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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 신선한 미래를 보는 의사-156화 (156/241)

#156 해피 버스데이(15)

나는 눈앞의 남자에게 싱긋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꺼져."

참신한 아침 인사가 돌아왔다.

"너 이상한 기운 몰고 다니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이상한 기운이요?"

"너 지나가는 곳마다 골치 아픈 환자 끌고 다닌다며! 오늘 일진 사납겠네, 젠장. 나한테서 다섯 걸음 이상 떨어져."

그렇게 말하며 내게서 몇 걸음 슬금슬금 떨어진다.

마치 출근길에 검은 고양이와 까마귀를 동시에 본 것 같은 리액션이군.

날카로운 특유의 눈으로 나를 경계하며 위아래로 쳐다보는 모습이다.

그렇다. 내가 정한 세 번째 타깃은 내과 김뱀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쩌다 3대 빌런들만 골라서 공략하게 됐잖아?’

내과 김범수.

그 역시 능력자에 속한다.

말하자면, 완벽하게 조직 순응적인 캐릭터.

성격도 부지런하고 ‘위에서 까라면 까는’ 스타일이라, 특히 남자 교수님들이 매우 좋아한다는 후문이다.

물론 그 부지런함으로 아랫사람들을 독설로 갈군다는 점이 흠이긴 하지만.

"너 무슨 생각 하냐?"

"그냥 오랜만에 봬서 반갑다는 생각 하고 있었습니다."

"이거 봐, 입 터는 거 수상쩍어! EKG(심전도검사) 판독 같은 거 급하게 부탁하러 왔다면 꿈도 꾸지 마라, 난 아직 근무 시작도 안 했다."

김뱀이 벌써부터 선을 긋는다.

하지만 내겐 그가 필요하다.

EKG 판독 같은 가벼운 사안이 아니다.

산모와 태아 두 명의 생사(生死)가 달려 있는 중대한 사항이다.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는 이 사람을 빼먹을 수 없지.’

아이젠멩거 산모의 혈역학(hemodynamic)을 계속해서 관찰하고 있던 순환기내과의 의견은 매우 중요하다.

게다가 순환기내과 교수님은 컨퍼런스에 모인 교수님들 중 가장 시니어로, 발언권이 세다.

그러니 김뱀을 통해서 순환기내과 교수님의 생각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줘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문제다.

송유주는 논리로, 천사연은 예전에 내가 도와주었던 빚으로 공략했다.

그런데 김뱀은 무엇으로 설득해야 할까?

일단은 논문부터 들이밀어 보자.

"다름이 아니라……."

"너 내 말 안 듣고 있지?"

"잠깐이면 됩니다, 선생님."

"아이 씨, 뭔데?"

처억-

나는 준비했던 논문을 꺼내어 펼쳤다.

그리고 어제 이야기했던 말들을 반복했다.

아니나 다를까, 내 말을 반도 듣지 않고 김뱀이 눈썹을 곤두세웠다.

"미친놈인가?"

내 저럴 줄 알았다.

김뱀은 본격적으로 내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이죽대기 시작했다.

"어휴, 아주 대단한 인턴 선생님 나셨어요. 몇 번 잘했다고 칭찬받더니 이제는 심지어 교수님 머리 꼭대기 위에 서려고 하네?"

"그게 아니라."

"제가 큰 잘못을 했네요. 교수님들보다 대단한 분을 진작 몰라뵙고…… 이제 아주 대한민국 내과 학회장을 하셔야겠어요, 신 선 한 선생님?"

오랜만이다, 이 화법.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듯 김뱀이 나를 비꼬았다.

3월 첫 턴 때 이 화법에 많이 당했었지.

그때는 괴로웠지만, 지금은 오랜만에 들으니 정겹기까지 하다.

"교수님들이 어련히 알아서 결정하실까, 감히 인턴이 이렇게 어려운 케이스 디시젼(decision, 결정)에 관여할라 그래?"

"그냥 이런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게 걱정돼서요. 이런 부분을 좀 강조해서 교수님께 말씀드리면……."

"야. 이 환자가 보통 환자도 아니고. 아무리 내가 던트라도 이런 크리티컬한(critical, 중대한) 디시젼 내리는 데 영향을 끼칠 수는 없지, 자식아."

"안 될까요?"

"되겠냐?"

"김범수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들보다 더 내과에서 신임을 받으시는……."

"입 털지 말고 돌아가, 새끼야. 아침 댓바람부터 별소리를 다 듣겠네."

안 통하네.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삐익-

김뱀은 IC 카드를 찍고 내과 스테이션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실패인가?

