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 해피 버스데이(14)
36시간.
앞으로 수술까지 남아 있는 시간이다.
<노을 누나의 뇌사(brain death) 의심 상태>
<아기의 죽음>
이 최악의 종착지를 바꿀 기회는 지금뿐.
적어도 내일 교수들이 모이는 컨퍼런스 전에, 내가 무언가를 바꿔 놓아야 했다.
나는 스테이션으로 돌아가 검색을 시작했다.
‘내가 본 미래에서 문제가 발생한 순간은 바로…….’
타닥, 타닥―
나는 곧 마취과 교수가 말했던 전신마취(general anesthesia) 후의 위기 상황에 대한 논문을 찾을 수 있었다.
‘그래, 바로 이 논문에서 말하고 있는 똑같은 상황이 펼쳐진다고!’
아이젠멩거 산모의 출산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위험 요소 중 한 부분.
교수들도 의심은 했지만, 이 위험 요소가 실제로 일어날지는 몰랐을 것이다.
당연하지. 그들은 미래를 보지 못했으니까.
미래를 본 나는, 어떻게든 그들의 계획을 바꿔야 한다.
‘문제는, 어떻게?’
인턴은 병원의 밑바닥이다.
심지어 의사들 중에서는 ‘인턴은 3신’이라는 오래된 표현을 쓰는 분도 있다.
먹을 땐 식신, 엉덩이만 붙이면 잠신, 일할 땐 X신이라고.
비하적인 표현이라 지금은 쓰지 않지만, 병원 내 인턴들에 대한 인식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즉, 다시 말해…….
―교수님들,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오, 자네 말이 맞네!
―이럴 수가, 인턴의 혜안이 대단하군! 우리 모두 인턴의 말대로 합시다!
……이런 일은 절대 없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교수 회의(discussion)의 흐름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다.
나보다 더 영향력 있는 무언가가.
‘만약 인턴이 아닌 레지던트라면 어떨까?’
레지던트(resident, 전공의).
물론 그들도 교수님들 앞에서 한없이 작은 존재다.
하지만 본질적인 차이는 있다.
인턴은 물 위에 뜬 부초처럼 떠돌아다니는 존재이지만, 레지던트부터는 본격적으로 ‘조직의 일원’.
그러니 나보다는 조금이라도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그래, 내가 못 하면 다른 사람을 통해 보자!’
당장 머릿속에 생각나는 사람이 몇몇 있다.
"좋아, 해 볼 만해."
모든 생각을 정리한 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없다.
교수 회의에서 의견이 결정되는 것은 내일이니, 그 전에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 * *
오후 9시.
나는 가장 먼저 흉부외과 중환자실 옆의 당직실로 달려갔다.
‘흉부외과에서 인턴 돌 때를 떠올려 보면…….’
흉부외과 수술 스케줄이 방금 끝났으니, 이 시간에 그녀가 있을 곳은 여기였다.
"송유주 선생님!"
타악!
가까스로 세이프했다.
중환자실 문을 열고 엘리베이터를 타러 가는 송유주 선생님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퇴근하던 송유주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웬일이야?"
사복 차림의 송유주 선생님은 오랜만에 본다.
정말 언제 봐도 의사 선생님 같은 포스랄까.
태어날 때부터 응애 하고 우는 대신, 분만실의 기계를 보며 바이탈 체크부터 했을 것 같기도 하고…….
"무슨 볼일 있어?"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하던 나는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잠시 여쭤볼 게 있어서 그런데 시간 괜찮으신가요?"
"나 약속 있는데."
"금방이면 됩니다. 따라가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든가."
나는 얼른 송유주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내 첫 번째 타깃은 이 사람이다.
송유주.
아직 레지던트 3년 차이지만 교수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의학용어에 사용되는 ‘모두 다 포함한다’는 접두어인 ‘pan―’을 붙여 <판―총>이라 불리기도 하는 그녀.
그야말로 금지옥엽.
그러니, 내가 1순위로 포섭해야 할 사람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정노을 환자 말인데요."
"아이젠멩거 환자?"
"예. 에크모 인서션(insertion, 삽입)의 시점과 관련해서……."
나는 처음부터 에크모를 넣는 것이 더 안전하지 않겠냐는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밤 9시에 퇴근하는 사람 붙잡고 하고 싶다는 말이 그거야?"
