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61화 (161/241)

#161 해피 버스데이(20)

"모쏠이요?"

"그래. 모쏠 몰라? 모태솔로 말야."

모쏠의 딜레마?

처음에는 내가 모르는 학자 이름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난데없이 연애 얘기라니, 허준임 교수님의 화법은 따라가기 어렵군.

"연애를 못 하니 자신감이 없고, 자신감이 없으니 연애를 못 하는 거야."

내 의아한 표정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의 말은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운동이 부족한 직장인들의 딜레마도 마찬가지지. 에너지가 없으니 운동을 못 하고, 운동을 못 하니 에너지가 후달리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

다소 기상천외한 설명이었지만, 나는 그의 언중에 있는 뜻을 눈치챘다.

"지금도 출혈과 에크모가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고 있다는 말씀이시죠?"

"그래, 그래. 역시 이해가 빠른 친구구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개의 상황이, 돌고 돈다.

출혈과 함께 심장의 힘(cardiac output)을 유지하기 힘들어서 에크모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에크모를 쓰면서 출혈경향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마치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그가 재차 질문을 던졌다.

"이런 악순환을 끊으려면 어떻게 해야겠어?"

"일단 뭐 하나라도 좋아지는 시작점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연애를 하려면 바깥으로 나가서 사람들을 열심히 만나 본다든가, 운동을 하려면 일단 헬스장 이용권을 끊는다든가……."

"그렇지, 그렇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친구네!"

허준임 교수는 자신의 비유가 통하자 기쁜 표정을 지었다.

"일단 출혈이 잡혀야 그다음을 생각할 수 있어. 라이트 벤트리클(right venricle, 우심실)이 늘어나 있기는 하지만, 아주 절망적일 정도로 나쁘진 않거든? 렁(lung)도 이 정도면 괜찮아. 그러니까 하루 이틀 내로 출혈만 딱 잡혀 주면 에크모 위닝(weaning, 제거)이 불가능한 건 아니라는 소리야."

말 엄청 빠르다…….

숨을 한 번도 안 쉬고 말하신 것 같은데?

그의 말에 따르면, 지금 노을 누나의 지상 과제는 ‘출혈의 멈춤’이었다.

이 과정만 넘어가면, 에크모를 제거하고, 인공호흡기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밟아 나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예,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후다닥!

그는 내 인사말이 끝나기도 전에 빠른 걸음으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허준임 교수.

젊고 특이한, 다소 정신없는 교수님이었다.

마치 강풍으로 회전하는 선풍기에 입과 발을 달아 놓은 느낌이랄까?

그러고 보니, 연국대병원의 교수님과 이렇게 오래 대화를 나누어 본 것도 처음이군.

그리고 흉부외과에 이미 내 이름이 알려져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점점 병원의 많은 사람들에게 인식이 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하기도 했다.

‘앞으로 하루 이틀이라.’

나는 노을 누나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그래, 기다려 보자.

가끔은 환자를 믿고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니까.

* * *

젠장.

못 기다리겠다.

하루가 이렇게 길던가?

밤이 지나고 날이 밝아도 노을 누나의 출혈은 멎지 않았다.

‘멎을 때가 됐는데…….’

수술 다음 날.

조재용 교수의 회진을 가이드하면서 나는 흉부외과 중환자실에 들를 수 있었다.

노을 누나는 아직도 어제 수술방에서 나온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출혈이 잡히지 않는 상황에서 환자의 의식을 깨울 수는 없었다.

어제부터 들어간 각종 수혈팩은 벌써 30개가 넘어가고 있다.

말 그대로, 온 병원의 혈액을 끌어모아 쏟아붓고 있는 것이다.

"오래 가네요."

"DIC 빠지기 시작하면 큰일인데……."

중환자실에서 환자를 지켜보고 있던 허준임 교수와 조재용 교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DIC(Disseminated Intravascular Coagulation, 파종혈관내 응고).

