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70화 (170/241)

#170 라이벌 매치(8) 송유주의 작품은 언뜻 보기에 난해했다.

일단, 종이가 삼각형 모양으로 몇 번 반듯하게 접혀 있다.

그리고 마치 이가 빠진 듯 군데군데 날카롭게 잘려 나간 모양새였다.

‘저게 뭐야?’

좌중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종이가 접혀 있다는 것이 특이하긴 했지만, 별로 의미 있는 형상은 아닌 듯했다.

그런데, 선한은 무언가를 눈치챘다.

‘어? 저건…….’

곧 그는 유주의 의도를 깨닫고 감탄했다.

‘뭔지 알겠다. 처음에 그래스퍼 두 개만 사용했던 이유가 있었구나!’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송유주.

로봇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기술뿐만 아니라 순간적인 발상도 뛰어난 사람이었다.

한편, 교수들은 아직도 좀처럼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

"저게 뭐죠?"

"글쎄요……."

"물론 그래스퍼를 사용해서 종이를 반듯하게 접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긴 한데…… 정작 내용물이 뭔지 모르겠네요."

몇몇 눈치 빠른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곧 사회자가 송유주에게 설명을 요구한다.

<선생님. 작품 설명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설명보다는 종이를 펼쳐 주시는 게 빠를 것 같습니다."

<어…… 이 접혀 있는 걸 펼치면 되는 건가요?>

"예."

송유주의 대답은 간결했다.

사회자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종이를 집어 조심스럽게 좌우로 펼쳤다.

그리고 곧 모두의 눈이 커졌다.

"아……!"

홀 여기저기에서 감탄이 터진다.

스노우플레이크.

즉 눈송이 모양의 페이퍼 크래프트였다.

접혀 있을 때는 아무런 모양도 아니지만, 펼쳤을 때 비로소 진면모가 드러난다.

의미 없어 보이던 칼집들은 육각형의 형태 안에서 대칭 구조를 만든다.

전체적으로 반듯하고 깔끔한 모양은, 옛날 TV에서 보았던 김영만 아저씨의 종이접기를 떠올리게 했다.

5분 안에 만들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이고 아름다운 종이공예였다.

<이야…… 이런 반전이! 정말 아름답습니다. 그 와중에 종이를 접어서 자를 생각을 하시다니. 대단한데요?! 교수님들 생각은 어떠신가요?>

사회자가 놀란 듯 흥분한다.

곧 교수들이 마이크를 잡고 허탈하게 웃었다.

올해는 어떻게든 송유주를 견제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송유주는 송유주네요."

"단순히 평면에만 구속되지 않는 아이디어가 좋았습니다."

"종이를 완벽한 비율로 반듯하게 접을 자신감이 있었던 거죠. 복강경 기구를 본인의 손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한 셈이네요."

"기술력과 창의력이 둘 다 뒷받침된 결과라고 봐야겠습니다."

마치 아이돌 경연 프로의 심사위원이 된 듯, 교수들의 입에서 평소 들을 수 없던 미사여구가 튀어나왔다.

"그래서 제 점수는……."

만장일치.

이견의 여지가 없는 우승 확정이었다.

곧 모두의 환호 속에서 최종 순위가 스크린 위에 발표되었다.

1위 ― 송유주

2위 ― 변규남

3위 ― 천사연

3년 연속 우승!

송유주는 위업을 달성하고도 평소처럼 무덤덤했다.

마치 <오늘도 평소처럼 밥을 먹고 숨을 쉬었다>라는 듯 태연한 표정.

반면 변규남은 2등에 만족한 듯 희희낙락하며 웃는다.

3등 천사연은 입만 웃고 있다. 올해도 송유주에게 패배한 것이 분한 모양이다.

"자, 웃으세요!"

찰칵, 찰칵!

시상식과 기념 촬영이 끝난 뒤, 마동섭이 실실 웃으며 다가갔다.

"야, 송유주. 매년 그렇게 최신 노트북 받아서 어디에 쓰려고 그러냐?"

"이렇게 쓰려고 그런다."

퍼억!

송유주는 마동섭의 명치를 가격했다.

"어억."

"우윳빛깔이 어쩌고 어째?"

최신형 17인치 노트북 박스로 흠씬 두드려 맞는 마동섭.

물론 송유주의 가느다란 팔로 휘둘러 봤자 야생 곰 같은 몸에는 타격 하나 없었다.

"자,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인재개발실장님께서 본관 지하 1층에 식당을 빌려 놓았으니까, 시간 되시는 분들은 점심 식사 하고 가시면 되겠습니다!"