물론 예상은 했다. 어쩌면 이게 가장 평범한 반응일 테니.

특히나 김뱀 선생님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주의라, 조직 안에서 튀는 행동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김뱀이 이죽이며 말했다.

"그러게 왜 쓸데없이 말도 안 되는 오지랖을 부리다가 나한테 욕을 처먹냐. 그 환자가 네 가족이라도 돼, 새끼야?"

"가족이나 다름없습니다."

"가…… 뭐?"

흠칫!

아무 생각 없이 말하던 김뱀은 놀란 기색이다.

"다름없는 건 또 뭐야? 어떤 사인데?"

"어릴 때부터 가족만큼 가깝게 알고 지내던 누나입니다. 저한테는 은인 같은 존재구요."

김뱀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친다.

잠깐, 이건 기회다.

어쩌면 이 기세를 몰아치면 가능할지도.

나는 일부러 서글픈 표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말했다.

"환자가 저한테 정말 소중한 분인데…… 어디 가서 말할 사람도 없고, 의지할 분이 김범수 선생님밖에 없어서 말씀드린 거였습니다……."

"아니, 아는 환자면 말을 했어야지."

김뱀이 흔들린다.

날카로운 눈매 안에서 동공 지진이 일어나는 것이 보인다.

좋아, 먹히고 있어.

나는 서글프게 고개를 꾸벅였다.

"무리한 부탁을 해서 죄송합니다. 선생님도 바쁘실 텐데 괜한 말씀을 드려서……."

"기, 기다려 봐."

김뱀은 마지못해 나를 붙잡더니 말했다.

"이따가 4시에 교수님들 회의 있는데, 거기 나도 들어가긴 해. 그러면 그 전에 회진 때……."

나는 잽싸게 낚아챘다.

"감사합니다."

"뭐? 인마. 난 아직 아무 말 안 했어!"

"도와주신다는 말씀 아니었습니까?"

나는 순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자기최면을 걸었다.

나는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장화 신은 고양이다…… 세상에서 제일 간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

"아잇 씨, 초롱초롱한 눈망울 뭐냐고. 뒤질래?"

김뱀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게 손을 내밀었다.

"논문 그거 내놔 봐."

"여깄습니다."

"도와준다는 말은 안 했어. 내가 읽어 보고, 네 말에 일리가 있는지 확인한다. 허튼소리면 죽여 버릴 줄 알아."

파악-

김뱀은 논문을 거칠게 낚아챈 뒤 스테이션 안으로 툴툴대며 사라졌다.

"아는 환자면 미리 말을 하든가…… 씨."

분위기를 보아하니 내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순환기내과 교수님께 말씀드릴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좋아!’

<흉부외과>.

<산부인과>.

<순환기내과>.

각 과에서 교수님들의 총애를 받는 세 명의 레지던트들에게 내 의견을 전달했다.

물론 이런 나의 행동들이, 물가에 던져진 작은 조약돌이 만드는 물결처럼 미미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 변화가 어떻게든 작용하여 큰 물줄기를 바꿔 주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 마지막 한 명만 남았네.’

교수회의까지 남은 시간은 약 반나절.

그 전에, 반드시 한 번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 * *

공기에도 무게가 있다.

특히나 이곳 중환자실은 더욱 그렇다.

마치 시간의 흐름마저 묵직하게 짓누르는 듯한 무거운 공기가 흐르고 있다.

"노을 누나."

나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찾아간 마지막 사람은 <환자 본인>이었다.

중환자실은 커튼이 있긴 했지만, 언제든지 환자의 상태를 볼 수 있게 활짝 열려 있었다.

"선한이니?"

"자고 있었어요?"

"아니…… 괜찮아."

노을 누나는 이제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머리 옆에는 네모난 각티슈가 놓여 있었고, 객혈을 뱉어 낸 휴지들이 봉지에 쌓여 있다.

‘밤사이에도 객혈이 심했구나…….’

병실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수액 라인들.

그 각각의 라인들이 연결된 인퓨전 펌프(infusion pump)는 반짝반짝 빛을 내며, 여기가 중환자실임을 알리고 있었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어? 이쪽 담당 인턴 선생님은 따로 있는 것 같던데……."

"누나 어디 안 가고 잘 있나 보러 왔죠."

"가긴 어딜 가?"

피식.

내 농담에 노을 누나가 마스크 아래로 피식 웃자 하얗게 김이 서린다.

"저 괜히 왔어요?"

"아냐, 와 줘서 고마워…… 여기 혼자 있는 거 진짜 곤욕이다. 중환자실 증후군이라는 거 괜히 생기는 거 아니겠더라."

