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라이벌 매치(7)
‘변규남 선생님이 천사연 선생님보다 위라니?’
나는 화면에 출력된 16강 결과에 놀라고 말았다.
1위가 송유주.
2위가 변규남.
3위가 천사연이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내가 알던 변규남 선생의 게으른 모습과는 상반된 결과였다.
‘분명 내 기억으로는…….’
아침에 지각은 기본.
회진 중에 꾸벅꾸벅 졸기까지 하던 변 선생 아니었던가.
물론 최근에는 꽤 성실해졌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의 반전을 보여 줄 줄은 몰랐다.
역시 사람은 단면만 봐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자~ 그럼 8강을 시작하기에 앞서 선생님들의 각오를 한마디씩 들어 볼까요?>
곧 변규남 선생에게 마이크가 쥐어졌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슬램덩크 만화에서 강백호가 농구를 언제부터 잘하게 되었을까요?"
<예?>
"그건 바로, 머리를 밀었을 때입니다."
처억.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반삭 머리를 가리킨다.
진지한 표정으로 뭘 해도 웃긴 사람이 있는데, 변규남 선생이 딱 그런 타입이었다.
홀에 웃음소리가 번졌고, 나도 변 선생의 너스레에 웃고 말았다.
<아하, 그럼 머리를 민 것은 의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무슨 소리야?
그 머리는 나랑 내기해서 밀어 버린 거였으면서.
하지만 단순한 허언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어쩌면 스포츠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대역전극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오늘 제가 챔피언 송유주 선생님을 꺾고 반드시 우승해 보겠습니다! 외과 파이팅!"
오오―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당연히 송유주의 우승으로 여겨지고 있던 본선이, 어쩌면 다른 결과로 이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한이 형, 어서 앉아요. 이제 8강 시작해요."
자리로 돌아가자 류명인이 나를 반겼다.
조진기는 아까부터 어딜 갔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아까 16강 봤어요? 송유주 선생님 장난 아니던데."
"A조 송유주 선생님 하시는 거는 보고 잠깐 나갔다 왔어. 제일 먼저 끝내고 자리에 돌아가시던데?"
"와아, 진짜 빠르고 정확했어요. 근데 웬만한 선생님들보다는 우리가 더 잘하는 것 같아요. 그쵸?"
류명인이 목소리를 낮추어 키득댔다.
"또 또 쌉소리 시작이다. 레지던트 선생님들 미션이 우리보다 더 어렵잖아, 명인아."
앞선 16강 종목은 ‘구슬 옮기기’.
3분 동안 15개의 구슬 모두를 받침대에 올려놓아야 하는 종목이었다.
구슬이 동그랗고 미끄럽게 생긴 게, 씨앗보다 훨씬 더 컨트롤하기 어려워 보였다.
게다가 구슬을 올려놓아야 하는 받침대는 좁고 그 높이가 제각각.
다른 구슬을 옮기다가, 기존에 받침대에 올려놓았던 구슬이 떨어지지 않을지 조심하기까지 해야 하는 종목이었다.
‘이걸 송유주 선생님은 1분 40초에 끊었다고?’
모니터에 떠 있는 16강 결과 타임랩을 보면서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 그럼 이번 미션을 소개합니다!>
8강 종목은 ‘봉합하기’.
3분 동안 흉강경/복강경 기구를 이용해서 수처(suture, 봉합)를 수행하는 종목이었다.
얼마나 많이 꿰맸는지도 중요하지만, 루스닝(loosening, 봉합이 느슨하게 풀리는 현상) 없이 완벽하게 되었는지가 관건이다.
"이 수처야말로 양손의 조화가 중요한…… 복강경/흉강경 술기의 핵심이자, 요샛말로 끝판왕입니다. 모두들 진지하게 임해 주시길 바랍니다."
교수가 마이크를 들고 강조했다.
실제 수술에서도 흉강경/복강경 기구를 사용하여 봉합을 시행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폐뿐만 아니라 기관지, 횡격막의 봉합 역시 흉강경 기구로 시행되는 경우가 많다고 예전 흉부외과에서 들었다.
‘재밌겠다.’
기구로 봉합이라니.
손으로 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기구를 쓰는 건 대체 얼마나 어려울까?
정말로 그래스퍼를 자신의 손처럼 사용할 줄 알아야 가능한 작업일 것이다.
<자, 시작!>
나는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송유주 선생님의 화면에만 집중했다.
역시 놀라운 실력.
조금의 버벅거림도 없다.
마치 자동화된 기계의 움직임을 보고 있는 것 같달까?
