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72화 (172/241)
  • #172 그가 향하는 곳(3)

    요추천자(Spinal tapping / Lumbar puncture).

    척추 사이를 찔러 뇌척수액을 뽑아 검사하는 것을 뜻한다.

    <뇌척수액>은 뇌에서 척수까지 신경이 지나가는 길에 흐르는 액체다.

    주요 기능은, 뇌와 척수를 보호하고 여러 가지 호르몬 등을 운반하는 것.

    만약 여기에 균이 자라거나 문제가 있다면? 이 액체를 뽑아서 검사해야 한다.

    ‘만약 어른 환자였다면, 나 같은 인턴이 해야 하는 업무였겠지만…….’

    여기서는 달랐다.

    연국대병원 소아과에서는 주치의 선생님이 직접 술기를 시행했다.

    인턴을 못 믿어서?

    그렇다기보다는, 혹시 생길 수 있는 소아 합병증에 대한 책임을 지기에 인턴은 아직 어리다고 생각한 것 아닐까?

    물론 환자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서 정한 원칙이겠지만, 아직 어린 의사인 우리 인턴에 대한 배려 또한 느껴졌다.

    약속된 시간인 두 시 반, 병실 입구에서 강하니 선생을 만났다.

    "들어갈까요?"

    "예!"

    드르륵―

    나는 트레이에 올려 있는 요추천자 세트를 밀면서, 강하니 선생님을 따라서 병실 안쪽의 환자 베드로 향했다.

    이번 ‘요추천자’ 술기에서 나의 역할은?

    간단하다.

    <똑바로 잘 잡고 있기>.

    수술에서와 마찬가지로, 모든 술기에 있어서 ‘포지션(position, 자세) 잡기’는 중요하다.

    그런데, 아이들은 불편한 자세를 꾹 참고 유지할 수 없다.

    안전하고 빠른 시술을 위해서는, 옆에 있는 사람이 아이의 포지션을 잘 유지시켜 주는 것이 필수적이다.

    "안녕하세요~!"

    강하니 선생님은 환한 얼굴로 병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보호자들이 일어나며 반겼다.

    "선생님, 오셨어요?"

    "우리 서아 오늘 조금 어려운 검사 받아야 하는데~ 다행히 잘 잠들었나 봐요?"

    "네, 아까 15분 전에 약 먹고 방금 막 잠든 거 같아요."

    윤서아. 7세.

    오늘 요추천자를 받을 아이였다.

    원인 모를 발열로, 뇌수막염이 의심되는 아이.

    그래서 요추천자를 통해 척수액을 뽑아 검사해야만 했다.

    "안 그래도 잠들기 직전까지 어제 과자 주신 의사 선생님 언제 오냐고 기다렸어요."

    "아유, 그랬어요?"

    "우리 서아가 선생님을 어찌나 좋아하던지 저희도 놀랐다니까요. 다른 병원에서는 이런 적 없었거든요."

    나는 대화를 듣고 놀랐다.

    강하니 선생님은 보호자들과 대단히 친밀한 듯하다.

    물론 그동안 다른 선생님들이 능숙하게 라포(rapport, 의사와 환자 간의 상호신뢰관계)를 형성하는 모습은 많이 보았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경우는 처음 본다.

    ‘대단한데?’

    나는 감탄하며 생각했다.

    꼭 배워 둬야겠다.

    라포를 형성하는 것은 손 기술 못지않게 중요하니까.

    이번 한 달간, 그것만 배워도 성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하니 선생은 환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웃었다.

    "우리 서아, 코~ 하고 자야 하는데. 아직 잠이 깊이 들락 말락 하나 보네?"

    "웅……."

    아이는 옹알대며 뒤척였다.

    그 귀여운 모습에 주변 사람들의 미소가 지어진다.

    물론 주치의가 보기에는 그다지 좋은 상황은 아닐 것이다.

    아이가 뒤척인다는 것은 마취제가 그만큼 효과를 나타내지 못했다는 뜻이니까.

    "약 효과 더 나올 때까지 조금만 기다릴게요."

    "예."

    잠시 후.

    수면제가 충분히 몸속에 퍼진 듯, 아이의 칭얼거림이 잦아들었다.

    트레이 위에 있는 요추천자 준비물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강하니 선생님이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 이거 성인들 대상으로는 해 봤죠?"

    "네."

    "포지션 잘 부탁해요."

    나는 예전 성인들을 대상으로 내가 했던 시술을 떠올리며, 환자 옆으로 가서 포지션을 잡는 것을 도왔다.

    "으……."

    우리가 환자를 옆으로 눕히려 하자 아이가 살짝 입을 연다.

    아이가 불편해하는 자세겠지만, 어쩔 수 없다.

    우리는 침대의 모서리 쪽에 환자의 몸을 옆으로 눕힌 뒤 새우등을 만들었다.

    ‘몸 전체가 바닥과 직각이 되어야 하니까…….’

