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해피 버스데이(22)
가끔 그런 날이 있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는 날.
마치 보이지 않는 인력에 이끌리듯, 안영희는 전화기로 손을 뻗었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것은 젊은 남자 의사의 목소리였다.
"예, 제가 안영희 맞는데요…… 예? 아, 그때 그 선생님이시구나. 무슨 일이세요?"
안영희는 놀랐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전화였기 때문이다.
그 후, 짧지 않은 통화가 10분가량 이어졌다.
그동안 안영희의 표정이 시시각각 바뀐다.
이야기를 듣는 그녀의 얼굴에 온갖 다양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잠시 후.
그녀가 통화를 끊자 부엌 쪽에서 앞치마를 두른 남편이 다가와 물었다.
"누구야?"
"병원."
"병원? 무슨 일로?"
"인턴 선생님이라는데…… 교수님 회진 때 맨날 앞에 서 있던 의사 선생님 기억나?"
그렇게 말하는 아내의 눈시울이 붉다.
남편은 무언가, 아내의 심정이 변화를 겪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띠링―
곧 그녀의 핸드폰에 무언가가 도착한다.
몇 개의 의학 전문지에 등록된 리포트들.
그리고 연국대병원의 산부인과 블로그에 등록된 글도 있었다.
"선생님이 뭐라고 했는데?"
"그……."
아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처음에는 위로였다.
병원에서 아기를 잃은 것에 대한 위로.
어쩌면 환자에게는 잊고 싶은 기억일지도 모르기에, 수화기 너머 젊은 의사의 말투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그다음, 신중하게 최근 입원한 환자들의 이야기를 꺼냈다.
안영희 환자처럼 몇 번의 실패가 있었지만, 결국 건강한 아이를 출산한 환자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마지막엔, 혹시 다음 번 임신을 생각한다면 알아야만 할 여러 가지 의학적인 정보들도 알려 주었다.
"여기 봐 봐. 임신 중 관리에 신경을 많이 써서 결국에는 건강하게 아기를 낳은 경우도 있대."
"……."
"이분은 조산을 세 번이나 겪었고 나보다 나이도 많은데 성공하셨네."
그녀는 핸드폰으로 선한이 보내 준 링크를 차례로 열어 보았다.
하나같이 자궁경관무력증에 대한 선례들이었다.
몇 번의 조산으로 출산에 실패했지만 결국 건강한 아기를 가지게 된 경우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병원에서 이렇게 따로 연락도 해 주고 별일이네."
"그러니까 말야."
"근데 자기야, 마음은 알겠는데…… 우리 고민 많이 해서 결정한 거였잖아. 아이 없이도 우리 행복할 수 있다고."
남편은 걱정스레 말했다.
살면서 가끔은 놓아야 할 것들이 있다.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꿈을 포기하자고,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전화 한 통으로 아내의 마음이 조금씩 바뀌는 것 같았다.
"혹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시도해 보고 싶은 거야?"
남편이 조심스레 물었다.
거실 한쪽에는 임신과 육아에 대한 책들이 끈에 묶인 채 놓여 있다.
진작 버리려 했지만, 차마 쉽게 버리지 못했다.
사실은 남편도 같은 마음으로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다.
"잘 모르겠어. 어떻게 하고 싶은지."
"우리 이미 결정했잖아. 그날……."
"알아, 아는데."
아내의 표정이 흔들렸다.
불과 며칠 전, 아기에게 작별 인사를 하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런 슬픔을 또 겪기는 싫다.
하지만…….
"어쩌면 아직 기회가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시도해 보면……."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떨린다.
남편은 아내를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천천히 생각해 보자."
"응……."
"우리한테 아직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마음이 이어진다.
부부는 서로의 등을 위로하듯 토닥였다.
환한 햇살이 베란다를 통해 들어와 두 사람을 비추었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텅 빈 거실에 기적이 찾아와 줄지도 모른다고…….
아주 작은 희망을 가지게 되는 그들이었다.
1년 후, 그 희망이 마침내 기쁨이 되어 돌아올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이.
* * *
"휴우."
나는 전화를 끊었다.
이것으로 미래가 바뀌었을까?
잘 모르겠다.
실낱같은 가능성을 더 키우기 위해 행동했을 뿐이니까.
다만, 마지막에는 환자의 목소리가 조금 더 밝아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
작은 조약돌이 모여 물줄기를 바꾼다.
그러니 이번에도 내가 만든 변화가 꼭 좋게 작용했으면 한다.
물론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방법은 한 가지가 아니겠지만…….
아기를 간절히 원하는 부부 사이에는, 하늘이 내려 주는 선물처럼 건강한 아기들이 태어났으면 한다.