출혈과 응고의 과정이 몸속에서 과도하게 진행하다 보니, 혈소판 등 환자의 몸속에 있는 응고인자가 소비되어 버리는 것을 말한다.

DIC 상태에 빠진 환자는 더욱더 출혈경향을 나타내며, 모든 장기가 망가지게 되는 심각한 상황에 노출되게 된다.

그야말로 출혈이 더 큰 출혈을 부르는 악마의 사이클이다.

"그러게요, 멈출 듯 멈출 듯 안 멈추네요. aPTT 타깃도 낮게 보고 있어요."

에크모를 사용하고 있음에도, 출혈 때문에 피를 묽게 하는 농도를 최소한으로 하고 있다는 허준임 교수의 말이었다.

"일단은 embolization(색전술)부터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수술방 다시 들어가도 어제랑 다를 게 없을 것 같아요."

색전술은 쉽게 말해, 혈관을 아예 막아 버리는 방법이다.

이 경우, 자궁에 혈액을 공급하는 동맥의 일부를 막아 버린다는 뜻이었다.

지혈을 위한 재수술보다는 이 방법이 효과적일 수도 있다.

"네, 오늘까지 보고 출혈량 계속 이렇게 유지되면, 색전술 시행하는 것으로 하시죠."

일단 교수님들 선에서는 그렇게 합의가 되었다.

오늘 하루, 일단은 지켜본다.

이에 따라, 가족들의 얼굴도 가뭄철의 논바닥처럼 바싹 말라 갔다.

"어휴, 자기 몸이나 잘 챙길 것이지 노을이는 왜 임신을 한다고 해서……."

"그런 말 하지 말어. 부모인 우리가 응원해 줘야지."

"속상하고 애가 타서 그러지요……."

"그래도 아기가 잘 태어난 게 어디야. 일단 의사 선생님들 믿고 지켜보자고."

언뜻 복도에서 노을 누나의 부모님들이 눈물지으며 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씁쓸함을 느꼈다.

<이건 내 선택이야.>

노을 누나는 수술 전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가혹한 대가를 치르게 될 줄은 알았을까? 만약 미리 알았다면, 똑같은 선택을 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은 중요한 날이니까 가능한 오래 지켜보자.’

이날은 오프(off)였지만, 나는 밤새 노을 누나의 곁을 지키기로 했다.

벌써 환자 옆에 수혈팩들이 많이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세수를 하고 중환자실로 돌아오는 도중,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

"선생님."

송유주 선생이었다.

그녀는 나를 힐긋 보더니 물었다.

"웬일이야?"

"아, 오프라서요. 환자를 좀 지켜보려고……."

그러자 날 바라보는 송유주 선생의 표정이 복잡미묘한 기색을 띠었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것 같기도 하다.

문득 그녀의 입이 열렸다.

"후회돼?"

"예?"

"에크모 넣고 수술하는 게 최선이 아니냐고 말했던 거."

"아뇨."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후회는 없다.

어쨌든 최악의 미래는 막았으니까.

지금 상황은 원래보다 좋아졌으면 좋아졌지, 더 나빠지지는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을 누나가 깨어나지 않는 것은 마음이 괴로웠다.

"말해 두지만, 지금 상황은 결코 좋지 않아. 지금도 병원의 모든 수혈팩을 끌어다 붓고 있다시피 하는데, 이걸 언제까지 유지할 수는 없잖아."

송유주의 냉철한 말이 스산하게 들린다.

사실, 맞는 말이다.

환자 혼자서 혈액을 무한정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니, 어느 선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만약 이대로 출혈이 계속되면……."

송유주의 말이 이어진다.

첫째.

일단 색전술(embolization, 자궁을 공급하던 동맥의 일부를 막아 버리는 시술)을 시행한다.

둘째.

만약 안 되면 자궁적출술(hysterectomy)까지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자궁적출술까지요?"

"그래."

