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라이벌 매치(6)
‘이렇게 빨리?’
다들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누구일까?
가장 먼저 끝낸 건 의외로 위풍당당한 조진기였다.
시작한 지 1분 만에 완료했고, 10초당 주어지는 추가 점수 6점을 획득했다.
그의 표정에는 전쟁을 마치고 온 개선장군 같은 의기양양함이 느껴진다.
"오, 예상보다 빠른 친구가 있네요."
"먼저 볼까요?"
곧 조진기가 자른 종이가 심사위원들이 있는 테이블로 옮겨진다.
종이를 옮기던 사회자는 고개를 갸우뚱했고, 결과물을 확인한 교수들의 얼굴에 일제히 물음표가 뜬다.
"……이게 뭐야?"
개판 오 분 전이다.
전체적인 모양은 오각형인지 타원형인지조차 헷갈렸다. 오각형의 각 변들은 직선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괴상한 모양.
게다가 조진기의 종이는 너덜너덜했다.
왼손의 그래스퍼로 종이를 잡을 때 얼마나 힘이 들어간 건지, 그래스퍼로 잡은 부위는 구멍이 날 정도다.
<아…… 이게 뭔가요? 지나치게 와일드한 것 아닌지? 야생의 숨결이 느껴지는 작업물이군요.>
심사위원들의 당황스러운 표정에, 사회자도 조진기의 작업물을 애써 포장하느라 힘들어했다.
역시 인턴은 인턴인 것일까?
복강경/흉강경 기구를 자유자재로 다루기에 인턴은 아직 경험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게 어설프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끝났습니다."
그다음으로 완료 선언을 한 건 류명인.
23초를 남기고 오각형 자르기를 완료하고 추가 점수 2점을 획득한다.
얼핏 보기에도 모양이 가지런하다.
류명인의 작업물을 보고 나서, 어두워져 있었던 교수들의 표정도 다시 밝아진다.
정확도 점수에서 얼마나 높은 점수를 받을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자, 이제 하나둘씩 미션을 완료하고 있습니다! 남은 시간은 20초!>
그리고 몇 초 뒤.
신선한이 완료하면서 추가 점수 1점을 획득한다.
다른 인턴들도 미처 자르지 못한 종이를 붙잡고 서둘러 미션을 완료한다.
<시간 종료!>
삐익―
2분의 타이머가 끝난다.
각 참가자들의 결과물은 이름이 붙여진 채 심사위원 교수들의 앞으로 향한다.
이제 모든 미션이 끝났고 점수 발표만이 남았다.
"에…… 심사에 앞서서, 일단 참가자 여러분들께 한 말씀 드립니다."
교수 한 명이 마이크를 잡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본 대회는 어디까지나 실전 연습입니다. 예능 대회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엄연히 의사의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교수의 설명이 이어진다.
가령 흉강경으로 폐암 수술을 할 때, 환자의 림프노드(lymph node, 임파선)을 떼어 내는 작업은 고도의 세밀함이 필요하다.
왼손으로 림프노드를 쥐고, 오른손으로 주위 소프트 티슈(soft tissue, 연부조직)를 자르고 태우면서 정확히 분리를 해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정확히 분리해 내지 못한다면?
남아 있는 암 조직 때문에 암이 재발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그 수술은 실패한 수술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1mm 단위의 섬세한 작업이 필요하다.
"그리고, 왼손의 중요성은……."
왼손의 그래스퍼로 쥐고 있던 림프노드를 너무 세게 눌러 림프노드가 으깨져 버린다면?
으깨져서 가루가 된 암 조직들이 흉강 안으로 퍼질 수 있다.
수술을 통해서 환자에게 해를 가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더니 교수는 조진기의 종이를 들어 올렸다.
"다시 말해, 환자의 림프노드(lymph node, 임파선)를 이렇게 으깨 버리면서 잘라 버리면 큰일 난다는 거죠. 앞으로 수술을 이렇게 하면 안 되겠죠?"
와하하―
강당에 웃음이 번진다.
조진기는 얼굴이 빨간무처럼 벌게졌다.
"물론 인턴이니만큼, 앞으로 발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교수가 인턴임을 감안한 추가 코멘트를 해 주었지만, 조진기는 괜히 서둘렀다가 본전도 못 찾은 꼴이 되었다.
대회에 괜히 나왔나 뒤늦게 후회해 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런데 교수의 말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그런데 조금 전 1라운드 비디오를 보니…… 5번 조진기 선생님 씨앗 개수가 좀 이상하더라고요. 분명 손으로 줍다가 완료 개수가 몇 개 늘어난 것 같던데."