날카로운 니들(needle, 바늘)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간격으로 실리콘 패드를 통과한다.
봉합사가 정갈하게 교차하며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마치 송유주 선생이 직접 손으로 수처를 하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을까?
나도 저런 수준에 오르려면 더욱 정진해야겠지.
"멋있다……."
문득 류명인이 홀린 듯 말했다.
그 역시 나처럼 송유주의 개인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형, 막상 술기 대회 참여해 보니까 써저리(surgery, 수술) 과(科)도 매력 있는 것 같아요."
류명인은 그렇게 말하며 눈을 빛냈다.
안 그래도 송유주 선생님에게 반해 있는 녀석인지라, 술기 솜씨를 보고 거듭 반해 버린 모양이다.
뭐, 녀석이 어디로 가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설마 내가 가는 과로 같이 가지는 않겠지?
나는 앞으로 레지던트 4년 동안 류명인과 같은 과에서 동고동락할 미래를 잠깐 생각했다.
‘에이, 설마…….’
그런 대참사가 일어나지는 않겠지?
잠깐이지만 오한이 느껴져, 금세 머리를 저었다.
* * *
이날, 정오까지 이어진 술기 대회의 마지막은 모두에게 꽤 깊은 인상을 남겼다.
<자, 그럼 결승에 오른 최후의 4인 앞으로 나와 주세요!>
―흉부외과 송유주
―외과 변규남
―산부인과 천사연
―비뇨기과 주요한
공교롭게도 참여한 과별로 골고루 한 명씩 남게 되었다.
물론 송유주가 앞선 경쟁에서 1등이었지만, 결승에 이르러 여태까지의 점수는 초기화되었다.
결국 마지막에 웃는 자가 최후의 승자.
특히 천사연은 이번에야말로 송유주를 이기겠다는 눈빛을 불태우고 있었다.
<4강이 곧 결승입니다. 그럼 마지막 문제를 공개합니다!>
[최종 과제]
다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결승에 오른 이상, 여러분은 이미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손으로, 가장 아름답고 창의적인 모양을 만들어 주세요.
―수행 과제 : 복강경/흉강경 기계 안에 있는 종이를 잘라서 자유로운 모양 만들기
―평가 기준 : 완성도 / 창의력
―시간제한 : 5분
"창의력 점수?"
"뭐야, 저런 게 있었나?"
"올해부터 룰이 좀 바뀐다더니 저거였나 보네."
다들 웅성댄다.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이건 노골적인 송유주 저격이라는 것을.
마동섭은 난감한 표정으로 볼을 감싸 쥐었다.
"아잇 씨…… 큰일 났네. 유주는 창의적인 미션에는 쥐약일 것 같은데……."
송유주는 흡사 로봇이다.
정해진 임무를 정확히 수행하는 데는 이길 자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창의력이라니?
이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평가 기준이었다.
곧 교수에게로 마이크가 넘어간다.
"올해 문제를 내기 전 고민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1회와 2회 때, 연속으로 압도적인 성적을 기록한 선생님이 있었기 때문에……."
교수는 송유주를 힐긋 보더니 장난스럽게 말했다.
"……1등 한 사람이 계속해서 1등을 하면 재미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올해는 변형을 해 보았습니다."
물론 근거가 없는 미션은 아니었다.
수술을 하는 의사에게는 창의력도 만만치 않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환자의 아나토미(anatomy, 해부학적 구조)는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항상 정해진 규격대로만 수술이 진행될 수는 없는 법.
다양한 상황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것 또한 의사의 덕목이라는 것이다.
<주어진 시간은 5분입니다. 아무리 빨리 끝낸다 해도 추가 점수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 또한 송유주에게 유리하지 않은 항목이었다.
속도 경쟁이 아니다.
즉 다른 세 명에게도 충분한 여유시간이 주어진 상태.
송유주의 강점을 여러모로 없애 버린 절묘한 과제였다.
‘이번만큼은 우승이 쉽지 않겠는데……?’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인턴 자리에 앉아 지켜보는 신선한도.
응원봉을 쥔 마동섭과 안경식도.
한편, 정작 송유주의 표정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포커페이스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무도 모른다.
속으로는 내심 당황하고 있을지, 아니면 계획이 있을지.
<자, 바로 시작합니다. 3, 2, 1, 스타트!>
타이머가 켜진다.
5분의 시간이 쏜살같이 줄어든다.
생각할 시간도 잠시, 레지던트들은 바쁘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한편, 대회의 재미를 더하기 위해 카메라는 블라인드 처리되었다.