그렇게 모든 행사가 마무리되고 사람들이 빠져나갈 무렵, 선한이 유주에게 다가가 물었다.

"선생님, 그런데 눈송이를 만드실 생각을 어떻게 하셨어요?"

그러자 송유주는 별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어릴 때 다들 좋아했잖아? 크리스마스트리 장식 만들기 같은 거."

어릴 때?

모두들 아리송한 표정이다.

송유주 선생의 어릴 때 모습이 잘 상상이 안 간다.

왠지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미자고 해도, <산타는 없습니다 부모님> 하고 공부방에 들어갔을 것 같은데…….

"……표정들이 왜 그래? 나도 어릴 때가 있었어."

그렇게 뾰로통한 표정으로, 항변 아닌 항변을 덧붙이는 송유주였다.

* * *

그날 저녁.

인턴 숙소 휴게실에는 한동안 류명인의 자랑이 끊이지 않았다.

"와, 요즘 무선 이어폰 성능 좋네요."

"명인아, 너 1등 한 거 알겠으니 그만 티 내라."

"……."

"명인아?"

"뭐라고요? 잘 안 들렸어요. 이어폰 성능이 너무 좋아서 그런가?"

"아오, 꼴 보기 싫어."

중원이 형은 오만상을 쓰며 류명인에게서 등을 돌리더니 내게 물었다.

"그런데 선한이는 상품 못 받은 거야? 공동 1등이라면서."

"저도 받았어요."

"오오~"

내 손에는 아직 포장이 뜯어지지 않은 최신형 버즈팟 프로가 놓여 있다.

홍보팀장님은 기어코 상품을 두 개 구해서 내게 주었던 것이다.

"이야~ 선한이 좋겠네. 근데 왜 아직 안 끼고 있어?"

"안 그래도 오늘 당장 테스트해 보려구요."

나는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이어폰을 귀에 꽂은 뒤 음악을 재생했다.

과연 어떤 성능을 보여 줄지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오, 뭐야?"

나는 놀라 버렸다.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켜자마자 귀가 먹먹해지며 소음이 차단된다.

이것이 최신 기술의 힘인가?

마치 물속에 들어온 듯 사방이 고요하다.

이거라면 분명 내 평온한 수면을 지켜 줄 수 있을…….

<드르렁― 크와아―>

"……."

어림도 없었다.

근욱이의 코 고는 소리는, 최신 기술로 만들어진 방음 시스템을 가볍게 뚫었다.

최신 이어폰 vs 김근욱.

최종 매치의 승자는 바로 김근욱이었다.

나는 한숨을 쉬고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그가 향하는 곳(1)

샌프란시스코 공항.

커다란 비행운이 그어진 10월의 하늘 아래로,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다.

저벅, 저벅―

한 남자가 바쁘게 걷는다.

나이는 중년에서 노년 정도일까?

희끗한 머리, 고집 강해 보이는 눈썹.

조금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겠다는 듯한 태도가 몸에 배어 있다.

커다란 여행 가방을 끌고 있는데, 나이에 비해 완력 또한 상당한 듯했다.

"백 선생님, 좀 천천히 가세요!"

두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한 명은 이국적인 혼혈 여인, 그리고 한 명은 나이가 지긋한 남자다.

캘리포니아 사람들 특유의 여유롭고 낙관적인 눈매가 닮은, 누가 봐도 부녀지간이었다.

"백 선생, 왜 그렇게 서둘러? 한국 가는 비행기가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묻는 남자의 말투에 은근한 서운함이 배어 있다.

곧 세 사람은 출국장 앞에 멈춰 섰다.

"그동안 불편하진 않았어?"

"그래, 돈 많은 친구 덕에 호화 별장생활도 다 해 봤네."

"다행이구만."

"정작 자네 딸이 귀찮게 굴어서 쉬지도 못했지마는."

그 말에 여인이 발끈하며 대꾸한다.

"와, 너무하네. 선생님 굶어 죽을까 봐 음식이고 과일이고 꼬박꼬박 가져다줬더니 이러기예요?"

"화내지 마. 재클린."

"화가 나는데요?"

"교감신경 과다항진 되면 부정맥 올 수 있어."

"……심장 수술 해 준 선생님이 그런 말 하면 농담으로 안 들리는 거 알죠?"

백의신 특유의 화법은 진담인지 농담인지 구분이 안 간다.

두 사람의 시답잖은 대화에, 나이 든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또 쉬고 싶어지면 언제든 찾아와. 자네는 내 딸의 은인이니까."

<은인>.

그 말을 백의신은 흘려 넘긴다.

백의신은 자신이 그런 말을 들을 만한 인물이 아니라 생각했다.

