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71화 (171/241)

#171 그가 향하는 곳(2)

10월의 첫날.

낮이 짧아져, 이제 겨우 동이 틀 무렵의 새벽 시간.

나는 근욱이와 함께 새로운 출근지로 향했다.

저벅저벅―

우리는 나란히 본관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걸으며 투닥댔다.

"지겨운 자식. 넌 나만 따라다니냐?"

"누가 할 소리를."

"룸메이트인데 세 번째 같은 스케줄이라니, 이게 뭔 우연이냐?"

"내 말이 그 말이다."

"어쩜 우린~ 복잡한 인연에~"

"하지 마."

나는 손을 들어 김근욱이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것을 틀어막았다.

이번 한 달.

나는 근욱이와 같은 과를 돌게 되었다.

원래는 서로 다른 스케줄이었지만, 교환을 거치다 보니 또 한 번 겹치게 된 것이다.

100명이 넘는 인턴 중에서 이렇게 인연이 겹치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그래도 한 달 동안 심심하지는 않겠구만!"

"어차피 너랑 나랑 카운터(counter, 당직 때 서로의 일을 커버해 주는) 병동이라 서로 번갈아 가면서 오프일 텐데?"

"그래도 왔다 갔다 하면서 얼굴 많이 볼 거 아냐? 나 어려운 거 있으면 선한이 너한테 콜할 테니까 도와주라!"

"싫어. 저리 가."

"나는 너의~ 영원한 친구야~"

김근욱이 또다시 감미로운 노래를 부르며 들러붙으려 한다.

징그러워 인마!

나는 얼른 녀석에게서 떨어졌다.

"근데 농담이 아니라 나 좀 도와줘. 나 요새 병원생활 위기야."

"왜?"

"뭐라 해야 할까…… 인턴 잡(job, 업무)도 이제 익숙해지고, 새로운 것도 없다 보니까…… 내가 어떤 의사가 되고 싶었는지 초심을 잃었다고 해야 할까?"

"매너리즘?"

"어, 그거."

근욱이는 내 말에 손가락을 튕겼다.

매너리즘(mannerism).

원래는 예술사조에서 사용되던 단어다.

타성에 젖어서 새로운 자극이 없는 채로 굳어지는 현상을 뜻한다.

근욱이는 지금 그런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듯했다.

"지난달에 ABGA(동맥혈 검사) 하러 갔다가 흠칫했다니까? 환자랑 별로 대화도 없이, 그냥 기계처럼 피만 뽑고 바로 나오려 하는 내 자신을 본 거야. 술기는 훨씬 빨라졌지만, 어느새 인간적인 의사가 되고 싶어 했던 내 처음 모습이 없어지려 했다는 거지."

나는 씁쓸히 웃으며 한편으로는 근욱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이라는 게 그런 것 아닐까?

처음에는 누구나 초심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사람은 변한다.

어느 순간 일이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기본적인 것에 소홀해지기도 한다.

일에 휘둘리기도 하고, 때로는 일에 잡아먹히기도 한다.

결국 ‘내가 왜 이걸 하고 있었더라?’ 하는 지점까지 이르는 것이다.

아직 인턴이지만, 한 해 동안 많은 일들을 압축적으로 겪기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물망초심(勿忘初心)이라. 항상 처음 마음을 가져야 하거늘……."

근욱이는 아저씨처럼 말끝을 흥얼거렸다.

"그래도 우리는 매달 새로운 과에 들어가잖아. 이번 달은 특히 새로운 세계니까 잘 적응해 보자."

"그래, 맞아. 그렇지."

<소아청소년과>.

흔히 쓰는 말로 하면 소아과. 메이저(major)로 불리는 내/외/산/소 중 하나의 과(科).

즉 많은 인턴들이 피할 수 없이 거쳐야 하는 스케줄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번 한 달이 제일 까다로울지도 몰라.’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동안 소아과를 거쳐 온 인턴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후기를 말하고는 했기 때문이다.

<멘탈 단단히 챙겨라!>

그 말대로, 결코 쉽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한편으로 소아 진료는 완전히 색다른 영역이라고 들었던 만큼, 어떤 경험을 얻을 수 있을지 기대가 되었다.

띠잉―

근욱이와 나는 엘리베이터의 같은 층에서 내린 뒤 찢어졌다.

나는 서쪽으로, 근욱이는 동쪽으로.

"수고해라!"

"어, 너도."

나는 새로운 출근지로 향했다.

9층 서(West)병동 소아과.

병동 스테이션을 꾸며 놓은 모양과 색깔부터가 성인 병동들과는 달랐다.

