바늘을 무서워하는 소아가 절대 성인처럼 가만히 기다리지 않기 때문이다.

    우는 것은 기본이고, 팔과 다리를 마음대로 움직이며 몸부림치기 때문에 정확히 바늘을 꽂는 것은 정말이지 너무나 어렵다.

    반드시 보호자/간호사 선생님께 꽉 잡아 달라고 요청 후에 술기를 진행해야 하는데, 마음 약한 보호자들은 세게 고정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 어렵다는 소아 컬처를 드디어 나도 해 보는구나!’

    기대 반 긴장 반으로 응급실에 도착했다.

    준화는 24G 얇은 니들을 준비한 채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

    눈빛에는 나를 향한 간절한 메시지가 가득하다.

    <형 도와줘요!>

    그런 빔을 쏘고 있다.

    "안녕하세요."

    "네, 선생님. 우리 아기가 너무 울어서……."

    "우에엥―!"

    엄마는 아직도 발버둥 치는 아기를 달래며 당황한 표정이었다.

    ‘쉽지 않겠네…… 일단 팔에서 혈관을 한번 볼까?’

    영아의 경우, 1cc의 피만 뽑아도 혈액배양검사를 할 수 있다.

    바늘에 차는 피만으로 충분하다는 이야기니까, 혈관을 잘 찌르기만 해도 된다는 것이다.

    내가 팔을 잡자, 발버둥 치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진다.

    "빼애애애애앵!"

    역시 영아들은 손만 대도 울기 시작한다.

    첫날에는 당황해서 어버버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어차피 애들은 운다. 그러니 빨리 끝내 주는 게 낫다.

    나는 팔에 거즈를 대고 고무줄로 묶고, 포동포동한 손등을 톡톡 두드리면서 살펴보았다.

    ‘……여기는 도저히 못 찾겠네. 준화가 어려워했던 이유가 있었구나.’

    나는 다음으로 팔의 오금 쪽을 살펴보았고, 여기서도 마땅한 혈관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환자의 발등 쪽으로 향했다.

    마찬가지로 거즈를 댄 뒤, 고무줄로 묶고 침착하게 기다려 보았다.

    그러자 길이가 어느 정도 확보된 시퍼런 핏줄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다!’

    아이들의 작고 얇은 혈관을 찾는 것은, 마치 하얀 백사장 안에서 사금을 발견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윤아, 조금만 참자~"

    "빼애애앵!"

    "응, 미안해~ 엄마가 잡고 있을 동안 선생님이 금방 뽑아 줄게~?"

    나는 부드러운 말로 아이를 어르고 달랬다.

    물론 영아가 내 말을 알아들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효과가 있다.

    옆에 있는 보호자와 라포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을 함으로써, 의사와 보호자는 비로소 <같은 편>이 된다.

    즉, 보호자들도 치료에 동참하고 협조하게 되는 것이다.

    며칠간 소아과에서 강하니 선생을 눈여겨보면서 배운 노하우들이다.

    "보호자분, 다윤이 꽉 잡아 주세요."

    "예."

    보호자의 도움을 받아, 나는 최대한 포를 뜨듯이 얇게 들어갔다.

    푸욱―

    바늘 끝에 느껴지는 감각이 말랑하고 부드럽다.

    성인의 피부와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

    주우욱―

    곧, 피가 맺혀서 니들을 따라 라인에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많은 양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검사하기에 충분하다.

    "고생했어, 다윤아!"

    나는 울고불고 눈물범벅이 되어있는 아기의 볼을 살짝 꼬집어 주면서 술기를 마쳤다.

    "그런데 선생님, 혹시 유명한 분 아니세요? 얼굴이 왠지 낯익은데……."

    그제야 보호자가 내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소아과엔 젊은 보호자들이 많아 내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누구 닮았다는 소리 많이 듣습니다."

    "그래요?"

    "흔하게 생긴 얼굴인가 봐요, 하하."

    나는 얼른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준화에게 눈짓했다.

    처억!

    준화는 아이의 발등에 밴드를 붙이고 내게 엄지를 몰래 내밀었다.

    <고마워요 신선한!>

    인턴들 사이에서, 나는 어느새 소방수 역할로 여겨지고 있는 듯했다.

    * * *

    일주일 차.

    나는 소아과에 완벽히 적응해 버렸다.

    인턴계의 고인물이라는 게 이런 걸까?

    하루하루가 수월하게 흘러간다.

    무엇보다, 매일 병동에서 만나는 소아 환자들은 정말 천사 같은 아이들이었다.

    "아빠?"

    "아빠 아니고 선생님이야."

    "아빠!"

    단어 사용이 서툴러서, 나를 아빠라고 부르는 아기들도 있는가 하면.

    "선생님한테 고맙습니다~ 해야지."

    "곰맘뚬미다."

    혀 짧은 소리로 꾸벅 인사하는 어린이들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내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 지어졌다.

    이런 걸 <삼촌 미소>라고 하던가?

    너무 귀여워서 몸서리가 난다.

    "헐! 저 사진 좀 같이 찍어 주면 안 돼요?"

    간혹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말을 거는 10대 청소년들도 있었다.

    그런 아이들은 유독 내 말을 잘 따랐다.

    그래서, 내 소아과 생활은 점점 더 편안해졌다.

    ‘게다가 보람도 있고.’

    소아과 환자들을 잘 치료해 주면, 그 환자의 향후 80년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

    같은 치료를 하더라도 성인들보다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인생의 출발점에서 관리해 주고 앞으로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

    이건 소아과 의사가 아니고서야 절대 얻지 못하는 행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아과 좋은데?"

    일주일이 지난 저녁.

    나는 소아과에 대한 첫인상을 수정했다.

    이래서 인턴들은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하는 모양이다.

    반면, 근욱이는 여전히 혼란 모드였다.

    "하늘이시여, 부디 제 전공을 점지해 주십쇼."

    타악!

    연필이 떨어진다.

    근욱은 휴게실 테이블 끝에서 국적 불명의 주문을 외우며 종이 위에 연필을 굴리고 있었다.

    "쟤 뭐 하냐?"

    "전공 정하는 중이래요."

    "무슨 자기 미래를 저렇게 정해?"

    "환자 많이 보는 과 말고 어디로 가야 좋을지 점 보는 중이래요."

    ……우리 근욱이가 드디어 고장 난 모양이다.

    얘를 어떻게 고치지?

    나는 녀석에게 다가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