십수 년 전, 자신의 손에 심장 수술을 받은 꼬맹이가 어른이 될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본인이 집도한 수백 건이 넘는 수술 중 하나일 뿐, 백의신은 그런 과거의 일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나저나 백 선생, 한국 돌아가면 뭐부터 할 거야?"

"일단 과일부터 먹고 생각해 보려고."

"과일?"

"미국 배는 영 맛이 없어서. 그동안 고마웠네."

그 말을 남긴 채, 백의신은 터미널 안쪽으로 걸어갔다.

제대로 된 인사도 없는 작별이었다.

두 사람은 복잡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백 선생님, 한국 가면 결국 병원으로 돌아가시겠죠?"

재클린의 말에, 남자는 착잡하게 말했다.

"그래, 저 양반은 어차피 돌아갈 곳이 한 곳뿐일 거야. 평생 해 왔던 일이 하나밖에 없으니까."

의사 백의신.

그는 분명 존경스러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이기도 했다.

그는 문득 백의신의 마지막 뒷모습이 커다란 동물 같다고 생각했다.

생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 위해, 때가 되면 자신의 고향을 찾아 긴 여행을 시작하는.

* * *

달력의 페이지가 넘어간다.

항상 일정 온도가 유지되는 병원 안에 있다 보면 계절의 변화에 무뎌지게 된다.

사계절 같은 옷을 입고 근무하는 인턴들까지 있을 정도니까.

그런데, 병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어느 날부터 외투를 걸치기 시작했다.

그렇다. 10월이 온 것이다.

‘자세히 보니 병원 풍경도 조금씩 변하는구나.’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푸른 나뭇잎들이 노란색과 빨간색 등 각자의 색깔로 변해 가는 시기.

우리 인턴들도 이제는 각자의 색깔에 맞는 진로를 정해야 할 때가 오고 있었다.

"중원이 형, 이제 10월인데 어디 지원할지 정했어요?"

숙소 휴게실에서 TV를 멍하니 쳐다보던 근욱이가 중원이 형에게 물었다.

"나는 마취과로 정했다. 마취과는 자유경쟁이래. 미리 어레인지 해 주는 것도 없고."

"경쟁 있어요? 그러면 인턴 성적이랑 12월에 보는 전공의시험이 중요하겠는데요?"

"그치. 뭐 지금까지 딱히 찍히거나, 망한 달은 없는 거 같은데……."

"크크. 마지막 관문이 남았네요. 10월이 성적에 들어가는 마지막 달이니까."

"응, 그래서 군기 빡세게 들어 있다!"

중원이 형이 의욕적인 제스처를 취한다.

이런 상황을 두고, 혹자는 이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사실상 인턴은 10월까지다>.

물론 10월 이후로도 채점은 이루어지지만, 레지던트 지원에 필요한 인턴 성적에는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적에 들어가는 마지막 달이다 보니, 다들 눈치 보기를 끝내고 본격적으로 지원할 과를 결정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는 너는?"

중원이 형이 되묻자 근욱이는 검지로 코를 쓸었다.

"글쎄요. 아직도 모르겠어요. 생각 중인 과는 몇 개 있긴 한데……. 모교로 돌아갈까 생각도 가끔 들어요."

"왜 인마, 같이 레지던트 하면서 새벽에 축구도 보고 해야지!"

"음……."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럴 만도 하다.

인생의 방향성 중 하나가 결정되는 순간이니까.

평소에 큰 고민이 없어 보이는 근욱이지만, 그래도 지금만큼은 생각이 많을 수밖에 없다.

"너 서져리(surgery, 수술)과 관심 있다고 안 했었냐? 내가 환자 기가 막히게 마취시켜 줄게. 나랑 수술방에서 콜라보 한번 하자!"

"크크. 누가 보면 우리 둘이 연국대병원 교수 되는 줄 알겠어요."

"잘 생각해 봐. 너 모교로 돌아갈 거면 연국대까지 와서 인턴 한 게 의미가 없지. 너 여기 왜 지원했었는데?"

진지한 질문에, 근욱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제 와서 솔직히 말하자면, 홍보 책자에 여자 선생님들이 너무 이쁘더라고요."

"……."

인생을 돌이켜 보면, 생각지도 못한 계기로 인생의 진로를 결정하기도 한다.

내가 백의신 다큐멘터리를 우연히 본 것처럼.

또는, 물리 선생님이 싫어서 문과를 고르는 고1 학생들처럼.

의외로 사소한 이유들이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이번 10월에, 우리 인턴들은 각자의 인생에서 어떤 분기점을 겪게 될까?

그리고, 올해 내 인턴생활은 어떤 마무리를 향해 나아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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