    나는 침대 위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아이를 잡았다.

    오른팔로는 아이의 머리 쪽 자세를 잡고, 왼손으로는 다리가 굽혀진 상태로 유지하게 하였다.

    그리고 무릎으로는 기울어지는 아기의 배를 좀 밀어 주었다.

    그러자 강하니 선생이 주사기에 리도카인(lidocaine, 국소 마취제)을 담으면서 강조한다.

    "잘 붙잡아야 돼요."

    말투가 변했다.

    이제 유치원 선생님 모드가 아니다.

    아이와 보호자를 대할 때는 다정했지만, 술기를 할 때는 냉정해져야 한다.

    강하니 선생님 역시 시술을 앞두고 냉철하게 변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내가 침대 위에서 아이를 잡고 있는 동안, 소독이 진행되고 허리 위로 방포가 덮인다.

    그리고 강하니 선생님이 들고 있는 요추천자용 바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찌익―

    바늘이 피부를 뚫고, 요추 사이의 척수강 내로 진입하려 한다.

    그런데 그 순간.

    움찔―

    아이의 몸이 한바탕 꿀렁인다.

    나는 얼른 힘을 주어 아이의 몸을 단단히 고정했다.

    곧 강하니 선생님의 단호한 말이 들려왔다.

    "인턴 쌤, 잘 잡아요. 티탭 나면 안 되니까."

    "예."

    티탭(T―tap, traumatic tap).

    바늘이 척수액이 지나는 공간이 아니라, 그 옆의 혈관을 찔러서 피가 섞이게 되는 현상을 뜻한다.

    만약 이렇게 되면 우리가 보고자 했던 검사 결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을 수 있다.

    심지어, 몇 번 잘못해서 찌르다 보면 척수강 근처에 혈종(hematoma)까지 생길 수 있다.

    물론, 그동안 아이의 고통이 커지는 건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반드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순간이었다.

    ‘지금이 이번 술기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서아야 좀만 참아라!’

    마음속으로 말하며 나는 아이를 꽉 붙잡았다.

    ‘한 번에 끝내자!’

    아마 강하니 선생님도 이렇게 되뇌고 있었을 것이다.

    커튼 밖에서는 차마 시술 과정을 지켜보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보호자의 발목과 슬리퍼가 보였다.

    입술을 질끈 깨문 보호자의 얼굴이 안 봐도 내 머릿속에 그려졌다.

    푸욱―

    바늘이 더 깊이 들어갈수록, 나는 아이의 허리가 움직이지 않도록 더욱 신경 썼다.

    잠시 후, 강하니 선생님은 요추천자용 바늘 안에 들어 있는 심지를 조심스럽게 빼내었다.

    그러고는 끼고 있는 장갑의 겉 표면에 심지를 몇 번 묻혀 본다.

    스윽 스윽―

    장갑에 맑은 액체 성분이 조금 묻는다.

    ‘……!’

    이는 바늘이 척수강 내로 잘 들어간 것을 의미했다.

    척수강 내로 바늘이 들어가지 못할 경우, 심지에는 전혀 액체가 묻지 않는다.

    앞서 말한 티탭(T―tap, traumatic tap)의 경우에는 피가 섞인 액체가 장갑에 묻을 수도 있다.

    똑 똑―

    시술이 성공적으로 되었다는 것을 알리듯, 꽂아 놓은 바늘을 따라서 맑은 뇌척수액이 한 방울씩 천천히 흐르기 시작했다.

    ‘휴, 한 번에 성공했어!’

    강하니 선생님은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플라스틱병으로 한 방울씩 떨어지는 뇌척수액을 받기 시작했다.

    성인의 경우에도 몇 번씩 실패해서, 한 시간이 넘게 걸릴 수 있는 시술.

    찌르는 횟수가 늘어나고, 시간이 길어질수록, 어렵게 쌓아 올린 라포가 와장창 깨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다행히 이날의 요추천자 시술은 문제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척수강의 압력 측정과 뇌척수액 샘플링이 다 끝나고, 우리는 20분 만에 병실 밖으로 나왔다.

    "선한 쌤, 고생했어요."

    "아닙니다."

    그렇게 말했지만, 은근히 식은땀이 났다.

    아이들을 상대로 하는 천자는 유독 더 조마조마했다.

    내가 만약 아이를 제대로 잡지 못해, 조금이라도 빈틈을 만들면 큰일이 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이 꽤 많이 들죠?"

    "예, 아이가 자고 있는 것 같은데도, 생각보다 힘이 들어가네요."

    "반쯤 잠든 아이가 저런데, 깨 있는 아이는 어떨 것 같아요?"

    "……."

    "앞으로 힘쓸 일 많을 거예요~ 화이팅!"

    다시 평소의 말투다.

    강하니 선생은 주먹을 불끈 쥐며 내게 힘을 불어넣은 뒤 다음 일을 향해 움직였다.