"인턴 쌤, 김윤정 산모 아기 출생신고서 작성해 주세요!"
"예!"
나는 활기차게 대답했다.
오늘도 산과에서는 생명이 태어나고 있다.
나는 마음속으로 바랐다.
해피 버스데이.
지금 태어난 아기가 건강하게 자라나기를, 한 가정의 기쁨이 되기를.
곧 세상의 빛을 보게 될 아이들, 그리고 아직 세상에 생겨나지 않은 아이들도.
#라이벌 매치(1)
9월의 끝자락.
일상이 평화롭다.
인턴생활이 시작된 후, 이 정도로 마음이 편한 적은 없었다.
노을 누나도 잘 회복하고 있고, 아기도 건강해서 걱정거리가 없다.
‘늘 병원생활이 이랬으면 좋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숙소 문을 여는데, 휴게실에서 누군가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야, 너 진심이야?"
"제 말이 틀려요?"
"하, 김근욱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실망이네!"
"중원이 형이야말로 이해가 안 되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웬일이지?
근욱이와 중원이 형이다.
두 사람이 저렇게 심각하게 투닥거리는 걸 최근에 본 적이 없는데…….
언성이 높은 걸 보니 언쟁이 제법 오랫동안 이어졌던 모양이다.
"무슨 일이에요?"
나는 얼른 싸움을 말리려 휴게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마침 잘됐다는 듯 두 사람이 나를 바라보았다.
"선한이 너 마침 잘 왔다. 솔로몬의 판결을 들어 보자!"
"좋습니다!"
졸지에 솔로몬이 된 나는 둘이 투닥거리는 이유를 말해 보라고 했다.
곧, 중원이 형의 입이 열렸다.
"호날두 vs. 메시. 누가 더 잘하냐?"
"……."
맥이 빠진다.
뭔가 했더니 축구로 싸우던 거였어?
가만 보면 이 사람들은 참 별것도 아닌 걸로 투닥거린다.
"고작 그런 걸로 싸우고 있던 거예요?"
"웃지 마라. 선한."
"그래. 우리는 진지하다."
그렇게 말하는 두 사람의 얼굴은 비장하기까지 하다.
하긴, 재밌는 주제이긴 하다.
참 원초적인 질문이다.
세상 모든 스포츠가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특히 메시와 호날두라는 이 시대의 축신(축구의 신(神))들.
이 둘의 비교, 메호대전은 끝나지 않는 논쟁거리이다.
곧 나를 설득하려는 듯, 두 사람의 갑론을박이 시작되었다.
"역대 골 수도 호날두가 더 많은 거 알죠?"
"그거 PK(페널티킥)가 많잖아. 그리고! 축구가 골 넣는 게 다냐? 메시는 플레이메이킹이랑 드리블 다 하는데."
"형, 메시는 국대(국가대표)에서 보여 준 게 없어요."
"아니…… 호날두 노쇼(No show)를 당하고도, 너는 한국인으로서 호날두를 어떻게 응원하냐?!"
둘의 투닥거림은 끝날 생각이 없다.
"둘 다 진정해요. 내가 볼 때는……."
그런데 이걸 내가 왜 진지하게 대답하려 하고 있지?
한편, 내 말은 듣지도 않고 두 사람은 더욱 열을 올린다.
"야, 너 그냥 호날두 근육이 멋있어서 그런 거 아니냐? 너처럼 근육질이라서?"
"아니, 형. 그러면 다시 태어나면 메시로 태어날래요, 호날두로 태어날래요?"
"그건……호날ㄷ…… 야, 그렇다고 호날두가 더 축구를 잘한다는 얘기는 아니지 인마!"
점점 유치해진다.
이게 과연 20대 후반과 30대 초반 의사들의 진지한 대화란 말인가?
정말 가슴이 절로 옹졸해지는 대화가 아닐 수 없었다.
"형님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들 하십니까?"
류명인이 앉는다.
녀석도 인턴생활을 겪으면서 조금 변했다.
소위 말하는 개념이 생겼다고 할까?
이제는 연장자들에게 형님, 형님 하면서 싹싹하게 굴려 한다.
곧 류명인에게도 똑같은 질문이 주어진다.
"야, 호날두랑 메시. 누가 더 잘하냐? 하나만 선택해라."
그러자 류명인이 망설임 없이 대답한다.
"둘 다 한물갔잖아요?"
……세상에.
불난 데 기름을 붓는군.
싹싹하게 굴고 뭐고, 역시 류명인은 류명인이다.
"이 자식이?"
"죽을래?"
"아, 왜요? 제가 감독이면 그 돈으로 다른 선수들 쓰죠. 예를 들면……."