누가 봐도 <여기는 소아과>라는 것을 병동에 들어서자마자 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언제나처럼 병동의 간호사 선생님들에게 간단한 인사를 한 뒤 자리에 앉았다.

EMR(의무전자기록 시스템)에 로그인해 확인한 인턴 업무창에는 이미 몇 가지 업무가 올라와 있다.

‘이게 오늘 내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구나.’

드레싱.

EKG(심전도 검사).

MRI 검사 동반.

Spinal tapping(요추천자) 어시스트.

등등.

쌓여 있는 일들을 빠르게 확인한다.

그때, 레지던트 선생님이 씩씩한 목소리와 함께 나타났다.

"좋은 아침입니다~!"

소아과 3년 차, 강하니 선생님.

앳된 얼굴이다.

전체적으로 순한 인상이었지만, 짱돌처럼 단단한 기운이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얼른 일어나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목소리가 특이하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유치원 선생님? 놀이공원 아르바이트?

그런 높은 텐션의 말투가 몸에 배어 있는 선생님이었다.

"이번 달 인턴 신선한입니다."

"와, 선한 쌤! 그동안 얘기 많이 들었어요. 반가워요~!"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두 손을 뻗어 흔든다.

……뭐지, 이 기분은?

갑자기 유치원생으로 회귀한 기분이다.

아동용 프로그램에서 <어린이 여러분 안녕~?> 할 때, 정확히 그 포즈였다.

"혹시 인계는 잘 받으셨을까요?"

"예, 아침 8시에 bone marrow biopsy(골수천자) 어시스트 들어가고, 그 뒤로는 쌓인 업무 리스트 해결하면 된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검사 동반은 아이가 잠들어 있는 찰나에 다녀와야 돼서, 콜에 빠르게 대응해야 된다고 인계받았습니다."

"와, 맞아요! 잘했어요~!"

……뭐지? 칭찬받을 일인가?

강하니 선생님은 사소한 일에도 커다란 리액션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어린 환자들을 오래 대했어서 그런가?

물론 소아과 선생님이 다 그런 건 아닐 테니, 아마도 이 선생님만의 성향이겠지.

"그럼 인턴 선생님, 한 달 힘내요. 파이팅!"

"네, 감사합니다!"

왠지 이번 달은 재미있게 일할 수 있을 것 같다.

강하니 선생님의 힘찬 응원과 함께, 나의 소아과 인턴생활이 시작되었다.

* * *

한국의 의대생, 의사라면 무조건 보았을 교과서 ‘홍창의 소아과학’ 의 첫 페이지에 적혀 있는 문구다.

직역하면, <소아는 작은 어른이 아니다>라는 뜻.

아마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고개를 갸웃거릴 만한 문장일 것이다.

소아 = 작은 어른. 맞는 말 아닌가?

아니다.

적어도 의료현장에서는 틀린 말이다.

소아는 성인과 모든 측면에서 다르다.

물론 각 장기(organ)들의 구성은 같을 수 있지만…….

3kg의 신생아에서부터 청소년 시기까지 성장해 가는 소아에게, 성인과 같은 잣대를 들이밀고 진단과 치료를 할 수 없다.

그래서 소아들을 전문으로 볼 수 있는 소아과 전문의(pediatrician)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어린 환자를 검사하는 건 처음이네.’

나에게 주어진 첫 업무는 5살 아이의 인플루엔자(influenza, 독감) 검사였다.

코를 통해 면봉을 집어넣어 비강에서 샘플을 얻는 검사였는데, 코를 찔러 입천장 근처까지 가야만 한다.

성인들을 대상으로 수십 번 해 본 검사이기에, 자신만만하게 검사키트를 들고 환자가 있는 베드로 다가갔다.

‘첫 단추부터 잘 끼워 보자!’

촤악―

커튼을 열었고, 베드에서는 환자와 환자의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하준이 인플루엔자 검사 시행하겠습니다."

나는 친절히 말했다.

그런데, 막상 검사하려니 좀 걱정이 됐다.

성인들도 불편해하는 이 검사를 5살 아이가 잘 받아 낼 수 있을까?

"흐잉……."

환자는 어린 남자아이.

옆에 있는 엄마의 옷깃을 붙잡은 채, 겁먹은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마치 내가 악당이 된 기분이군.

하지만 나는 이 검사를 반드시 해야만 한다.

나는 만면에 따스한 웃음을 짓고 말했다.

"하준아, 안녕?"

"……."

"선생님이 잠깐 검사를 좀 해야 돼. 이거 꼭 해야 되는 거야. 금방 끝나니까……."

"으아앙―"

갑자기 아기가 울기 시작한다.

……억울하다.

