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라이벌 매치(3)
타닥―
나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시간은 8시 50분.
급하게 미선 누나에게 인계를 한 뒤, 대회 장소인 히포크라테스 홀에 도착했다.
‘벌써 사람들이 많네.’
웅성웅성―
홀 입구가 북적거린다.
레지던트 선생님들이 응원도구와 현수막을 들고 각자의 과를 응원하기 위해 모여 있다.
이름만 대회인 게 아니라, 정말 운동회라도 펼쳐지는 것 같은 분위기다.
막상 현장에 도착하니 은근히 긴장감이 느껴지는군.
"신선한 쌤?"
그때 누군가 내 쪽으로 다가와 물었다.
"오늘 참가하시는 인턴 맞죠?"
"예. 당직 끝나고 인계하느라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녜요. 아직 대회가 시작한 건 아니니까."
가슴에 STAFF라고 붙인 병원 직원분은 그렇게 말하더니 시계를 힐긋 바라보았다.
"근데 대회 전까지 시간이 10분도 없는데…… 괜찮겠어요? 기구 한 번 만져 볼 시간밖에 없겠는데?"
원래는 8시 반부터 9시까지, 30분 동안 연습할 시간을 준다고 했다.
복강경/흉강경에 생소할 인턴들을 위한 주최 측의 배려였다.
그런데 그 소중한 시간 중 20분이나 놓쳐 버린 것이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일이 바빴으니까.
"일단 남은 시간 동안이라도 연습해 보겠습니다."
"그래요, 얼른 와요!"
그는 나를 홀 안쪽으로 안내했다.
<자, 행사가 시작하기 전까지 10분 남았습니다~ 인턴 선생님들은 마지막 벼락치기 연습을 하시면 될 것 같고요. 지금 들어오시는 분들은 과별로 좌석이 정해져 있으니, 거기에 맞춰서 앉아 주시면 되겠습니다.>
사회자를 맡은 홍보팀장님이 마이크로 시간을 알리고 있었다.
홀 가운데에 놓여 있는 복강경/흉강경 기계들.
그리고 그 앞에는 몇몇 인턴들이 복강경 기계들을 만지작거리느라 정신이 없다.
참여 인원은 대략 10명 남짓.
빠른 눈길로 멤버들을 슥 살펴보니…….
‘역시 제일 눈에 띄는 건 이놈이네.’
인턴 류명인.
1등 중독자.
일찌감치 와서 열의를 불태우고 있다.
본인이 공부도 잘하고 일도 잘하고 손도 좋다고 생각하는 놈이니, 증명하려 나왔겠지.
오늘 인턴 리그의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저기 보이는 건 인턴 손예리.
말을 섞어 본 적은 없지만, 명성은 알고 있다.
블러드 컬쳐(blood culture, 혈액배양검사)나 각종 천자(―centesis) 시술을 할 때 예리를 찾는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었다.
그만큼 혈관을 찾고, 원하는 위치에 구멍을 뚫어서 흉수, 복수, 척수액을 뽑는 데는 장인이라고 들었다.
‘역시 하나같이 쟁쟁한 후보들이군.’
그 외에도 이곳에 모인 인턴들은 모두 수술과에 관심이 있는 경쟁자들이었고, 그중 만만한 상대는 단 한 명도 없었…….
‘잠깐.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조진기.
얘는 왜 왔을까?
녀석은 곧 죽어도 피부과를 원하고 있으니 복강경을 만질 일도 없다.
아마도 폭락 중인 본인의 평가를 어떻게든 만회하고 싶은 마음에 온 것 같다.
만약 대회에서 1등을 한다면 레지던트들 사이에서의 평판도 조금은 바뀔 테니까.
"아잇 씨X…… 더럽게 어렵네."
녀석은 작은 목소리로 욕을 섞어 가며 투덜대다가 힐긋 나를 바라보았다.
"뭘 봐 인마. 너라고 잘할 것 같냐?"
나는 녀석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때마침 비어 있는 기계 하나에 달라붙어서 연습을 시작했다.
‘다른 사람 신경 쓸 때가 아니지. 시간이 별로 없으니 내 연습에 집중하자.’
나는 복강경용 그래스퍼(laparoscopic grasper, 기다란 스틱 끝에 집게가 달려 있는 수술기구)를 손에 쥐었다.
그래스퍼가 무엇이냐고?
자, 생각해 보자.
복부/흉부에 대한 외과 수술이라 하면 보통은 배나 가슴을 크게 여는 장면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최근에 시행되는 수술을 보면 꼭 그런 것만 있는 게 아니다.