싸아―
강당이 얼어붙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하 호호 웃어넘기는 분위기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단순히 <어설픈 것>과 <부정행위>는 이야기가 전혀 다르니까.
조진기의 창백해진 얼굴로 수십 개의 싸늘한 시선들이 화살처럼 꽂힌다.
"속도, 정확도, 숙련도…… 그런 것들도 다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우선시되어야 할 것은 양심 아니겠습니까?"
교수의 정론에 조진기는 할 말을 잃은 채 어깨를 움츠렸다.
"뭐 단순한 실수였다고 믿어 보겠지만, 일단 5번 선생님은 실격패입니다."
"예……."
"크풉."
옆에 있던 류명인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매로 입을 가린다.
더 떨어질 곳도 없었지만, 이번 사건으로 확실히 조진기의 평판은 나락으로 찌그러지고 말았다.
"그럼 3라운드 심사를 시작할 동안 잠시 기다려 주시길 바랍니다."
곧 교수들의 심사가 이어진다.
여러 말들을 주고받지만, 보는 눈은 비슷한지라 대체로 의견이 일치했다.
애초에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쯧, 모서리가 완전히 날아가 버렸네요."
"못 쓰겠는데?"
"여기는 절단면이 나쁘지 않네요. 시간이 없어서 다른 면들은 대충 마무리한 모양이지만."
교수들의 눈은 깐깐할 수밖에 없었다.
섬세한 조작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환자의 몸에 칼을 대는 일은 철두철미함이 요구되며, 이 평가 기준은 인턴이라 해도 예외는 없다.
그런 잣대로 평가한 결과, 15점 만점에 12점을 넘기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때, 문득 교수들이 한 종이를 보고 놀랐다.
"이것 좀 보세요."
"와, 대단한데?"
"이건 자 대고 자른 거 아니야?"
교수들의 놀란 시선이 모여들었다.
엔도스코픽 시저(endoscopic scissor)의 칼날은 약간 휘어진 커브드(curved) 형태이다.
이를 사용해서 완벽한 일자로 자르기란 여간 쉽지 않은 법.
그런데도 눈앞의 결과물은 놀랍도록 반듯한 모양을 가지고 있었다.
"인턴이 제법이네요."
"어떻게 이렇게 잘랐지?"
"이 정도면 점수는……."
곧 교수들이 감탄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평가를 완료한다.
<자, 드디어 교수님들의 심사가 끝났습니다!>
긴장되는 순간.
인턴과 레지던트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인다.
두구두구―
홍보팀장은 스피커로 북소리가 나는 BGM을 재생한다.
곧 화면 위로 3라운드의 점수가 발표된다.
[3라운드 순위]
1위 : 신선한 21
2위 : 류명인 18
3위 : 나유진 17
3위 : 손예리 17
…….
"와아!"
홀 안에 탄성이 울려 퍼진다.
또다시 1등, 그것도 무려 3점 차.
게다가 속도도 그리 빠르지 않았는데?
모두 놀랄 만한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곧 교수가 다시 마이크를 잡는다.
"1위를 한 신선한 선생님의 세밀함이 무척 놀라웠고…… 엄격한 기준으로 평가해도 흠잡을 곳이 없었습니다. 물론 다른 인턴 선생님들의 실력도 아주 인상 깊게 잘 봤습니다."
교수의 코멘트로 심사평이 마무리되었다.
사회자는 곧 지체 없이 인턴 리그의 우승자를 발표한다.
<오늘 인턴 리그의 우승자는…… 신선한 선생님, 그리고 류명인 선생님. 공동 1등입니다!>
모두의 박수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단상 위로 호출된다.
류명인의 표정은 떨떠름하다.
왠지 1등을 해도 1등을 한 것 같지가 않달까.
마지막에 두 번이나 연속으로 추월당했기 때문에 타격이 심한 듯하다.
"와 씨, 아깝다. 선한 쌤이 1라운드 전에 한 번만 만져 봤어도 혼자 1등 먹는 건데!"
"뭐, 류명인도 잘했으니까."
"그건 그렇지만요."
안경식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신다.
한편, 마동섭은 뿌듯한 표정이다.
역시 내가 사람을 제대로 봤군.
너는 흉부외과 꼭 와라!
안 오면 납치해서라도 끌고 온다!
불타는 눈빛으로 신선한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온갖 흉계를 꾸미는 마동섭이었다.
<아…… 그런데 준비된 상품은 하나뿐인데 어떡하죠?>
홍보팀장이 작은 무선 이어폰 박스를 들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뭐라 말하기 전에 선한의 입이 열렸다.
"제가 양보하겠습니다."
꽁해져 있던 명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선한은 이미 보상을 받은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상품에 혹했었지만, 복강경/흉강경 기구를 사용하는 경험을 쌓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재밌었다.