송유주는 잠시 나를 이상하게 보았다.
물론 내가 봐도 별난 놈은 맞다.
그래도 내가 이런 성격이라는 걸 몇 번 겪어서 아는지, 긴말은 하지 않고 뒤이어 묻는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나는 곧바로 방금 찾아봤던 논문을 보여 주며 이야기했다.
"폐동맥 고혈압 산모는……."
인공호흡기에 노출되면, 폐동맥혈압이 증가하고, 정맥순환이 방해될 수 있다.
또한 마취와 함께 전신의 저항이 감소된다.
이런 복잡한 기전으로 전신의 순환 장애가 일어나면, 아이젠맹거 환자의 심장은 버틸 수 없어 멈춰 버릴 수 있다.
내 설명을 무심히 들으며 내가 들고 있는 논문을 힐끗 보더니, 송유주가 입을 연다.
", 프랑스 파리의 APHP병원에서 쓴 논문?"
역시 송유주.
그녀도 이 논문을 봤다.
사람 이름은 못 외우면서 논문 이름과 병원까지 외우는 그녀의 기억력에 감탄했다.
"맞습니다."
"그래, 그런 위험이 있지."
나는 그 대답에 안도감을 느꼈다.
인턴이 감히 레지던트 앞에서 까부는 것처럼 보일까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이 사람은 위계질서보다는 철저하게 논리로 움직이는 사람인 것이다.
송유주 선생님의 말이 이어졌다.
"정확히 그 이유로, 사실 허준임 교수님도 처음부터 에크모를 사용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어."
"송유주 선생님은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렇다면 이야기는 빠르다.
나는 좀 더 솔직히 묻기로 했다.
"그렇다면 내일 회의에서도 에크모를 미리 넣고 진행하는 방향으로……?"
하지만, 돌아오는 송유주의 대답은 날카롭고 차가웠다.
"그 논문 끝까지 읽어 봤어? 산모의 진짜 위험은 출산 후 (postpartum period)에 시작이야."
"……."
"출산 후 출혈 문제는 눈덩이처럼 커다란 문제로 발전될 수도 있지. 그래서 출혈 경향을 증가시킬 수 있는 에크모를 망설이는 거라고."
물론 나도 안다. 끝까지 읽어 보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말하고 싶었다.
어차피 이 환자는 에크모를 넣게 된다고, 그러니까 차라니 미리 넣고 하는 게 낫다고.
물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미리 에크모를 넣는 쪽이 조금 더 안전하지 않을까요? CPR 상황이 발생하면 산모와 태아 모두에게 안 좋을 테니까요."
"신경 많이 쓰네. 아는 환자라서 그래?"
"아는 환자가 아니라도 똑같이 말씀드렸을 것 같습니다."
나는 곧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 명의 의사로서.
톡, 톡.
잠시 생각에 빠진 송유주의 손가락이 핸드폰 모서리를 두드렸다.
"……그쪽 방향으로 나도 한 번 더 생각은 해 볼게. 좀 더 찾아보고 교수님이랑 디스커션(discussion) 해 봐야겠네."
교수님께 당당히 의견을 얘기하고 논의해 보겠다는 송유주 선생님.
역시 믿음직스럽다.
저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레지던트 선생님이 몇이나 될까?
아마 전국 병원을 다 뒤져 봐도 송유주 선생님 하나밖에 없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아직 확정된 건 없어. 내일 회의에서 결정되는 거니까. 그리고……."
"?"
"……아니다."
지잉―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송유주는 주차장을 향해 걸어갔다.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다소 아리송했지만, 어쨌든 내 말이 통한 것은 다행이었다.
‘좋아!’
일단 첫 번째 보험은 들었다.
가장 강력한 우군을 얻었지만, 아직은 충분치 않다.
나는 얼른 다음을 향해 움직였다.
* * *
11시.
나는 부인과의 인턴 동기들에게 수소문을 했다.
곧 어렵지 않게 다음 타깃을 8층 산부인과 병동 복도에서 찾을 수 있었다.
"천사연 선생님!"
또각, 또각―
복도를 가로지르는 구두 소리가 멈추고, 당직 근무 중이던 천사연이 고개를 돌렸다.
"뭔데요? 지금 산과 도는 중 아니었나?"
산부인과 천사연.
이 사람 역시 교수님들 사이에서 총애를 받는 인물이다.