즉 과정을 볼 수 없고 오직 결과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미션도 재밌네요."
"궁금하네. 다들 어떤 창의력을 발휘할지……."
교수들은 기대 어린 눈빛이다.
하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다.
정작 마음속으로는 각자의 과를 응원하는 마음이다.
‘힘내라 규남아!’
변 선생을 응원하는 외과 엄서용 교수.
‘어휴, 다들 용쓴다 용써. 그래 봤자 송유주가 1등할 겁니다!’
확신을 가진 흉부외과 허준임 교수.
등등…….
각자의 생각이 교차되는 가운데, 타이머가 줄어든다.
그런데, 송유주의 양손에는 그래스퍼만이 쥐어져 있었다.
가위로 잘라서 모양을 만들어야 하는데, 초반에는 가위를 사용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어라? 송유주 선생님, 좀 특이하게 진행하시는 것 같은데…….’
신선한은 그런 송유주의 도구 선택을 주의 깊게 눈여겨보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무언가 남다른 과정을 진행하고 있다는 것을.
곧 송유주는 오른손에 쥔 도구를 그래스퍼에서 엔도스코픽 시져(endoscopic scissor, 복강경용 가위)로 바꾼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후반작업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삐익―
종료 시각이 알려지면서 레지던트들은 손을 뗀다.
<자, 시간이 종료됐습니다! 이제 한 명씩 확인할 텐데요, 제가 미술관의 도슨트가 되어 여러분들께 예술 작품을 하나씩 보여 드릴 겁니다.>
홍보팀장이 장난스럽게 운을 띄운다.
가장 먼저 비뇨기과 주요한의 종이를 비추는 카메라가 켜진다.
<선생님. 이건 뭘 표현한 거죠?>
"이건 저희 과의 프라이드를 담아 제작해 보았습니다."
<아~ 자세히 보니 U R O! 비뇨기과의 약자였군요!>
오올~
비로소 작품 의도를 깨달은 레지던트들이 환호한다.
꽤 멋들어진 이탤릭체 폰트다.
그런데 가운데 R 부분이 약간 뭉개져 있어서 쉽게 알아보기 힘들었다.
교수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은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 좋습니다! 시작부터 아주 좋군요. 다음은 우리 산부인과 천사연 선생님의 작품을 보겠습니다.>
파앗!
화면이 켜진다.
곧 모두들 혀를 내둘렀다.
천사연이 만든 것은 무려 연국대병원의 로고였다.
"저는 우리 연국대병원의 프라이드를 담아 제작해 보았습니다."
천사연이 한 수 위였다.
판정승!
로고의 완성도 자체도 제법 뛰어났다.
더군다나, 심사를 맡은 교수들이 특히 좋아할 만한 주제 선정이었기에 반응이 더욱 좋았다.
<아~ 소속된 병원을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한 작품! 모두들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모두의 박수를 받는 가운데, 여태까지는 천사연이 유력해 보였다.
과연 그다음은?
이윽고 변규남의 작품이 공개되었다.
오오~
화면이 켜짐과 동시에, 모두들 감탄했다.
꽤 잘 만들어진 사람의 상반신 실루엣이었다.
매끈한 두상에 옆머리가 뻗쳐 있다.
<이건 뭐죠? 게임에 나오는 악당 캐릭터 같기도 하고…….>
"저희 교수님입니다."
<악, 교수님이었군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폭소가 터진다.
자세히 보니 특유의 머리스타일을 과장되게 표현하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엄서용 교수도 허허허 하고 웃고 말았다.
짧은 시간 안에 사람의 형상을 오려 낸 것은 주목할 만한 실력이었다.
게다가 유머러스함까지!
변규남의 작품 역시 만만치 않은 점수를 얻는 순간이었다.
<아, 점점 흥미진진해집니다. 우열을 가리기가 쉽지 않은데요. 그럼 이제 마지막 순서로 넘어가 볼까요?>
가장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주목되는 가운데, 사회자가 옆으로 이동하며 외쳤다.
<2연속 챔피언 송유주 선생님의 화면을 공개합니다!>
파앗―
송유주의 화면이 켜진다.
교수들은 어리둥절하게 서로를 쳐다보았다.
……저게 뭐지?
레지던트들도 일제히 고개를 갸웃거린다.
예상치 못한 결과물에, 사회자도 좀처럼 감을 잡지 못하고 말을 더듬거렸다.
<어…… 잠깐만요. 이게 뭐죠? 송유주 선생님, 제대로 하신 것 맞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