송유주 선생의 가르침 이후, 손과 기구가 마치 하나가 된 것처럼 움직일 때의 느낌.
그것은 선한에게 더없이 짜릿한 경험이었다.
<아~ 양보하는 모습 보기 좋습니다. 상품 두 개가 가능한지는 제가 한번 알아볼게요.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반반씩 가져도 되는데."
"뭔 소리야."
"콩 한 쪽도 나누란 말이 있잖아요. 형이랑 저랑 한 쪽씩 하고 다니면……."
"너나 실컷 해라."
선한은 가볍게 명인의 뻘소리를 차단했다.
교수들과 기념사진 몇 장을 찍고, 두 사람은 함께 제자리로 돌아왔다.
"근데 어떻게 그게 가능해요?"
"뭐가?"
"저는 숙달되는 데 며칠 걸렸단 말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아침까지만 해도 씨앗도 제대로 못 잡고 흘렸으면서……."
류명인이 진심으로 궁금한 듯 물었다.
비록 자존심은 상했지만, 그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경외감이 더 큰 듯했다.
그런 마음을 숨기지 않는 것을 보니, 어찌 보면 순수한 면모도 있는 성격이었다.
신선한은 대수롭지 않게 흘려 넘기듯 말했다.
"너도 가락시장에서 어릴 때부터 회 썰고 자라면 그렇게 돼."
류명인의 얼굴에 물음표가 떴다.
정말 이상한 형이다.
다시 한번 그렇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럼 잠시 후 레지던트들의 경연 대회가 시작되겠습니다. 참가자들은 준비하시길 바랍니다.>
"와아아!"
"외과 화이팅!"
"산부인과 힘내자!"
벌써부터 응원이 치열하다.
인턴과는 달리, 이제부터는 정말로 소속이 있는 자들의 경쟁이니까.
그러자 안경식이 질 수 없다는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선배님. 저희도 응원해야죠! 저희는 사람도 적으니까 두 배로 힘내야 돼요."
"드디어 이걸 꺼낼 차례인가? 흐흐흐."
찌익―
마동섭은 비장한 표정으로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흡사 야구 배트나 칼이라도 꺼낼 것 같은 조폭의 기운이 느껴졌다.
곧, 가방 안에서 형형색색의 응원봉이 나왔다.
마동섭의 두꺼운 팔뚝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앙증맞은 디자인들이었다.
송유주가 흠칫하고 놀라며 물었다.
"그건 뭐야?"
"나 사촌 동생들 있잖아. 동생들한테서 아이돌 응원도구 빌려 왔지. 어때?"
"끔찍해."
"깜찍하다고?"
"너 그걸로 나 응원하면서 우윳빛깔 어쩌구 하면 죽여 버린다."
"어휴, 그런 거 나는 부끄러워서 못 해."
마동섭은 너스레를 떨며 징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야, 안경. 너도 하나 가져가. 흔들면 소리도 나오더라."
"네 선배님!"
안경식이 신나서 넙죽 응원봉을 받았다.
이럴 때는 죽이 착착 맞는 두 사람이다.
<먼저 A조부터 시작하겠습니다. A조 선생님들 나와 주세요.>
와아아!
박수 소리와 함께 레지던트들이 홀 중앙으로 향한다.
그 순간.
흉부외과 2인조는 우렁찬 목소리로 응원봉을 흔들며 외쳤다.
"우 윳 빛 깔 송 유 주!"
"잘 생 겼 다 송 유 주!"
와하하!
예상치 못한 열렬한 응원에 웃음이 홀 전체로 번졌다.
……죽여 버릴 테다.
송유주는 그렇게 무언의 눈빛으로 마동섭을 째려본 뒤 홀 중앙으로 향했다.
* * *
쏴아아―
나는 화장실에서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했기 때문에, 인턴 경기가 끝나자 나른한 피로감이 몰려온다.
"그래도 레지던트 선생님들 경기도 끝까지 봐야지."
나는 홀 입구 테이블에 있던 비스킷 하나의 포장을 뜯어 입에 넣었다.
‘뭐, 어차피 우승은 송유주 선생님이 할 것 같긴 하지만…….’
그런데 올해부터는 룰이 바뀐다고 했다.
과연 어떻게 바뀌는 걸까?
송유주 선생님의 우승을 방해할 정도의 변화일까?
궁금함을 느끼며 다시 홀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 8강 진출자들은 앞으로 나와 주시길 바랍니다!>
어라?
예상외의 인물이 선전하고 있었다.
짧은 머리. 한때 푸짐한 몸집이었지만 최근에는 비교적 홀쭉해진 실루엣.
바로 외과 변규남 선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