수술은 다음 두 가지로 나뉜다.
(1) 크게 찢는 수술.
(개복/개흉, Open surgery)
(2) 작게 찢는 수술.
(최소침습수술, Minimally invasive surgery) ‘크게 절개를 하는 수술’에서는, 손끝으로 내가 만지고 있는 장기(臟器)를 느끼면서 수술할 수 있다.
하지만 ‘작게 절개하는 수술’의 경우.
일단 내 <눈>은 복강/흉강 안에 들어가는 카메라가 대신한다.
그리고 작은 구멍을 통해 환자의 몸속으로 들어가는, 이 그래스퍼가 내 <손>을 대신하게 된다.
만약 힘 조절을 잘못해서 이 수술기구로 폐를 뚫거나, 장을 뚫어 버린다면?
상상도 하기 싫은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기구를 마치 내 손처럼 다루는 연습이 당연히 필요하다.
즉, 이 그래스퍼는 나에게 제2의 손가락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눈으로는 모니터를 보면서, 이걸로 엄청나게 섬세한 작업을 빠르게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지…….’
오늘 인턴 경연의 1라운드 종목은 미리 정해져 있었다.
<씨앗 옮기기>.
그래스퍼 두 개를 양손에 쥔 채, 작은 박스 안에 있는 씨앗을 다른 박스로 옮기는 일이었다.
속도. 그리고 정확성.
두 가지 소양을 모두 필요로 하는 미션이다.
정확히 다른 박스에 옮기는 것도 중요했지만, 결국 시간 기록인 만큼 빠르게 옮겨야 한다.
"일단 해 보자."
처음 만져 보는 수술기구인 그래스퍼.
역시나 이 기구는 조작하기 쉽지 않았다.
산부인과 수술 어시스트를 할 때 몇 번 어깨너머로 보기는 했지만, 직접 하려니 어려웠다.
기다란 스틱 끝에 달려 있는 집게는 내 마음같이 움직이지 않는다.
눈을 모니터에 고정한 채 집게의 끝으로 씨앗을 살며시 잡아 옮기려는 순간.
피용―
집게 끝에 걸려 있던 씨앗은 힘 조절에 실패하면서 멀리 달아나 버렸다.
실제 시합에서 이렇게 날려 버린 씨앗을 다시 줍고, 박스 위에 올려놓다 보면 시간은 금세 지나가 버릴 것이다.
‘이러면 안 돼. 타임아웃이 있는 경쟁에서 시간 낭비는 필패니까.’
뭐든 처음은 어렵다.
마치 자전거를 처음 탈 때 중심을 잡기조차 힘든 것처럼.
하지만 가락시장 횟집 막내아들의 자존심이 있지, 이대로 쩔쩔매기만 할 생각은 없다.
‘손으로 하는 건 뭐든 자신 있어.’
문제는 시간.
고작 10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이 도구를 손에 익히는 건 쉽지 않다.
내가 그렇게 집중하고 있을 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형, 그렇게 해 가지고 3분 안에 씨앗 다 옮길 수 있겠어요?"
누군가 떨어진 씨앗을 주워 내 박스 안에 집어넣었다.
바로 옆자리의 류명인이었다.
녀석은 꽤 여유로운 말투로 말을 걸었다.
"그러게 왜 늦게 왔어요? 1분이라도 더 연습해야 할 텐데."
"너야말로 말 걸 시간 있어?"
"저는 이미 마스터했거든요."
녀석은 보란 듯이 내 옆의 기계로 가서 그래스퍼를 양손에 쥐었다.
그러고는 씨앗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잘했다.
얼핏 보아도 복강경/흉강경 수술기구를 처음 만져 봤다고는 믿기 힘들었다.
기구들을 다루는 움직임에서 익숙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저 지금 외과 돌잖아요. 선배들한테 부탁해서 몇 시간 동안 연습 좀 했죠. 선행학습이 필수인 시대니까."
와, 그건 몰랐다.
반칙 아니냐?
하지만 류명인을 탓할 생각은 없다.
미리 연습하면 안 된다는 룰은 없었으니, 녀석은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한 것일 테니까.
<자, 3분 남았습니다~!>
‘이렇게는 안 되겠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슥―
나는 문득 씨앗 옮기기를 멈추었다.
그리고, 그래스퍼를 과감히 인체모형에서 빼냈다.
"형, 뭐 하는 거예요? 지금 1분 1초가 아깝다니까요. 설마 자포자기하는 거예요?"
나는 깐죽거리는 녀석을 무시하고 그래스퍼라는 도구 자체에 집중했다.