나는 진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단지 채취한 검체를 보관하게 될, 주황색 뚜껑으로 된 플라스틱 통을 살짝 보여 주었을 뿐인데…….

아이는 이 주황색 뚜껑을 보자마자 우는 것이다.

아마도 이전에 이 검사를 당했을 때의 괴로움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모양이다.

옆에서 아이를 잡고 있던 어머니가 부드러운 말로 달래기 시작한다.

"응, 하준아. 괜찮아. 이거 한 번만 코에 슈욱 놀이 하자."

"싫어!"

"이거 아픈 거 아니야. 주사도 아닌데?"

"싫어!!"

"여기 의사 선생님이 안 아프게 잘해 주실 거야. 그쵸 선생님~ 우리 하준이 하나도 안 아프게 해 주실 거죠~?"

엄마가 아이를 잡고 달래며 나를 쳐다본다.

‘……아닌데요, 아픈데요?’

순간 당황했다.

솔직히 이 검사 만만치 않다.

나도 한 번 경험해 봤는데, 엄청 아픈 건 아니지만 그래도 대단히 불편한 건 확실하다.

하지만, 해내야만 한다.

그래서 나는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이거 봐, 하준아. 길게 생겨서 앞이 뾰족한 게 우주선 같지? 이거 하나도 안 아픈 거야~ <스페이스 하준>호 발사 준비 완료. 3, 2, 1 퓨슈욱―"

나는 인플루엔자 스왑 면봉을 보관하게 될, 주황색 뚜껑으로 된 기다란 검체 보관 통을 옆으로 눕혀서 하준이 앞에서 흔들었다.

"……."

스페이스 셔틀이 우주를 항해하는 것처럼 소리를 내며 아이의 머리 위를 맴돌자, 아이가 잠시 울음을 멈춘다.

잠시 트랜스(trance, 어떤 일에 집중할 때 겪게 되는 몽환상태) 상태가 되어, 우주선 놀이를 하는 내 손끝만을 쳐다보고 있다.

"피슈욱―"

나는 입으로 우주선 소리를 내며 아이의 얼굴 근처로 접근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기다란 면봉을 준비했다.

"<스페이스 하준>호 착륙 준비하겠습니다. 2단 분리 시행! 푸시잉―"

그렇게 말하며 검체 채취 통의 뚜껑을 열었고, 면봉을 아이의 코로 조심스레 가져갔다.

다행히 아이는 아직까지는 우주선 놀이에 정신이 팔려, 멍하니 내 왼손에 들려 있는 플라스틱 통만을 쳐다보고 있다.

‘어차피 오래 코 안에 있을 수는 없어. 단숨에 찌르고 나온다!’ 내 왼손에 집중하고 있는 아이를 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면봉 끝이 코에 닿자마자 하준이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울음을 터뜨린다.

"으아앙―!!"

식은땀이 난다.

역시 무리수였나?

애초에 이 검체 통은 얇고 기다랗게 생겨서 우주선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이 위기를 어떻게 헤쳐 나가지?’

결국 하준이 엄마가 상황을 리드하기 시작한다.

"선생님, 제가 꽉 잡고 있을 테니까, 너무 거칠게 말고 부드럽게 넣어 주세요!"

어머니가 아이의 몸과 얼굴을 붙잡는다.

몸부림을 치며 우는 아이에게 다시 한번 면봉을 가져갔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나는 면봉을 하준이의 코에 집어넣을 수 있었다.

아무 말 대찬지로 아양을 떨면서 아이를 달래 가며 콧속을 후비적후비적했다.

그동안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서럽게 울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

……귀청 떨어지겠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겨우겨우 검사를 끝냈다.

인플루엔자 검사 하나 하는 데 몇 분이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성인들 대상으로 1분 컷인 검사가, 소아과에서는 무려 15분이 걸렸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이 과정을 헤쳐 나가야 하는 거구나.’

기가 쪽 빨린다.

소아과 인턴들이 왜 업무 건수에 비해서 바쁜지 이해가 되었다.

이번 달, 이곳에서 배울 세 가지 교훈 중 하나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첫째. 아이는 어른과 전혀 다른 생명체다.>

나는 볼이 홀쭉해진 채로 병실을 나섰다.

* * *

두 번째 교훈은 오후 근무에서 느낄 수 있었다.

"선생님, 56호실에 윤서아 환자 스파이날 탭핑(spinal tapping, 요추천자) 할 거니까, 두 시 반에 병동에서 봐요!"

"예!"

레지던트 강하니 선생님의 말에 나는 착실히 대답했다.

그리고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인계장을 다시 한번 숙지한 후 병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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