류명인이 불쏘시개를 더하는 바람에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
나는 여기에서 탈출해야겠어.
얼른 복도 쪽으로 도망쳐 나오는데, 낯익은 사람이 게시판에 무언가를 붙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 했더니, 홍보팀장님이다.
"안녕하세요."
"어, 즈기야 오랜만!"
그는 테이프를 입에 문 채 나를 보며 반갑다는 듯 말했다.
참 이분은 언제 봐도 열심히 일하신다.
아마 연국대병원에서 열일하는 근로자상을 준다면 이분은 꼭 후보에 오르지 않을까?
"이 시간에 인턴 숙소까지 웬일이세요?"
"응. 내일모레 큰 대회 준비하느라."
<대회>라니?
뭔가 병원과 잘 어울리지 않는 단어 같다.
나는 궁금증이 생겨 홍보팀장님이 붙이고 있던 포스터를 바라보았다.
[제3회 천하제일 복강경 · 흉강경 술기 대회]
올해도 어김없이 최고의 손을 가린다. 정상에 설 자는 단 한 명! 더욱 재밌어진 미션, 더욱 커진 스케일, 더욱 풍성해진 상품! 연국대병원의 차세대 유망주는 누구인가?
―일자 : 9월 30일 오전 9시
―모집 : 참가를 희망하는 각 과의 전공의들
―경쟁 종목 : 복강경, 흉강경을 사용하여 정교한 작업을 수행하는 각종 미션……
"와, 이런 대회도 있어요?"
"몰랐어?"
"예, 처음 봐요."
나는 신기한 마음에 포스터를 바라보았다.
딱 봐도 재밌어 보인다.
복강경과 흉강경 (Video―assisted surgery).
카메라를 통해 복강과 흉강을 보면서, 작게 뚫린 포트를 통해 수술기구를 집어넣고 수술하는 방법을 말한다.
옛날처럼 절개를 크게 하는 방식이 아닌, 최소침습 수술(minimally invasive surgery)을 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수술 기법이다.
그런데, 이걸 대회를 열어서 레지던트들끼리 경쟁을 한다고?
"이거 우리 병원에서 꽤 유명한 이벤트야. 게다가 재작년부터 예능처럼 편집해서 인터넷에 올리고 있는데, 그때마다 꽤 반응이 좋거든."
홍보팀장님이 씩 웃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너튜브 채널에 올라가 있는 동영상이 조회수가 이례적으로 높게 나왔다고 한다.
[댓글]
―와 신기해요!
―재밌다 ㅋㅋ
―병원에서 의사들이 이런 이벤트도 하는구나 ㅋㅋㅋ 무슨 예능 프로인 줄?
―의사 선생님들이 서로 시합하면서 긴장도 하는 모습을 보니까 왠지 친숙하네요 ㅎㅎ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 주니 교수님들도 좋아하더라고. 그래서 말인데, 올해는 3회째라 판을 좀 더 키워 볼까 해."
홍보팀장은 눈을 빛내며 포스터의 아랫면을 가리켰다.
나는 미처 읽지 못한 아랫부분으로 시선을 옮겼다.
―오프닝 : 인턴 자유 경쟁
―본선 : 레지던트 토너먼트
―심사: 각 과의 교수님들
……
"인턴이 참여한다고요?"
"응. 일종의 맛보기 대회랄까? 물론 레지던트들보다는 난도를 좀 낮춰서 오프닝 매치로 진행하는 거지."
인턴 대회라.
나는 슬슬 마음이 이끌리고 있었다.
물론 인턴 중에서 복강경을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턴 잡(job)에 속하는 업무가 아니니까.
아마도, 교수님과 레지던트들 입장에서는 ‘하하하 귀엽군’ 하고 재롱 잔치 보는 것 같은 오프닝 매치가 되겠지.
하지만, 그래도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재밌겠네요."
"그치? 근데 인턴들이 생각보다 별로 참여 의사가 없더라고."
"그래요?"
"잘해 봤자 본전이고, 어버버하면서 헤매면 점수가 까질 거라 생각하나 봐."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나는 곧바로 납득했다.
물론 나야 참여하고 싶다. 안 그래도 복강경/흉강경은 한번 다뤄 보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보통 인턴들이라면 <내가 그걸 왜 해?> 하고 기피할 확률이 높겠지.
"그래서 인턴들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매력적인 상품을 걸었지."
매력적인 상품이라.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정말 본격적으로 기획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마도 5만 원짜리 백화점 상품권 한 장 정도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포스터를 확인하는데, 1등 상품을 보는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자문에 도움을 주고 계신 흉부외과 전문의 김홍선,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최재영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