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62화 (162/241)
  • #162 해피 버스데이(21)

    내 대책 없이 긍정적인 말에 송유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거 있는 말이야?"

    "아뇨. 그냥 왠지 그렇게 될 것 같아서요."

    "……이상한 놈."

    송유주는 무심하게 중얼거린 뒤 복도를 걸어 사라졌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막연한 낙관?

    아니, 확신이다.

    조금 전 내가 중력에 이끌려서 보았던 미래가 그대로 펼쳐진다면…….

    노을 누나의 출혈은 내일 즈음이면 멎게 될 테니까.

    ‘다행이야.’

    결국 미래가 달라졌다.

    내가 열심히 던진 돌 하나, 하나가 결국에는 물줄기를 바꿔 놓은 데 성공한 것이다.

    여태껏 미래를 보고 나서 이렇게 후련한 기분이 드는 건 처음이다.

    * * *

    수술 이틀째.

    정오가 다가올 무렵, 정노을은 눈을 떴다.

    "……."

    그녀는 기억을 더듬었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은 수술실의 천장.

    그 후, 밑도 끝도 없는 어둠이 눈을 덮쳤다.

    동시에, 주마등처럼 여러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의 따스한 손길, 가족들의 다정한 목소리, 처음 느꼈던 아기의 태동 등등…….

    그리운 감각들이 조금씩 흩어지며 멀어졌다.

    온몸이 나른해지고, 이대로 몸을 맡기면 편해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시는 올라올 수 없는 깊은 바닷속으로 천천히 가라앉는 느낌.

    그런데, 그때.

    알 수 없는 힘이 자신을 붙잡고 의식의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회백색 천장이었다.

    아프다…….

    배를 비롯한 온몸에 참기 힘든 통증이 느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격통이야말로 자신이 무사히 살아났다는 증거였다.

    "정노을 환자분. 정신이 들어요?"

    익숙한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노을은 얼른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배에 품고 있던 일부가 없어졌음을 느꼈다.

    아기는요?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입에서 목까지 기다란 관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입술과 혀, 목 안은 드라이기로 말린 것처럼 바짝 말라 있다.

    시선을 돌려 보니, 자신의 몸에서 나온 여러 갈래의 수액 라인들이 보인다.

    ‘세상에, 나 정말 죽다 살아났구나…….’

    새삼스럽게 그런 실감이 드는 노을이었다.

    "환자분, 수술 잘 끝났습니다. 여기는 중환자실이에요. 제 말 들리면 고개 끄덕여 보시겠어요?"

    스으윽―

    그녀는 목을 살짝 앞뒤로 까딱인다.

    옆에 있는 의사와 간호사가 눈을 마주치고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멈추지 않던 출혈로 얼마나 의료진이 걱정했는지, 환자인 그녀도 눈치챌 수 있을 정도였다.

    노을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겨우 움직여지는 검지로 자신의 배 쪽을 가리켰다.

    <선생님, 아기는요?>

    그렇게 묻는 의도를 알아차린 듯, 의사가 웃으며 답한다.

    "아이는 건강합니다! 미숙아로 태어나서 몇 주 동안은 관리가 필요해요. 그래서 신생아 중환자실에 있습니다."

    다행이다.

    노을의 눈에서 긴장이 사르르 풀렸다.

    순간적으로 고통도 잊을 정도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교수뿐만 아니라 많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환자분은 지금 에크모의 도움을 받고 있어요. 이 부분부터 해결되면 입에 들어가 있는 관도 뽑아 드릴 거예요."

    노을의 다음 과정은 에크모 위닝(weaning)이었다.

    환자에게 들어가고 있는 약들을 줄여 가면서, 에크모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서 제거하는 것을 말한다.

    "걱정 마시고 편하게 숨 쉰다고 생각하세요."

    노을은 눈짓으로 대답했다.

    고맙습니다.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면 몇 번이고 그렇게 진심으로 말했을 것이다.

    곧 자신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바로 옆 베드로 움직인다.

    그때, 흰 가운을 입은 한 명이 자신에게 살짝 다가와 말을 걸었다.

    "노을 누나. 고생 많았어요."

    앳된 얼굴, 익숙한 목소리.

    선한이었다.

    순간, 천장의 조명과 겹치며 노을의 눈에는 선한이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수술 전에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손을 잡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 정도면 옛날에 한 약속 지켰죠?"