그렇게 말하며 이불을 추스른다.

웬만하면 투덜대지 않는 성격인 그녀.

그런 노을 누나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현재 상태가 쉽지 않다는 뜻이리라.

하지만 그 와중에도 차분한 미소를 잃지 않고 있다는 점이 대단했다.

"근데 선한아, 손에 그 종이는 뭐야?"

"혹시 공부할 여력 돼요?"

"공부?"

내 말에 노을 누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실, 중환자실 앞에서 끝까지 고민했다.

지금 노을 누나 같은 환자에게 의사결정권이 있을까?

사망률 50퍼센트의 수술.

그러다 보니, 수술 방법을 취향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환자의 의사결정권은, 안전한 선택지가 여러 개 있을 때 가능한 이야기니까.

지금처럼 위험한 상태에서는 의사의 지침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래도…….

만약 환자 본인의 의지가 있다면, 의사들의 결정에도 조금은 영향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내일 수술이 어떻게 진행될지 얘기 들으셨죠?"

"응, 아직 결정이 안 된 부분이 있다면서……? 선생님들이 자세히 말씀은 안 해 주시더라고."

"혹시 알고 싶으세요? 좀 어렵기는 한데."

만약 노을 누나가 원치 않는다면, 굳이 설명하지 않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노을 누나는 내가 알던 모습 그대로였다.

"알려 줘, 궁금해."

나는 환자의 베드 한편에 걸터앉아,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마치 1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이제 내가 노을 누나의 과외 선생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현재 누나가 가지고 있는 질환인 PDA와 아이젠멩거 증후군.

임신 후의 변화.

에크모라는 기계.

혈전과 출혈의 관계.

수술 시 일어날 수 있는 합병증.

등등…….

결코 쉽지 않은 내용들이었다.

입장을 바꿔서, 내가 의사가 아니었다면 절대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할 정보들이었다.

하지만 몇 분 남짓.

역시 노을 누나는 이해력이 남달랐다.

"그러니까…… 이 에크모가 지금으로선 나한테 양날의 검 같은 거네."

"금방 이해하셨네요."

"선한이 네가 설명을 잘해서 그렇지…… 예전에 너 공부 가르쳐 줄 때 생각난다…… 괜히 뿌듯하고 뭉클하네."

쉬익-

노을 누나는 살포시 웃더니 숨을 힘겹게 몰아쉬었다.

말하자면, 아슬아슬하게 절벽 위에 서 있는 상황.

노을 누나의 심장과 폐가 버틸 수 있는 한계에 놓여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나는……."

잠시 후, 진정을 되찾은 노을 누나의 입이 열렸다.

"……가능하다면, 처음부터 에크모라는 걸 넣고 수술하고 싶네."

어찌 보면 당연한, 그녀다운 선택이었다.

"아이에게 더 안전하고 좋은 방법이 있다면 그걸로 가고 싶어…… 선한이 네 설명을 들으니 확실히 알겠어."

"……그래요."

나는 씁쓸히 웃었다.

회진 때, 노을 누나는 자신의 의견을 확실히 교수님들에게 전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환자의 의지가 그들의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겠지.

"무섭진 않으세요?"

"왜?"

"방금 제가 의학적인 위험 요소들을 다 설명드렸잖아요. 이건……."

"내 선택으로, 내가 죽을 수도 있으니까?"

말문이 막혔다.

노을 누나는 자신의 선택의 무게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다.

"무서운 건 그런 게 아니야, 선한아."

노을 누나는 의연한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 그게 정말 무서운 거지."

"……."

"남들은 잘못된 임신이라고 했어. 아무리 잘 몰랐다지만, 그런 몸으로 어떻게 아이를 가질 생각을 했냐고…… 그런데……."

노을 누나의 입술이 미소를 띠었다.

"이건 내 선택이야."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내 배 속의 아이를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나한테 그것만큼 좋은 일은 없을 거야."

"……."

"고마워, 선한아."

노을 누나는 내 손을 꼭 잡았다.

비록 병상에서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내가 동경하던, 해처럼 빛나는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고 너, 아픈 거 있으면 다 책임져 준다면서."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요?"

"나 기억력 좋다, 선한아."

"아, 진짜."

"왜. 부끄러워?"

노을 누나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렇게 우리는, 짧은 시간 동안 옛날로 돌아간 듯 농담을 주고받았다.

* * *

D-0.

수술의 날이 밝았다.

본관 17번 방의 아침 첫 수술로, 정노을 환자의 수술 준비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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