모두가 꺼려 하는 ‘빌런’이 총애를 받는다는 것이 아이러니지만…….
윗사람들의 기분을 사근사근 잘 맞춰 주는 스타일이라, 어쩌면 교수님들에게 말이 통할지 모른다.
"지난번에, 도움이 필요하면 한 번 더 찾아오라고 말씀하신 게 생각나서 왔습니다."
그러자 천사연이 뾰족하게 묻는다.
"빚 받으러 왔다는 거예요?"
"꼭 그런 건 아니고요."
"맞는 것 같은데?"
그렇게 쏘아붙이는 천사연의 말투가, 웬일인지 평소보다는 약간 누그러져 있다.
"산과에 아는 환자 있다면서요."
"그걸 어떻게……."
"우리 과에는 소문 다 났지. 아이젠멩거 환자가 임신을 했다고 하던데?"
이미 알고 있다면 이야기는 빠르다.
처억―
나는 준비했던 프린트를 스테이션에 펼쳤다.
그리고 송유주에게 말했던 의견을 다시 한번 반복하며 전달했다.
생각보다 천사연 선생의 반응은 나쁘지만은 않았다.
처음에는 뭐 이런 집요한 놈이 다 있냐는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곰곰이 내 말을 듣더니 말했다.
"공부 좀 했나 보네요?"
"예, 조금……."
"그런데 나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마취과나 흉부외과한테 물어봐야지, 나한테 얘기해서 뭐하려고?"
"안 그래도 TS 송유주 선생님과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안 그래도 왕밤빵만 한 눈을 더욱 키우며 나를 해괴한 놈 보듯 한다.
"……본인 좀 이상한 거 알죠? 우리 병원에서 나보다 독한 사람 처음 보네."
칭찬인가?
왠지 칭찬은 아닌 것 같지만 묘하게 날 인정하는 듯한 느낌도 든다.
"아무튼…… 아무리 그래도 교수님들이 정하는 의견에 감히 일개 레지던트가 끼어들 수는 없어요. 무슨 얘기인지 알죠?"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이다.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기도 하고.
나는 준비했던 멘트를 꺼냈다.
"천사연 선생님은 일개 레지던트가 아니셔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악, 내 손발!
스스로 한 말에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작전을 써서라도 내 목적을 달성해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칭찬에 약한 천사연의 입꼬리가 미약하게 씰룩 올라가는 것이 보인다.
"어디 봐, 정노을 환자 담당 교수님이…… 조재용 교수님이시네?"
"맞습니다."
"안 그래도 가을학회 발표 ppt 확인받으러 내일 오전에 찾아뵐 일 있는데, 그때 넌지시 수술에 대해 물어보면서 눈치껏 말씀드려 볼게요."
"감사합니다."
"지금 그 논문 이메일로 보내 봐요. 유주랑도 통화해 보게."
다행이다.
천사연 선생은 성격이 모나긴 했지만, 그래도 자기가 했던 말을 지키려고는 하는 성격이니까.
"그래도 너무 기대는 하지 마요. 레지던트들이라고 해도 교수님들 앞에서는 별 영향력 없어."
"예, 그냥 말 한마디만 넌지시 덧대 주셔도 좋습니다."
"이걸로 빚 없는 거예요!"
"감사합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두 명째 포섭이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물방울들이 모여서 잔을 넘치게 하듯 변화들을 쌓아 가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사람은…….’
나는 내가 목표로 삼았던 레지던트 세 명 중 마지막 사람을 떠올렸다.
쉽지는 않겠지만, 이번에 꽤 중요한 열쇠 역할을 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사람은 어떻게 공략하지?’
벌써부터 까다롭다.
저번 회의에 왔으니까, 지금은 순환기내과 돌고 있다는 얘기고…….
나는 순환기내과 당직표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찾아보았다.
오늘은 오프(off).
즉 퇴근한 후다.
내일 아침에 기회를 노려보는 수밖에.
* * *
수술 D―1.
새벽이 밝았다.
나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세 번째 타깃이 출근하기를 기다렸다.
"선생님."
스윽―
먹이를 노리는 매의 눈빛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타깃이 흠칫 놀라며 대뜸 거친 말이 돌아온다.
"아잇 씨 깜짝이야. 놀랐잖아, 뭔데 이 또라이야!"