첫째, 집게 집기.
둘째, 360도 회전.
이렇게 두 개의 레버를 조작해서 두 가지 동작이 가능한 것이 그래스퍼의 특징이었다.
‘내가 레버를 이 정도로 움직이면…….’
나는 집게 끝에 한쪽 손가락을 대고 감각을 집중했다.
까닥, 까닥―
레버의 움직임에 따라 섬세하게 집게가 반응하며 움직였다.
지금은 이 도구와 친해지는 것이 먼저다.
내가 얼마큼의 신호를 주면, 이 도구가 얼마큼의 반응을 하는지…….
그런 감각들을 체득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한편, 류명인은 그런 나를 신기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자, 이제 시간이 끝났습니다!>
10분의 연습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 버렸다.
우리 인턴들은 그래스퍼를 내려놓고 홀 오른쪽 구석의 자리로 돌아와서 앉았다.
자리에 앉아 홀을 돌아보니, 사람들이 많았다.
15분 만에 자리는 거의 만석이 되고 있었고, 각 과에서 회진 일정이 끝난 무리들이 하나둘씩 강당으로 들어오면서 강당은 더욱 북적였다.
<그럼 메인이벤트 진행에 앞서서 교육인재개발실장님의 말씀이…….>
저 멀리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흉부외과, 산부인과, 비뇨기과, 외과 레지던트 선생님들이었다.
또한 응원하기 위해 온 펠로우 선생님들과 간호사 선생님 몇몇도 보인다.
히포크라테스 홀이 작은 곳이 아닌데, 꽉 찬 느낌이 든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곧 교육인재개발실장 이주흥 교수님의 멘트로 대회가 시작되었다.
<이번 대회는 의료진의 술기 향상 독려와 술기 증진을 응원하기 위한 취지로 기획된 대회로…….>
약간은 지루할 수도 있는 개회사가 끝나자마자, 사회를 맡은 홍보팀장님이 마이크를 들고 외친다.
<자, 여러분의 뜨거운 함성과 함께 복강경 술기 대회를 시자아아악 합니다~!>
그의 샤우팅과 함께, 대회에 참여한 각 과의 의료진과 이를 응원하기 위해 이곳에 모인 사람들의 환호성이 강당 안에 울려 퍼진다.
박진감 넘치는 스포츠 BGM이 스피커에서 뿜어져 나온다.
강당 맨 끝의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우리 인턴들은 뜻밖의 열기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심지어 몇몇은 응원 플래카드를 준비해 왔다.
"힘내라 외과! 할 수 있다 외과!"
"어차피 우승은 흉부외과!"
"산부인과 파이팅!"
"웃을 때 잘하자! 비뇨기과 파이팅!"
각기 개성 넘치는 응원 멘트로 활기가 돌기 시작한다.
"와아…… 이 정도로 열심히 참여하는 대회인 줄 몰랐네요."
옆에서 류명인이 흥분된다는 듯 작게 중얼거렸다.
홍보팀장님은 대회의 본선에 앞서 오프닝 매치로 예정되어 있는, 인턴 자유경쟁 부분을 설명했다.
<인턴 자유경쟁 부분은 총 3라운드로 진행되고, 각 라운드별로 점수를 매겨서 1명의 우승자에게 상품을 줄 예정입니다. 그럼 오늘의 인턴들을 소개합니다!>
BGM이 바뀐다.
마치 프로레슬러가 입장하는 듯한 웅장한 음악.
사회자의 호명과 함께, 우리는 한 명씩 걸어 나갔다.
‘이 긴장감은 뭐지?’
홀 가운데로 걸어가는데, 이건 인턴생활을 하면서 처음 느껴 보는 긴장감이었다.
교수님들뿐만 아니라, 레지던트 선생님들과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선한 화이팅!"
안경식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인턴 화이팅!"
마동섭 선생님의 굵은 목소리도 들린다.
여러 사람들의 몇 마디 환호성을 들으며, 우리는 홀 가운데에 놓여 있는 복강경/흉강경 기계 앞에 섰다.
좌에는 조진기, 우에는 류명인이라니.
‘재미있겠네.’
긴장감은 곧 호승심으로 채워진다.
처음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진지하다.
오늘, 이 자리에서 꼭 우승을 하고 싶다.
의자에 앉아 양손으로 그래스퍼를 잡은 우리는 사회자의 시작 신호를 기다렸다.
<카운트다운을 시작합니다. 3, 2, 1, 스타트!>
사회를 맡은 홍보팀장님이 타이머를 눌렀고, 우리의 1라운드 씨앗 옮기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