    "……."

    "이제 다 잘될 거예요."

    노을은 고개를 끄덕였다.

    입에 삽관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미소가 지어졌다.

    왜일까?

    선한의 말에는 그 무엇보다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힘이 있었다.

    노을은 비로소 안심하며 눈을 감았다.

    조금만 더, 잠을 자고 싶었다.

    * * *

    지난밤.

    노을 누나의 출혈은 급격하게 줄었다.

    시간당 많은 양으로 기록되던 배액관을 통한 출혈량이, 새벽 4시부터 시간당 30cc 이하로 준 것이다.

    하지만 곧바로 에크모를 제거할 수는 없었다.

    일단 심장 상태가 에크모 없이도 안정적일지 확인해야 했다.

    다행히 여러 가지 생체 징후들은 출혈이 멎은 후 안정을 찾아갔고, 그녀는 큰 위험 없이 에크모 치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수술 후 5일째.

    노을 누나는 드디어 인공호흡기를 뽑고 병동으로 전실되었다.

    출산 후 몇 개월 동안은 혈전증의 위험이 있기에 면밀한 관찰이 필요했지만, 어쨌든 지금까지의 코스는 좋다.

    결국 내가 보았던 미래가 바뀐 것이다.

    "아기를 아직 안 봤다구요?"

    잠시 순환기내과 병동에 들른 내가 놀라서 물었다.

    그러자 노을 누나는 볼멘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응, 내가 직접 보고 싶다고 하는 바람에…… 이렇게 늦어질 줄은 몰랐지."

    이제 겨우 걸어 다닐 만한 상태가 된 노을 누나가 베드에 앉은 채 말했다.

    "아니, 낳는 건 내가 낳았는데 정작 나만 못 봤어! 우리 남편은 벌써 세 번이나 봤는데 나만 못 봤다고! 이게 말이 돼?"

    그렇게 농담처럼 말하는 걸 보니 이제 정말 평소처럼 회복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볼 수 있잖아요? 제가 찍어서 보여 드릴까……."

    그러자 노을 누나는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니야. 스포하지 마."

    "스포요?"

    "나 스포일링 엄청 싫어하거든. 그래서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남편한테 절대 보여 주지 말라 그랬어. 내가 직접 보고 싶어서."

    나는 픽 웃었다.

    새삼 이 누나의 고집과 인내심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자기가 한 말이 우습다는 듯 웃었다.

    웃으니 더 아프다는 표정이었다.

    "늦었지만 축하해요."

    병실을 떠나기 전, 나는 말했다.

    그동안은 축하한다는 말도 못 했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 모두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모두에게서 아낌없는 축하를 받을 수 있겠지.

    "고마워…… 빨리 보고 싶다. 우리 아가 보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아."

    <우리 아가>.

    그 단어를 입에 머금을 때, 노을 누나의 얼굴은 꽤 행복해 보였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사탕을 입에 문 것 같은 표정이었다.

    * * *

    NICU(신생아 중환자실).

    벽을 따라서 인큐베이터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공간.

    병원에서 이만큼 독특한 풍경을 가진 공간도 드물 것이다.

    "산모분, 이쪽으로 오세요."

    노을은 신발을 갈아 신고, 환자복 위에 또 하나의 소독된 겉옷을 걸치고 나서 NICU로 들어갈 수 있었다.

    왠지 무섭다.

    그러면서도, 얼른 보고 싶다.

    조바심이 난다.

    소아과 의사의 안내를 받아, 노을은 자신의 아기가 누워 있는 자리에 도착했다.

    그리고 생애 처음으로, 아기와 인사한다.

    "튼튼아……."

    노을은 입을 열어 태명을 불러 본다.

    하지만 입에 익숙하지 않다.

    이름으로 부르면, 만약 잃었을 때 너무 슬플까 봐.

    그래서 그동안은 태명을 지어 놓고도 자주 이름을 불러 주지 못했다.

    그녀는 조심스레 인큐베이터 안의 아기를 들여다보았다.

    "……작다."

    정말 작았다.

    두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의 아기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노을은 자신이 낳은 아기를 한동안 말없이 지켜보았다.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할지 몰라, 지금은 그저 신기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엄마가 손잡아 주세요."

    "그래도 돼요?"

    "그럼요. 여기 장갑 끼시고, 이 구멍으로 손 집어넣으시면 돼요."