송유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노을 누나가 살 수만 있다면 자궁이 없이 살아가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게다가 아이젠멩거 환자이기에 앞으로의 임신은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이어지는 송유주의 말은 나를 벙찌게 만들었다.

"만약, 환자가 나중에 폐 이식을 받고 두 번째 아기를 낳고 싶어 한다면?"

"……."

말문이 턱 막혔다.

또 낳고 싶을까? 이 고생을 하고도?

인생은 알 수 없다.

만약 폐 이식으로 폐동맥고혈압에서 벗어난다면, 노을 누나가 두 번째 아기를 낳고 싶어 할지 모르는 일이다.

즉 지금 상황에서는 출혈이 멎기를 바라는 것이 최선의 시나리오인 것이다.

"솔직히 제 지인이긴 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고생을 하고도 두 번째 임신을 선택하게 될지……."

"그건 우리가 알 수 없지. 나도 같은 여자지만 엄마들의 마음은 몰라. 다만 어떻게든 환자의 의사를 존중하는 게 의사로서 해야 할 일이니까."

같은 여자.

송유주는 그렇게 말했다.

의사들도 사람인 만큼,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 환자들도 있는 법이다.

무언가 개인적인 이야기가 더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 이상은 내가 알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너에게 몇 번 말하려다 말았는데……."

송유주는 문득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지금 좀 위험해."

"예?"

"일에 과몰입하는 중이라고."

나는 놀랐다.

송유주 선생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너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일에 취하지는 마."

말 속에 뼈가 있다.

본인의 경험담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왠지 모를 진정성이 느껴지기도 했다.

송유주 선생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했다.

"뭐…… 나도 옛날에 들은 얘기야. 네가 좋아하는 백의신 교수님이 해 줬던 말이니까 새겨들어."

의외의 이름이 나와서 다시 한번 놀라고 말았다.

"백의신 교수님이요?"

"그래. 아직 은퇴 안 하고 연국대병원 계실 때 내 지도교수셨어."

와…….

생각도 못 했다.

내가 이 병원에 오기 전, 여러 선생님들이 촘촘한 관계로 엮여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순간이었다.

"지금이야 아는 환자라서 그렇다 칠 수 있는데…… 여태까지 너 하는 거 보면 모든 환자한테 그러고 있잖아. 앞으로는 적당히 조절해."

"예."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분명 그녀가 한 말은 주의 깊게 새겨들어야겠지만, 어쨌든 최선을 다한 것에 후회는 없다.

그동안 할 수 있는 건 다 했으니까.

"만약 모든 방법을 다 써도 환자가 호전되지 않으면……."

송유주의 말이 이어지려 한다.

그때.

눈앞이 밝아진다.

마치 막아 두었던 물길이 터지듯 빛 무리가 몰려온다.

그것은 여태까지 내가 보아 온 미래 중에서 가장 애타게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 * *

빛의 향연이다.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로 수많은 <선>들이 시선 방향으로 이어진다.

미지의 공간 속, 멀리서 여러 개의 장면들이 구름에 가려진 듯 흐릿하게 보인다.

그런데…….

그중 유난히 밝은 선.

그것이 내 앞에서 일직선으로 이어진다.

마치 강한 인력으로 나를 인도하듯, 내 눈앞을 환하게 비추며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건……!’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그 끝에 다다랐을 때.

나는 눈앞에 펼쳐지는 장면들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 * *

"출혈은 잡힐 겁니다."

꿈에서 현실로 돌아온 뒤, 나는 곧바로 말했다.

그러자 송유주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네가 뭘 안다고?"

지금 노을 누나의 상태는, 그 어떤 의사도 쉽게 장담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미래를 보았다.

그렇기에 뚜렷한 확신을 담아 미소 지으며 말할 수 있었다.

"환자가 예전에 저에게 그랬거든요.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면…… 때로는 기적에 가까운 일이 벌어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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