    나는 두 번째 교훈을 얻었다.

    <둘째. 소아과에서는 섬세함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힘쓸 일도 많다.>

    * * *

    세 번째 교훈은 회진 때 얻을 수 있었다.

    나는 강하니 선생을 따라다니면서 여러 베드의 회진을 도왔다.

    그동안의 경험과 가장 다른 점은, 환자와 이야기하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선생님, 우리 아이가요……."

    "우리 애 괜찮은 거예요?"

    "우리 아기가 남편을 닮아 가지고, 성질이 급해요. 그래서 가만히 있지를 못해요."

    "우리 애가 원래 안 이런데……."

    등등…….

    주로 보호자와의 대화가 이루어졌다.

    게다가 부모님의 성향도 제각각이다.

    어떤 부모님은 울먹이기도 하고, 한탄을 늘어놓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마치 압박 면접을 하듯 주치의 선생을 다그치는 부모님도 있었다.

    "지금 애가 열이 이렇게 나고, 몸을 바르르 떠는데, 뭐라도 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여기 연국대병원인데 이래도 되는 거예요?"

    공격적인 말투다.

    어쩌면 불화가 생길 수도 있는 순간이다.

    그런데, 강하니 선생은 이런 일이 익숙하다는 듯 웃으며 잘 대처했다.

    "어머니, 걱정 많이 되시죠?"

    "예?"

    "이런 경우에 부모님들이 많이들 놀라세요~ 이럴 때일수록 보호자분들이 침착하셔야 저희도 최선을 다해서 도와드릴 수 있어요."

    "아, 예……."

    "지금 약이 들어가고 있고, 각종 검사도 진행 중이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열 떨어질 거예요. 원인도 찾아서 교정해 줄 거고요!"

    특유의 말투 때문일까?

    가시 돋친 보호자들의 태도도, 눈 녹듯이 사르르 녹는 것이 보인다.

    역시 소아과에서 산전수전을 겪는 의사 선생님들의 요령이 남다르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생님……."

    "네, 걱정 마세요!"

    강하니 선생님의 모습을 보며, 나는 소아과의 세 번째 교훈을 알게 되었다.

    ‘여기에서 일하는 의사들은 보호자를 상대할 줄 알아야겠구나!’

    소아청소년과의 환자는 만 18세까지.

    이 중 청소년들은 의사 표현이 가능하다.

    하지만, 아직 어린아이들은 의사 표현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커뮤니케이션의 대상은 자연스레 대부분이 보호자가 된다.

    <셋째. 소아과의 고객(?)은 보호자들이다.>

    * * *

    "아이고 디다."

    털썩―

    그날 저녁, 나는 숙소 휴게실의 소파에 몸을 묻었다.

    인턴 8개월 차, 인턴계의 고인물인 나에게도 소아과 병동 일은 쉽지 않았다.

    몸이 힘든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힘들었다.

    ‘소아과는 내 적성이 아닌 것 같기도 한데…….’

    터엉―

    잠시 후,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온 근욱이가 소파에 몸을 던진다.

    표정을 보아하니, 얘도 멘탈이 꽤나 털린 것 같다.

    "와― 지난달 이식외과 파트가 인턴 스케줄 중에 힘든 걸로는 톱 티어였는데, 소아과도 만만치 않네."

    "그러게."

    "애들 달래야 되고, 보호자는 옆에서 내 손끝 하나하나 지켜보고 있고……."

    "맞아…… 마음은 충분히 이해 가는데, 쉽지 않네."

    우리는 빨래처럼 소파에 늘어졌다.

    <멘탈을 챙겨라>.

    다른 인턴들의 조언이 새삼 와닿는 순간이었다.

    그때, 누군가 우리의 대화에 웃으며 끼어들었다.

    "제가 그래서 소아과 프로퍼였다가 한 발 뺀 거예요."

    "어, 연서 오랜만!"

    언제부터 와 있던 건지, 휴게실 구석의 컴퓨터 앞에 있던 연서가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연서는 소아과 지망이었잖아?"

    "아기들은 너무 귀엽고 좋은데, 정신적으로 힘들더라고요."

    "그럴 만해. 나도 오늘 보호자들한테 털리고 주치의 선생님한테도 털리고 쌍으로 털렸거든."

    "근욱 오빠, 오늘의 주요 이벤트는 뭐였는데요?"

    "천자 하다가 애 제대로 못 잡았다고 혼났다."

    엥?

    의외다.

    근욱이의 근력으로 아이를 휘어잡는 건 식은 죽 먹기였을 텐데…….

    우리가 의문을 표하자, 근욱이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애가 울면서 몸부림치니까 너무 가슴이 아파서 나도 모르게 힘이 빠지더라고."

    하긴, 근욱이는 겉보기와는 다르게 의외로 감성파다.

    "그런데, 소아과 돌면서 나에 대해서 알게 된 새로운 것이 있어."

    "뭔데?"

    우리는 근욱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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