    노을은 잠시 방황했다.

    대체 어딜 잡아야 할지 감도 오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손이었다.

    스윽―

    그녀는 인큐베이터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조심스레 손가락을 뻗어 아기의 손을 톡 건드렸다.

    저 작은 손에 아주 가느다란 손가락 다섯 개가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게 신기하다.

    그런데…….

    꼬옥―

    아기가, 노을의 둘째 손가락을 잡았다.

    "튼튼아."

    노을의 눈이 커진다.

    이름을 다시 한번 불러 본다.

    손끝에서, 생각보다 강한 힘이 느껴진다.

    마치 아기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 그동안 힘들었어요.

    그래도 낳아 줘서 고마워요 엄마.

    "튼튼아."

    노을은 다시 한번 불렀다.

    이번에는 좀 더 큰 목소리였다.

    그러자, 아기는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작은 울음을 터트렸다.

    "으앙―"

    "그래, 엄마야."

    "으아앙―"

    "엄마가, 엄마가 더 잘해 줄게. 너 힘들게 했던 만큼…… 그만큼 더 잘해 줄게."

    노을의 눈에서 참았던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옆에 서 있던 남편은 황급히 눈시울을 붉히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나와 줘서 고마워."

    노을은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웃으며 말했다.

    마음속에서 벅차오르는 행복이 가득한 미소였다.

    그렇게, 정노을은 한 아기의 엄마가 되었다.

    * * *

    "아니 세상에, 아가가 엄마를 알아보고 손가락을 꼭 쥐더라니까요!"

    "그랬어요?"

    "정노을 환자도 갑자기 막 울기 시작하는데, 그거 보면서 저도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아이고."

    패앵!

    그는 코를 풀었다.

    눈물이 많은 유정남 선생님은 오늘도 휴지 한 통을 다 쓸 기세다.

    정작 환자의 지인인 나보다 더 감정이입을 한 모양이다.

    ‘하여튼 눈물 많은 선생님이야.’

    나는 웃으며 휴지를 더 뜯어 주었다.

    다사다난했던 산부인과 인턴이 끝나 가고 있었다.

    그동안 특히 산과에서 많은 경험을 했고 여러 가지를 배웠다.

    ‘잊지 못할 날들이었어.’

    물론 아직 끝이 아니다.

    산과 인턴이 마무리되기 전, 내가 마무리할 것이 하나 남아 있다.

    나는 줄곧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실행에 옮기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송유주 선생의 경고가 생각났다.

    <과몰입하지 마.>

    <일에 취하지 마.>

    이것도 오지랖일까?

    하긴, 그렇겠지.

    이미 퇴원한 환자에게, 인턴이 전화를 하는 것 자체가 누가 봐도 넌센스니까.

    ‘하지만…… 그날 봤던 황금빛으로 빛나던 미래에서, 두 사람은 정말 행복해 보였어.’

    나는 기억을 떠올렸다.

    중력으로 이끌리던 어두운 미래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밝게 빛나는 선으로 이어지는 미래가 있었다.

    즉, 내가 무언가 변화를 준다면…… 그 미래가 올 확률도 커지겠지?

    이번 노을 누나의 케이스로 미루어 보자 더욱 내 생각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 해 보자.’

    충분한 고민 끝에, 나는 과감히 전화를 걸었다.

    * * *

    지이잉―

    테이블 위의 전화가 울린다.

    부엌 쪽에서 요리를 하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기야, 거실에 전화 오는 것 같은데?"

    "응, 잠깐만."

    곧 거실로 한 여자가 나타났다.

    안영희.

    그녀는 얼마 전, 연국대병원에서 아기를 잃었다.

    자궁경부를 묶는 수술까지 했지만, 결국 버티지 못하고 아기가 너무 일찍 나와 버린 탓이었다.

    그날, 남편과 함께 죽은 아기를 안고 작별 인사를 하던 순간이 아직까지 선명하다.

    지금은 그 슬픔을 지워 내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모르는 번호인데?"

    "그럼 받지 마."

    "응…… 그럴까?"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전화기를 다시 내려놓았다.

    지이잉―

    전화는 계속 울리고 있다.

    평소라면 받지 않고 무시했을 법도 한데, 어쩐지 오늘따라 기분이 묘했다.

    이 전화를 꼭 받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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